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아바나로 갑니다.'체 게바라가 아버지에게 보낸 한 줄 글로 떠난 여행.총천연색 풍경처럼 아직도 눈앞에 선명한 쿠바에서의 한달을 되감아 본다.
1.<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이후, 쿠바의 대표 이미지가 된 올드 카. 아바나의 웬만한 차들은 반백 년의 나이를 훌쩍 넘었다. 2.헤밍웨이가 묵으며 집필한 호텔, 암보스 문도스로 향하는 길. 분홍과 노랑의 건물, 스페인풍의 낡은 건물이 이곳을 고대의 풍족한 도시로 착각하게 한다.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쿠바는 로망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여름옷 몇 벌만 겨우 챙겨 넣은 배낭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 쿠바를 가는 경로로 가장 많이 선택되는 것은 멕시코 칸쿤을 거쳐서 가는 것과 캐나다 토론토를 거쳐서 가는 것. 비행시간만도 만만찮다. 10시간쯤 떠 있다가 창 아래로 펼쳐진 은백의 산맥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이렇다 할 여행 팁도 챙겨 넣지 않은 채 떠나왔음을 깨달았다. 그건 쿠바 시장에서 살 요량으로 빼놓은 반바지 한 벌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의 두려움이었다. 나는 캐나다에서 ‘쿠바 통’으로 불리는 숀킴 아저씨(www.cuba.co.kr, 비행편과 숙박 등 자세한 정보를 알려준다)의 도움으로 쿠바 여행의 줄거리를 잡는다. 그리고 겨울에서 여름으로 넘어간다.
+ 색다른 돈 비행기가 쿠바의 짙붉은 땅에 닿는다. 아담한 바라데로 공항은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이들로 금세 북새통을 이루는데, 겨울을 막 넘어온, 털 부츠에 파카 차림의 미국인도 꽤 눈에 띈다. 미국인에게 쿠바 여행은 불법. 하지만 쿠바 정부는 여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입·출국 시 카드를 주는 형식으로 미국 정부의 제재에 대응하고 있다. 때문에 이 카드는 무척 중요하다. 묵을 호텔 이름과 연락처, 돌아갈 날짜만 정확하게 기입하면 사진 촬영을 하고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에스파냐어를 쓰고 영어 발음 차이가 나는 심사관 앞에서 손짓 발짓 하며 진땀을 흘린다. 날씨 탓도 있다. 12월의 쿠바는 30℃를 웃돌았다. 강렬한 햇살에 등이 간지럽고 발바닥이 뜨겁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버스는 여행자를 태우고 아담한 도시 바라데로의 이곳저곳에 서며 정해진 호텔에 여행자를 하나둘 떨구고 ‘빌라마르’에 나를 내려놓는다. 별 세 개가 붙었지만 외관은 정갈한 시골집 같은 호텔이다. 까만 머리의 키 작은 동양 여자의 등장이 새로웠나? 벨보이가 급하게 뛰어나와 냉큼 짐을 들어 방으로 옮겨준다. 호텔에선 1페소 (약 1천원) 정도의 팁이 적당하고, 팁을 줄 땐 지폐로 주는 것이 좋다던 숀킴 아저씨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공항에서 환전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이곳에선 달러를 환전하기가 힘들다. 캐나다달러로 환전해 공항이나 호텔의 정해진 환전소에서 환전해야 하는데, 동네마다 환율을 다르게 적용하고 잔돈을 잘 거슬러주지 않아 대부분 공항에서 환전을 마친다. 미처 환전하지 못해 돈이 없다고 말하니 선선히 웃으며 “다음에.”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당장 환전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어 조금 밑지더라도 호텔 환전을 선택했다. 팁을 지폐로 줘야 한다던 말의 의아함도 환전과 함께 해소된다. 쿠바의 화폐에는 다양한 색이 칠해져 있는데, 여행자 화폐(CUC)와 지역 화폐(CUP)의 차이를 이 색으로 알 수 있다. 여행자 화폐는 컬러, 지역 화폐는 흑백으로 같은 1페소라도 여행자 화폐와 지역 화폐엔 23배 정도 차이가 난다. 이렇다보니 어수룩한 여행자에게 쿠바 청년들은 슬그머니 다가와 ‘친구’를 부르짖으며 종종 기념으로(?) 돈을 바꾸자고도 하는데, 이 꾐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 여행자가 지역 화폐를 내면 받아주지도 않아 그야말로 기념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나는 컬러풀한 여행자 화폐 한 장으로 벨보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1. 바라데로 공항을 나오면 바로 보이는 국기. 2. 바라데로 장터에 내걸린 그림들, 살 수 있지만 공항 검색에서 걸리면 압수 조치를 당한다. 3. 아바나는 거리 가로등 하나에도 심오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4. 호텔 벽면에 그려진 추상화, 색채는 화려하지만 자세히 보면 섬뜩한 그림이다. 5. 이런 총천연색 집들이 줄지어 있다. 6. 한 장의 그림에 사상, 이념, 역사 등 많은 것을 담아내는 쿠바인. 7. 바라데로 해변. 넘실대는 에메랄드 빛 바다와 대조적인 구릿빛 피부의 쿠바 훈남들. 8. 작은 엽서 한 장에도 체 게바라의 얼굴은 항상 보인다. 9. 수백 년 넘은 스페인풍 건물 앞에 수십 년을 넘긴 올드 카들이 색을 맞춰 서 있다. 아바나에선 주차까지도 디자인을 고려하는가보다.
2단 크레파스보다 많은 색 바라데로는 20km에 달하는 백사장과 한 가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색감의 청록색 바다로 유명하다. 갈색 토양에 짙은 녹색 나무, 풀을 뜯는 말의 검은 깃에선 반짝반짝 윤이 난다. 나는 바라데로의 한적한 골목골목을 다니며 아홉 살 때, 처음 나온 2단 둘리 크레파스 상자를 열었을 때 본 색보다 많은 색을 만난다. 해변을 끼고 키 작은 호텔이 늘어선 여행자를 상대로 하는 아담한 상점도 줄지어 있는데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집들의 색채다. 머리를 맞댄 집들은 마치 하나라도 같으면 불쾌하단 듯이 각기 다른 색으로 벽을 칠해놓았는데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첫 번째 집이 주황색 벽이면 두 번째는 노란색, 세 번째는 연두색을 칠하는 ‘약속의 조화’이고, 지붕이 분홍색이면 외벽은 자주색으로 칠한 ‘톤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상상하기 힘든 총천연색 퍼레이드다. 집들의 색채는 바라데로의 기후, 하늘과 바다, 석양과 어우러지며 시시각각 다른 그림을 만들어낸다. 며칠은 이 모든 풍경이 약속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 의구심은 바라데로 해변에서 절정에 달했다. 에메랄드 빛 바다는 큰 스펙트럼으로 차근히 초록에서 파랑으로 이어지고 펼쳐진 은빛의 모래 위에 구릿빛 피부의 청년들이 줄지어 선 모습이 놀라울 수밖에.
집들의 행렬,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은은하게 펼쳐지는 것이 바라데로의 건물이라면 강렬하게 도로를 수놓는 것은 아바나의 명물, 올드 카들이다. 쿠바를 가장 쿠바답게 하는 것들은 가만히 보면 고립에 근거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 봉쇄로 인해 문명의 손길이 쉽게 닿지 않는 땅이기에 보존 가능한 것들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강렬한 인상의 쿠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장거리 버스 비아쥴(10페소)을 타고 3시간, 시간이 멈춘 구도심과 신시가지가 만나는 지점에 버스가 선다. 아바나다. 외국인 여행자가 많은 바라데로와 달리 수도 아바나의 색은 한층 차분하다. 그리고 간혹 강렬하다. 아바나의 도로를 달리는 차들 대부분이 차령을 수십 년은 훌쩍 넘긴 올드 카인데, 강렬한 빨강이나 짙은 초록, 코발트 빛에 가까운 파랑과 하양의 대비로 이어져 매혹적이다. 물론 겉과 안은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다르지만. 홀리듯 올드 카 택시에 몸을 싣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차가 도로 한가운데서 주저앉진 않을까 떨었을 정도로 차 내부는 굴러가는 게 신기하리만치 낡고 낡았다. 올드 카와 함께 아바나를 대표하는 것은 말레콘 해변. 파도가 도로 위로 부서지고 햇빛은 내리쬐는데 하얀 포말의 바다 비가 내린다. 이 신비한 풍경 속에 올드 카들이 달린다.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1. 바라데로 공항을 나오면 바로 보이는 국기. 2. 바라데로 장터에 내걸린 그림들, 살 수 있지만 공항 검색에서 걸리면 압수 조치를 당한다. 3. 아바나는 거리 가로등 하나에도 심오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4. 호텔 벽면에 그려진 추상화, 색채는 화려하지만 자세히 보면 섬뜩한 그림이다. 5. 이런 총천연색 집들이 줄지어 있다. 6. 한 장의 그림에 사상, 이념, 역사 등 많은 것을 담아내는 쿠바인. 7. 바라데로 해변. 넘실대는 에메랄드 빛 바다와 대조적인 구릿빛 피부의 쿠바 훈남들. 8. 작은 엽서 한 장에도 체 게바라의 얼굴은 항상 보인다. 9. 수백 년 넘은 스페인풍 건물 앞에 수십 년을 넘긴 올드 카들이 색을 맞춰 서 있다. 아바나에선 주차까지도 디자인을 고려하는가보다.
가질 수 없는 그림 장터나 거리, 박물관 등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쿠바 특유의 그림이다. 낡고 쓰러지는 건물의 외벽에도 뜻을 알 수 없는 추상화가 즐비하고 빈 벽을 그냥 두지 않아 강렬한 색채의 그림이 이어진다. 예술성과 정치성, 그리고 대중성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시각적 호소력을 발휘하는 정치 포스터도 집집마다 걸려 있다. 바라데로의 야시장에서 본 그림들은 하나같이 강렬해서 고르기도 힘들다. 특히, 대문자 S라인쯤 되는 몸매의 쿠바 여인을 그린 그림은 까만 피부에 오렌지나 핫 핑크로 옷을 입고 쿠바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고, 매혹적인 올드 카 그림은 여러 개 구입해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눈에 띈다. 실로 야시장의 아마추어 작가의 그림을 여러 개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사도 가지고 나갈 수 없다는 설명을 들어 구입을 포기한다. 그들은 그림 한 점에 정치 구호 이념, 사상과 역사가 담긴다고 믿기에 국가 차원에서 그림의 해외 반출을 막는 것이다. 듣고 보니 손에 닿지만 가질 수 없는 그림 앞에서 더 애가 탄다. 흑백 돈을 컬러 돈으로 바꾸자고 조르는 이들이지만, 또 돈만으론 가질 수 없는 것도 많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들이기도 한 것이다.
쿠바에 다녀왔다. 기억 속엔 쿠바의 색이 있다. 그리고 따라오는 향이 있다. 무늬 없고 단아한 흰 잔에 흑갈색 커피는 잊지 못할 향을 남겼고, 회색 건물과 마주한 분홍과 노랑의 건물들을 떠올리면 알싸한 럼의 향이 이어진다. 어린 날 입어본 색동과 어디에 어울리는지 몰라 써보지도 못한 2단 크레파스의 화려한 색이 천연덕스럽게 녹아 있던 도시. 돌아온 순간 나는 떠난 이유와 함께 무서운 한 가지를 깨닫는다. 다시 갈 그날까지, 쿠바를 그리워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첫댓글 이 글 읽으니 쿠바 다녀 온 기억이 새롭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