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예레미야 31,1-7 마태오 15,21-28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때때로 성경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말씀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당혹감을 줄이고 읽는 이가 받을 충격을 조금이나마 약하게 하고자
“강아지”로 표현하였지만,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이 ‘자녀’ 또는 ‘양’이라면,
가나안 여인, 곧 이방인을 가리킨 “강아지”는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개’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목자이신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 떼로 지칭되었고(이사야 예언서 40,11 참조),
이방인들은 대단한 혐오의 대상으로 흔히 ‘개’로 불렸습니다.
개는 아무리 해도 개이고 양은 어떻게 해도 양입니다. 개가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그분의 개입 없이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방인인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개’입니다.
그런데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개가 양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아마도 이것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당혹스러운 정황 설정과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메시지일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는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의 처지를 가나안 여인과 “호되게 마귀가 들린”
그의 딸로 지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시간으로도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고
구원도 베푸셨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이전까지 그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들을 수 없었던 놀라운 말씀의 의미를 강조하려고,
곧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방인에 대한 멸시와 그들의 불결함과 무자격성에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강조하려고 오늘 복음은
극적인 대비와 반전의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엄연히 차별이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 정결한 이와 부정한 이, 거룩한 이들과 죄인들을 구별하고 분리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늘 대단히 끈질깁니다. 스스로 열심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일수록 자신은
선별되고 다른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간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차별을 멀리하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별과 민족, 나라, 종파,
소속, 학연, 지연, 빈부, 장애 등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인이 볼 때 어긋난 신앙을 지닌 사람을 상징하지만,
오히려 예수님께 참된 신앙인의 모범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애타게 구원을 청하여, 그것을 아무런 자격 없이 거저 받았음을 잊지 맙시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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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예레미야 31,1-7 마태오 15,21-28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은 모두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신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졌던 체험을 다시
하게 되리라 상상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야에서 누린 바 있던
하느님의 자애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섭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화답송도 독서에 이어지는 주님의 신탁으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그런 다음 마태오 복음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애를 확인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이민족이라는 출신의 약점을 넘어서 진정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처사에도 끈질긴 구애는 마귀 들린 그녀의 딸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시킵니다.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출신이나
병듦의 약점이나 약함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이라는 장점과 강함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을 묵상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바오로 사도의 고백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코린토2서 12장 9절).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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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예레미야 31,1-7 마태오 15,21-28
그 누구도 원하는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대단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가나안 입성을 코앞에 둔 채 다시 물러나 사십년을 꼬박 광야를 떠돌아야 했으니까요.
그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이 이렇게 꼬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하느님의 힘을 믿지 못했던
이스라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그들의 아둔함이 딱하고 안타깝지만
“사십 일,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사십 년 동안 그 죗값을 져야 한다는
주님의 결정에 한편 고소하기도 합니다.
‘된통 쓴 맛을 봐야, 정신 차리지’ 싶으니까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약속 그분께서 이끌어 가시는 가나안 땅,
그 곳을 향해 우리는 나아가고 있습니다. 믿으시나요?
그 좋은 약속 그 좋은 곳이 눈앞에 선 한데도 돌아서 그분의 방법과 뜻과
이끄심에 투덜대고 있지 않나요?
문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간다면서도 지금 내가 이겨야 할 유혹
‘아낙의 후손들’의 막강한 체구와 힘에 겁을 먹는 일이라 싶습니다.
세상은 아말렉족, 히타이트족, 여부스족, 아모리족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산악 지방에 자리한 그들은 막강한 힘으로 우리 앞에 버티는 바로 그 장벽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고 그들은 모두 키가 크고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기만 합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는 명령에 멈칫하여 다른 방법을 찾고 그분께서 주신 계명을
어떻게 따를 수 있냐고 머리를 굴리는 이유입니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정말 메뚜기같습니다. 절대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는 힘 쎈 용사들은
세상에 산재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길 사람을 고르지 않으십니다. 혼자 힘으로 이긴 사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메뚜기처럼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위해 싸우겠다 하십니다.
우리가 힘없고 가엾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기에 돕고 살피고 함께 하여 세상의 권세와 싸우고
세상의 악을 이기고 세상의 편견에 도전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해서 이 어둔 세상이 모두,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함께 하시는 그분’을 알아 돌아서게
하시기를 꿈꾸십니다.
메뚜기같이 약한 우리들에게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 같고 도무지 가당찮은 그 엄청난 일들을
하라고 부추기시고 할 수 있다고 힘을 주시며 해 내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까닭입니다.
이기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메뚜기로써 족합니다.
그 분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우리는 메뚜기처럼 작고 보잘 것 없어야 합니다.
높아지기는커녕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허약한 우리이기에
그분의 사랑은 곁을 떠나지 못하시고 내내 눈을 떼지 못하시고 돌보십니다.
이보다 큰 은혜는 없습니다. 아멘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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