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아이들을 곡하며
허초희(許楚姬)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
스릎고 슬프도다 광릉 땅이여
두 개의 무덤이 마주하고 솟았구나
백양나무에 쓸쓸한 바람 불고
도깨비불은 숲속에 번쩍이네
지전을 살라 너희 혼을 부르고
물을 따라 너희 무덤에 붓는다
너희 형제의 혼은
밤마다 서로 만나 놀고 있겠지
배 속에 아이가 있지만
어찌 자라길 바라리요
하염없이 황대사 노래 부르며
슬픈 피눈물 곳으로 삼킨다.
哭子(곡자)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哀哀廣陵土(애애강릉토)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鬼火明松秋(귀화명송추)
紙錢招汝魄(지전초여백)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縱有服中孩(종유복중해)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어휘풀이]
-玄酒(현주) : 제사 때 술 대신 쓰고 맑은 찬 물
-黃臺詞(황대사) : 당나라 고종의 아들이 여덟 명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 장현태자(章賢太子) 현작(賢作)이 황제를 황대에 비유하고 황후와 계비 사이에 서로 자기가 낳은 아들을 태자에 봉하고자 하는 과정에 줄줄이 죽어 나간 아들들을 비유하여 쓴 시라고 한다.
[역사이야기]
난설헌 허씨(蘭雪軒許氏, 1563년 ~ 1589년 3월 19일)는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1]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허균(許筠)이 그녀의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그녀의 명성이 점차 널리 알려졌다. 사후 남편 김성립이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후,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의 시인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성 시인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2] 1612년에는 취사원창이란 이름으로 미간행 시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당대에는 고부갈등과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의 시들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초당 허엽의 딸로 허봉의 여동생이자 교산 허균의 친누나이며, 허성의 이복 여동생이다. 어의 허준은 그의 11촌 숙부뻘이었다. 손곡 이달(李達)의 문인이다. 강원도 출신.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