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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용어
녹관(祿官)
정식으로 녹봉을 받는 관원 또는 그 관직
정식으로 녹봉(祿俸)을 받는 관원 또는 그 관직. 유록관(有祿官)이라고도 한다. 이에 비하여 녹을 받지 못하는 관직을 ‘무록관’이라 하였다. 또 겸직(兼職)이 아닌 고유업무를 가진 실관(實官)을 녹관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관직은 실직(實職)과 산직(散職)으로 나뉘고, 실직은 다시 녹관과 무록관으로 나뉘며, 녹관은 또 지속적으로 근무하고 정기적으로 녹을 받는 정직(正職)과 일정기간씩 교대로 근무하고 근무기간에만 녹을 받는 체아직(遞兒職)으로 나뉜다.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실직은 동반 1,779직, 서반 3,826직, 합계 5,605직이었다. 이 중에서 녹관은 동반경관직 646직, 서반경관직 5,405직, 동반외관직 1,038직, 서반외관직 502직, 합계 7,681직이었다.
녹관 중 동·서외관직은 모두 정직이었고, 경관직은 동반 541직, 서반 319직만이 정직이었으며, 동반 105직과 서반 3,005직은 체아직이었다.
즉 동반·서반 정직녹관은 모두 960직이었고, 동반과 서반의 체아직녹관은 모두 3,110직이었다. 무록관은 동반경관직에만 있었는데 모두 95직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에 정상적인 녹봉을 받고 있었던 관원은 960여 인의 동반·서반 정직녹관뿐이었다.
무록관이나 체아직녹관제도는 국가의 경비를 절약하고 다수의 관직희망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무록관은 녹관에 비하여 여러가지로 차별대우를 받았으나 360일(12개월)을 계속 근무하면 정직녹관으로 나갈 수 있었다.
<<참고문헌>>經國大典
<<참고문헌>>朝鮮初期兩班硏究(李成茂, 一潮閣, 198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식으로 녹봉(祿俸)을 받는 관원(官員)을 가리킨다. 주로 겸관(兼官)에 대응하여 쓰여지므로 전임관(專任官)의 의미가 강하다고 하겠다.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녹권(錄券)
영문표기 : nokgwon / nokkwŏn / certificates of merit
고려·조선시대 공신도감이 왕명을 받아 각 공신에게 발급한 공신임을 증명하는 문서
고려·조선시대 공신도감(功臣都監)이 왕명을 받아 각 공신에게 발급한 공신임을 증명하는 문서. 고려 초에는 녹권만을 주었으나, 고려 말 중흥공신(中興功臣)에게는 녹권과 공신교서(功臣敎書)를 주었다.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 3공신의 정공신(正功臣)에게는 교서와 녹권을 아울러 사급(賜給)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게는 녹권만을 사급하였다. 그리고 정난공신(靖難功臣) 이후는 정공신에게 교서를 주고, 원종공신에게는 녹권만을 주었다.
녹권에는 녹권을 받을 사람의 직함과 이름을 앞에 적은 다음, 공신으로 논정하게 된 경위와 공신으로 선정된 사람들을 대개 3등으로 나누어 그들의 관직과 성명을 기재하였고, 끝으로 그들에게 주어질 특권을 명시하였다.
개국공신녹권 중에는 필사한 것도 있고, 활자로 인출(印出)한 것도 있는데, 조선시대의 원종공신녹권은 주자(鑄字)로 찍어 책자로 만들어 배포하여 주는 것이 상례였다. 그것은 원종공신의 수효가 적으면 수백인에서 많을 때에는 수천인에 달하여 인출하는 것이 편리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에는 30차례에 가까운 원종공신녹권의 발급이 있었으므로 조선 중기 이후의 녹권은 각 가문에서 간직하고 있는 것과 여러 도서관에 소장된 것이 많아 그 실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녹권은 공신도감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간혹 실록에 전하지 않는 사실을 수록하고 있어 그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高麗史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
<<참고문헌>>韓國古文書硏究(崔承熙,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1)
녹금서당(綠衿誓幢)
신라시대의 군부대
신라시대의 군부대. 일명 녹금당(綠衿幢)이라고도 한다. 통일기 왕경(王京)을 지키는 핵심적 군단인 이른바 구서당(九誓幢)의 한 부대로서, 본래의 신라 사람으로만 편성하였다.
녹금서당은 583년(진평왕 5)에 설치한 서당을 613년에 개칭한 것인데, 이 개칭시기를 문무왕 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소속군관으로는 최고지휘관인 장군 2인을 비롯하여 대관대감(大官大監) 4인, 대대감(隊大監) 5인, 보병지휘자 2인, 기병지휘자 3인, 제감(弟監) 4인, 감사지(監舍知) 1인, 소감(少監) 23인(보병지휘자 4인, 기병지휘자 6인, 나머지는 알 수 없음.), 대척(大尺) 20인 (10인은 대관에 속하고, 보병지휘자 4인, 기병지휘자 6인), 군사당주(軍師幢主) 1인, 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인, 보기당주(步騎幢主) 4인, 착금기당주(著衿騎幢主) 18인,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24인, 군사감(軍師監) 2인, 대장대감(大匠大監) 1인, 보기감(步騎監) 4인, 착금감(著衿監) 18인을 두었다. 금(衿)의 빛깔은 녹자(綠紫)였다. → 구서당
<<참고문헌>>三國史記
<<참고문헌>>新羅政治制度史(李仁哲, 一志社, 1993)
<<참고문헌>>新羅幢停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참고문헌>>新羅兵制考(井上秀雄,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녹로(轆轤(건축 기구))
활차(=도르래)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 쓰이던 기구
활차(滑車 : 도르래)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 쓰이던 기구. 조선 후기에 성을 쌓거나 큰 집을 지을 때 사용하였다.
각목으로 네모난 틀을 만들고 틀의 앞쪽으로 긴 지주(支柱) 구실을 하는 간목(竿木) 둘을 비스듬히 세운 다음, 간목 꼭대기에는 활차를 달고 나무틀의 뒤쪽에는 얼레를 설치하여 동아줄을 얼레와 활차에 연결하고 줄의 반대쪽에 물건을 달아맨 뒤, 얼레를 돌려 줄을 감으면서 물건을 들어올리도록 한 것이다.
1796년(정조 20) 수원성곽을 쌓을 때에는 두 틀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에 의하면 틀의 크기는 세로 15척, 높이 10척이고 간목의 길이가 35척으로, 여덟 사람이 둘로 나뉘어 얼레를 좌우에서 돌려 물건을 올리고, 적당한 높이에 올라가면 줄 갈고리로 끌어서 원하는 자리에 옮긴 다음 다시 얼레를 늦추어 물건을 내리도록 한다고 하였다.
그 뒤 1803년(순조 3)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재건공사 때와 1857년(철종 8) 인정전 중수공사 때에도 녹로를 만들어 활용하였다. 인정전 공사 때에는 이것을 만든 장인을 녹로선격군(轆轤船格軍)이라고 불렀는데, 배를 만드는 일을 돕던 기술자들이 이 일에 종사한 데서 연유된 듯하다.
간주(竿柱)를 높이 세우고 그 꼭대기에 활차를 달고 동아줄을 걸어 밑에서 한쪽 줄을 잡아당겨 물건을 높이 올리는 것은 오래전부터 깃발을 세우는 일 등에 쓰이던 것인데, 조선 후기에 와서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데 그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참고문헌>>華城城役儀軌
<<참고문헌>>仁政殿營建都監儀軌
<<참고문헌>>仁政殿重修都監儀軌
녹명(錄名)
과거 응시자의 자격을 심사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던 제도
과거 응시자의 자격을 심사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던 제도. 단 한번의 시험으로 합격·불합격이 결정되는 알성시·정시·춘당대시를 제외한 식년시(式年試)·증광시(增廣試)의 경우는 시험 전에 반드시 녹명을 해야만 하였다. 시한은 시험 10일 전에 녹명소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뒤에는 과장에 들어갈 때 하는 일이 많았다.
녹명관으로 한성시(漢城試)는 한성부와 예문관·성균관·교서관·승문원의 참하관이 담당하고, 향시는 각 도의 감사가 정한 차사원이, 복시는 예문관봉교 이하의 관원과 성균관·교서관·승문원의 참하관이 담당하였다. 복시의 녹명에 앞서 조흘강(照訖講)이라는 강시험을 보았다.
소과는 ≪소학≫과 ≪가례 家禮≫, 대과는 ≪경국대전≫과 ≪가례≫로 했으며, 전자는 학례강(學禮講), 후자는 전례강(典禮講)이라 하였다. 학례강과 전례강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첩문(帖文)을 주었으며, 이 첩문이 없으면 복시에 녹명할 수 없었다. 향리의 경우는 학례강 이외에 사서(四書) 중 일경(一經)의 강시험을 더 보아야만 하였다.
수험생들은 녹명소에 먼저 사조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해야 하였다. 사조단자는 응시자 및 그 아버지·할아버지·외할아버지·증조부의 관직과 성명·본관·거주지를 장백지(壯白紙)에 기록한 것이다. 보단자는 일명 보결(保結)이라고도 하는데, 6품 이상의 조관(朝官)이 서명 날인한 신원보증서이다.
중종조 이후부터는 사조 안에 누구나 알 수 있는 현관(顯官 : 文武兩班職)이 없는 경우 지방 응시자는 경재소(京在所)의 관원 3인, 서울 응시자는 해당 부(部)의 관원 3인의 추천서를 받아야만 하였다.
녹명관은 사조단자와 보단자를 접수한 다음 응시자의 사조 가운데 ≪경국대전≫에 규정한 결격 사유가 없는가 살펴보고 이상이 없을 때 녹명책에 기입하였다. 이 때 응시자는 시험지에 답인(踏印)한 다음 시험 장소를 배정받았다.
특혜를 받은 응시자라 하더라도 녹명하지 않으면 자격이 상실되었다. 만약 녹명에 부정이 있을 경우 경재소의 해당 관원과 사관원은 파직되고 응시자는 수군(水軍)에 충당되었다.
<<참고문헌>>大典會通
<<참고문헌>>韓國의 科擧制度(李成茂, 한국일보社, 1976)
<<참고문헌>>古法典用語集(法制處, 育志社, 1981)
<<참고문헌>>學制와 科擧制(曺佐鎬, 한국사 10, 국사편찬위원회, 1974)
과거응시자(科擧應試者)의 응시자격을 심사하여 응시원서를 접수하는 것을 말한다. 문과(文科)의 경우 관시(館試)는 성균관(成均館)이, 한성시(漢城試)는 한성부(漢城府)와 예문관(藝文館)·성균관(成均館)·승문원(承文院)·교서관(校書館)의 참하관(下官)이, 향시(鄕試)는 관찰사(觀察使)가 정한 차사원(差使員)이, 복시(覆試)는 예문관(藝文館) 봉교(奉敎) 이하의 관원(官員)과 성균관(成均館)·승문원(承文院)·교서관(校書館)의 참하관(下官)이 각각 녹명(錄名)하게 되어 있었다[예전(禮典) 제과(諸科)].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녹봉(祿俸)
영문표기 : nokbong / nokpong / emolument
관리가 국가로부터 받던 물질적 급여.
관리가 국가로부터 받던 물질적 급여. 과전(科田)이나 직전(職田) 등의 수입과는 구별되며 연봉(年俸)이나 월봉(月俸)으로 받는 미곡·포(布) 등 현물로 지급되던 급료제도이다.
녹봉은 ‘녹(祿)’과 ‘봉(俸)’으로 구별된다. 신라 신문왕 때 조(租)와 직전이 주어졌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월봉이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비주(妃主)·종실(宗室)이나 문무백관에게는 녹이 주어지고, 잡직·서리·공장에게는 상봉(常俸)이 주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고려시대의 것을 계승해 녹과(祿科)와 월봉이 구별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녹은 수록(受祿)·급록(給祿)·녹과 등으로 표기되고, 봉은 상봉·월봉·급봉 등으로 표기되었으며 봉 대신 ‘요(料)’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녹은 3개월마다 지급되는 경우인 사맹삭(四孟朔)과 그에 준하는 경우로서 아마도 수직관리(受職官吏)를 우대하는 급료제이며, 봉이나 요는 특수관직이나 잡직·임시직 등에 대한 급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삼국시대의 녹봉제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처음에 녹읍(祿邑)을 주었다가 689년(신문왕 9)에 이를 없애고, 대신 녹봉으로 보이는 조를 해마다 주었다고 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월봉을 중지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하였다. 이러한 기사에서 녹봉제의 흔적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고려〕
고려시대에는 1076년(문종 30)에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와 함께 녹봉제가 크게 정비되었다. 그러나 건국 초기부터 비슷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즉, 후삼국 통일 이전에 태조가 문경지방에서 귀순해온 고사갈이성주(高思葛伊城主) 흥달(興達)과 그 세 아들에게 청주록(靑州祿)·진주록(珍州祿)·장천록(長淺祿)을 주었으며, 신절(臣節)을 제의해온 연산매곡인(燕山昧谷人) 공직(龔直)에게 백성군록(白城郡祿)을 주었다고 한다.
이들에게 주어진 녹의 성격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신라 말기에 시행되고 있었던 녹읍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귀부한 신라의 경순왕에게 매년 천석의 녹을 주었으며, 그를 따라 온 신하들에게도 전록(田祿)을 주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예우이며, 일반관료들에게 주어진 녹봉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또한, 광종이 즉위 후 건국 초기의 공역자(功役者)들에게 일정한 양의 곡식을 내려 예식(例食)으로 했다는 것도 건국공로자들에 대한 논공행상으로 보인다.
관료전반에 녹봉을 지급한 것은 965년(광종 16)에 비롯된다. 즉, 당시 내의령(內議令 : 內史門下省의 장관) 서필(徐弼)은 광종이 중국계 귀화인들에게 신하들의 제택(第宅)을 빼앗아주는 등 그들을 후대하던 처사에 반발해 “녹봉의 나머지를 모아 조그마한 집을 마련했으니 넓은 제택을 왕에게 바치겠다.”라고 상소한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녹봉제도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당나라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면적으로 관제를 정비하던 성종 때에 와서 점차 확충되었으리라 보인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침입을 당한 뒤에 늘어난 군수(軍需)의 조달로 백관의 녹봉이 부족하게 되자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이에 충당하려 하였다. 이것을 보면, 고려의 관제에 있어 녹봉제가 일반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덕종 때 좌복야(左僕射) 이응보(異膺甫)에게 사도(司徒)의 직을 겸하게 하고, 우복야 김여탁(金如琢)에게 사공(司空)을 겸하게 하면서 이에 따른 녹봉을 추가했다는 사실이 있다. 또 같은 해에 외관록(外官祿)으로서 동경관록(東京官祿)에 대한 녹봉기록이 보인다.
즉, 유수(留守) 250석, 판관(判官) 130석, 사록(司錄) 70석, 장서기(掌書記) 60석, 법조(法曹) 30석 등 이었다. 정종 때는 백관에 녹패(祿牌)를 내려주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의 녹봉제는 단편적인 사료에서 실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며, 제도의 전면적인 실태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1076년(문종 30)에 관제 개혁 및 토지제도를 확충정비해 고려 왕조의 통치조직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 때 관료체제의 정비작업의 하나로서 녹봉제 정비도 있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좌창(左倉)에 세입으로 들어오는 쌀·조·보리 모두 13만9736석13두를 과(科)에 따라 주되 중앙에는 비주(妃主)·종실·백관, 지방에는 삼경(三京)·주(州)·부(府)·군(郡)·현(縣)의 관리에게 녹봉을 주어 염치를 기르고, 그 밖에 잡직·서리·공장 등 직역을 가진 모든 자에게는 상봉을 주어 농사를 대신하게 했는데, 이를 별사(別賜)라고 하였다.
한편, 서경관록(西京官祿)은 서경 대창(大倉)의 서해도세량(西海道歲粮) 1만7722석13두로써 했으며, 그 밖에 외관록은 반은 좌창에서, 반은 외읍(外邑)에서 충당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이 때에 정비된 녹봉제의 대체적인 내용은 ① 비주록(妃主祿), ② 종실록(宗室祿), ③ 문무반록(文武班祿), ④ 권무관록(權務官祿), ⑤ 동궁관록(東宮官祿), ⑥ 서경관록, ⑦ 외관록, ⑧ 잡별사, ⑨ 제아문공장별사(諸衙門工匠別賜)로서 역(役) 3백일 이상자의 9항목으로 되어 있다.
이들 녹봉제 중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문무반의 것이었다. 이것을 문종 30년에 경정된 전시과제도와 대비해보면 몇 가지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전시과에는 시토사(試討史)·시서예(試書藝)가 있으나, 녹봉제에는 시륙상서 좌우상시(試六尙書左右常侍) 이하 시제대묘승(試諸大廟丞)까지 거의 각 품직에 망라되어 있다.
시직(試職)은 고일품(高一品)은 행(行), 하일품(下一品)은 수(守), 하이품(下二品)은 시직이라는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규정된 품보다 2품이나 낮은 품관이 관직에 임용되었을 때 적용된 관직이었다.
그러므로 시직관의 녹봉은 정직보다 일등 혹은 그 이하의 녹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시직이 유독 녹봉표에만 많이 보이고 있어 전시과표의 단순한 누락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둘째, 문종조 관제에 보이는 중서문하성의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지성사(知省事), 중추원의 판원사(判院事)·지원사(知院事) 등이 녹봉표에 보이지 않는 점이다.
단순한 누락이나 혹 겸직 등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셋째, 품계와 녹봉의 등급은 일치하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같은 품관이라 하더라도 녹봉의 등급에는 여러 등급이나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수가 있다.
넷째, 녹봉액의 기준이다.
최고 녹봉액은 종실록의 공(公)으로 460석10두인데, 당나라의 경관품록 7백석과 대비하면, 고려는 15두1석, 당나라는 10두1석이므로 같은 양의 녹을 받고 있다. 제2등 녹봉액은 경관 종1품으로서 3성의 장관과 종실의 후(侯)가 각기 4백석을 받고 있어 당나라의 종일품록 6백석과 녹봉액이 같다.
그러나 1등급·2등급의 녹봉액 이외에는 당나라의 것과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관(貞觀) 2년의 녹봉제에는 중앙관제의 경우 정종(正從)의 품계 18과로 나누어 일정한 차등을 두고 지급하고 있는데, 고려 문종 때는 47등이라는 복잡한 등차로 세분되고 있으며, 차액에도 일정한 비율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권무관록(權務官祿)은 임시관서의 성격을 띠는 제사(諸司)·도감(都監)의 실무직에 종사하는 준품관적(準品官的)인 관직이다. 권무관(權務官)의 녹봉은 최고 60석에서 최하 6석에 이르기까지 10등급이 있다.
외관록은 ≪고려사≫ 식화지 외관록의 기록에, 덕종 원년, 문종조(文宗朝), 숙종 6년, 인조조(仁宗朝)로 구분되는데 문종조와 인종조라고 된 부분은 명종대의 사실로 밝혀지고 있어, 문종조의 녹봉제와 대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앙관의 녹액보다 낮은 등급의 녹봉을 받고 있거나, 또 삼경(三京) 중에서도 서경의 유수는 같은 품관이면서도 늘 상위의 녹봉을 받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 등의 특징이 있다.
서경관록 및 동권무관록은 서경의 토관과 그에 따른 권무관록으로서 문종 30년에 서경토관은 최고 246석10두, 최하 8석, 권무관은 최고 40석, 최하 8석10두로 규정되어 있다.
비주록(妃主祿)은 여러 원주 및 귀숙비(貴淑妃)·공주·궁주(宮主)에게 주는 녹으로 문무반과 비교하면 최고가 8등에 해당하며, 종삼품급에 준하고 최하의 녹봉은 정4품관에 준한다.
종실록은 종실의 공(公)·후(侯)·백(伯) 등 봉작에 따라 6등작으로 되어 있다. 공은 고려의 최고녹봉액인 460석10두를 받는데, 당나라의 정일품관의 녹 7백석에 해당한다.
동경관록은 최고액은 빈객첨사(賓客詹事)가 3백석으로 최하는 약장승(藥藏丞) 4석으로 되어 있다.
잡별사(雜別賜)는 이속을 중심으로 한 말단 원리(員吏)에 대한 보수로서, 1년 이상 근무자, 3백일 이상, 180일 이상의 3단계로 나누어 별사미(別賜米)란 명목으로 되어 있다.
제아문공장과 3백일 이상 역사자(役事者)에게는 역시 별사미란 명목으로 좌창에서 지급되지 않고 해당관서의 공해전(公廨田)에서 거둔 도미(稻米) 중에서 급여되고 있다.
문종 30년(1076) 녹봉제의 정비 이후, 예종 16년(1121)에 주진장상장교록(州鎭將相將校祿)이 정비되었다. 이것은 당시 심각해진 여진(女眞)에 대한 북변의 군사적 위협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그 뒤 인종조에 다시 대규모의 녹봉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때 재정비된 녹봉제는 문무반 및 권무관·동궁관·비주·종실록이며, 새로 확대된 것이 치사관록(致仕官祿)이다.
치사관록은 이전에도 보이기는 하지만 이 때에 와서 완비된 것으로 보인다. 인종녹제(仁宗祿制)에서 문하시중 이하 어사대부 등에 이르기까지 6등급으로 규정되어 있다.
아마도 정4품 이상에게 치사록(致仕祿)이 주어진 듯하며, 예외는 있으나 당제와 같이 현임록(現任祿)의 반을 원칙으로 한 것 같다. 중앙관록은 문종 때와 비교하면 뚜렷한 변화가 보인다. 녹봉지급의 등급이 47등급에서 28등급으로 줄었다.
이것은 그 동안 관제의 정비작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비주록에서는 왕비가 새로 추가되고 제원주가 빠졌다. 종실록(宗室祿)은 문종 때의 6등작에서 5등작으로 줄고, 최고인 국공(國公)은 녹봉제 최고봉인 6백석이며 당나라의 정일품관보다 훨씬 웃돌고 있다.
권무관은 문종 때보다 일등이 줄어 9등으로 되고 관직수도 감소되고 있다. 동궁관록도 문종 때의 13등급에서 11등급으로 줄었다. 최고 3백석을 받던 빈객첨사와 다음 2백석을 받던 소첨사(少詹事)가 보이지 않고, 첨사부승(詹事府丞)에서 시작되고 있다.
녹봉제의 실태를 보면, 첫째, 관리임용과 녹봉지급의 기준은 매년 3월 전에 차출해 그 해 6월 전에 임용되면 녹봉의 전액을 주고, 6월 뒤에 부임하게 되면 녹봉의 반액을 급여하며, 3월부터 6월 전에 차출해 10월 전에 취임하면 반록(半祿)을 주고, 10월 뒤에 임용되면 그 해의 녹봉은 전혀 지급하지 않는다.
둘째, 녹봉지급 시기는 원칙적으로 일년에 2회 반록되었던 것 같고, 매년 정월 7일이 정기반록일의 하나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일정한 시기를 찾기 어렵다.
셋째, 녹봉을 받는 관리에게는 녹봉의 사령서라고 할 수 있는 녹패(祿牌)를 내렸다. 예외가 있으나 원칙적으로 인일(人日)인 정월 7일에 의식을 치르고 내려주고 있으며, 동시에 반록도 행해지게 되었다. 넷째, 녹봉의 품목은 쌀·조·보리 등이 중심이고, 백은(白銀)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다섯째, 녹봉을 지급하는 장소인 좌창은 문종 때에 우창과 함께 설치되어 충선왕 즉위 초에는 광흥창(廣興倉)으로 개칭되었다. 좌창은 10만여 결(結)에서 수납한 조세를 보유하는 큰 국고로서 약 14만석을 저장하고 있었다.
여섯째, 녹봉에 소요되는 양곡세입량은 문종 때의 기준으로 하면 1년에 13만9736석13두와 서경관록을 위한 서경대창(西京大倉)의 1만7722석13두를 합친 15만7천여 석이었다. 물론 이들 세입양곡은 국고수조지(國庫收租地)에서 들어온 것이다.
고려 말에는 50만결의 토지 중에서 10만결을 녹봉의 재원으로 계상하고 있어 전국 토지의 5분의 1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녹봉의 다른 재원으로서 제아문공장과 3백일 이상 역자(役者)의 별사(別賜)는 군기감·중상서(中尙署) 등의 공해전 수입으로 충당되어 정규관료와는 구별되고 있었다. 또한 외관록의 경우도 문종 녹제 이후 숙종 6년에는 외읍의 공해전이 재원으로 전용되고 있었다.
무인정권기에 접어드는 명종대에 좌창이 비어서 전목사(典牧司)·장작감(將作監)의 백금이나 포를 녹봉으로 전용해 충당하였다. 더욱이 몽고 항쟁기에 들어 녹봉은 물론 국가재정에 위기를 맞게 되었다.
1257년(고종 44) 백관에게 녹봉을 지급할 수 없게 되자, 녹과전 제도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식으로 실시하게 된 것은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된 뒤인 1272년(원종 13)이었다. 물론 녹과전의 지급은 녹봉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관리들은 녹봉과 겹쳐서 받게 된 셈이었다. 수급자는 문무양반에게만 국한되었다.
충렬왕 때에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따르는 전비·군량의 부담으로 창고가 허갈되어 녹봉의 재원은 부족하였고, 심왕(瀋王)이 설치되면서 그 녹봉까지 감당하게 되어 녹봉지급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공민왕 때는 왜구의 침입으로 녹전(祿轉)·조운(漕運)이 불통해 일부의 녹봉은 중단되기까지 하였다. 이 시기에 정치개혁이나 토지경제의 재건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녹봉제의 정비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마침내 1388년(우왕 14)에 360석을 받아야 할 재상의 녹봉이 20석도 못하게 되었다는 조준(趙浚)의 상서가 있었다. 1391년(공양왕 3) 과전법의 제정으로 군국(軍國)의 당면한 수요와 더불어 국가의 재정기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조선왕조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조선〕
조선시대의 녹봉제는 새 왕조가 출발하기에 앞서 재정적 기반이 구축되어 있었다. 고려 공양왕 3년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해 관료들에게 관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 분배하였다. 아울러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거의 정돈상태에 빠졌던 녹봉도 재원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녹봉의 재원이 어느 정도 배정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전제개혁론자 조준이 동서양계(東西兩界)를 제외한 6도의 간전 50만결 중 녹봉을 위해 10만결을 좌창에 소속시키도록 건의한 것을 보면 적어도 녹봉제를 재정비할 수 있는 재정적 기초를 확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1392년(태조 1) 문무백관의 직위를 정하고 새로운 관료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들에 대한 녹봉의 지급은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 부전녹봉조(賦典祿俸條)에 의하면 “1품부터 9품까지 18과로 나누어 반사(頒賜)하되, 삼사(三司)에서 녹패를 분급해 광흥창에서 지급하도록 한다.” 하였다.
고려 문종 때 47과에서 인종 때 28과로 개정되었다가 조선 건국 초에 18과로 정비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녹봉제 내용은 찾아볼 수 없고, 최초의 녹봉제 내용은 1407년(태종 7) 정월 좌정승 하륜(河崙)이 그 증감상정을 계청해 백관녹과가 경정(更正)된 데서 알 수 있을 뿐이다.
내용은 18과로 되어 있으나 제5과는 두 등급으로 나뉘어 있어 19등급으로 되어 있으며, 권무녹과까지 합하면 모두 20등급으로 되어 있다. 제1과 재내대군(在內大君)·정승 이상은 녹미 1백석, 세포·정포(正布) 합해 32필이며, 최하 제18과 종9품은 녹미 14석, 정포 4필로 되어 있다.
고려 인종조 경정녹과에서 종실의 최고녹봉액 6백석, 문무관의 최고녹봉액 4백석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의 것을 습용해 1년에 두 차례 주던 것을 1435년(세종 17)부터 사맹삭반록(四孟朔頒祿 : 춘·하·추·동의 맹삭인 정월·4월·7월·10월에 급여하는 것)이 논의되어 오다가 1438년에 결정을 보았고, 이듬해부터 실시되었다. 이 때 실시된 사맹삭반록제에서 각 과마다.
1년의 총지급액은 아무런 증감이 없다. 그러나 태종 7년의 각과 녹봉액과는 다소 감액이 있어 1407년에서 1438년까지 녹봉액이 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39년(세종 21)의 사맹삭반록제는 ≪경국대전≫에 거의 그대로 규정되어 있으며 다만 권무관록은 삭제되었고, 전(錢)이 저화(楮貨)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녹봉제는 태종 7년부터 세종 20년까지의 정비작업과 그 뒤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수록된 바와 같이 완비를 보게 되었다.
녹봉의 지급 대상은 종친·이성(異姓)의 봉군(封君)을 비롯해 문무관원과 잡직·공장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것이었다. ≪경국대전≫ 호전녹과조(戶典祿科條)에는 “각 과록은 실직에 따라 사맹삭으로 반사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관원이 실직이라고 해서 과록을 받는 것도 아니며, 모든 관원이 실직인 것도 아니다. 경관록을 동반직과 서반직으로 나누어 볼 때, 동반직 가운데에는 겸직의 직과(職窠)가 많고, 녹이 없는 무록관이 있었다.
동반직의 겸직된 직과는 당상관만의 경우 실직은 84인인 데 비해 겸직이 약 130직과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무록관이란 의금부의 당상관 및 각 아문의 제학·제검(提檢)·별좌·별검(別檢) 등이며, ≪경국대전≫에 실린 무록관의 수는 의금부의 당상관을 제외하고 모두 89인이 있었다.
그 밖에 동반직에는 동반속아문체아(東班屬衙門遞兒)와 동반속아문잡직체아(東班屬衙門雜職遞兒)가 있었다. 전자는 중앙관부에 세습하는 기술직·내시부의 관원 등으로서 총 156인이 있으며, 후자는 공장·마원(馬員)·악사·화원 등으로 수직대상자의 인원수는 3,350인에 이르는데 체아직의 수는 142인이었다.
이들 체아직에는 실직에 의한 과록과는 달리 체아록이 지급되었다. 또한 동반직에는 종친부·충훈부·의빈부·돈녕부·봉조하 등이 대상이 되었다. 산관에 대한 급록으로서 검교 각 품의 녹은 건국 이래 일반적으로 본 품과보다 3등을 낮추어 지급해왔다.
그러나 검교제는 1416년(태종 16)을 거쳐 1443년(세종 25)에 혁파되었으며, 이후 70세 이상의 유공자는 검교로서가 아니라 치사록의 형식으로 검교녹과에 의거 지급되었다. 실제로 내시부의 환관, 액정서(掖庭署)의 액정이 산관으로 녹을 받고 있었다.
그 후 1457년(세조 3)에 봉조청(奉朝請)의 법을 세워 공신·적장(嫡長) 및 동서반 당상관 중에서 봉조청에 응한 자에게는 과를 낮추어 녹을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1466년에 직전법의 실시에 따라 산관에게 직전을 급여하지 않게 되자, 봉조하 15원 이외에는 산관에 대한 녹봉이 없어졌다.
서반직은 중추원·오위도총부·오위·훈련원·내금위·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등의 아문으로 오위를 제외하면 겨우 50직과이며, 대부분이 타관으로 겸직되었다. 다만 오위의 군직은 3,282인인데 모두 체아직이었다. 이처럼 서반직은 거의 체아직으로 수직되어 체아록을 받게 되었다.
외관록은 건국 초 이래 관찰사·도절제사·처치사(處置使)·경력(經歷)·도사(都事) 등이 모두 경관으로 겸차(兼差)되었고, 이들에게 주어진 경관록은 대략 3천여 석이었다. 경관록이 주어지지 않았던 평안도도절제사는 문종 원년에, 함길도도절제사는 세조 6년에 각각 녹이 급여되었으며, 우후(虞候)는 양계(兩界) 외에는 급록되지 않았다.
주현의 수령은 일정한 녹봉의 정액이 없고, 아록전(衙祿田)이라는 늠전(廩田)이 있을 뿐이었다. 진(鎭)의 진장은 그들이 대체로 수령으로서 겸직되었기 때문에 주현에 주어진 아록전 이외에 따로 아록전이 지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록전이나 관둔전이 없는 독진(獨鎭)인 첨사·만호와 우후·교관(敎官) 등은 군자(軍資)에서 공급을 받도록 되어 있을 뿐이며, 향리는 녹이 주어지지 않았다.
녹봉의 반급 내용을 보면 각 과의 녹은 실직에 따라 반급했는데 품계는 높으나 직급이 낮은(階高職卑) 행직에는 실직에 따라 반사되고, 품계는 낮으나 직급이 높은(階卑職高) 수직에는 본계품을 넘어서 녹을 받을 수 없었다. 각 도의 관찰사·절도사·경력·도사 등의 녹봉은 실직에 따르되 한 등을 낮추어 녹을 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또 공신·종친·외척봉군은 품계가 제도화되지 않아 태조 이래 실직보다 한 등 혹은 세 등까지 낮추어 반록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의 제정당시에는 직질(職秩)이 상정되어 녹봉도 실직에 따라 반록하게 되었다. 녹봉의 반사일은 제1과에서 제6과까지는 사맹삭의 각 8일에 시작해 하루에 두 과씩 제17·18과는 14일로 되어 있다.
동서반을 막론하고 모든 수직자는 고신(告身 : 관리로 임명되는 사령장)을 받게 되었는데, 5품 이하는 대간의 서경(署經)을 거쳐 고신을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사 5품 이하 체아수직자는 고신을 주되, 입직일에 입직당상관이 전수(前受)의 고신을 조사해 분급하였다.
그러나 녹봉을 받은 뒤 대간이 검사해 만 2개월이 지나도록 전수고신을 납부하지 않은 자는 고신을 몰수하고 동시에 녹을 거두게 되어 있다.
양계 군사의 고신 역시 해당 도에 보내어 감사가 전수고신을 조사해 분급하되, 녹을 받은 뒤 만 2백일이 넘도록 전수고신을 사간원에 납부하지 않으면 고신과 녹을 몰수하였다.
이처럼 모든 관원에게는 고신이 분급되며, 고신에 따라 매년 봄의 맹삭에 녹패를 받아 수록하였다. 동서반녹패는 이조와 병조가 각각 분장하였다. 그리고 백관녹봉의 반사는 광흥창에서 시행하였다.
경관은 물론 관찰사·도사·절도사, 양계의 우후·평사 등의 녹도 역시 경창에서 지급되었다. 양계 군사의 녹도 경중(京中)에서 지급되었다가 1437년(세종 19)에 주재하는 주창(州倉)에서 급여키로 되었다.
녹봉의 재원을 보면, 고려 말 토지개혁 당시에 조준이 10만여 결을 좌창에 소속시키도록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 건국 초기의 녹봉을 위한 토지는 약 5만결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녹봉의 재원은 부족해 증액하기도 했으나 늘 채우지 못하였다.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 10만석 내지 12만석의 재원이 소요되므로 수만결의 녹전위전(祿轉位田)이 배정되었으며, 그래도 부족해 군자전조(軍資田租)에서 충당하였다.
이들 재원은 각 도에서 경중의 광흥창으로 조운되었다. 광흥창위전은 1445년(세종 27)에 국용전(國用田)의 제도로 바뀌었다. 고려시대 이래 조선 초기까지 용도에 따라 창고를 설치하고 각사위전이라 하던 것이 이 때에 폐지된 것이다.
녹봉액은 건국 이래 경중녹봉총액이 10만석 내지 12만석이던 것이 세조·성종 이후 명종 연간에 14만석 정도로 팽창되어 당시 1년 수세액 26만7천석의 반을 웃도는 양이 되었다.
외관의 녹봉 재원은 경관으로서 겸차되는 경우 경관록(京官祿)을 지급받지만 각 도 수령의 녹은 재원이 동일하지 않았다. 주현 등의 관아에는 지방관의 녹으로서 아록전(衙祿田)이 있고, 여러 영진에는 관둔전 등의 수입이 충당되었다.
세종 초 당시의 아록전의 총결수가 2만결이며, 1년에 4만석 정도가 수령의 늠록(廩祿) 등으로 지급된 것이라 한다.
주현만이 아니라 역·참·원·도 등에도 유역인전(有役人田)이 있었다. 그러나 지방향리에게는 요록(料祿)이 없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 둔 토관에도 지록(地祿)이라 하여 세조 때까지 계속 급여되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정비된 녹봉제는 세조·성종 때부터 관료층이 증가하면서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비상수단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정권 강화를 위해 집권 초기에 검교를 다시 설치하고, 봉조청 등으로 유공자에게 산관록(散官祿)을 반사했으며, 행직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집권 말기인 12년에 산관에게 급전의 혜택이 배제된 직전법을 실시하고, 산관록으로는 봉조하 15원만으로 국한시켰다.
이와 같이 산관록이 배제된 반면 성종 초까지 행직을 남발해, 이른바 행직당상이 정원의 4배를 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반의 산관은 서반체아직을 침식하게 되어, 관료층의 대기발령처나 예비직 같이 되었다.
그리고 연산군 때에 군직체아가 남급되고, 체아직은 당상관 및 조사(朝士)의 무소임자(無所任者)를 위한 대기처가 되었다. 중종 초에 정국공신(靖國功臣)에게 군직체아(軍職遞兒)를 주어 녹을 받게 하는 은전을 베풀었고, 많은 군병의 체아직은 문관에게 탈급되었다.
그리하여 세조·성종 때부터 침식되기 시작한 서반직은 중종 때쯤에 와서 거의 문관의 군직체아 수직에 의해 독점되었고, 체아직을 중심으로 녹봉제도 문란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정이 파탄되자, 녹봉제도 위기를 맞았다. 유형원(柳馨遠)은 임진왜란 후에 녹봉이 감소되었고, 종래의 세포와 저화도 제외되었다고 하였다.
1647년(인조 25)에 녹봉제가 개정되었다. 4반록에 있어 1기분의 녹이 정1품은 쌀 11석, 전미 2석, 콩 4석으로, 대군의 경우 쌀 3석을 더 추가했고, 4품 이하의 관원은 정·종의 구별없이 녹과가 단일화되어 13과로 구분되었다.
이로써 조선 초기 18과에서 개편되었으며, 마지막 9품의 경우 역시 1기에 쌀 2석, 콩 1석으로 여름·가을·겨울 3기에도 같은 양이 분급되고 있다.
그 뒤 1670년(현종 11)에 녹봉의 내용이 다소 달라지고 있다. 즉, 봄에 정1품은 쌀 11석, 콩 6석, 명주 2필, 정포 2필로 되어 있고, 13과 9품은 쌀 2석, 콩 2석, 명주 1필, 포 1필로 정하였다. 다만 여름에는 명주 대신 마포로 바뀌며, 4기분이 모두 같은 녹봉을 받게 되었다.
인조 때에 비해 명주·마포 등이 추가되고, 전미는 제외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삼남지방의 기근으로 백관의 녹봉을 감하고 쌀 1석에 전미로 대급한 사례가 있었으나 숙종 19년에 복구되었다. 1699년(숙종 25) 백관 6품 이상은 전 2백문을 주어 녹미 1석을 감하도록 하고, 1701년(숙종 27)에는 백관 6품 이상에 녹봉미 1석을 감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흉년이 들어 국가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종래 녹봉의 4반록제를 폐지하고 월봉제로 바꾸었다. 또한 13과에서 9과로 축소했으며, 제1과에는 대군·공주로 되었다. 제2과인 정1품은 매월 쌀 2석 12두, 콩 12두로 양이 뚜렷이 감소되었고, 명주나 정포 등이 제외되었다.
1721년(경종 1)에 또다시 녹봉제가 개정되었다. 이 때 숙종 17년의 9등과를 인조 25년 이래의 13등과로 다시 고쳤다. 그러나 인조 때와 비교하면 인조 때의 제1과 정1품은 1년에 쌀 44석, 전미 8석, 콩 16석이었는데, 이 때에는 쌀 30석6두, 콩 16석으로 양이나 품목에서 줄어들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문관품계를 개정해 조선왕조 5백여 년간의 전통적인 관료제도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었다. 이에 1895년 3월에 내각총리대신·각부대신 이하 일반관리의 관등이 규정되어 있는 〈관등봉급령〉이 칙령으로 공포되었다.
이어 무관 및 상당관등봉급령(相當官等俸給令)이 공포됨에 따라 전통적인 녹봉제는 새로운 제도로서 개혁을 보게 되었다. 갑오개혁의 제1차 내정개혁 과정에서 종래의 녹봉제를 폐지하고 개정된 품계에 따라 품봉(品俸)을 제정해 월급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쌀·콩 등 현물로 지급하던 종래의 녹봉과는 달리 관리의 품계에 따라서 월급을 화폐로 지급하게 되었다. 그 월급액은 〔표 3〕과 같다.
이것은 상후하박의 경향이 극심한 것이어서 전통적인 조선사회의 계급관념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품봉규정도 당시의 만성적인 재정궁핍으로 실시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제2차 내정개혁에서 〈관등봉급령〉으로서 관등별로 봉급을 정하고 그에 따라 봉급액을 제정했으며, 뒤이어 무관 및 궁내부관등봉급액도 책정되었다. 그러나 국가재정사정의 악화로 그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일부 외국의 빚을 얻어 지급하였다.
<<참고문헌>>또한 문관의 봉급은 일정한 비율로 감액조정해 지급하게 되었다. 어떻든 갑오개혁에 의해서 종래의 전통적인 현물지급제도인 관리녹봉제는 화폐를 지급하는 월급제로 전환해 근대적인 관료급료제도로 이행하게 되었다. 三國史記
<<참고문헌>>高麗史
<<참고문헌>>經國大典
<<참고문헌>>大典會通
<<참고문헌>>增補文獻備考
<<참고문헌>>한국사 17(국사편찬위원회, 1977)
<<참고문헌>>新羅의 祿邑에 대하여(姜晉哲, 李弘稙博士回甲記念韓國史學論叢, 1969)
<<참고문헌>>高麗祿俸制의 硏究(李熙德, 李弘稙博士回甲記念韓國史學論叢, 1969)
<<참고문헌>>朝鮮前期의 祿俸制(李載龒, 崇田大學校論文集 5, 1974)
<<참고문헌>>高麗祿俸制의 成立過程(崔貞煥, 大丘史學 15·16, 1978)
<<참고문헌>>高麗史食貨志外官祿條의 批判(浜中昇, 朝鮮歷史論集 上, 1979)
<<참고문헌>>高麗祿俸制의 運營實態와 그 性格(崔貞煥 慶北史學 2, 1980)
<<참고문헌>>高麗祿俸制의 變遷(崔貞煥, 大丘史學 18, 198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녹(祿)은 미곡(米穀)을 뜻하고, 봉(俸)은 포백(布帛)을 의미하여[『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121] 유품(流品) 외의 관인(官人)에게 지급되는 ‘급료(給料)’ 또는 ‘삭료(朔料)’와는 구별·사용된다.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녹사(錄事)
경아전(京衙前) 중에서 상위(上位)에 속하는 상급이서(上級吏胥)로서 소속 관사나 관원에 따르는 실무를 전장(專掌)하는 임무를 맡는다. 고려조에서 조선초기에 걸쳐서는 원래 8·9품(品)의 품관명(品官名)이었으나[『태조실록』권 1, 1년 7월 정묘] 몇 차례의 직제개편(職制改編)을 거쳐[『태종실록』권 27, 14년 1월 계사. 『세종실록』권 85, 21년 4월 경인] 세조(世祖) 12년 1월의 관제경정(官制更定) 때에는 녹사(錄事)·부녹사(副錄事)라는 직명(職名)을 사록(司錄)[의정부(議政府)]·봉사(奉事)·부봉사(副奉事)[봉상시(奉常寺)·선공감(繕工監) 등의 경우] 등으로 개칭하고, 녹사(錄事)라는 직명(職名)은 품관 계열(品官系列)에서는 아주 배제하여 그것이 유품(流品) 외인 아전(衙前)의 직명(職名)으로 전락되고 별감(別監)·지인(知印) 등의 고급이서(高級吏胥) 등도 혁파되어 녹사(錄事)로 일원화된 것이다. 세조(世祖) 8년 당시의 토관 계열(土官系列)에도 녹사(錄事)[정·종9품], 부녹사(副錄事)[종9품, 권무(權務)]라는 직명(職名)이 있었으나 이들도 그 뒤에 개칭되었다. 녹사(錄事)는 서리(書吏)에 비하여 그 임기도 짧으며, 원래 품계(品階)를 지닌 자는 입속(入屬)할 수 없이 제한한 것은 성종(成宗) 5년 6월의 일이고[『성종실록』권 43, 5년 6월 계유], 종6품 거관(從六品去官)으로 수령취재(守令取才)에 응시할 기회를 주어 입격자(入格者)는 서용(用)하고 불입격자(不入格者)에게는 영직(影職)을 주게 한 것은 성종(成宗) 13년(1482) 6월의 일이다[『성종실록』권 142, 13년 6월 정묘. 韓永愚, [朝鮮初期의 上級胥吏 ‘成衆官’]『동아문화(東亞文化)』권 10, 1971].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녹사(錄事(고려조선초하위관직))
고려와 조선 초기에 중앙의 여러 관서에 설치된 하위관직
고려와 조선 초기에 중앙의 여러 관서에 설치된 하위관직. 고려시대 중앙의 여러 관부에는 문하녹사 등의 정7품에서부터 병과권무(丙科權務)에 이르기까지 각급의 녹사직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조선 초기에도 8품에서 권무에 이르기까지 각급의 녹사직이 설치되어 있었다.
참하직(參下職)에 해당하는 각급의 녹사직은 1466년(세조 12) 관제개혁 때 사록(司錄)·봉사(奉事)·부봉사(副奉事)·부직장(副直長) 등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지거나 혁파되어, 관직명으로서의 녹사는 없어졌다.
<<참고문헌>>高麗史
<<참고문헌>>經國大典
<<참고문헌>>大典會通
<<참고문헌>>朝鮮初期의 錄事(申解淳, 成均館大學校論文集 18, 197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녹사(錄事(중앙상급서리직))
조선시대 중앙 관서의 상급 서리직 관직
조선시대 중앙 관서의 상급 서리직 관직.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성중관(成衆官)으로 총칭되던 여러 종류의 상급 서리들이 세조 때 정리되어 녹사만이 남게 되었다.
의정부와 중추부에 나뉘어 소속되었으며, 문반의 관부에는 의정부에서, 무반의 관부에는 중추부에서 나누어 파견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2품 이상의 실권이 있고 업무가 많은 관부나 대신들에게 배정되었다. 녹사취재(錄事取才)를 통해 선발되며, 음자제취재(蔭子弟取才)에 합격한 자도 자원하면 선발되었는데, 원래 품계를 가지고 있는 자는 선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종류를 보면, 관부에 배정된 수청녹사(隨廳錄事)와 대신에게 배정된 전속녹사(專屬錄事, 陪錄事)로 구분된다. 전자는 주로 관부에서 문서의 취급과 기록 및 연락 업무를 담당하였다. 후자는 주로 대신의 명을 받아 공문서의 전달이나 구두 연락의 업무 및 기타 잡무를 담당하였다.
근무 일수 514일이 되면 품계를 받았고 종6품의 근무 일수를 채우면 녹사직에서 물러났는데, 재직 기간은 약 10년 정도였다. 체아직(遞兒職)으로서 단지 3년에 한번 정도밖에 녹봉을 받지 못했으며, 그나마 조선 후기에는 없어졌다.
1년 동안 두 차례의 도목정(都目政)에서 10인이 물러났으며, 이들 가운데 수령 취재(守令取才)에 합격하면 수령에 임용되었다. 불합격자는 결원이 있는 무반의 체아직에 임용되었다.
녹사가 되는 자들은 조선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주로 사족(士族)의 자제들이어서 사회 신분적 지위가 일반 사류와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녹사 출신들의 품관(品官) 진출이 극도로 폐쇄되어 벼슬길에서의 녹사직은 그 의의가 상실되어갔다. 그 결과 사족 자제들은 이를 기피하게 되고, 사회 신분적 지위 또한 양반·사류와 점차로 구별되어 중인화하였다.
<<참고문헌>>高麗史
<<참고문헌>>世祖實錄
<<참고문헌>>經國大典
<<참고문헌>>續大典
<<참고문헌>>大典會通
<<참고문헌>>朝鮮初期의 土官에 對하여(李載龒, 震檀學報 29·30합병호, 1966)
<<참고문헌>>朝鮮初期의 上級胥吏-成衆官-(韓永愚, 東亞文化 10, 1971)
<<참고문헌>>朝鮮初期의 錄事(申解淳, 成均館大學校論文集 18, 1974)
녹사(錄事(조선토관직))
조선 초기의 토관직
조선 초기의 토관직. 조선 초기 평안도·함길도의 평양·의주·강계·함흥·회령·경원·경성·온성·부령 등 각 관의 정9품·종9품 토관직으로 설치되어 있었으나, ≪경국대전≫에 참사(參事)·섭사(攝事)로 정리되고 있다.
<<참고문헌>>朝鮮初期의 土官에 對하여(李載龒, 震檀學報 29·30합병호,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