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황제의 야심이 불러온 위기
1888년, 현군(賢君)이 될 만한 품성(品性)을 가졌으나 건강(健康)이 나빴던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가 제위(帝位)에 오른 지 99일 만에 요절(殀折)했습니다.
이에 따라 29세에 불과했던 젊은 황태자(皇太子)가 독일 제국(帝國)의 3대 카이저(Kaiser)로 즉위(卽位)합니다.
그렇게 갑자기 황제(皇帝)에 오른 인물(人物)은 똑똑하기는 했으나 성격(性格)이 불안정(不安定)한 보수적 사상(保守的事相)의 소유자(所有者)이며 야심가(野心家)였던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년 1월 27일~1941년 6월 4일)였습니다.
↑1870년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독일을 하나로 뭉치는 데 성공한다. 빌헬름1세가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는 모습. 1885년 Anton von Werner 의 작품 .
중앙에 서 있는 흰색 옷이 비스마르크이고, 왕세자 프리드리히는 아버지 빌헬름 1세 뒤에 서 있다.
↑빌헬름 2세의 즉위식(卽位式)을 기록한 사실화(事實畵)
독일이 최강(最强)의 국가가 되기를 원했던 그에게 광대(廣大)한 식민지(植民地)를 경영(經營) 중인 영국, 프랑스는 부러움이자 질투(嫉妬)의 대상(代償)이었습니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의 국력(國力)이 이들에 결코 뒤지지 않지만 분열(分裂)의 역사(歷史)가 길어서 식민지 개척(植民地開拓)이 늦었을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구상(地區上)에 더 이상 개척(開拓)할 식민지가 없다면 빼앗아서라도 독일의 영향력(影響力)을 확대(擴大)하려 마음먹었습니다.
당연히 충돌(衝突)도 불사(不似)할 생각이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계 분점이 완성된 1900년의 세계 지도. 독일이 식민지를 개척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황제의 이런 구상(構想)은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Fürst von Bismarck-Schönhausen, 1815년 4월 1일~1898년 7월 30일)를 비롯한 개국 공신(開國功臣)들에게 불안(不安)으로 다가왔습니다.
통일(統一)을 위해 오스트리아(Austria), 프랑스(France)와 연이어 전쟁도 벌였지만 제국(帝國)이 성립(成立)한 이후부터는 외교적(外交的)으로 프랑스를 고립(孤立)시켜 안보(安保)를 현 상태(狀態)로 유지(有志)하는 평화적 정책(平和的定策)을 취했습니다.
프랑스가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 1870년 7월 19일~1871년 5월 10일)의 패배(敗北)를 복수(復讐)하려 나서지 못하도록 틀어막으면서 제국의 발전(發展)을 도모(圖謀)했던 것인데,
젊은 황제의 생각은 이와 배치(排置)되었던 것입니다.
↑1905년 탕헤르(Tangier)를 방문한 빌헬름 2세, 모로코(Moroco) 지배(支配)를 노리던 프랑스를 자극해 전쟁 위기까지 갔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 비스마르크가 어렵게 만든 주변 유럽 국가(國家)들과 맺은 우호적 관계(友好的關係)를 변화(變化)시켰습니다.
동맹국(同盟國)이던 러시아(Russia)가 적(敵)으로 바뀌었고 영광스런 고립(孤立)을 자부(自負)한 중립국(中立國)이지만 가까웠던 영국과도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더구나 이들 국가들은 그의 사촌과 삼촌이 군주(君主)인 국가였습니다.
상황(狀況)이 우려(憂慮)스러웠던 비스마르크가 계속 고언(苦言)을 하자 1890년 3월,
카이저는 노신(老臣)을 파면(罷免)하는 것으로 의지(意志)를 확고(確固)하게 표출(表出)했습니다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2세,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벨기에인의 왕 알베르 1세
앞줄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조지 5세 본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조상과 관계를 끓은 영국 왕가
그들이 피 튀기게 전쟁을 벌인 결과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독일은 왕정 폐지(王政廢止)후 망명(亡命), 러시아는 왕실 참살(王室慘殺), 영국 왕실(英國王室)은 그들의 조상(祖上)인 독일과의 절연 선언(絶緣宣言)이었습니다.
아마, 너무 욕심(慾心)을 부린 자업자득(自業自得)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빌헬름 2세(右)와 제국 창건의 주역인 비스마르크
젊은 카이저는 식민지(植民地)를 개척(開拓)하고 유지(有志)하려면 향도(向導)가 되어 줄 강력한 해군(海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정학적 이유(地政學的理由)로 독일은 전통적(傳統的)으로 육군 강국(陸軍强國)이었지만 국토(國土)의 크기에 비해 연안(沿岸)이 작고 이 또한 대부분 내해(內海)에 불과(不過)해서 해군력(海軍力)은 전무(全無)하다 시피 했습니다.
더구나 강력한 해군력을 구축(構築)하려면 막대한 재정(財政)이 투입(投入)되어야 하는데 통일(統一) 전에는 그럴만한 여력(餘力)도 없었습니다.
↑본격적으로 해군력 확장(海軍力擴張)에 나섰던 20세기 초 독일의 방위산업체(防衛産業體)
하지만 제국(帝國)이 성립(成立)된 지 20년이 지나자 본토(本土)의 경제력(經濟力)으로만 따지면 어느덧 독일이 세계 1위에 올라섰을 만큼 국력(國力)이 신장(伸張)했기에 빌헬름 2세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진출(進出)을 뒷받침하기 위한 강력한 해군의 건설(建設)에 착수(着手)했습니다.
1897년, 티르피츠(Großadmiral Alfred Peter Friedrich von Tirpitz, 1849년 3월 19일~1930년 3월 6일)를 해군성 장관(海軍省長官)에 임명(任命)한 후,
이듬해 '함대법(艦隊法, Flottengesetze)'을 입법화(立法化)시켜 그의 의지(意志)를 확고(確固)하게 천명(薦名)했습니다.
↑황제의 신임 하에 독일 해군을 건설한 티르피츠
독일의 우수(優秀)한 생산력(生産力)과 자본(資本)이 군함 건조(軍艦建造)에 투입(投入)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 (統一) 후 경제력(經濟力)이 성장하면서 새로운 시장에 목말라하던 많은 자본가(資本家)들, 영국과 프랑스의 대외 경영(對外經營)을 부러워 하던 군인(軍人) 및 귀족(貴族)들은 황제(皇帝)의 이러한 시도(始睹)에 열광적(熱狂的)인 지지(支持)를 보내었습니다.
당연히 독일의 움직임은 그동안 바다에서 어떠한 경쟁 세력(競爭勢力)의 등장(登場)도 용납(容納)하지 않았던 영국에게 현실적(現實的)인 위협(威脅)으로 다가왔습니다.
↑20세기 초 출동하는 영국의 함대, 전 세계에 산재한 대영제국의 연결로를 지키는 파수꾼이었습니다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地理的利點)을 바탕으로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에 해양 패권(海洋覇權)을 거머쥔 영국은 '1 > 2+3 정책(定策)'을 고수(固守)하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 걸쳐 있는 대영제국(對英帝國)은 기본적(基本的)으로 해양 네트워크에 의해 유지(有支)되므로 영국의 해군력은 2위와 3위 국가의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 많은 수의 군함(軍艦)을 보유(保有)하는 것을 기조(基調)로 잡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독일의 도전(挑戰)에 응전(應戰)하기로 결심(決心)합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