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사대 물리교육과, KAIST 물리학과(MS, PhD)
Wisconsin 대학 과학사학과(MA), Wheaton 대학 신학과(MA)
Chicago 대학에서 한국과학재단 Post-doc
경북대 사대 물리과 교수로 14년간 재직
1997년 말부터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원장 역임
캐나다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그 동안 기독교 대학이나 신학교에는 기독교 세계관 관련 단기 프로그램이나 한, 두 개 정도의 강좌들은 많이 개설되고 있었지만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정규 대학원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은 VIEW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VIEW의 기초 신학강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강의들은 새롭게 개발한 것들입니다. 이처럼 개척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물어야 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전례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비단 저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이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닐 때도 있지만, 그래서 불순종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과 관련된 신앙 서적들이 시중 서점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책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개인의 기질도 다르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사안도 다 다릅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인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가 VIEW 사역을 개척하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절대로 어떤 기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주문과 같은 공식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오, 자기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느라고 고민하며 방황하는 것을 가학적(加虐的)으로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요한복음 7장 17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대천덕 신부님이 늘 애용하시던 이 말씀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기초가 됩니다.
아래에서는 이 말씀을 기초로 VIEW를 시작하면서 제가 경험한 것들을 통해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992년, 처음으로 해외에서 기독교학교를 시작해보려는 비전을 가진 이래 지난 십수 년간 하나님께서 이 생각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특히 VIEW를 통해 그 비전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나누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얘기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나아가려고 노력한 자취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인해 고통 가운데 지난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지나면서 저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순종하든지, 억지로 순종하든지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 꿈의 시작
1981년에 시작된 기독학술교육동역회(DEW)(당시에는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를 중심으로 저는 훌륭한 기독교대학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대학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2년을 지나고 돌아온 직후인 1992년 12월, DEW 실행위원회에서 한국보다 대학을 만들기 쉬운 해외에서 기독교대학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내놨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 대해서는 모든 실행위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실행위원들이 모두 찬성했지만 그 때 지나는 길에 잠깐 옵서버로 참가하고 계셨던 어떤 목사님이 우리들이 해외의 현실을 잘 몰라서 그렇지 해외에서 기독교대학을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고 찬물을 끼얹는 통에 모두들 유보적인 자세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 분은 미국에 30여년 정도 계셨던 분이고, 국제적으로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이라 뭘 모르고 그러신다고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제안자로서 다소 섭섭함이 있었지만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 목사님을 그 시간에 그 곳에 보내신 것도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 속에 해외에서 학교를 만들어보려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95년 5월, KAIST에서 열린 실행위원회에서 좀 더 실현 가능한 안을 제출했습니다. 독자적인 대학을 하기보다, 또한 여러 가지 많은 자원이 필요한 대학을 하기보다 적절한 파트너 대학을 정하고 그 학교 내에 세계관대학원 학과를 만들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해외에서의 세계관 대학원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제안서를 준비하면서 저는 어디가 최적의 장소일까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최적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조건들을 몇 개 정리해 봤습니다: ① 우선 영어권이어야 한다; ② 세계관 대학원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인력이나 다른 자원들을 동원하기에 용이한 곳이어야 한다; ③ 실제로 세계관 대학원을 개설할 수 있는 좋은 기독교대학이나 신학교 등이 있어야 한다; ④ 국제적인 수준의 큰 대학교들이 있어서 일반적인 학술 자료들을 찾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⑤ 한국인들에게 출입국이 용이한 나라여야 한다; ⑥ 한국에서 직항하는 항공편이 자주 있는 곳이어야 한다; ⑦ 학생들이 생활하는 데 지나치게 물가가 비싸지 않아야 한다; ⑧ 한인 교민 사회가 어느 정도 형성된 곳이어야 한다; ⑨ 그리고 기왕이면 기후도 좋고 경치도 좋아서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곳이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이 어딜까 라고 생각해 봤지만 역시 가장 많이 생각해 본 것은 역시 미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한인들이 많이 사는 LA,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DC) 등을 생각해 봤지만 제가 공부하면서 몇 해를 지낸 시카고 인근의 중서부 지역이 첫 번째 후보지였습니다. 하지만 시카고 지역도 위 조건들 중에서 3-4개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안서를 실행위원회에 제출하였고 세계관 대학원을 만들 수 있는 최적지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한 동안 논의를 하던 중 실행위원인 이윤식 목사님이 처음으로 세계관 대학원 후보지 조건이 그러하다면 밴쿠버가 어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수년 동안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단과 청소년 훈련 프로그램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비교적 밴쿠버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밴쿠버가 캐나다에 있다는 것만 알았지 캐나다 서부에 있는지, 동부에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사실 영어권 국가에 만들자는 얘기를 하면서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도 생각해 봤지만 정작 캐나다는 후보에서 거론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의 제안으로 밴쿠버에 대한 조사를 좀 더 하기로 하고 일단 모든 실행위원들이 세계관 대학원을 해외에 만든다는 것에는 만장일치로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북미주의 주요 도시들에는 대체로 아는 사람들이 한 두 명 정도는 있는데 이상하게 밴쿠버에는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리 없이 밴쿠버가 있는 British Columbia 주 관광청에 편지를 해서 우리들의 프로젝트를 간단히 설명하고 밴쿠버와 BC주에 대한 정보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몇 주 뒤, BC주 정부로부터 보내온 한 뭉치의 자료들과 더불어 밴쿠버에 대한 여러 가지를 조사하면 할수록 저는 점점 더 이곳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곳일지 모른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체적으로 어느 학교와 더불어 일을 할 것인지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리전트 칼리지(Regent College)를 접촉했고, 다음에는 밴쿠버신학원(Vancouver School of Theology)을 접촉했습니다. 그러나 1995년 8월, 캐나다에 가서 두 학교의 총장을 만난 후 전자는 다른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 없었고, 후자는 신학적으로 우리와 맞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 밴쿠버 현지에서 소개받은 학교가 바로 Trinity Western University(TWU)였습니다.
하지만 TWU의 누구를 접촉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평생교육원장인 Linda Long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자세히 설명하고 나니 Linda는 곧 이것이 평생교육원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대원이나 대학원에서 해야 할 일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당시 TWU에는 대학원이 없었기 때문에 몇 개 교단이 컨소시엄을 이루어 만든 TWU의 신대원 ACTS를 책임지고 있는 Larry Perkins 박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 때부터 Perkins 박사와 세계관 대학원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Perkins 박사는 ACTS의 학장이면서 동시에 ACTS의 컨소시엄 멤버인 Northwestern Baptist Seminary의 총장이기도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Perkins 박사는 자신이 속한 NBS의 일로 인해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강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과 한국 교회에 대한 이해가 깊었습니다. 북미주에서 새로운 학위과정을 만들기 위한 제안서를 영어로 작성하는 것이나 일을 진행시키는 관행에 익숙하지 않은 저로서는 천사를 만난 듯 했습니다. 그 때부터 시작해서 근 1년 반에 걸쳐 이메일을 통해 ACTS 내에 세계관대학원 프로그램 개설을 위한 작업을 했습니다.
● 이주와 고민
처음 해외에서의 세계관 대학원 프로젝트를 제안할 때는 당연히 저 자신은 국내 대학에 그대로 근무하면서 여름, 겨울 방학 때만 현지에 가서 강의와 프로그램 진행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잘 안 되면 그만 두고 국내로 철수하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위험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Perkins 박사와 세계관 대학원에 대한 실제적인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저는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관 대학원 프로그램의 내용으로 미루어봐서는 제가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희생과 수고가 따르는 일이라는 것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저히 이 책임자가 학기 중에는 국내 대학에 재직하면서 방학 중에만 나가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부터 어쩌면 제가 대학을 사직하고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스러운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이미 저는 마흔이 되었고, 아이들이 셋이나 있었습니다. 국립대학 대학에 온 지도 10년이 지나서 중참이 되었고,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조촐하게 실험실도 갖추어져서 어느 정도 연구할 수 있는 상태도 되었습니다. 지도하고 있는 석, 박사 과정의 대학원 학생들만도 십수 명에 이르러 학과에서 가장 많은 대학원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흔도 안 되어 정교수로 승진하여 정년보장도 받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대학을 사직한다는 것을 저는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기초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만일의 경우 일이 잘 못 되었을 때는 먹고 살 다른 방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 일은 결국 다른 누구에게 총대를 메라고 떠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님이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선뜻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많은 고민을 하다가 필자는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으면 그 분이 인도하여 주실 거라는 생각으로 1996년 2월 7일, 캐나다 대사관에 독립이민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물론 아내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직접 캐나다 대사관에 가서 이민 신청용지를 받아서 직접 작성하고 접수시켰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민회사나 중개인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서류를 작성하였고, 필요한 서류들은 직접 번역해서 제출했습니다. 이민회사를 통하지 않은 것은 몇 백만 원에 이르는 대행료를 아끼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 보다도 까다롭다는 독립이민이 안 되면 하나님께서 이 길을 막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학교를 떠나는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또한 신청서를 접수시키는 것만으로는 실제로 학교를 그만 두고 떠나는 것이 아니며 결국 영주권을 받더라도 제가 다시 최종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민신청서를 제출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은 느꼈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사임해야 하는 것과 같은 큰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좀 더 지난 어느 날 캐나다 대사관에서 면접을 하라는 통보가 왔습니다. 저는 가슴이 덜컥했고, 한편에서는 이제 올 것이 오는구나 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면접에서 영사는 우리 부부에게 기본적인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우리 부부는 우리가 캐나다에 가서 하게 될 세계관 대학원 프로젝트를 설명했습니다. 잘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신청서를 접수시킨 지 만 1년 4개월이 되던 1997년 6월 6일, 대사관으로부터 독립이민 허가서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1997년 11월 6일까지 출국하지 않으면 허가를 취소한다고 했습니다. 점점 더 제가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사관으로부터 이민허가가 난 날로부터 출국 데드라인까지의 5개월간은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고통과 번민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내는 그 때를 회상하면서 제가 조석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아침에는 ‘그래 학교를 사직하고 떠나야지’ 하고 말했다가 다시 저녁에는 ‘아무래도 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아’ 라고 말을 바꾸곤 했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생각하면 떠날 수가 없고, 일을 생각하면 떠나지 않을 수 없고... 그 해 여름, 밴쿠버에서 시작한 제 1회 세계관 단기연수를 인도하고 돌아온 후에도 저는 마음을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일은 즐거웠지만 이 일을 위해 제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세계관 연수를 마친 후부터 학교에 사표를 제출하고 출국할 때까지 3개월간은 그 때까지 살아온 제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매일 같이 강의와 회의가 없는 시간에는 금호강변으로 나갔습니다. 학교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금호강변은 고민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거닐며 기도하던 곳이었습니다. 검단동을 가로질러 경부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강변에 차를 세우고 언덕에 올라가 무태 맞은편까지 걷곤 했습니다. 왕복 5-6Km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늦여름, 긴 해가 빨간 낙조를 띠며 서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9월 말까지도 저는 학교를 사직하는 것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결정하게 되면 다시는 같은 곳으로 돌아올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11월 6일까지 떠나려면 적어도 한 달 전에는 사표를 제출해야 하고, 그러려면 학과 교수님들에게 적어도 한 주 이내에 알려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까?
이 때 제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말씀이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마태복음 26장 39절의 예수님과 같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과는 달리 차마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기도를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고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39절 전체의 기도를 자주 했지만 실제로 학교를 떠나야 하는 가능성이 코앞에 닥치자 그 기도가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속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 나는 이 직장 하나 그만두지 못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십자가를 앞에 두신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그러면서 저는 저의 출신 근본을 생각해 봤습니다. 경북 문경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부분의 동네 친구들이 갔던 ‘지게 대학’을 가지 않은 것만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비록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만 최고학부에서 공부도 하고, 박사학위도 받았으며, 지금은 유수한 대학의 교수까지 된 것이 원래 내게는 과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면서 저는 지금까지 저의 삶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때까지 제가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손해 본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한번도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인용하면서 수많은 설교와 강연을 했지만 정작 저는 한번도 십자가다운 십자가를 진 적이 없었습니다. 설교하면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고마워했고, 강연을 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많은 강사료를 주었습니다. 때로는 차로 모셔다 주기도 하니 도대체 수고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수고했다는 말을 많이 했지만 저는 솔직히 수고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때까지 저는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단물만 빨아먹고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 다음 단계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지금까지는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손해 본 것이 없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손해를 봐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고뇌와 결단
우선 모시고 있던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시골에 형님이 계셨지만 우리 집에 계시는 것이 편하다고 하시면서 결혼초기부터 저희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중간에 우리 가족이 두 번 미국에 가서 산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동행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자신의 공부 못하셨음을 한탄하시면서 며느리라도 공부하라고 집에서 아이들을 돌봐주셨습니다. 덕분에 아내는 위튼대학에서 기독교교육과 신학으로 석사를 두개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맏이 범모가 태어날 때부터 십 수 년 동안 저희들과 함께 계시면서 세 아이들과도 너무나 정이 드셨는데 어머니는 우리들을 따라 가실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개척 사역을 위해 떠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형님은 펄쩍 뒤며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를 또 다시 외국에 모시고 가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다음에는 그 때까지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셨던 장인, 장모님께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무척 당황하시는 눈빛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의지가 확고함을 보시고 “꼭 그렇게 떠나야 하는가? 하지만 두 사람이 충분히 생각해서 결정했을 테니...”라고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두 분에게 제가 대학을 사직하고 떠나는 것에 대한 섭섭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 제 마음이 너무 힘들어 두 분의 고통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지만 그 때 두 분의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지금도 죄송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과 교수님들에게도 알렸습니다. 모두가 모인 곳에서 갑자기 말씀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먼저 한 분씩 찾아뵙고, 그 간의 경과를 간단히 말씀드리고 학교를 떠나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학과 교수님들은 한편으로는 놀라며 섭섭해 하시면서도 단호한 제 마음을 이해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마음 한 구석에는 학과 교수님들이 극구 만류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는 저는 10월 초순에 10월 31일 부로 대학을 사직하겠다는 사직서를 정식으로 대학 본부에 제출했습니다. 아울러 그 때까지 맡고 있던 보직들은 그만 두고, 강의들은 연말까지 마칠 테니 시간강사 발령을 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정작 사직을 가장 강력하게 만류한 분은 박찬석 총장님이었습니다. 사실 총장님은 개인적으로 가까운 분도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을 두고 사직하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꼭 사직을 하고 그 일을 해야만 하느냐고 몇 번이고 만류 하셨습니다. 쉽게 사직서를 받아주지 않아서 힘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결국 당시 강원대 총장을 하시면서 DEW 이사장을 하시던 문선재 박사님이 시외전화로 근 20여분에 걸쳐 박 총장님께 저의 사직서를 수리해 달라는 부탁을 드린 후에야 비로소 사직서가 수리되었습니다. 교무과장님은 전화로 10월 13일자로 교육부로 사직서를 올려야 하는데 정말 올려도 되겠느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습니다.
그 때 쯤 우리나라는 그 동안 소문으로만 들리던 외환위기가 서서히 가시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매스컴들은 앞을 다투어 우리 경제가 아르헨테나와 같이 무너질 것이라는 우울한 보도를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까지 850원 내외이던 달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그리고 순식간에 900원을 넘어섰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지난 8월, 세계관 연수 강사로 밴쿠버에 왔던 한림대 안동규 교수님이 “양 교수님, 혹 돈이 있으면 무조건 달러를 사 두세요. 지금은 800원대지만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를 생각하면 연말까지는 적어도 1300원은 올라갈 겁니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순간 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내가 뭔가에 씌어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닐까? 아직 교무과에서 사직서를 교육부로 올리지 않았다면 보류하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지나갔습니다. 저절로 전화기에 손이 갔고 교무과장님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마침 과장님은 자리에 계시질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 일은 다른 교무과 직원들에게 부탁할 수 있는 성질의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는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또 다시 전화통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때도 과장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사직서는 교육부로 올라갔고 얼마 후에 “원에 의해 그 직을 면함. 대통령 김영삼” 이라고 적힌 종이가 날아왔습니다.
단지 몇 글자만 적혀 있는 그 증서를 받는 순간 “이젠 나는 교수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제게 인처럼 박혀있던 교수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떨어져나갔습니다. 20여 년 전에 별세하신 아버지께서 어릴 때부터 “너는 교수가 되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래서 어떻게 교수가 되고, 또한 교수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던 시골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간직해왔던 꿈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의 무거움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냉혹하게 흘러갔고, 캐나다 대사관에서 랜딩 시한으로 정해준 11월 6일을 사흘 앞둔 1997년 11월 3일, 저는 가족들과 더불어 비 내리는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동안 밴쿠버에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학과는 달랐지만 KAIST 재료공학과를 다녔던 한 대준 박사가 이미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반년 정도 앞서 DEW 멤버로서 함께 활동하다가 공부하러 오신 박신일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박 목사님이 설교 봉사를 하던 한마음선교교회의 김주영 집사님(지금은 그레이스한인교회 권사)이 미니 밴을 몰고 공항에 마중을 나와 주셨습니다.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밴쿠버 공항에서 밴 택시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호텔로 향하는 서글픔은 덜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짐들은 따로 컨테이너를 임대하여 배로 붙였지만 다섯 명의 가족과 가족들이 가져올 수 있는 커다란 10개의 이민 가방을 싣기 위해 두 대의 미니 밴이 동원되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버나비 지역에 가족들이 기거할 수 있는 침실 세 개의 타운 하우스를 임대하여 곧 바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곧 이어 윌링돈교회 구자형 목사님의 도움으로 중고차도 구입하고 약간의 짐 정리를 마친 후에 저는 곧 바로 경북대 강의들을 마무리하기 위해 급히 한국으로 나왔습니다.
귀국한 후 다시 출국할 때까지는 팔공산 기슭에 집을 짓고 살던 제자 박장호 형제와 문정희 선생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동안 학기말 성적처리를 모두 마치고 도서관에서 빌린 자료들과 학과 물품들을 하나씩 반납하면서 저는 학교를 떠날 준비를 마무리했습니다. 14년간 손 떼 묻은 책상과 컴퓨터, 30대의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만들었던 실험 장비 하나 하나를 어루만지며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했습니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 분명한 학술잡지들은 버렸고, 별로 필요치 않을 듯한 책들은 남들에게 주었습니다. 지도하던 3명의 박사과정 학생들과 교육대학원 학생들을 포함하여 12명의 석사과정 학생들은 비슷한 분야를 연구하시는 다른 교수님들께 지도를 받도록 주선했습니다.
성적 처리를 마치고 모든 짐들을 정리하여 학교를 떠나기 위해 마지막 연구실을 떠나기 전에 혹시나 싶어서 학교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체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함께 세계관대학원 프로그램 제안서를 준비해 오던 ACTS의 Perkins 박사로부터 이메일이 온 것이 눈에 띠었습니다. 저는 다소 불길한 마음으로 얼른 메일을 열어보았습니다. 내용인즉 현재 한국의 경제위기가 심각하기 때문에 새로운 학위과정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으니 캐나다에 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Perkins 박사는 제가 이미 한국 대학에서 사직서를 제출하고 독립이민으로 밴쿠버에 랜딩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분은 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제가 잠깐 밴쿠버를 다녀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이 아찔했지만 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밴쿠버에 가서 뵙겠다고 짤막하게 회답하고 컴퓨터를 껐습니다. 정말 떠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다행히 몇 년 간 살던 팔공산 자락의 평광동 집은 같은 대학 공대에 근무하던 친구 송재원 교수가 사주었습니다. 비록 집은 허술한 농가에 불과했지만 살던 동네가 너무나 아름답고 동민들의 인심이 좋아서 몇 번인가 집을 팔지 말고 그대로 둔 채 나갈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5년 이내에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별로 없었습니다. 혹 국내로 들어온다고 해도 다시 경북대에서 근무할 가능성은 전무했기 때문에 이 집으로 다시 들어올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이제는 떠나기 싫어도 떠나야 하고, 팔고 싶지 않아도 집을 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산 지 오래되지 않은 냉장고와 몇몇 가전제품들은 아깝지만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한국 전기가 220볼트인 데 비해 캐나다는 120볼트였기 때문입니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저는 마치 세상을 떠나는 것과 같은 이별의 아쉬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래, 세상을 떠날 때는 이렇게 아쉬움 가운데 떠나겠구나!” 그 때까지 제가 그렇게 애착을 갖고 있는 줄 몰랐던 것들까지도 막상 버리려고 보니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공은 제 손을 떠났고 저는 아직 많은 것들을 갖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듯한 텅 빈 마음을 가지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제가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것을 포기한 것은 마음의 공허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고난과 시련이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이 때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IMF 관리체제로 들어섰고 미국 달러는 2000원 가까이 올라간 상태였습니다. 신문에는 날마다 해외에 나간 유학생들이나 상사주재원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런 암담한 환경 속에서 저는 해외에 한국인들을 위한 전혀 새로운 대학원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떠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저를 파송해 주는 DEW가 든든한 대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도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튼튼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하겠다고 나선 저 역시 해외에서 학생으로서 공부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 이런 개척의 일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영어는 여전히 낯선 외국어였습니다. 게다가 그 동안 함께 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제안서를 만들고 있었던 Perkins 박사조차 현재와 같은 경제 위기 속에서는 이 프로젝트를 계속 밀고 나가기가 어렵다는 의사를 분명히 알려온 터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도 이제는 가던 길을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DEW를 후원하시는 서울 승복교회(김태수 목사님 시무)에서 파송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2월 22일, 마지막으로 연구실 열쇠를 학과에 반납하고 김포에서 밴쿠버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민 가방에 짐을 가득 채워 대구 공항으로 나갔습니다. 조성표, 김중락 교수님이 함께 공항까지 배웅해주었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격려의 말들이 너무 고맙기는 했지만 제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기에는 시국이 어두웠고, 날씨가 너무 춥고 우울했습니다. 저는 그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말을 생각해 봤습니다. 뒤로는 사직(辭職)의 배수진을 쳤고, 앞으로는 IMF의 절망의 늪이 기다리고 있고...
밴쿠버에 당도한 이 후에도 별 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학교에 가서 Perkins 박사와 더불어 그 동안 만들어오던 VIEW 교육과정과 ACTS와의 계약 내용들을 손질하면서 될 지 안 될 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일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한국의 경제 위기를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교민사회에는 달러가 지금은 2000원이지만 5000원이 될 거라거나 심지어 20000원이 될 거라는 루머도 떠돌아다녔습니다. 해외에 나가 있던 주재원들, 유학생들, 선교사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다는 음울한 뉴스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VIEW 프로그램을 개설하려는 TWU 어학원에 재학하고 있던 70여명의 한국학생들 중 54명이 귀국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마음을 우울하게 만드는 데는 밴쿠버의 겨울 날씨도 일조를 했습니다. 밴쿠버는 해양성 기후로 인해 겨울에도 크게 춥지는 않았지만 끝없이 비가 왔습니다. 어쩌다가 한번 비가 오지 않을 때도 날씨는 잔뜩 찌푸린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밴쿠버는 만주보다 위도가 높은 북위 49.5도의 고위도 지방이라 겨울이 되면 낮은 매우 짧고 밤이 무척 길었습니다. 할 일은 없고 밤은 길고 하니 시차 적응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눈을 뜨도 깜깜하고 감아도 깜깜한 기가 막힌 상태가 끝없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데 뭔가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계속 몰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컨테이너로 보낸 짐들이 도착했습니다. 많은 전공서적들과 논문집 등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180여개의 책 상자와 100여개의 크고 작은 살림 가재도구를 담은 상자들이 임대한 좁은 타운 하우스를 꽉 채웠습니다. 결혼한 지 16년이 지났고, 그 동안 어머니를 포함하여 여섯 식구들이 살던 살림이라 만만하지가 않았습니다. 거실과 1층 방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짐이 꽉 차 있었지만 언제 또 다시 이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풀어서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필요한 책들을 찾아 공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좀 들기는 했지만 어느 구석, 어느 상자에 들어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침 저녁으로 아이들의 등하교를 지켜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엄마로서 늘 하던 일이었지만 저는 아이들이 학교에 잘 다녀오겠다고 등교 인사하는 것은 늘 듣던 일이었지만 오후 3시쯤 되어 학교에서 돌아왔다는 하교 인사를 듣는 것은 익숙하질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며 타운 하우스 2층과 1층을 왔다가 갔다 하다가 아이들의 등하교하는 것을 보는 것은 일중독에 걸려서 늘 늦게 귀가하는 것이 몸에 밴 전형적인 한국인 아버지에게는 차라리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안식년이나 휴가를 와서 쉬고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가벼울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아내는 몇 번인가 남의 속도 모르고 “당신이 그렇게 조용히 글 쓰는 시간을 갖고 싶어했는데 잘 되었네요”라는 말을 태연스럽게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때야 비로소 글을 쓰는 것도, 공부에 전념하는 것도 소망이 없으면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가 잘 이해를 못 하니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별로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것이 보기에 안타까웠든지 당시 리전트 칼리지에서 안식년을 보내던 방 목사님은 “양 교수, 빨리 MDiv 하고 목회나 하지”라고 권하기도 하고, 인근 감리교회 임 장로님도 보기에 딱했던지 “양 교수님, 공부 좀 해서 캐나다 공무원 시험이나 쳐 보시지요”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말은 고맙지만 문제는 제가 이곳에 취직하러 온 것이 아니라 DEW에서 파송한 선교사로 왔다는 점이었습니다. 교회 개척은 아니지만 VIEW를 만들라는 분명한 미션을 받고 파송예배와 파송패까지 받고 나온 사람이 다른 무슨 일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요즘은 바빠서 손을 잘 대지 못하지만 클라리넷을 배운 것도 이 때의 일입니다. 뭔가 답답한 마음을 달래줄 악기가 필요했는데 적당한 것이 없었습니다. 피아노와 기타는 마음을 달래줄 만큼 실력이 없었을 뿐더러 야외에서 조용히 독주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었습니다. 소리는 오보에(Oboe)가 구성지고 좋았었지만 오보에를 곧 잘 부는 옆집 정 목사님에 의하면 값이 너무 비싸고 복황악기(리드가 아래 위로 두개가 달린)여서 배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고른 것이 오래 전부터 관심이 있었고 값도 비교적 저렴한 클라리넷이었습니다. 이것도 잘 연주하려면 한이 없겠지만 그래도 몇 달 동안 레슨을 받았더니 혼자 불만 했습니다. 그래서 울적할 때마다 집에서 가까운 프레이저강 반스톤섬의 강가에 나가 숲 속에서 혼자 앉아 불었습니다.
그 때는 교회에 새벽기도 가는 것 외에는 정규적으로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우리 가족이 나가던 윌링돈교회는 캐나다인 교회였지만 한인들이 서너 명 모여서 날마다 새벽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분들의 사정은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모두 이민 온 지 얼마 안 된 분들이었고, IMF의 태풍이 교민 경제를 수렁으로 몰아넣은 터라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말과 문화가 다른 나라에 이민 온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교민사회를 비비면서 자리를 잡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내 경제위기로 인해 교민사회에 극한의 한파가 닥치자 이민자들은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날마다 눈물의 새벽기도를 하게 했습니다.
● 밝아오는 동녘을 바라보며
하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1998년 1/4 분기를 지나면서 올라갔던 달러는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별로 오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틈나는 대로 학교에 가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이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근거도 없는 얘기를 하고 다녔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1-2년 후에는 한국이 이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어설픈 예상도 늘어놨습니다. ACTS 채플에서 설교도 하고, 때로는 세계관 대학원 프로그램의 가능성에 회의적인 교수님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서툰 영어로 설득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98년 11월 3일, 그러니까 우리 가족이 밴쿠버에 도착한지 만 1년이 되던 날, ACTS가 있는 TWU 내의 Fosmark Centre의 Conference Room에서 Saffold 부총장, Perkins 학장님, 구자형 목사님, 유경상 형제, 저의 부부가 참가한 가운데 최종적으로 ACTS에서 VIEW 세계관대학원 문학석사(MACS) 과정을 개설하는 두툼한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우리는 남북회담 하듯이 테이블을 마주 높고 앉아 그 동안 수고한 것에 대하여 사의를 표하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프로그램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대한다고 얘기한 후 곧 바로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서명 자체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유경상 형제가 옆에서 비디오를 촬영하는 가운데 먼저 제가 서명하고 이어서 Saffold 부총장이 서명했습니다. 서명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함께 Fosmark Centre 북쪽 문으로 나가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시던 구 목사님도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프로그램에 서명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역만리 북미주에서 시작하는 프로그램에 입학할 한국인 학생들을 단기간에 모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줄 믿고 저는 11월 하순에 한국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3주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겸한 설명회를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지원이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7월부터 강의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5월까지 지원자들이 35명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최종적으로 비자를 받아서 학교에 등록한 학생들은 26명이었지만 처음 해외에서 시작하는 프로그램으로서는 경이적인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입학생들의 비자가 늦어지는 통에 취소된 강의도 있었고, 연기된 강의도 있었지만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1999년 여름학기는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차는 고사하고 한국에서 도착하여 이삿짐도 채 풀기 전에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는 학생들을 실어 나르고 이들이 집을 구하고 자동차를 마련하는 것 등을 도와주느라 우리 부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졸음을 참아가면서 빡빡한 학사 일정에 맞추어 공부하는 학생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무리에 익숙한 의지의 한국인이 아니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허겁지겁 시작된 프로그램이지만 학기가 거듭될수록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미 잘 짜여진 캐나다 교수들의 신학 분야의 강의들과는 달리 한국인 교수들이 담당한 세계관 분야의 강의들은 모두 새로 만든 강의들이었습니다. 세계관 강의들은 이전에 어느 누구도 대학원 수준의 세계관 강의를 해본 적이 없는 터라 교수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학기가 거듭되면서 세계관 강의들도 놀랍게 안정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엉성하게 강의계획서를 쓰고, 또한 강의계획서대로 강의를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 교수들은 ACTS의 학사위원회로부터 거듭거듭 강의계획서 수정 지시를 받았습니다. 북미주의 표준적인 대학원 강의 수준을 맞추라는 요구였습니다. 학사위원회에서는 적어도 3학점 강의 같으면 1200-1500면의 읽기와 20면 내외의 연구논문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40면에 이르는 글쓰기 숙제를 부과하도록 엄격히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숙제들 중에는 절대로 단순한 요약 등을 제출하라고 요구하지 말고 학생들로 하여금 창의적이고 비판적 사고를 함양할 수 있는 숙제를 부과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학생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가장 큰 월급이요 보람이었습니다. 또한 강의가 거듭되면서 제가 강의하는 "세계관 기초"(WVS500), “과학사와 과학철학”(SCS502), “창조론”(SCS503) 등의 강의들도 안정이 되었습니다. 강의가 안정이 되었다는 말은 가르쳐야 할 내용(강의노트와 비디오 자료 등)이 확정되었고, 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분명한 내용과 방향, 숙제, 평가방법 등이 개발되었다는 말입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세계관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관을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들이 만들어져 갔습니다. 물론 다른 교수들의 강의들도 안정이 되어갔습니다. 강의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모습은 학생들의 변화가 눈에 띤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들이 변화되는 모습은 1차적으로 자신들이 제출하는 논문과 발표들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제 VIEW의 첫 강의를 시작한지 13번째의 학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직 많지는 않지만 최근 2년간 2회에 걸쳐 17여명의 졸업생들이 배출되었으며, 다가오는 2004년 4월 17일 졸업식에는 7명의 졸업생이 더 배출될 예정입니다. VIEW에서 모든 과정을 마친 것은 아니지만 중간에 사역지로부터 초빙을 받아 간 사람들도 여럿 있습니다. 이곳 프로그램을 완전히 마친 졸업생들이나 이곳에서 잠시 훈련을 받은 후 중간에 임지로 떠난 사람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사역하는 소식을 듣는 것은 VIEW 책임자가 누리는 축복이었습니다.
지난 2003년 9-10월은 VIEW를 위해 파송된 후 처음으로 연구년이라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제대로 원고 정리를 하지 못하던 창조론 글을 정리하기 위해 이전에 대학원 학생으로 공부한 적이 있던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에 가서 혼자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온 것입니다. 비록 두 달도 채 되지 못하는 기간이었지만, 그것도 가족들과 더불어 갈 수 있는 형편도 되지 못했지만 저는 연구년이란 이름으로 연구실을 비워두고 떠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물론 아직도 날마다 이런 저런 도전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VIEW도 초기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재학생들도 60여명에 이르고, 지원자들도 꾸준히 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관 공부와 훈련이 목회와 선교는 물론 의사나 교사 등 전문직에 있는 분들에게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다양한 계층의 지원자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계관 훈련이 행복한 신자, 튼튼한 교회,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훈련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캐나다 정부가 종합대학의 학위과정 학생들이 아니면 자녀들의 학비나 그 외 혜택들을 축소하기 시작하면서 VIEW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덧 기독교대학에 대한 꿈을 가진지 23년이 지났고, VIEW 사역에 풀타임으로 뛰어든 지도 7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40대 초반에 시작한 VIEW 사역이지만 이제는 저도 50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좋았던 시력도 노안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작은 요미가나를 읽기가 곤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뽑아주곤 하던 흰머리도 이제는 뽑기가 곤란할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20대에도 30대 같았고, 40대에도 30대 같았던 아내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중학교 졸업반으로 이곳에 왔던 맏이가 벌써 대학 졸업을 준비하고 있고, 태평양을 건널 때 우리도 알지 못하게 뱃속에 들어있던 아이는 벌써 유치원을 다니고 있으니 꽤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제가 조언과 도움을 요청하는 일보다 요청받는 일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의 가족이 한국을 떠날 때 시골 형님 집으로 가셨던 어머니는 그 후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셨습니다. 정말 건강하셨고 청년과 같은 활동량과 식욕을 가지신 분이었는데 저희들이 떠난 것이 큰 충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형님집에서는 계단에서 넘어지는 등 이런 저런 사고도 있었고, 나중에는 약간의 노인성 치매 증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 VIEW의 첫 강의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의 기도의 용사이셨던 어머니는 우리 곁을 훌쩍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 제가 고집을 부리면서라도 어머니를 모시고 밴쿠버에 왔더라면 몇 년이나마 더 건강하게 저희들과 함께 지나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죄스러움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인생은 흘러가는 것. 1, 2년 더 살고, 덜 살고가 뭐 그리 대수일까라고 자위하면서 아쉬움을 달랩니다.
요즘은 저도 가끔 은퇴에 대한 생각을 해 봅니다. 누가 이 VIEW 사역을 다음 세대로 이어갈 것인가를 두고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VIEW 사역을 중단 없이 이어가며,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일에 있어서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들을 보내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혹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은퇴하기까지 VIEW국제센터(VGC)와 더불어 세계관 DMin 과정이 만들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마치고 기쁨으로 은퇴할 날을 상상해 봅니다. VIEW의 끝없는 행정적인 부담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읽고 싶은 책, 쓰고 싶은 글 속에 파묻혀 지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기를 기대합니다.
한국의 대학을 떠난 이후 세상의 직장, 혹은 직업, 그리고 돈이라는 것들을 상대화 시킬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것은 생각지 않은 소득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듯이 애지중지하는 것들도 세상에 사는 동안 잠깐 필요한 것일 뿐,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창조론이나 세계관 공부를 하는 데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내용의 성격상 날카로운 대립을 할 수 있는 주제들이지만 그것들도 이전에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항상 그렇게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정말 영원히 귀한 것들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근래에 와서는 주변에 제가 계속 캐나다에 살 거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전에는 주일 오후에 나가서 돕고 있는 일본인교회 요시유키 목사님도 동일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모릅니다. 제가 앞으로 어디로 갈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라는 동일한 대답을 하곤 합니다. 이것은 의례적인 대답이 아니라 저의 진심입니다. VIEW 사역을 위해 대학과 한국을 떠난 이후 저는 어떤 곳에 특별히 살고 싶다고 끌리는 곳이 없어졌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캐나다고 그럭저럭 살만하고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역시 살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봄 방한 때 중국과 베트남을 다녀온 이후에는 한국이나 캐나다보다 못한 연길이나 호치민에 가야할 일이 있다면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살만하겠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한다면 이 세상 어디에도 완전히 만족할 만한 곳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정말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완전히 만족스런 곳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에도, 미국에도, 유럽에도, 캐나다에도 살아봤지만 어디나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비슷한 문제들이 있고, 동시에 비슷한 기쁨들이 있습니다. 달력 그림에 나오는 천국 같은 동네에 가서 살아도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파란 잔디 위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며 산다면 최고로 행복할 것 같지만 날마다 할 일이 없어서 골프장에만 다니는 것은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 찬 건축 공사판에 가서 땀 흘리며 일하는 것보다도 더 힘듭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살아본 결과 저는 정말 더 이상 이사 가고 싶지 않은 곳은 오직 하늘나라뿐일 거라는 원론적인 대답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VIEW에 대한 비전의 잉태로부터 지금까지 몇 년간의 VIEW 사역을 회고하면서 저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흔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으로 말씀과 내적 확신, 주변 환경, 영적 지도자들과의 상담, 순적하게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중요한 방법은 되지만 절대적인 방법은 되지 못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공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간구하는 바들을 기계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순종하겠다고 하는 마음의 자세가 있을 때 혹시 우리가 잘못 분별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곳으로 가는 경우에도 곧장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의 사역을 돌이켜 보면서 IMF의 한파도 하나님은 그것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계기로 삼으셨고, 의심과 회의에 밀려 갈대와 같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구름이 끼어도 태양은 빛나듯이 사람의 눈에 절망인 듯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중단 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전후좌우에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고,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듯이 느껴질 때도 하나님은 위로 하늘의 문을 열어놓고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은근히 자기가 잘해서, 혹은 열심히 일해서 그렇게 된 줄 알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면 어느 한 걸음이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비하심이 없었던 적이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수년간 VIEW 사역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 약속하신 바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040331(127.0매)
경북대 교수로 남을 것인지 사직하고 캐나다로 갈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이 참 인상깊습니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 그 불확실함 앞에서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는 거 느낍니다. 결단의 순간에 최선의 결정을 하기까지 고민되고 마음 흔들리는 일이 가장 큰 어려움일 것입니다.
첫댓글 구름이 끼어도 태양은 빛나듯이 사람의 눈에 절망인 듯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중단 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경북대 교수로 남을 것인지 사직하고 캐나다로 갈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이 참 인상깊습니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 그 불확실함 앞에서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는 거 느낍니다. 결단의 순간에 최선의 결정을 하기까지 고민되고 마음 흔들리는 일이 가장 큰 어려움일 것입니다.
믿음아.....싸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