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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내가 우리학교 총동창회 가운데서 유일하게 중학교 동기생홈 페이지가 있는 42회임이 자랑스럽고 또 그 중에서도 9반 이었음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우리 담임을 맡아서 가르쳐 주셨던 은사님의 추모문집 발간에 즈음하여 작고한 여경우교수에게 보낸 글이 있기에 실어 봅니다 벌써 故人이된 東巖(여경우 박사의 아호)은 은사님께 우리 九松友들 소식 전했을 테지...
죽포(竹圃) 정윤진(丁允鎭) 恩師님을 회고하며
어제 오후에 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있는데 MSN 메신저 창에 인천대학교 인문대학장겸 대학원장으로 있는 呂景宇형이 log in했다는 창이 떴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한국의 시간은 자정이 넘었고 그렇다면 연구실에서는 아닐테고 집의 컴퓨터일 터인데 집에서는 아들의 컴퓨터를 사용한다던 말이 생각나는데 작은 아들은 얼마전에 번갯불에 콩볶아먹는 식으로 짝을 지어 미국으로 공부 더하라고 보내 버렸으니 큰아들 이겠구나 생각을 했었지요.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내 상태를 온라인으로 만들어 두었더니 어? 여경우형이 나를 부르고 있더군요. 근황은 어떠하며 보낸 메일을 보았느냐고 묻고... 요새라고는 메일 한장도 안 보내주고선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싶었는데 서너시간 전에 메일을 보냈다나... 나는 속으로 하이구 이양반아 내가 어디로 메일이 올줄을 알고 목을빼고 기다리고 있는줄 아시오? 하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반가운 벗에게 그럴수도 없고 어느 메일주소로 보냈느냐고 물었지요.
내가 평소에 쓰는 주소를 잘 알고 있을텐데 우리 사랑방 카페메일 주소로 보냈다는군요. 이 주소로는 메일을 보내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며칠만에 한번씩 체크를 할 정도인데...
사연인즉슨-
우리 중학교 졸업반때 담임이셨던 정윤진 선생님의 문집을 발간 하려고 하는데 사진자료나 回想記 같은걸 모은다니 가르침을 받은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없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말씀으로는 현재 서울에 있는 김교국, 서정돈, 김대환, 여경우등이 주동이 되어 얘기를 나눈 모양이고 저희들 끼리 정윤진 선생님을 회고하며 라는 제목의 글을 내가 쓰도록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데 내가 글을 쓰도록 하는 책임을 여경우형이 맡았다나... 그러니 시간이 촉박하니 당장 글을 써서 사랑방에 올리던지 자기에게 메일로 보내 주던지 하라는 지엄한 분부가...
이럴때 김진복형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文士로서 筆名을 날렸다던데... 옛날 어린시절부터 유달리 글을 잘 썼지요... 서정돈총장, 김대환변호사도 글을 쓰는 솜씨는 별로 뒤질바가 아닐테고... 그래서 그 친구들께 말해보라고 했더니 여경우형이 하는소리- 그 친구들은 바빠서 어쩔수가 없다나... 그렇다고 비서에게 글을 쓰라고 할수도 없을테고... 자기도 무척 바쁠텐데 다른친구들 배려를 저렇게 하는걸 보면 언제나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친구의 성품을 보는것같아 갸륵하기도 하고... 그래서 우둔한 제가 회상기를 쓰기로 했답니다 물론 옛친구 제형들의 글도 볼수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내가 附言 하기를 얼마전 안동에서 열린 경연 포럼때 강수균교수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강보영 이사장이 우리반 "남을 믿고 남으로부터 믿음을 받는 사람이 되자"는 급훈을 기억하고 있고 또 선생님과는 어떤 유별난 인연이 있는 모양인데 직접 통화를 해 보라고 권유를 했답니다.
그리고 이자리에서 말씀 드리고 싶은건 선생님께 배운게 어찌 우리반 학생들만 배웠답니까? 선생님과 같이 소풍때나 수학여행때 찍은 선생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갖고계신 벗들은 연락을 해 주시면 하는 부탁도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는 벗들은 짧은 글이라도 한자씩 올려 주면 어떨까 싶네요.
君師父一體란 유교사상을 실생활에서도 약간 이나마 感知할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였던 내가 어릴적 코흘리게 시절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을 기억함에 있어서 모든 선생님들을 다 기억할수는 없지만 적어도 담임을 맡아서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의 존함은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한분도 빠짐없이 지금까지 기억을 하고 있답니다 지금은 평준화니 뭐니 해서 없어진 중학교때 담임을 맡으셨던 세분 선생님 장재택,김옥진,정윤진선생님들의 존함들도 물론 말할 필요도 없고요. 중학교때 선생님들은 아마 80%정도는 존함을 기억하고 있지 싶습니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교육자도 아닌 자들이 학교 평준화가 어떻고 하며 명문학교를 죄다 없앴는데 이제 몇십년 지나고보니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학교 다닐때만해도 요새 애들처럼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학교에서 시간을 다 보내지는 않았지요. 그리고 국가간의 경쟁에 이길려면 어느 나라건 엘리트를 양성해야하기 때문에 명문학교의 필요성을 느껴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판국에... 대학원 중심교육이 어떻고 떠들어 대더니 서울대학교 대학원과정에 정원미달 사태까지 만들어 놓고... 예삿일이 아닙니다 또 기억력은 머리가 좋고 나쁜것 하고는 상관없는게 아닐까 하는게 저의 지론임을 밝힙니다 적어도 지능지수와 비례하지 않는것만은 확실할것 이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이름은 평생 단 한번이나 서너번만 만나고 들었던 기억이 영원히 기억되는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름은 불과 몇년전에 꽤나 오랫동안 같은 생활권에 살았으면서도 기억나지 않는게 있을뿐더러 그 명확한 증거로는 내 家兄 한분도 우리 동문인데(35회) 어릴때부터도 공부를 잘 하기로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였지요. 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1983년에 독일에서 형님과 십수년 만에 만났는데 40여년전 옛날 어릴때 살던 동네 이야기를 하면서 동네의 형님 친구들 이름들을 늘어 놓았더니 자기는 들으니까 기억은 나는데 하나도 기억에 없었다고 얘길 하시더군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그후 내가 한국에 들렸을때 제 형수가 하시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도련님,형님이 그러시던데 어찌 그 오래된 일들을 모두 기억을 다 하고 있는지 기가 맥힐 정도였다고 하시던데요"
이제 3학년때 담임 이셨던 정윤진 선생님을 회고할까 합니다.
회상기는 정확하게 선생님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옮길수 있어야 할텐데 솔직히 말씀드려 어떤 일련의 얘기를 할 자신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건데 한편 한편의 순간들이 끊어진 활동사진의 필름처럼 희미하게 생각이 날 뿐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그대로의 모습을 적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아시다 시피 우리 동기들은(42회) 수성천변 가교사에서 입학한 마지막기 이었답니다. 그러니 가교사와 대봉동 본교 두곳에서 공부를 해본기수는 40, 41, 42회 뿐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1학년때 본교로 이사를 해 들어 갔답니다 그러니 43회는 본교사에서 시험보고 입학식을 했었답니다. 제가 3학년이 될때는 은근히 속으로 이길우선생님 반에 배정이 되길 바랬는데(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그 바램은 이루어 지지 않아서) 학년주임 이셨던 이길우선생님은 1반 담임이셨고 나는 9반으로 배정이 되어서 약간 실망을 했던게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이길우 선생님 반에 가고싶었던 이유는 언젠가 사랑방에 입학시험 수험번호를 받던날 이야기를 올린게 있으니 왜 그랬던지 잘 아실테지요 하지만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9반으로 갔던것 또한 커다란 행운 이었다는걸 알수가 있습니다
나는 삼학년이 되고나서도 勉學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놀기에만 열심이었답니다. 지금 가슴에다 손을 얹고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나는 중학교때도 고등학교때도 실컷 놀면서 건성으로 학교엘 다니다가 3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몇달간 열심히 공부하여 상급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자랑스러운건 평생 단 한번도 낙방하거나 2차시험을 칠 필요가 없었으니 상당한 행운도 따랐던 모양입니다
이제 정윤진 선생님을 회고해 보건데 선생님은 원체 원만하신 분이라 특별히 기억에 두드러게 남는게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친구들도 모범생 보다야 惡童들이 기억에 더 선명하게 남드시...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라야 편편히 떠오르는 모습들일뿐...
한마디로 엄하고 무서우신 선생님이 아니라 온화하고 자상하신 어버이같은 선생님 이랄까요. 언제나 조용하게 싱긋이 웃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그당시는 전쟁이 끝난지도 몇년 안되고 어렵던 시절이라 선생님들이 대부분 다 그러셨지만 우리 담임선생님은 거의 언제나 고동색(Braun,갈색) 두꺼운 양복을 입고 다니신 기억이 선명 합니다. 참 검소하신 분이셨지요. 그 당시 우리학교 선생님들 가운데도 멋진 양복을 자주 갈아입으시고 멋내는 선생님들이 안계셨던건 아니었거든요. 선생님께선 내 기억으론 단 한번도 머릿기름을 바르신걸 본 기억조차도 없었답니다.
선생님은 유별난 특징이 하나 있으셨는데 아마 결벽성이 무척 강하셨던지 수업시간에 칠판에다 분필로 글을 쓰시고는 언제나 입으로 손에 묻은 분필가루를 후후 부시던 습관이 특이 했었지요. 아마 선생님께 수업을 받아본 벗들은 지금도 모두 다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옛날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슴아픈 일이 있는데 우리 학우들 가운데도 그런 벗들도 있었고 선생님 께서도 영양 상태가 좋지않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마른버짐이 얼굴에 나타나신 것이 또 기억에 남아 있답니다
선생님이 우리반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건 세장면이 연상되는데 첫번째는 우리가 3학년이 되고 아마 첫 홈룸시간 이었다고 기억이 되는데 우리반 급훈을 정하자고 하여 중구난방으로 우리끼리 의논을 하다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선생님께 여쭤보는게 어떠냐고 중론이 모아졌는데 선생님께서 옆에 계시면서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우리들의 토의과정을 쭉 경청하시다가 우리의 중론이 모아지자 비로소 한말씀 하시고 이것이면 어떻겠느냐고 물으신것 같았는데 모두 좋습니다고 동의를 하여 급훈으로 채택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급훈은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얼마전에 안동에서 개최한 우리동기 교수들 모임인 경연 포럼에서 안동병원 강보영 이사장이 하던 얘기를 강수균교수가 옮긴걸 보고 다시 기억이 나더군요. "남을 믿고 남으로부터 믿음을 받는 사람이 되자" 선생님 다운 말씀 이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반 級訓이 곧 선생님의 말씀이었다는걸 이제금 깨닫습니다
두번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나는 3학년때 학교 밴드부에서 활동을 했는데 월요일아침 조회를 할때는 언제나 교가를 연주했지요.
그날도 아침 조회를 하고 수업 첫시간이 국어 시간이라 선생님께서 수업을 하러 우리반에 오셨는데 아침조회시간에 떠들었다고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체육선생님(이준상 선생님)으로부터 엎드려 뻗쳐 기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실에는 당번한명과 숙직실 창고에 악기를 넣어 놓는답시고 뺑소니쳐서 교실로 들어온 나와 두명만이 교실에 있었답니다 사실 나는 숙직실에서 전교생 기합이 끝날때까지 어거정 거리다가 교실로 왔어야 했는데 너무 성급하게 교실로 돌아와서 혹시나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지나 않을까 마음을 조리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을 보시고는 싱긋이 웃으시더니 "그넘들 지금도 벌받고 있나?" 하시더니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칠판에다 그날 수업 준비를 하시는 것이었지요.
세번째 기억은 졸업을 얼마두지 않았을 때인데 그날도 Home Room시간 이었답니다 졸업도 얼마 남지않아 다른반 선생님들은 대부분 교무실에 계시고 학생들끼리 쑥덕거리고 놀다시피 했는데 우리반에서는 그날도 선생님께서 학급에 오셔서 참관을 하셨답니다.
그날 우리 졸업기념 문집을 발간하면 어떻겠느냐는 발의는 실장 이었던 김진복형이 하고 의논끝에 편집위원을 선발하고 문집을 내기로 가결이 되었지요 그날 우리가 토의를 하고 있는동안 선생님께서는 무슨 책이었던지는 모르겠으나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서 책을 읽으시고 계셨던걸 기억합니다 우리반은 별관 아랫층 가운데 출입구가 있는 끝방 이었는데 8반과 9반옆에 온실이 있었지요
만약 선생님께서 우리끼리 그냥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면 과연 우리끼리도 그런 의사진행을 하고 그런 결의(문집발간)를 했을지 의문입니다. 감히 저의 소견으로는 어림도 없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네요.
이제 돌이켜 회고컨데 우리 동기생들 아홉 학급중에 졸업기념 문집을 발간한 학급은 우리반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송 발간을 축하함" 이라고 선생님께서 쓰신 축하의 말씀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냥 건성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진정 우리에게 일러 보내고 싶어 하신게 보인답니다
아무것도 아닌것 같이 보이지만 이제 세월이 흐르고 보니 얼마나 중요하고 요긴한 것이었던지 알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십대 중반에 외국으로 나와서 오늘날까지 외국에서 살고있기 때문에 한국의 사정은 전혀 모르고 살고있으며 선생님께서는 자제분들도 잘 키우신걸로 들어서 압니다만(웃기는 것은 한국의 한 인터넷카페에서 경고 49회 출신의 후배님 에게 海旺,海昉동문얘길들어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우리동기생들도 누구 못지않게 사회의 棟樑들로서 일하고 있는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란걸 알겠습니다
본인은 不德하여 졸업 이후에 한번도 선생님을 찿아 뵙지도 못하고 이제서야 선생님이 오래전에 소천 하셨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恩惠에 憾泣하옵고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빌면서 졸필을 마칠까 합니다
2003년 9월 22일 독일 Bonn에서 臥雲 金景郁
에필로그: 지금 또 생각이 하나 떠 오릅니다 선생님 께서는 회의 진행법을 늘상 강조해 주셨는데 홈룸 시간에는 질서없이 아무나 중구난방으로 얘기하지 말고 회의진행자가 회의 주제를 하고(교실에서는 실장) 발언자는 거수로 발언권을 얻어 發議를 하고 그에 同議 하는 사람은 동의를 한다고 하신것, 그때 어떤 학우가 나도 또 동의를 하려면 어찌 합니까? 하는 질문에 그때는 재청을 하고 토론을 거쳐 표결을 한다 하셔서 우리들이 홈룸 시간만 되면 재청이요 나도 재청이요 하고 시끌벅적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즈음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그걸 보고 듣고 배웠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아니 또 하나 이길우 선생님처럼 나도 자꾸 자꾸 생각납니다 중국어는 四聲인데 平聲(평성) 上聲(상성) 去聲(거성) 入聲(입성)이라고 가르쳐 주신적도 있었답니다 그리고 여담 이지만 이제 우리 九松友 들은 은사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수있는 <대나무 그 푸른 향기?>라 이름한 은사님 추모문집도 있는데 그곳에는 師母님이 어떤 분이셨던가 알수있는 글이 있습니다 감히 외람되지만 저의 어머님 이야기를 그대로 쓰신것 같아 가슴뭉클 했었답니다 말년에 뇌졸중으로 고생하신것 까지도... 누구는 어디사람인데 집안은 어떻고... 우리 형제가 모두 어머니를 닮아 머리가 나쁘진 않답니다 우리동기 장진영이가 정해창선배님의 처남이라는 것도 또 정해창선배님이 정윤진 은사님의 아드님 이라는것도 나는 우리 사랑방에서 알았답니다 사실 장진영이는 나랑 같은반에 있은적이 없고 동기생이라지만 잘 모르는 사이였지만 우리 어머님 덕분이라할지 내 이모부와 처남매부지간인 장택상씨 집안을 줄줄이 꿰고있어서(길상,직상) 낯설지가 않게 느껴졌지요 그래서 사랑방에서 진영이는 자형한테 말씀드려 선생님문집이라도... 아무튼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진영학우가 자형께 말씀드려 시도가 되었는지 우연이었던지 여하간에 추모문집이 있어 제자들인 우리들이나 또 후손들이 은사님을 자랑스럽게 기억할수 있다는게... 저의 이 拙文 이외에도 서정돈 총장, 여경우 교수, 강수균 교수, 김태달 교장, 김교국 사장, 김대환 법원장(이상 無順 ) 우리학급 친구들의 추모글이 올라 있답니다 대구나 서울이나 적어도 우리동기들 사랑방에서 만 이라도 유고집을 비치하여 벗들이 읽을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책이 사랑방에 있어서 벗들이 읽어 볼수나 있는지...
그리고 참, 경북중고등학교 총동창회원 명부에(5년마다 새로 발간된다고 알고있음) 지난 시절 교직원들 성함이 올라 있던데, 심지어 일정시대 일본선생들 까지도, 정윤진 은사님의 성함이 누락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쳤는지... 누가 좀 알아보시고 동창회 사무실에 연락해 보심이...
첫댓글 그 친구가 간지도 까마득하네
오래전에 계산과 윤병우와 같이 파주에 있는 유택에 가본적이 있는데
다시 한번 찾아가 봐야겠소
하늘나라에 있는 여경우
조금 더 기다리시게 ㅋㅋㅋ
백초형, 2009년 5월에 물어 물어 찿아 갔었 답니다 잔디 잘 자라도록 눈물 몇방울 뿌려주고 왔었지요 독일에서 103sun.net 를 보고 어떤 靈感(영감)이 번개처럼 스쳐 찿아간 중학교 사이트에서 강수균, 여경우 이름이 보이길래 얘기를 걸었더니 모르는척... 넌 그때 횟배앓이를 했었나 언제나 얼굴이 노랗고 뒷전에서 그랬나고 했더니 아 옛날 class mate가 맞구나 내가 구송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너 이름이 보이네... 했었지요 소래포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먼저 간 친구 덕분에 임진각도 구경했으니... 그리고 백초형 아호기란 원평재형의 글이 보구싶어 찿아도 안 보이네요 내가 우리사랑방에 옮겨다 놓은적이 있었는데...
엄동설한에...수성못을 한바퀴 휘돌아 나오는 기분이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