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에제키엘 1,2-5.24-28ㄷ 마태오 17,22-27
때때로 성경 말씀이 수수께끼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도 그런 난해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의 말씀으로 시작되어,
곧바로 앞뒤 맥락과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성전 세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나옵니다.
그러고는 물에서 건져 낸 물고기와 그 입 속에 담긴 동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는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으로, 그 뜻을 유추하고 비교해 볼 다른 성경 구절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초대 교회 공동체가 마주하였던 문제를 봅니다.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이들 사이에
성전 세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랐기에, 신자들이 분열되지 않도록 유다교의
전통에 충실한 이들의 입장을 인정하였다는 설명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한 영성적인 해석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먼저, 우리말 성경에서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의 성경 본문을 직역하면 자녀들은 ‘자유롭다’입니다.
이를 통하여 오늘 복음의 주제를 자녀들의 자유로 보는 견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자유의 대가로
우리가 내야 할 유일한 세금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이웃에 대한 형제적
사랑이라는 세금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세금을 내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물속에서 고기를 건져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곧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예속의 조건에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드시고자 당신 자신을 사람들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스스로 사람의 손에 예속되실만큼
사람을 한없이 신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유롭지 못하고, 부모의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부모는 자유 의지로 기꺼이 아이를 보살피면서 스스로 아이에게 매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면
자유인으로서 다시 자기 아이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자유를 얻은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내 자유가 예수님처럼 다른 이를 섬기고 사랑하는 자유인지 자문해 봅시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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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에제키엘 1,2-5.24-28ㄷ 마태오 17,22-27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성전세는 모세가 “누구나 자기 영혼의 속죄를 위하여 주님께 반 세겔을 내야 한다.”
(탈출기 30,13)고 말한 대로, 영혼과 육신의 속죄를 위해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은 자신이 다스림을 받는 왕에게 내는 것임을 일깨워주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니 성전세를 면제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곧 ‘어떻게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느냐?’
는 반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을,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지혜로운 방법으로 세금을 내기로 하십니다. 곧 세금 낼 돈을 호수로 가서
낚시를 해서, 먼저 잡힌 물고기의 입을 벌려 거기에 들어있는 은전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신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당신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십니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사랑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당신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그리고 제 입에는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이 물려 있습니다.
당신 말씀이 물려 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명의 말씀이 저를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칩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저는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이오니,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을 입에 물고
당신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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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웅 신부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에제키엘 1,2-5.24-28ㄷ 마태오 17,22-27
메시아의 비밀 그리고 성전세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한가지는 당신의 수난예고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왜 그렇게 되어야 되는지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응은 그들이 기대했던 주님께 대한 실망이었고 낭패였습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며 기적도 행하고 가르침도 주시기를 바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하루빨리 당신 왕국을 세우고 자기들을 등용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세상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 주님께서 수난하시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단히 나무라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네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니까요.
또 부활이야기를 하시지만 수난하게 될 예수님을 미리 알았다면 그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신앙생활은 마음도 편하고 또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좀 잘되기 원해서 아닙니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된다고 하지만, 십자가는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제자들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이야기를 미리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또 어떤 분이신지를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미리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는 당신의 참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 빼놓고 다른 가르침이나 기적으로만 으로는
당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도 알 수 없고,
우리 모두를 어떻게 구원 해주실 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이 주님이십니다”하고 외쳤을 때
“입 다물어라”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조차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 것도 몇 번이나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메시아의 비밀” 이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메시아의 비밀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베드로 일행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후 성령의 내려오시자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져야하는 우리자신의 모든 어려움,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피하고서는 즉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또 주님의 제자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의 수난을 만류했다가 야단맞았지만 나중에 자신의 십자가를
끝까지 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십자가 피하고서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도 없고,
주님의 질책을 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중에 두 번째는 성전세금을 내는 문제입니다.
그 당시 유대에서는 남자가 20세가 되면 매년 성전세를 냈습니다.
세금을 내는 돈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리스 돈 드락메가 아니라 유다 자기나라 돈 세겔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돈으로만 성전세를 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려하던 그들이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다른 돈은
일상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성전세금을 내는 데는 불가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신으로 숭배되었으니 당연히 우상입니다.
우상이 새겨져 있는 돈,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우상이 된 돈이 성전마당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돈 그것은 하느님을 공경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하느님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마당의 환전상 자판을 뒤집어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바치게 하셨습니다. 또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서 봉사하던 제관들과 다른 종사자들은 성전세를 면제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시몬아 세상 임금들은 누구에게서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냐, 아니면 남들이냐?”
베드로는 “남들입니다”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하고 확인하십니다.
그러니 주님도 또 베드로도 성전세를 면제 받는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 없다”하시고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정해진 세금을 바치지 않으면, 그것이 교회 내 일 때는 교무금이 되겠습니다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하는 잘못도 범하겠지만,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될 것입니다.
부산교구 황태웅 요셉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