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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라
롬 15:7-13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 15:7-13 / [서로 영접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따뜻하게 영접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따뜻하게 교회 안으로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실히 지키며 이스라엘을 도우신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9) 이방인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구원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도록 하고자 오셨다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ㄴ) `뭇 백성이 다 듣도록 주님을 찬미합니다. 주님의 명성 드높이 기립니다. (ㄴ. 시18:49(삼하22:50)) 10)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ㄷ) `세계 만민들아, 이제 주님의 백성과 함께 환호성을 외쳐라! (ㄷ. 신32:43) 11) 또 이렇게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ㄹ) `온 세상 사람들아,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우리 주님을 찬송하여라.' (ㄹ. 시117:1) 12)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ㅁ) `그날에는 다윗 왕조를 세우신 그분이 온 세상을 향하여 해방의 깃발이 되실 것이다. 그의 나라가 영광스러운 땅이 되어 세계 만민이 그에게로 몰려 올 것이다.' (ㅁ. 사11:10) 13) 그러므로 나는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에서 오는 행복과 평화를 넘치게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 여러분 속에 역사하고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여러분이 희망으로 넘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말고 하나가 될 것을 권면합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7)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꺼이 받아 주신 것과 같이, 자신과 믿음의 분량이 다른 사람들을 서로 따뜻하게 맞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로마의 성도들을 받아들인 것은 그들의 견해와 행동이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서로의 관점과 행동에서 부족한 점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열방들아(8-12)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벽을 그리스도께서 허무셨습니다(엡 2:11-22).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구분 없이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네 개의 구약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시 18:49; 신 32:43; 시 117:1; 사 11:10). 이 네 개의 구절에 모두 이방인이 언급됩니다. 이미 구약성경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비전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 하나됨은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음식과 절기 문제로 이 하나님의 비전이 무너질 수는 없습니다.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13) 구원의 주가 되신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소망의 하나님이 됩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모인 로마교회에 기쁨과 평강을 충만케 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성령의 능력 가운데 소망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적용: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다툴 시간이 없습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가슴에 품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은 열방을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심판받아 마땅한 진노의 자식들을 구원하신 한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을 기억하며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사람
로마서 15:7 / 문기태 목사
여러분 누군가에게 거부당한 아픈 경험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그런 아픈 경험을 갖고 계십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요한복음 1:11 예수님은 그의 형제들과 고향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마 27:23).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의 대속자로서 버림받는 아픔을 겪으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46절).
그렇지만 예수님은 여러분을 거부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가면 거절하지 않고 주님은 그를 받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고자 하는 사람을 결코 내어쫓지 않으십니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돌아 오기만 하면 반갑게 영접하십니다. 주님의 품은 너무나 넓어서 모든 사람을 다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거부당하고 박대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주저하고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받아 주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변화되면 받아 주겠다.' '좋은 믿음을 갖게 되면 받아 주겠다.' '회개하면 받아 주겠다' 하고 조건을 내걸지 않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시고 받아 주시고는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먼저 받아 주시고 나서 회개하게 하시고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깨우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이 돌아 오니까 무조건 받아 주셨습니다. '일단을 품군중에 하나로 받고 너 하는 것 봐서 다시 아들로 승격시켜 주겠다.' 라고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거지꼴을 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며 아버지 재산 다 탕진하고 빈털털이로 돌아 왔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조건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되찾았다."하며 기쁘게 받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자신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오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너는 너무 더러워서 안되겠다.' 하고 받아 주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인생의 실패자라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라고 하나님이 거절하고 받아 주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워하고 받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주님께 돌아가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나 주님은 아무것도 탓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시지 못할 정도로 더러운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품지 못할 만큼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아오는 사람을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받아 주셨습니다. 세리도, 죄인도, 창녀도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까지 들었습니다. 신앙심 좋은 유대인뿐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았던 이방인도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키 크고 잘 생기고 잘 나가는 사람뿐 아니라 작고 못난 사람도 다 받아 주셨습니다. 신실한 남자들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문란하고 추하다고 따돌림당하는 사마리아 여인까지도 받아주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더럽다고 전염될지도 몰라 꺼리고 돌을 던지는 문둥병자도 받아 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에 들려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여 절규하는 광기어린 젊은이를, 무섭다고 모두들 외면하고 가족들까지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도 주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받으시고 다가가셨습니다. 일생을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집행을 당하기 직전 긍휼을 구하는 강도도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배신하고 부인하고 달아났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다시 받아 주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중에는 로마에 충성하던 세리도 있었습니다. 지금으로치면 권력과 현실에 안주하는 수구적인 인물입니다. 그런가하면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로마에 대항하여 힘으로 다 뒤집어 엎으려는 무리에 속한 과격한 사람입니다. 지금으로치면 급진 개혁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다 받아 주셔서 제자로 삼으시고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인물로 만드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넓은 가슴으로 여러분을 품으십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부끄러운 실수와 허물로 더러워도 개의치 않으시고 받아 주십니다. 여러분이 변화되지 못하고 아직 죄의 습관에 사로잡혀 있어도 책망하지 않고 받아 주십니다. 여러분이 결심하고는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하며 초라한 모습이라도 불쌍히 여기시고 받아 주십니다. 여러분이 친구에게 거절당하고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랑하는 이에게조차도 외면당해도 주님은 기꺼이 받아 주십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같은 존재라고 놀려도 주님은 조금의 망설임없이 여러분을 받아 주십니다. 주님은 넓은 품으로 여러분을 안아 주십니다. 여러분을 정말로 사랑하시기에 품에 안으시고 모든 슬픔과 설움을 녹여 주십니다.
어느 부인이 복음을 전해 듣는 자리에서 자기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절대로 받아 주시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에요"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그리스도인이 말했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하나님은 절대로 받아 주시지 않을 거예요." 이런 답을 전혀 기대치 않았던 이 여인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예수 믿는 사람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네, 하나님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받아 들
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믿음으로 그 아들과 연합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아무 망설임없이 기꺼이 받아 주신다는 확신을 갖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그대로 받으셔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주님의 넓은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2. 여러분도 자신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괴로와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가장 깊은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등의식이 극복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작용합니다.
자신의 외모를 혐오합니다. 자신의 성격을 혐오합니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여기고 괴로와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독특하고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고귀하게 지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시139;14-'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사람들이 여러분을 다른 사람과 어떻게 비교를 하든지 관계없이 여러분은 전지하신 하나님이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서 지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후안 까르로스목사님에게 성령께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느냐?" "너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저는 저 자신을 보면 속이 뒤집힙니다. 제 성격은 너무 형편
없습니다. 안됩니다. 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까르로스목사님 때문에 조금 화가 나신 것 같았습니다.
"내 아들 예수의 피가 나에게는 충분히 좋은 것이었는데 그것이 너를 위해서는 충분치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구나. 그럼 너는 도대체 누구냐?" 하나님께서는 다그쳐 물으셨습니다."네가 나보다 더 나은 존재냐?"
비로소 후안 까를로스목사님은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행위와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리 형편없는 인간일지라도 예수님의 피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재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더 이상 화를 내지 마십시오. 실수했다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마십시오. 무능하다고, 못났다고, 패배자라고 스스로를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시도록 주님의 손에 계속 맡기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받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나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만드신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받아 주신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 스스로 거부한다면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리고 자신을 거부하는 댓가는 좌절과 부정적 사고, 우울과 불행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들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고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행복해집니다. 소망이 넘칩니다. 감사가 넘치고 항상 기쁨이 샘솟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 나는 사랑스러운 존재다. 나는 참 놀라운 존재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쓸모없는 것을 만드시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분의 지혜로운 기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들을 용납하는 평온함을 허락해 주옵소서.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시고 그 차이를 이해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여러분도 그렇게 기도하고 자신을 더욱 사랑하고 아름답게 바라보는 안목이 열리기 바랍니다.
3. 여러분은 서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한국인은 좁은 땅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참 조급합니다. 마음도 좁아서 어떤 면에서는 용서를 잘 못합니다. 유머감각도 너무 빈약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여유가 없어서 그렇겠지 하고 이해되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살만한데도 점점 더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로 변해가고 다른 사람들을 품지 못하는 좁은 가슴을 안고 사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한국인만이 갖고 있는 고질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얼마 전 전문적인 여론 조사기관에서 한국을 위시하여 동남아 지역에 있는 여러 나라 젊은이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묻는 설문조사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이들의 경우 71%에 해당하는 수가 제 1순위로 '성격'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격을 가장 원하는지 다시 질문하자 '너그러운 성격'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단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소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사람들이 너그럽지 못해서 답답하다는 감정의 표현임과 동시에 좀더 너그러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소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도 받아 주라는 말씀입니다. 연약한 이의 약점을 가지고 비방하지 말고 감싸 주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안에서 어떤 이는 믿음이 연약해서 채소만 먹습니다. 어떤 이는 고기도 마음대로 먹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로마교회안에서 업신여기고 서로 비난했습니다. 초대교회안에서 어떤 이는 주일을 특별한 날이라고 믿고 주일만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거룩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모든 날이 다 주의 날이라고 믿고 특별하게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자기가 옳다는 확신으로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심각한 갈등에 휘말려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한 문제로 교회안에서 서로 비난하며 갈등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크신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다 받으시고 품으셨으니 우리끼리 서로 비난하고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롬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이미 받으신 사람을 우리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작고 사소한 문제를 여러분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주님을 닮은 자녀답게 가슴을 열고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십자가 위에서 너무나 끔찍한 고통과 씨름할 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고 고함을 지르던 폭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저런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이처럼 대적하는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품을 수 있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넓게 열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긍휼은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혼자 살려면 긍휼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어우러져 살려면, 서로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온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치유의 공간으로 우리의 마음을 넓게 확장하는 것이 긍휼이다.' 모든 사람을 품고 그들의 심신을 고쳐주는 공간, 이것이 바로 긍휼로 넓어진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누구든지 받아 줄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마음은 굉장히 이해타산에 예민합니다. 우리에게 좌절을 안겨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을 쉽게 품지 못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어도, 아무리 목사가 되어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어도 나를 욕하고,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나를 좌절 시키는 사람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제게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형제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내 속에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용서도 되고 이해도 되고 어떤 사람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대표적인 소화기관으로 위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유 1리터를 마시게 되면 소에게 있던 알부민이 꽤 짙은 농도로 사람의 혈액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위를 통해 흡수된 알부민이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가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유를 주사기에 넣어 사람의 혈관에 바로 투입하면 쇼크사를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소의 알부민이 위 안에만 들어가면 우리 몸과 조화를 이루어 몸 속에 자연스럽게 흡수가 됩니다. 우유뿐만 아니라 온갖 음식물이 위 속으로만 들어가면 우리 몸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영양분을 공급하게 됩니다. 이물질이 들어와도 함께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생물학적 장치가 위 안에 있습니다. 이 생물학적 장치를 일컬어 '탈러런스'(tolerance) 라고 합니다.
마치 위가 이물질을 다 소화하듯이 자기 안에 자기와 다른 사람을 품게 될 때 굉장한 영양소가 나옵니다. 다르지만 받아주는 것, 틀리지만 품어주는 것, 잘 맞지 않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아 주는 것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때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지금까지 큰 고통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큰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여러분 가족중에 받아주지 못하고 거부하며 살았던 이가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허물 많은 여러분을 받아 주신 것을 기억하고 오늘부터 서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체들중에 받아주지 못하고 거부하며 등지고 살아온 이가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마음을 넓게 열고 먼저 손을 내밀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웃이나 직장에서 여러분에게 해를 입혀서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불쌍히 여기고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관용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울릴 수 있는 조건이라곤 없습니다. 오죽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편안하게 품어줄 만한 어떤 근거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머리에 하나님의 긍휼로 관을 만들어서 씌워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허물대로 갚지 않으시고, 법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관용입니다.
여러분도 불쌍히 여기고 다가가 먼저 손을 내미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한량없는 평안을 누리기 바랍니다.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의 일화하나만 소개함으로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한때 남아프리카연방의 통합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남아프리카 추장 여러 명을 여왕의 왕실에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리 사전 오리엔테이숀이 있었지만 추장 한명이 포크와 나이프가 불편하게 느껴지자 손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함께 있던 영국 각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긴장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여왕이 빙그레 웃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제쳐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하더랍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모든 만찬객들이 여왕을 따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손님들은 기분좋게 식사를 마쳤고 여왕의 남아프리카 통합제의에 흔쾌히 협력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그날 더 큰 그림을 본 것입니다. 만일 그 날 여왕이 이 손님들에게 무례하다고 큰 소리쳐 책망을 했다면 얼마나 국가적으로 더 큰 손해를 보았을까요? 지혜로운 여왕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런 큰 마음을 품고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과 조금 다른 사람도 받아주며 큰사랑으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데 더 적극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받아 드리는 사람
로마서 15:7-13 / 민병석 목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의 사랑과 은혜를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 나타내시는 각도에 따라 혹은 안위의 하나님, 혹은 인내의 하나님, 혹은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평강의 하나님(롬 15:33),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1:3),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5:10)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아름다운 용어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의 역사를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하나님이 우리로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대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잡다한 인종, 여러 가지 성품의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흩어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성장과 부흥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이처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받아 드림으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서로 받아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 데 우리를 받아드리신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와 같이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받아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약한 자로서의 시험을 받으심으로 시험을 받는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받으시면 서도 그들을 배척하지 아니하심으로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 인내하심으로 고난을 받는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본은 우리들로 예수를 배우게 하심으로 그 아들의 형상을 이루시려는데 있습니다(롬8:29, 갈4:19). 바울은 우리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받아 드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바울은 여기서 주를 본받아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서로’라고 말한 대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서로 ‘받으라’ 곧 서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간에는 많은 갈등을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로운 생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선민의식 등이 갈등을 빚어내 ,교리적인 충돌이 잦았습니다. 서로 받아 드리지 아니하므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① 여기서 서로 받아드리는데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툼이나 판단은 교만이나 자기 우위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이해하고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려면 먼저 자기보다 다른 이를 낫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용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빌2:3). 예수님도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20:27).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우해 준다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경우를 본받아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차원 높은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② 서로 받아 드리는 일에는 서로의 약점을 서로가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약점을 판단하면 그곳엔 분쟁이 생기고 파벌이 생깁니다. 상대편의 약점을 자신의 약점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폭 넓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약점을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보자기가 필요합니다.
③ 서로 받아 드리는 일에는 서로가 신앙의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이 한 가족으로 한 울에서 행복스럽게 살아가는 이유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서로의 협력에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주님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율법의 준행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이실 필요가 없는 분이지만 그가 친히 율법의 준행자가 되신 이유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함께 위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함 없이 서로 받아 드려야 할 것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위하심이란,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을 견고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메시야이십니다. 이 같은 약속은 그의 조상들에게 언약으로 수도 없이 주셨습니다. 그 일을 견고케 하시기 위해서는 그가 유대인으로 태어나셔야 했으며 율법 아래에 태어나 그 율법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다른 한편 예수님은 이방인에게도 약속된 구주가 되십니다. 창세기 3:15절의 ‘여인의 후손’의 약속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약속입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유대인들에게 국한시킨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이방인들도 그 약속에 포함된 사실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창12:3). 이 일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이방인파 유대인의 담을 헐어버리고 서로 받아 드리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인용한 구약은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성경적 근거로 제시해 주었습니다.
2. 소망의 하나님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소망을 품고, 소망을 바라고,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생활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인간이 만들어낸 소망이 아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확실한 소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사죄를,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영생을, 그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소유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소망을 친히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증하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결 론
13절에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모든 기쁨과 평강이 성령 안에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과 평강과 소망 안에서 살아가도록 항상 힘써야 하며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받아 드리는 생활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충만한 기쁨과 평강
로마서 15:8-13 / 이수영 목사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가장 강조한 점 두 가지를 말한다면, 첫째는 모든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곧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며,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유대인이든 아니든 그 누구나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진리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에로 선택하시고 성령의 역사로 택하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게 하시며 그 믿음을 지키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도 성취하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향해 가지신 계획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구원자시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요약하여 쓴 것이 본문 8절과 9절 상반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먼저 8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는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표징인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로 인한 구원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폐하지 않고 그대로 따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진실함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이란 무엇입니까? 그 약속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하란에 있던 칠십오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시며 가나안으로 가게 하실 때 주신 약속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창12:1-4).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복을 주시며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
그 후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반복하여 확인해주셨습니다. 먼저는 아브라함이 나이 백 살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 했을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6-18) 이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서도 이어졌습니다. 흉년이 들어 이삭이 그랄로 내려갔을 때(창26:1)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2-4)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도 또 확인시켜주셨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훔친 일로 형의 분노를 사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이 있는 먼 하란으로 향해 가다가 해가 저물어 돌을 베개 삼고 누워 자다가 꾼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창28:10-12):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28:13-14)
그런데 우리는 이 반복된 하나님의 약속에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과 그 후의 거듭된 약속의 말씀 사이에 한 가지 차이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 했던 것이 그 뒤부터는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22:18),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4)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28:14)로 바뀐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많은 백성이 복을 받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자손들 때에도 그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요셉으로 인하여 칠년간의 극심한 흉년에도 불구하고 온 이집트 백성과 주변나라의 주민들까지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게 하신 일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자손들로 인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시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절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천하 만민의 소망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열방이 소망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구약성경에서 이미 증언되어온 것임을 사도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의 네 군데에서 인용을 합니다. 본문 9-12절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9절에서 시18:49을 인용했고, 10절에서는 신32:43을 인용했으며, 11절에서는 시117:1을 인용했고, 마지막 12절에서는 사 11:10을 인용했습니다. 시편에서 두 차례, 신명기에서 한 차례, 이사야서에서 한 차례 인용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책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모세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모세오경 중 하나인 신명기에서도 인용했고 예언서 중 대표적인 이사야서에서도 인용했으며 성문서의 대표작인 시편에서도 인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함으로써 구약성경 전체가 천하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와 찬송과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될 것임을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증언을 사도 바울이 자신의 믿음과 소망으로 받아들이며 그 믿음과 소망을 짤막한 기도로 서술한 것이 본문 13절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소망을 갖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왜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됩니까? 정죄와 죄책감과 형벌과 멸망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다 와서 쉬게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세상에 죄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소망을 주시려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시고 거기서 몸을 찢기시며 피를 다 흘리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과 영생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13절에서 간구한 대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또한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
로마서 15:9-11 / 김광일 목사
기찻길 옆에 석탄 공장이 있었습니다. 석탄 공장 주인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석탄을 한 삽씩 퍼서 던졌습니다. 종업원이 왜 그렇게 하느냐고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장 주인이 말하기를 철길 건너편에 아주 가난한 노인이 살고 있는데 너무 가난하여 땔감이 없어서 기차에서 떨어진 석탄을 주워 땔감을 하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기관차 화부가 실수로 석탄을 떨어뜨리면 그 걸 주워서 불을 피워 추위를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기차가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차에서 디젤기관차로 바뀐 것도 모르고 늘 하던 대로 석탄을 주우러 철길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석탄을 하나도 줍지 못하고 허탕을 치곤하였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공장 주인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철길에 석탄을 한 삽씩 던져 놓아 가난한 노인이 석탄을 주울 수 있도록 배려하였던 것입니다. 석탄 공장 주인은 아주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베풀만한 이유나 받을 만한 이유가 없어도 지불하거나 도움을 베푸는 것입니다. 특히 자원하며 희생하여 주는 은혜라면 받는 쪽에서는 더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를 받은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값없는 베푸시는 이 은혜를 어찌 다 보답할 수 있습니까? 값없이 받은 이 은혜를 어찌 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바울은 부활의 확실성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아울러 자신의 신앙고백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사도였지만 항상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또 많은 일들을 이루었지만,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가득 부어주셨기 때문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고 핍박하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이미 새 삶으로서의 부활을 경험하며 사는 은혜의 모습이 아닌가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들어 강조합니다.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면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은혜입니까?
첫째로 나를 칭해 주시는 은혜
1930년대 신앙 대부흥이 일어날 때 주역을 맡았던 김익두(金益斗) 목사는 길선주 목사와 더불어 대부흥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본시 평양에서 소문난 깡패였습니다. 술과 주먹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가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자신이 평소에 괴롭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에 여러분을 괴롭히던 김익두는 이미 죽었습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은 새롭게 거듭난 김익두입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십시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니가 김익두를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김익두가 죽었는지 어디 한 번 확인해 봅시다.” 바가지에 찬물을 가득 담아 지나가던 김익두의 얼굴에 확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김익두는 빙그레 웃으며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지금 아주머니가 그 자리에 살아 계신다는 것이 이 김익두가 죽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김익두는 자신이 목사가 된 것,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군이 된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비난당하고 조롱받는 상황이 닥쳐와도 확신에 찬 음성으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저처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직분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이 자격 있다 하시고, 자신은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 안 된다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문제를 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리고 사도로 칭함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처럼 지극히 모자라는 자신이 사도로 여김 받은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 인한 은혜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작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도로 칭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한 없이 부족한 자를 불러주시고 사도로 칭하여 여겨주신 그 은혜를 고백하는 바울처럼 우리도 구원하사 일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칭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로 나로 되게 하시는 은혜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 100만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설문 내용은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였는데 이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사람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창시절 생활기록부는 엉망이었습니다. “품행이 나쁘고 믿을 수 없는 아이. 희망이 전혀 없으며 다른 아이들과 싸움질만 일삼는 문제아” 그의 성적도 초라했습니다. 지리 점수는 겨우 낙제를 면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처칠은 삼수 끝에 샌드 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를 제치고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그는 철저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처칠의 회고록’을 보면 처칠만큼 배신을 많이 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처칠은 전쟁터에서나 국회에서 늘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그를 가장 존경 받는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희망이 없던 소년’을 ‘희망을 주는 지도자’로 되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바울은 ‘나의 나됨은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은혜요.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 힘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고백합니다. 만일 그대로 있었다면 계속해서 핍박자와 폭행자로 살았을 것이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게 하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던 바울은 현재의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된 것으로 믿었습니다. 자신의 인격과 활동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서 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수고는 하였지만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세입니다. 즉 자신의 삶의 근거와 존재의 바탕을 온전히 하나님께 두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공하면 자기가 잘나서 성공한 줄 압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행복하게 된 줄로 여깁니다. 자기 힘으로 이룬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자신이 은혜 받은 존재임을 아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바울처럼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와 함께 하시는 은혜
한 육상 선수가 올림픽에서 명성을 얻은 위 성공을 거둔 소감을 말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나와 함께 달려주셨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 해설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이 이기도록 도우셨다는 말은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훈련하는 데 필요한 준비도 못했을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할 필요성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달려 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늘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아닙니까? 우리는 매일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하루하루 살아온 삶의 기적, 그리고 우리의 재능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무슨 일을 하든지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게 하실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주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러한 은혜 의식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연약한 자이면서 가장 강한 자로 살 수 있었음도 하나님의 함께하시는 은혜였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만큼 교회를 많이 설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만큼 많은 서신을 저술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훌륭한 전도자요, 학자일 뿐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하면서 많은 핍박을 받고, 매를 맞고,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풍랑을 만나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수고는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어진 결과였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바울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학식이 그러합니까? 신분이 그러합니까? 수고와 고난이 그러합니까? 복음을 위한 열정이 그러합니까? 도저히 바울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얻게 하시고 복음을 위한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업적이 있어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경직(韓景職) 목사는 자신이 무력한 존재임을 알았기에 때로는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죄를 고백하는 참회와 회개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자기의 죄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짊어지고 고백하는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항상 자기의 죄와 허물을 고백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찬송을 평생 불렀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1992년 한경직 목사는 템플턴상 수상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인사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이 상을 주셨습니다.” 모였던 많은 이들은 한경직 목사의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과연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은혜를 받은 자만이 사명으로 일을 감당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영혼구령의 안타까움을 가지고 전도합니다. 부디 부족한 나를 불러주시고 일꾼으로 칭하여 주신 은혜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내가 되게 하신 은혜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