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체포특권 폐지? 포기?… 美-獨-日 등 채택한 헌법적 권리 어찌 될까
체포동의안 폐지-포기 논란《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회에 체포동의안이 상정된 사람은 조봉암 의원이었다. 1949년의 일이다. 이승만 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 의원은 비료와 양곡 횡령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 정권에 맞선 것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해석됐고, 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은 부결됐다.
현행범이 아닌 한 회기 중 국회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 ‘불체포특권’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국회의원의 자유로운 대의 활동을 보장하고 국회의 독립성을 지키는 의미가 컸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불체포특권이 비리에 연루된 의원을 감싸는 보호막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생겨났고, 1990년대 후반엔 ‘방탄 국회’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최근 정치권에서 불체포특권 폐지 논란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대표를 비롯해 소속 의원들의 체포동의안을 연이어 부결시킨 게 발단이 됐다. 이에 당 혁신위원회는 1호 혁신안으로 ‘불체포특권 포기 서약’을 제안했고, 민주당 의원들은 우여곡절 끝에 18일 의원총회에서 ‘서약’을 결의했지만 “정당한 영장 청구에 대해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국민의힘은 이를 “꼼수”라고 비판하는 등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불체포특권의 ‘포기’가 아닌 ‘폐지’를 포함한 최소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불체포특권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 국회의원의 의정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라는 이유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선 폐지 반대 의견도 나온다.
● 개헌 없이는 불가능한 특권 ‘폐지’
방탄 국회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건 25년 전이다. 1998년 대선자금 불법 모금 혐의로 검찰이 이신행 서상목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회기 중’을 유지할 목적으로 임시국회를 연이어 열었다. 재적 의원 4분의 1 이상 요구만 있으면 임시국회를 소집할 수 있는 헌법 규정을 활용했다. ‘이신행 방탄 국회’는 네 번 이어졌고, 그 뒤를 이어 ‘서상목 방탄 국회’도 여섯 차례 문을 열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큰 선거 때마다 여러 대선후보가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폐지 또는 포기, 특권 내려놓기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지금까지 달라진 점은 별로 없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없던 일이 됐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후보는 불체포특권 폐지를 공약했지만 집권 이후엔 구체적인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민주당 전신) 후보도 불체포특권을 제한하는 공약을 냈지만, 승리가 유력했던 2017년 대선에선 이 공약을 채택하지 않았다.
이재명 대표도 지난해 대선 때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신년 기자회견에선 “경찰이 적법하게 권한을 행사한다면 당연히 수용하겠지만 경찰복을 입고 강도 행각을 벌이고 있다면 판단은 다를 수 있다”며 사실상 입장을 바꿨다.
불체포특권 폐지는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국회의원은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기 중 국회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으며, 구금된 경우라도 국회의 요구로 석방될 수 있다는 것은 헌법 44조에서 보장하는 권리다. 1948년 제헌헌법이 이를 규정한 이래 75년간 이어져왔다. 이를 바꾸려면 헌법 개정, 즉 개헌을 해야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엇갈린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정치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민주주의가 확립됐다. 만약 권력이 국회의 권한을 침탈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국민적 저항이 일어날 것”이라며 “오남용되고 악용되는 특권은 폐지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반면 장영수 고려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서구의 선진국들이 불체포특권의 문제점을 몰라서 존치시키는 것이 아니다”면서 “오남용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제도를 폐지했을 때 정부가 수사권을 오남용해 야당을 억압하고, 의회를 파행으로 몰아갈 경우 발생할 위험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 ‘폐지’가 아닌 ‘포기’를… 與野 온도 차
김진표 의장이 불체포특권 폐지를 주장했지만, 현실적으로 개헌이 쉽지 않다는 것을 학자들도 의원들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논의는 ‘폐지’보다는 ‘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장 교수는 “헌법 해석상 개헌 없는 폐지는 불가능하지만 국회법 개정을 통해 불체포특권의 운용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고 했다.
18일 현재 국회엔 불체포특권에 제한을 두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이 모두 6건 계류 중이다. 올해 들어서만 4건이 발의됐는데 모두 국민의힘 의원들이 대표 발의했다.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은 16일 국회의원이 스스로 불체포특권을 포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스스로 영장실질심사에 응하고자 할 경우 다른 의원들에게 임시회를 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골자다. 앞서 권성동, 정우택, 유의동,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발의 순)도 불체포특권의 오남용을 막기 위한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이들은 현행 ‘72시간 내’로 규정된 체포동의안 표결 기간 단축, 무기명인 투표 방식을 기명으로 변경, 기한 내 처리되지 않은 경우 가결된 것으로 간주 등의 내용을 개정안에 담았다.
민주당에서는 김승원 의원이 지난해 1월 관련 개정안을 발의했다. 체포동의안이 본회의에 보고되는 즉시 표결하고, 표결은 기명투표로 하는 내용을 명시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국민의힘 의원 101명과 민주당 비명계 의원 31명이 불체포특권 포기에 이미 서명했고, 민주당이 ‘불체포특권 포기 서약’을 결의한 만큼 여야의 공감대는 충분히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며 “다만 여야가 처한 사법 리스크 차이로 인해 실제 국회법 개정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라고 말했다.
● 해외 각국도 인정… 한국과 다른 운용
불체포특권의 역사적 뿌리는 근대 의회제도를 가장 먼저 발달시켰던 영국에서 찾을 수 있다. 1603년 영국 의회는 ‘의회 특권법’(Privilege of Parliament Act)을 처음 법제화했다. 이를 1789년 미국이 제정헌법에 수용했다. 이후 많은 나라가 이를 헌법적 기본 권리로 채택했다. 나치즘의 위험을 경험한 독일은 더 강력한 특권을 두고 있다. 회기 중에만 보장하는 우리와 달리 의원 임기 내내 특권을 인정한다. 삼권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그 필요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미국은 연방 대법원 판례로 입법 활동과 관련이 있을 때만 불체포특권을 인정한다.
불체포특권 제도의 운용 결과는 나라별로 차이가 있다. 우리 국회에 따르면 제헌의회부터 현재까지 제출된 체포동의안 70건 가운데 가결된 것은 17건으로, 가결률이 24.3%에 불과하다. 특히 15·16대 국회(1996∼2004년) 때는 각각 12건과 15건의 체포동의안이 제출됐는데, 단 한 건도 가결되지 않았다. 21대 국회만으로 한정하면 총 8건의 체포동의안 중 4건이 가결됐다.
일본과 독일은 다르다. 일본에서는 1947년 헌법 시행 이래 현재까지 ‘체포허락 청구’ 20건 중 16건(80%)이 가결됐다. 불체포특권을 폭넓게 보장하는 독일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독일 연방 의회가 낸 자료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21년까지 총 127건의 체포동의안이 제출됐는데, 이 중 118건(92.9%)이 가결됐다. 다만 이 국가들은 검찰 수사나 체포동의안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는다는 신뢰가 정치권에 깔려 있다는 점이 한국과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불체포특권 폐지냐, 포기냐는 여야 공방 차원으로만 접근할 일은 아니다. 역사적 연원, 검찰 수사의 공정한 잣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국민 눈높이에 맞춰 풀어갈 문제라는 얘기다.
길진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