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의
김명이
애써 무덤덤한 척 하지 않으면
금세 쏟아질 것 같은 감정
골목 누비며 전사의 후예였던 남자와
족보 안에서 구절초처럼 피고 지던 여자
시대는 부부를 그렇게 불렀다
구순이면 뿌리도 마르는 과일나무라 하며
지팡이 짚는 세 발 남자와 네 발로 기어가는 여자가 됐다
창문틀에 먼지가 오래 앉았다
시절은 화살보다 빠르다지만
마음은 화살집에 갇힌 채 떠나고 싶지 않은 눈치다
창을 타고 넘어오는 깊은 밤의 윤곽
방문만 밀면 화장실인데
안방 구석에서 요강을 꺼낸다
쓸모는 뻔했지만 설마했다
동틀 때까지 번갈아가며
여자가 앉아 오줌을 싼다
남자가 요강을 들고 서서 오줌을 눈다
첫 빛이 창문의 나무 그물맥 서너 가닥을 걷자
되치기 한방으로 황소를 눌렀던 전설의 전사
한 손에 지팡이, 한 팔엔 요강을 감싸 안는다
마주친 내 시야가 암막처럼 가려진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스치는 지린내의 공포
요강을 뺏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부릅뜬
서로의 눈은 필살기가 된다
한사코 직접 비우고 씻겠다고 버티다
사정하듯 무너지는 전사의 눈빛과
못 들은 척 빼앗는 내 손 끝에
쏟아져버린 감정이 주저앉는다
빡빡 문질러 닦아내고 구석에 놓아둔다
요강에 비친 전사의 움찔했을지 모를 배설의 기억
뿌리를 향한 요의가 밀려왔을 지도 모른다
여자는 사자使者를 만나는지 시체의 꿈을 꾸고
가지들이 팔다리 켜는 아침이 밀려든다
서로에게 기대어
지붕 끝을 지켜온 부부 인연의 끈
옷깃 여며주며 한날한시에 먼 나라로 떠날 수 있다면
나의 움켜쥔 아랫배도 한결 후련하겠다
프로필 : 김명이
2017.세종 나눔 도서선정
2023.아르코 발표지원 선정
시집으로[엄마가 아팠다][모자의 그늘][사랑에 대하여는 쓰지 않겠다][섬, 몽상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