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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21일 금요일 말씀묵상 ♣
성경:누가복음15:25-32(신122P)
제목: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할렐루야! 오늘도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시고 성령님께서 께닫게 하시는대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여러분! 한 죄인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그 돌아오는 길에는 큰 장애물 하나가 있습니다.
그 장애물이 뭔지 아십니까? 죄의식이었을 것입니다.
죄의식, 정죄 의식, 죄책감. 내가 이 지경으로 인생을 살아놓고 이제 와서 무슨 얼굴로 무슨 면목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자기 마음속에서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정죄감, 죄책의식. 이것이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사건을 가만히 보시면 이 아버지는 미리 다 용서해놓고 기다리셨습니다. 용서는 이미 해놓고 기다리셨습니다.
죄책감이 없도록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2000년 전에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 하나님이 왜 예수님 보내주셨는 줄 아십니까?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를 그분이 다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할 저주, 우리가 받아야할 채찍 대신 맞으시고, 다 형벌을 받으시고, 네, 죄 문제는 다 해결되었어, 돌아오기만 해, 길을 닦아 놓으셨어요.
이제는 돌아가 보기만 하라! 그렇습니다. 여기 성경에 나타난, 이 사건에 나타난 우리 아버지 하나님, 그는 이미 용서해놓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너 돌아오면 용서해, 이것이 아닙니다. 용서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용서해 놓으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십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죄인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더 깊게 묵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눅15:25-32)
신문을 보면 사람을 찾는 광고를 자주 봅니다. 기업에서는 유능한 사원을 찾습니다. 학교에서는 실력을 갖춘 교수를 찾습니다. 때로는 실종된 가족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별히 자녀를 잃은 부모는 생업을 포기하고, 전국을 돌며 찾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를 따라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범죄한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최초의 질문입니다. 죄를 짓고 두렵고 떨림으로 숨어있는 인간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이겠다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아담을 심판하시려고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은혜의 가죽 옷을 입혀 주십니다.
창세기 4장에도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계속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 가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묻습니다.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을 처벌하시려고 죽은 아벨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의 표를 주셔서 가인을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범죄한 인간들을 찾아오십니다. 벌주시려고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셔서 하나님과의 거룩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함입니다.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애타는 몸부림의 절정은 바로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 것으로는 부족하시기에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높고 높은 보좌에서 가장 낮고 낮은 이 땅으로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왔다(눅19:10)”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부르십니다.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수가성의 여인도 찾아가십니다.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이 방황하는 무리들을 찾아가십니다.
당시 사람들이 멸시했던 세리와 창기와 고아와 홀로 사는 여인들을 찾아가십니다. 마침내 자신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도망쳤던 제자들까지도 다시 찾아가십니다. 후에는 사울과 같이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던 사울까지 찾아 가셔서 그를 새롭게 하십니다.
항상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사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사람 찾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너희는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6)”고 명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말씀하십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명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여 세상에 나가 죄에 신음하는 영혼들을 찾아오라는 명령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봅니다.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유명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신구약 성경 가운데 단 한 장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복음 15장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5장만 있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동전)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세 개의 비유 모두 잃어버렸다가 찾은 기쁨을 표현합니다. 중요한 것은 잃은 양이나, 잃어버린 동전이나, 집을 나갔다 돌아온 아들 어떤 경우도 배신자나 나쁜 아들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바라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왜 오늘 우리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에게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1. 용서하시고 기다리는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세상에 나가 허랑방탕하다 모든 것을 탕진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미움이 앞섭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다릅니다.
아들이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간 순간부터 아버지의 마음은 온통 아들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밥을 먹어도 밥상에 아들의 얼굴이 어른거립니다.
길거리에 나가 젊은이들만 보면 아들 같아서 쫓아가 봅니다.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아들 생각에 먹을 수가 없습니다.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내 아들은 오늘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불면의 밤을 지새웁니다. 아버지는 밤이 새도록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불도 끄지 않습니다. 행여나 아들이 찾아 왔는데 문이 잠겨 있으면 마음이 상할까봐 활짝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대문 밖을 바라보며 아들을 기다립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어야지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아들이 나간 순간부터 용서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다 보면 자식들이 어버이의 속을 썩입니다. 그것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면 부모는 결심을 합니다.
“내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너를 보지 않겠다”그러나 이런 말은 자식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큰 사랑이 이미 부모의 가슴 속에는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랑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엔 한계도 끝도 제한도 없습니다.
내 허물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고, 내 실수보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 크십니다. 내가 행한 죄악보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은 훨씬 더 큽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끼로 사람을 쳐죽인 고재봉도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세상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습니다.
집을 나갔던 아들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난 후에 집으로 돌아갈 염치가 없습니다.
다같이 18-19절을 읽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왜 집을 나갔느냐? 그 많은 돈 어디다 썼느냐? 언제까지 그 돈 갚을 거냐? 묻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서 돌아온 그 자체가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내 아들이라고 감격합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품을 떠나 내 방법대로, 내 뜻대로 살다가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주저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 나오십시오.
사랑의 아버지는 이미 과거의 모든 실수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두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로 돌이키는 순간 달려오셔서 우리의 위치를 회복시키시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잔치 자리로 불러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왜 오늘 우리들이 삶의 아픔을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가지 못할까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체면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고 아버지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될 때 우리는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마음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채울 때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생명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줄 믿습니다.
2.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제2의 탕자가 나옵니다. 바로 큰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러나 형은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잔치소리를 듣고 화가 납니다. 기분이 나빠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뼈 빠지게 아버지를 위해 일했는데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서 잔치를 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들과 즐기면서 탕진한 아들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맏아들의 말이 다 맞습니다. 맞고요! 그런데 틀린 것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생 때문에 잃어버린 재산만 생각했지 살아 돌아온 동생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동생이 재산을 탕진한 문제아로 보입니다.
우리는 맏아들의 시각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고 따지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당연히 맏아들의 논리가 맞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맏아들의 마음은 이기적입니다. 동생을 정죄합니다. 그는 동생의 생명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성경의 관심은 집을 나간 아들이 아닌 집을 지키고 있던 맏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집을 지키고 있는 맏아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맏아들의 태도를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써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헛수고입니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생명을 찾는 믿음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아직 내 안에 맏아들의 태도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마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다가가십시오.
그 안에 사랑이 있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3. 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한 생명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양 백마리 가운데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리면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습니다.
양을 찾은 후에는 잔치를 베풉니다. 한 마리 양을 찾은 기쁨의 잔치를 위해서는 몇 마리 양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산술적인 계산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고 잔치를 베풀면 훨씬 많은 돈이 듭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이런 엉터리 계산을 하실까요?
그것은 한 영혼이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찾아내야 할 가치있는 존재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영화 가운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 보면 작전 수행중 라이언 일병이 포로로 잡힙니다.
그런데 그 한명을 구출하기 위해서 작전에 나섰다가 6명의 다른 미군 군인이 죽습니다. 왜 이런 엉터리 작전을 할까요?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사지에서 떨고 있는 미군은 반드시 구출해 낸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합니다. 따라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인간적인 계산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익을 따질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 그 자체가 소중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사랑하시는지, 예수님은 자기 생명과 우리 자신을 맞바꾸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산 양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달리는 앰블런스와 같은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앰블런스가 앵앵거리며 달려 갈 때에 다른 모든 차가 길을 비켜 줍니다.
교회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이라면 그것도보다 더 우선순위는 없습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면 우리는 만사를 제쳐두고라도 앞장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가슴앓이 사랑입니다.
엔도 슈사꾸의 단편 “바다와 독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후방기지 병원에 로데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군 포로들의 인체를 실험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오장육부 중 얼마를 잘라내면, 즉 허파 얼마를 제거했을 때 얼마 동안 살 수 있는가?
간의 얼마를 남겼을 때 얼마를 살 수 있는가? 하는 잔인한 실험을 매일같이 계속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데는 미쳐버리고 맙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토록 끔찍한 실험을 매일 반복하는 가운데 양심의 고통을 잃어버려가고 거기서 오히려 묘한 쾌감과 재미를 느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절규는 “내 양심의 고통을 돌려 주세요”입니다.
작가는 현대인들의 무관심의 질병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한편 생명의 소중함을 망각한 인간의 잔인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엔도 슈사꾸의 독약 - 즉, 무관심의 독약, 영혼의 소중함을 잃고 살아가는 독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잃고, 자칫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내 곁에서 영혼이 죽어 가는데도 아무런 관심이 없고 내 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역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 이것이 질병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가족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적어도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최고의 섬김은 바로 생명을 찾아 살리는 일입니다. 최고의 사랑은 바로 죽어 가는 영혼을 찾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잃어버린 영혼, 방황하고 있는 영혼을 찾으십시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내가 전도한 한 사람이 지역을 살리고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영국 어느 대학의 채플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목사님이 오셔서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대학의 채플시간에는 의무적으로 가서 앉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지하게 설교를 듣는 학생은 많지 않습니다.
절반은 떠들고 잡담하고 있고 절반을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사 목사님은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몇몇 학생들이 장난을 쳤습니다. 깊이 잠들어 있던 친구를 깨웁니다. “야 너 목사님이 나오래” 이 학생은 자다가 깨어서 얼떨결에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이 스탠리 존스입니다. 그는 전설적인 인도 선교사요 기도의 사람입니다. 졸다가 일어나 친구들의 장난에 의해 앞으로 나갔지만 성령님이 그 마음을 사로잡을 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역사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차게 증거 할 뿐입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하나님 앞에서 정의를 구하는 한 사람이 한 도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이 사회와 민족을 살리는 위대한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임금님이 도공에게 순금 왕관을 하나 만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이것이 순금인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아무리 연구를 해도 순금인지 아닌지 알 수 가 없습니다.
어느 날 너무 머리가 아파서 공중목욕탕에 갔습니다. 마침 아무도 없는 목욕탕에서 물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풍덩! 몸을 던졌습니다. 물이 출렁하고 넘칩니다. 이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물이 흘러넘친 만큼 부피가 되겠구나. 그만큼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이구나!’그래서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 유레카(I found it!)를 외치며 옷 입는 것도 잊어버리고 길거리로 뛰어나갔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 한 드라크마,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을 바라보고 “유레카”를 외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그 영혼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결론}***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1. 용서하시고 기다리는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2.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3. 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오늘도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 영혼을 찾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묵상:누가복음15:25-32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잃은 영혼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잃은 영혼을 찾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거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