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진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시집 『봄비』, 1969)
[작품해설]
이 시는 봄비 내리는 날의 애상적 정서를 7⸱5조의 음수율과 3음보격의 민요조로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수복의 시는 섬세한 감성과 한국적인 정감을 한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시는 자연에 대한 관조적, 친화적 태도를 전통적 율조에 의탁하여 형상화함으로써 전통 서정시의 장점을 고루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적 화자는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시어와 ‘강나루’ ⤑ ‘보리밭길’ ⤑ ‘꽃밭’ ⤑ ‘들판’으로 시선을 확대시키는 방법을 통해 봄의 생명력을 노래한다. 또한 으레 그러리라고 짐작되는 것을 다짐하여 말할 때 쓰는 ‘-것다’라는 종결 어미를 반복함으로써 임에 대한 간결한 그리움을 전달한다. 이 시가 봄의 생명력을 예찬하는 작품이면서도 전통적 애상의 정서를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봄은 화자에게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임에 대한 그리움을 다시 일깨워 줌으로써 봄비 그친 뒤 강 언덕에 짙푸르게 솟아날 풀잎 같은 서러움을 맛볼 계기가 된다. 마침내 4연에서는 봄의 상징물인 아지랑이를 ‘임 앞에 타오르는 / 향연’으로 표현함으로써 화자가 서러움을 느끼는 이유, 즉 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준다. 그러나 화자는 봄의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를 통해 임에 대한 그리움을 극복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로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다.
이수복은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만을 남긴 과작(寡作)의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양적 정서를 부드러운 운율로 담아내는 전통적 서정시를 통해 겸손하고 고결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표현해 보여 줌으로써 박재삼, 이동주 등과 함께 1950년대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작가소개]
이수복(李壽福)
1924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
조선대학교 국문과 졸업
1954년 『문예』에 서정주에 의해 「동백꽃」이 추천됨
1955년 『현대문학』에 「실솔」, 「봄비」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55년 전남문화상 수상
1957년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1986년 사망
시집 : 『봄비』(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