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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2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태오 5,1-12ㄴ
참행복: 존재 가치 상승 욕구의 충족
연봉 100억이 넘는 정승제 수학 강사는 “강남 아파트 살면 행복할 거 같아?”라고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절대, 절대, 절대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왠지 약을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진심이 묻어납니다.
40~50억짜리 한강 경치가 보이는 강남 아파트에 아마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일 행복할 때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처음 갔을 때. 그다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잔금을 낼 때.
막상 들어가 살면 전혀 행복하지 않아. 더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무엇이든 배울 때가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구도 80이 젤 재밌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임영웅, BTS 절대 행복하지 않아.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대학도 마찬가지야.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하고 그다음부터는 행복하지 않아. 그 안에 갇혀버린 거니까. 더 갈 곳이 없어.”
이 말 안에서 ‘희망’이 행복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하여지려면 끊임없이 희망해야 하고 그 희망이 끊임없이 달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결코 완전히 달성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돈, 명예, 쾌락입니까?
사실 그런 모든 욕망을 아우르는 욕망이 하나 있습니다. ‘존재 상승 욕구’
그냥 인정받으려는 욕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강남 아파트를 살 때 처음 그 집을 보았을 때, 그리고 잔금을 치를 때 느끼는 맛은 ‘내가 이런 사람이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존재 상승 욕구가 있고 그것이 충족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 돈이 있는 것을 자랑할까요?
그것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존재 상승 욕구를 추구하는 우리는 모두 두 종류로 나뉩니다. 나의 창조자, 부모를 닮아가며 존재 상승의 기쁨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소유와 경쟁을 통해 타인보다 높은 존재임을 증명받으려는 사람입니다.
이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비가 되어 존재가 상승하려는 노랑 애벌레와 애벌레 기둥을 기어올라 더 높아지려는 줄무늬 애벌레의 차이입니다.
저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으며 경쟁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닮아가는 행복을 추구하려고 신학교에 늦게나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존재가 향상됨이 자주 느껴지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예수님 가르침의 시작이고 첫 주제는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해지는 방법은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며,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려고 해야 하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도 받아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면 부활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과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은 당신을 닮아가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이전의 세속-육신-마귀의 행복을 좇던 것에서 지금은 주님을 닮는 것이 목적이니
마음이 조금은 가난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성공을 좇을 때보다 분명 행복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스스로 행복해지려 노력하는 이들을 보면 슬픕니다.
아기보다 어머니가 행복한 것처럼 그래도 슬퍼질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 더 행복합니다.
가끔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봅니다.
그러나 저는 화가 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 주님 뜻이라 여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내가 죽는 데서 나옵니다.
그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려고 했고 조금씩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는 것도 행복입니다.
또한 이런 것 때문에 사실 박해도 없지 않은데, 가장 짜릿한 이상한 행복이 그때 옵니다.
그리스도와 매우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감의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는 자신을 봅니다. 이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또한 끝이 아니기에 행복이 거기서 멈추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은 부모를 닮아감입니다.
더는 부모처럼 살고 싶지 않을 때 행복을 잃습니다.
부모처럼 말을 하고 부모처럼 두 발로 걸으며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물 위를 걸은 베드로는 그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유튜브에 보니 아기가 처음 “엄마!”라는 말을 했을 때 엄마가 기뻐서 계속 “엄마, 엄마, 엄마?”라고 하고 그러면 아기도 “엄마, 음마, 암마…”라고 하며 웃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엄마도 기쁘고 아기도 기쁩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일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일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나의 변화하는 모습을 행복의 이유로 삼아봅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재미를 들여봅시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정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2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태오 5,1-12ㄴ
마음 한번 크게 바꿔먹으면 사방이 온통 축복이요 은총꺼리들입니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희망 사항이 하나 있다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상태에 도달해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행복에 대한 기준점, 척도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 같습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가끔 보는데, 전기도 안 들어오는 그 깊은 산골에서 혼자 살아가는 어르신께서 입만 열면 행복하다고 외칩니다.
맨날 삼시 세끼 스스로 밥을 해 먹어야 하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 여름의 불볕더위도 견뎌내느라
죽을 고생인데도 불구하고, 얼굴은 세상 행복한 얼굴입니다.
반면에 어린 시절부터 있는 것 없는 것, 모든 것 다 갖춘 재벌 2세들, 천문학적 재산을 축척해, 어떻게 재산을 관리해야 하나 고민인 부자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고 눈동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세상 착한 든든한 A급 신랑에, 제 갈 길 잘 가고 있는 자녀들, 넉넉한 연금, 넓직한 아파트, 거의 모든 것을 다 갖춘 자매님의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 잘 안 풀리는 인간 관계였습니다.
저는 강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 지상에서 완벽한 행복, 완벽한 충족을 희망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입니다.
잘 안되는 유일한 한 가지에 목숨 걸지 마시고, 삶 속에 널려있는 행복꺼리, 감사꺼리들을 찾고 또 찾아보십시오.
오늘 마태오 복음 사가는 산상 설교 중에서도 백미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복팔단(眞福八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진복팔단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행복에로의 초대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살고,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떻게 처신해야 행복할 것인지, 8가지 비결을 말씀하시는데, 하나하나 헤아려보니 어려운 과제인 듯 보이지만, 더 곰곰이 묵상해보니,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한 삶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손에 쥐시고 거듭 문을 두드리시는데, 관건은 우리가 쉽사리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복으로 나아가는 8가지 열쇠 중에 첫 번째인 ‘가난한 마음’, 그리고 6번째인 ‘깨끗한 마음’에 제 마음이 오래도록 머물렀습니다.
가난한 마음, 깨끗한 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청빈하게 살려는 마음,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측면이 있는 듯합니다.
가난한 마음, 깨끗한 마음이 강조하는 바는 잡다한 생각들과 근심 걱정들을 바닥으로 완전히 내려놓으라는 초대입니다.
미워하는 감정이나 이런저런 상처도 훌훌 털어버리라는 초대입니다.
틈만 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열등감도 내려놓으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복팔단을 통해 강조하시는 바처럼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는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계속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크게 먹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사방이 다 축복이요 은총 꺼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를 깊이 묵상하신다면, 이 극심한 고통, 이 끝도 없는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2023. 6. 12. 월)(마태 5,1-12ㄴ)
<행복이 아니라 구원>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3-4).”
이 말씀에서 ‘행복’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평화, 안식, 기쁨, 생명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행복’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구원이 지금 시작되었음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 기쁨이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위로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대면서, 지금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들어도 행복해 하라고 강요하면 안 됩니다.
행복을 강요하려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가난’의 경우, 가난이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사실 가난은 물리쳐야 할 ‘악’입니다.
‘악’은 언제나 항상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될 뿐입니다.
가난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지는 않으면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행복해 하여라.”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 ‘언어폭력’이 됩니다.
<실제로 가난의 고통을 전혀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더 많이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나서서 사랑을 실천할 때, 바로 그 공동체의 모습은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 주는 모습이 되고, 그것을 체험한다면 ‘가난’이라는 불행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니까 행복하다.”가 결코 아니고, “비록 가난할지라도 구원의 희망을 잃지 마라.”입니다.>
반대로, 사랑 없이 이기심만 가득 찬 곳은 지옥의 모습이 됩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번역은 별로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원문대로 직역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마음은 풍요로운 사람들이고,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이고,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고, 탐욕을 버리고 마음속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는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라는 말 때문에
부자들만 겨냥해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부자들도 많지만, 가난해서 오히려 더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는 살 수 없다는 말씀은, 실제로 그것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은 아니고,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하느님 나라는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도
슬퍼도 행복해 하라고 강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말로 슬퍼서 울고 있는데, 행복해 하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ㄴ-4).”
하느님 나라는 슬픔도 눈물도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울고 있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더라도 최소한 함께 울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 일도 역시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울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함께 울어 주는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징이 되고, 그 표징 덕분에 슬픔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함께 울기는커녕 비웃기만 한다면, 또 가엾게 여기지는 않고 조롱하고 비난하기만 한다면,
그곳은 지옥이 될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전에 어떤 큰 재난과 참사를 당한 유가족들이 울고 있을 때, 실제로 그런 짓을 한 자들이 있었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울고 있는 유가족들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비방한 자들의 모습은 사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