육백 년 전 바람은
돈화문 드나들며
무슨 생각했을까?
낙선재 꽃 계단
꽃담 너머
누구라도 서 있을 것만 같다
덩그러니
건물만 남겨놓고
옛 사람 모두
어디 갔나?
역사가 부른 거야
분명, 심심했던 거야
[한국일보 동시 2007신춘]
세탁기 - 김현서
세탁기가 돌아간다
코피 묻은 내 옷도 돌아간다
친구의 얼굴도 돌아간다
화가 난 내 마음도 돌아간다
세탁기는 돌면서
꽁꽁 뭉쳐 있던 멍든 내 마음을
비틀었다가 풀어버리고
비틀었다가 풀어버린다
울컥울컥 검은 물이 쏟아진다
먹구름 속에서
해님이 나온다
눈부신 햇살 받으며 옷을 넌다
활활 털어 빨랫줄에 넌다
어느새 말끔해진 내 마음도 넌다
친구를 찾아가는 내 마음
먼저 사과하고 싶은 내 마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집게로 꼭 집어 넌다
김현서(본명 김현순ㆍ金鉉順)
1968년 강원 홍천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현대시사상> 시 당선, 2005년 <아동문예문학상> 동시 당선
006년 시집 <코르셋을 입은 거울> 출간
[심사평] 생활 속의 소재 세밀한 묘사 눈길
신춘문예 작품을 심사할 때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작품을 읽는다. 그것은 기존의 동시 작품을 훌쩍 뛰어넘는 새롭고 참신한 작품이 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러나 '그저 그렇구나'하는 작품만 발견될 때는 적잖이 실망을 할 때도 있다.
대상(소재)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사물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쓴 작품을 보면 더욱 그렇다.
다행히 올해 응모된 작품 가운데는 그런 것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아서 좋았다. 예년에 비해 응모 편수는 늘지 않았지만, 전반적인 수준은 많이 향상됐다. 동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유치하게 쓴 작품이 별로 발견되지 않았고, 사물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소재나 주제가 낡고 상투적이어서 시적 감흥을 자아내지 못하는 작품도 있었다. 또 구어체적인 동시도 많이 발견됐는데, 그러한 작품은 대부분 설명적이고 시적 긴장감을 주지 못했다. 동시도 엄연히 '시'라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면 그런 오류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예심을 거쳐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별>(류영순) <가을>(황영선) <나무 >(김인옥) <3초만 웃어 봐>(추필숙) <택배>(박선미) <세탁기>(김현서) 등 6편이었다.
이들 작품들은 시적 기반을 탄탄히 갖추고 있는 등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류돔騙씬?작품은 시적 감성이 살아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막연한 생각으로 쓴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황영선씨와 김인옥씨의 작품은 사물의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하고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그려낸 것이 돋보였으나 참신하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박선미씨의 작품은 상황 묘사를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펼쳐 놓았을 뿐 아니라 앞뒤의 짜임도 매우 탄탄했다. 그러나 발상이 기존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것 때문에 뒤로 밀려났다.
결국 지적사항이 제일 적은 김현서씨의 <세탁기>를 당선작으로 올렸다. 일상에서 발견된 생활의 소재를 막연하게 그려낸 것이 아니라, 친구와 싸운 일을 세탁기와 절묘하게 연결시킨 점이 돋보였다.
갈등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여 상황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점도 좋았다. 함께 보내 온 두 편의 작품이 당선작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이만하면 앞으로 잘 쓸 수 있겠다는 믿음에 심사위원 두 사람이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노원호(동시인) 이상희(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