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좋아한다'는 말
나는 누구를 "좋아한다" 는 말을 자주 한다.
참 좋은 말이긴 하나 너무 헤프면 안 되는데,
해서 잠시 멈춰 찬찬히 생각해본다.
얼마 전엔 세기의 결혼에 이은 세기의 이혼 사건이 있었다.
위자료 청구액이 조를 넘어섰다지만
판결 내용도 무려 5백억을 넘어섰다는 뉴스다.
사랑, 그거 신중하게 하고
사랑, 그거 함부로 버리지 말자.
버리지 않아도 떠나가는 슬픈 사랑도 있지 아니한가.
허나 좋아한다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로 시샘하진 말고
좋아한다는 말을 '벗'으로 바꾸어 이야기해 보자.
벗이란 마음이 서로 통하여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이른다.
이를 다른 말로
붕우朋友, 우인友人, 친구, 동무라고도 하며
벗 따라 강남 간다고도 하고
살면서 진정한 벗 하나 얻었다면
산 보람이 있다고도 하니
모두 벗을 귀히 여기는 마음에서
생겨난 말들이다.
익자삼우益者三友라 했으니
사귀어서 유익할 벗을 정직과 신의와 지식을
그 품성으로 들고 있다.
고산 윤선도는 아마도 속세에서는
진정한 벗을 만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기에 탈속해 다섯 벗과 즐기면서
선경에 들었을 테다.
그게 불후의 '오우가(五友歌)'이다.
팔십 평생을 살아가면서 당쟁과 모함에 휩쓸려
유배되기를 여러 차례 했으니
그 참담했을 지경을 알 수야 없어도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벗이란 말 중에서 동무라고 하면
어렸을 때의 벗을 떠올리게 되니
아무런 잇속이나 헤아림 없이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가까이하던 사람을 이른다.
친구라 하면 어느 정도 인간성이나
사회성에 대한 인식을 한 뒤에
가까이하게 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나 사람 이외의 것에서 가까이하면서
마음을 달래거나 고양시키는 대상을
친구나 벗이라 이르기도 하는데
말벗이나 글벗, 또는 취미의 대상이 되는
시서화악詩書畵樂 등의 기예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경향들은 전통적인 문화생활에서
비롯되는 것들이지만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는
가까이한다는 말로
사랑한다거나 애인이란 용어도 쓰이게 되어
표현의 내용과 양식이 다양해졌다.
사람을 사랑함이 애인愛人이요
말을 사랑함이 애마愛馬요
강아지를 사랑함이 애견愛犬이다.
포괄적으로는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보살피며 즐기는 일을 애완이라 말하기도 한다.
요즘엔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면서
컴퓨터를 가까이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따라서 소위 사이버 공간을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다른 네티즌들과 교우交友하는 일도 흔해졌다.
“애인이 있어요?”
어느 회원과 채팅을 하던 중
애인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우선 없다는 대답을 했지만
내가 애인이 있는 것처럼 처신을 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애인은 통상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그렇지만 그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즉흥적으로 대답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랑이란 애틋하게 여기어
위하고 아끼는 일이거나 그런 마음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을 공경하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 했으니(敬天愛人)
누군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고운 데에 미움이 없고
미운 데에 고움이 없다는 것이니(不可憎, 不可愛)
고운 사람 미운 사람 가릴 수밖에 없고
고운 사람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다.
보편적으로 결혼하기 전의 젊은 시절에
특별히 둘만이 사랑하는 이성을 애인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결혼하여 한참이나 지난 중년시절에는
애인이 있을 수 없는 것일까?
헬라어는 우리와 달리
사랑을 네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 한다.
에로스는 본디 희랍의 신 에로스에서 나와
사랑의 뜻을 가진다.
플라톤이 최초로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로
관능적인 아름다움에서 출발해
예지적인 아름다움으로 나가는
이데아 추구의 심기(心機)를 말한다.
아가페는 신의 사랑, 즉 신이 죄인인 인간을 위해
자기를 희생으로 하여 긍휼히 여김을 이르며
예수의 사랑으로 집약할 수 있는 사상을 말한다.
스톨게는 가족생활의 희비 애환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필리아는 교제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친구 간의 우정을 설명할 때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 글벗들이 모두 나의 애인인걸요.”
이렇게 대답했더니
글벗 말고 애인이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에로스의 애인은 있을 수 없겠지만
있다 하더라도 그걸 말하면 경을 칠 일이요
아가페의 애인은 가끔씩 그렇게 흉내나 낼뿐
늘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스톨게의 애인은 내 가족들과의 관계이니
그걸 물었을 리 없을 것이다.
필리아의 애인은 친구 간의 우정을 말하는 것이라니
덧없는 사이버 세상에서야
달이 차고 이지러지듯 생겼다 없어지고
없다가 생기기도 하는 게 그것이 아닌가.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할 것인가?
동산에 달(月) 오르면 그도 벗이라 할 것인가?
속세에 찌든 부질없는 객이야
선경에 든 시선詩仙을 넘겨보다가 돌아설 뿐인데,
불가에서 말하는 네 가지 고통 중 하나는
애별리고愛別離苦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따른 고통을 말하는 것일 테다.
유명을 달리해 사랑을 잃는 것이야
어찌 그 아픔을 말로 다 이르랴.
그럼에도 누구든 그 길을 한 번은 가야 하느니
이런 생각에 잠기노라면
사랑하는 동안에도 숙연해질 때가 있다.
이와 달리 하늘 아래 함께 살아가면서
이별하는 사랑도 있으니
한 사랑이 다른 사랑을 버리고 돌아서는 일이다.
더 큰 사랑을 찾아가는 쪽이야 좋을 일이겠지만
버림받는 사랑은 큰 고통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또 신중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홀로 태어났으니
사랑을 얻으면 덤이란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얻은 사랑을 잃는 것은 본전이 아니던가.
허나 사랑의 아픔을 누가 모르랴.
애별리고를 벗어날 수 없다니
그렇게 자위나 해보는 것일 뿐이다.
사랑이 떠난 자리엔 미움이 깃들기도 한다.
마음에도 평형의 원리가 적용될 테니
무엇인가 깃들 게 아니던가.
빈자리엔 증오의 독버섯이 돋지 않도록
레테의 강물로 채우고 새로운 인연을 심어야 한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카페에서도...
어느 게시판에서 방장이 의기소침해 있기에
"나는 방장님을 좋아한다"라는 글을 올렸었다.
격려하는 뜻이었다.
하지만 다른 회원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새로 가입한 a 회원이 자주 글을 올리기에
"나는 a 님을 좋아한다" 라는 글을 올렸었다.
역시 자주 글을 올려달라는 격려의 말이었던 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난 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내가 방장을 좋아하면서 또 a도 좋아한다는 거였다.
그것 참!!
이어서 띠방 주관 정기산행을 앞두고
방장을 좀 도와주자는 글을 올렸더니
"왜 방장의 위상을 높여주려 하느냐"는 댓글이 달리더라.
그래서 그 뒤로는 그곳에 들리기가 저어 되더라.
남성 휴게실 신사분들이시여!
누구를 '좋아한다는 말'을 함부로 할 건 아니더이다.
시샘이 작동하므로..
* 사진은 어느 문학모임에서 '글벗'을 주제로 문학토크 하는 모습이다.
첫댓글 저는 석촌님을 좋아합니다~누가 시샘하든 말든 간에! ㅎㅎㅎ
그런가요?~~~ㅎㅎ
동성끼리는 시샘이 발동하지 않는다네요.
전기도 음극 양극이 부딪혀야 스파크가 일어나는 법이고요.
저도 모렌도님 처럼
석촌 선배님을 좋아 합니다.
또 소문 나거나 말거나 상관 없습니다.
저 사람들 나이 먹어 가지고 동성연애 한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것 참!!
그럼 두 분이 싸우지나 말고 잘 지내세요.
언제 합석 한 번 하게요.
선배님의 여성편력(女姓遍历)
늘 건강하시길 기원하면서
제 7편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석촌 선배님 지금부터 뜻이 잘 맞는 여성분들 많이 만나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한 시간 갖으시기 바랍니다.
@코알라1 네에, 여성이나 남성이나 뜻이 맞으면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