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8군무대, 대한민국 최초의 연예기획사1】
지금은 연예기획사가 증권시장에 上場도 되고 꿈의 직장 중 한 곳으로 각광을 받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같은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진 연예기획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연예기획사는 우리들의 생각보다 꽤 오래 전에 설립됐고 그 규모도 상당히 컸습니다.
주한 미 8군에 쇼무대를 공급하는 것은 1957년 미 8군 내의 'Special service'가 이 일을 담당하면서 시작됐습니다.
1958년 10월부터는 한국흥행,극동연예,신일연예,삼양기업의 4개업체가 연합한 KEC란 단체와 유니버셜이란 업체가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50개가 넘는 한국 측의 쇼공급업체가 난립하자,Special service는 화양.유니버셜.공영.대영의 4개 대행업체를 두고 쇼를 공급받았는데, 그럼에도 미 8군에 쇼납품을 위한 경쟁이 과열되어 대행업체의 지출이 수입을 넘어서는 지경이 되자 1961년 4개 업체가 화양(한국흥행)이라는 하나의 업체로 스스로 통합하게 됩니다.
화양은 서울 원효로에 380평 규모의 회사를 소유했는데 사옥 내에는 회의실,의상 제작실,작품 제작실,
소도구실,교육실,음악실,작.편곡실과 커다란 스튜디오까지 구비한 제대로 된 업체였습니다.
이런 시설을 통해 미국에서 새롭게 히트한 곡이 불과 1주일 후면 주한 미8군 무대에서 연주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본토 미국인을 통해 발음,영어 회화,가창,제스처까지 지도했었는데,화양은 600명의 종사자로 구성된 35개 쇼단 산하에는 전속 가수가 30명,전속 악단이 65개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큰 회사였습니다,
화양은 이런 규모로 월 400회 이상의 공연을 하여 연간 120만 달러(1964년 기준)를 벌어들였습니다.
기득권 유지를 위한 화양의 로비도 만만치 않아서 당시 상공부는 화양의 입김으로 시행 규칙을 만들어 주무 부처인 공보부가 인정한 쇼단체라도 기존 업체가 아니면
미 8군에 출연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이런 화양의 횡포에 반발한 여타 업체들이 이합집산해 극동,공영,20세기 등의 새로운 쇼공급업체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 화양이란 업체는 베니김이란 예명을 쓰던(원래 트럼펫을 연주하던)분이 운영했는데 당시 국내 연예계에서 가장 큰 힘을 가졌던 분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 분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렀던 이해연 씨의 남편이고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걸쳐 활약하던 김트리오 남매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당시 많은 가수들에게 미 8군 무대는 가장 동경하는 무대였습니다. 패티김도 이 화양이란 업체를 통해 미 8군 무대에 섰는데,패티김은 태어나서 사랑의 감정을 처음 느껴봤던 남자가 바로 이 베니김 씨였다는 이야기를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자신은 신인가수이고 베니김은 자신이 소속한 단체의 책임자이며 이미 기혼자였지만 당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였던 그 분만 보면 가슴이 뛰고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베니김은 서울대 치대 출신이고 작곡가 길옥윤 씨의 선배여서 길옥윤 씨도 베니김의 영향을 받아 치과의사가 아닌 음악인으로서의 인생을 살게됩니다.
첫댓글 귀한 자료 감사히 보았습니다!
미션님 덕분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