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성모 승천 대축일
요한 묵시록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코린토 15,20-27ㄱ 루카 1,39-56
"예수님이 새로운 모세라면, 새로운 ‘계약 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은 '성모승천' 교리를 예형론을 통해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지 새 아담만이 아니라 새로운 출애굽을 이끌 새로운 모세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40일 밤낮으로 시나이 산에서 단식했듯이(탈출 34,28) 예수님께서도 40일 밤낮을
광야에서 단식하시고(루카 4,1-2), 모세가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로운 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였듯이(탈출 16,1-31), 예수님께서도 외딴 곳에서 신비로운 빵을
많은 군중에게 먹이시고(루카 9,10-17), 모세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계약을 맺듯이(탈출 24,1-8),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 때 열두 제자와 “새 계약”(루카 22,20)을 맺으십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출애굽’이 이집트 땅에서 시작해서 약속의 땅에서 끝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출애굽’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하늘나라에서 끝납니다.
(루카 9,30-31; 24,50-51)
곧 지상의 약속된 땅은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단지 출발지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새로운 모세라면, 새로운 ‘계약 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계약 궤’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 도착해서 십계명을 받았을 때(탈출 19-20장),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지상 거처로서 당신 백성들 가운데 머무실 장소로 ‘성막’을 짓고(탈출 25,8-9),
그 안에 당신께서 백성을 만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장소로 ‘계약 궤’를
만들라고 합니다. (탈출 25,8-22)
이 ‘계약 궤’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개의 증언판’(탈출 31.18)과 ‘만나’가 담긴 항아리,
그리고 싹이 돋은 대사제 아론의 신비로운 ‘지팡이’가 모셔졌는데(탈출 16,34; 민수 17,25),
그 위에 하늘에서 주님의 ‘영광인 구름’이 내려와 머물렀습니다. (탈출 40,21.34-38)
이 ‘영광의 구름’은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지상에 내려오셨다는 가시적인
표지였으며, 당신 백성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론 제국에 파괴되기(기원전 587년) 전에
하느님 ‘영광의 구름’이 예루살렘에서 떠났다고 전합니다. (에제 10장)
그리고 예레미야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다시 ‘자비를 보이실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야 하며, ‘주님 영광의 구름’이 나타난 것을 보면,
거기 ‘계약 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2마카 2,8)고 말합니다.
사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는 ‘하느님 영광의 구름’과 ‘잃어버린 계약 궤’가 없이
텅 비어 있었고, 그래서 당시 유다인들은 잃어버린 ‘계약 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하느님 현존을 나타내는 ‘영광의 구름’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께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루카 1,35)
이렇게 해서 성막 위에 내려온 ‘영광의 구름’과 ‘마리아에게 내려온 성령’이 연결됩니다.
곧 “주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다(επισκιαξω).”(탈출 40,34-35)는 말과
“성령이 동정 마리아를 덮을 것이다(επισκιαξω).”(루카 1,35)라는 말이 연결됩니다.
곧 성막 안에 자리한 ‘계약 궤’가 출애굽 여정에서 하느님 현존의 특별한 자리였듯이,
이제 주님 탄생 예고를 통해 마리아는 새 출애굽 여정에서 하느님 영광이 머무시는 특별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 탄생 예고에서
마리아를 ‘새 계약 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주님 현존이 머무는 곳인 ‘계약 궤’가 나타날 때처럼
환희에 차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새로운 출애굽을 이끌 ‘새 모세’로, 그리고 마리아를 하느님 현존의 새로운 지상 거처인
‘새 계약 궤’로 묘사해 줍니다.
또한 오늘 제1독서에서는 ‘태양을 입은 여인’에 대한 요한의 환시(묵시 11,19-12,2)를 통해,
‘여인과 계약 궤’와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하늘에 있는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나면서, ~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날 것입니다.”(묵시 11,19-12,2)
이렇게 ‘계약 궤’와 ‘여인’은 하늘의 성전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참된 계약 궤’가 더 이상
지상에 있지 않고 천상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기에서, ‘계약 궤’와 ‘여인’은
한 사람에 대한 이중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새 계약 궤’라면,
그녀의 몸은 ‘하느님의 지상 거처’라는 말이 되고, 예수님은 ‘지상의 하느님’이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줍니다. 결국 ‘새 계약 궤’로서의 마리아의
정체성의 신비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아주 깊은 신비를 밝혀줍니다.
이를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느님 말씀의 거처이신 분,
오 새로운 계약의 궤여,
순금대신 순결을 입으신 분,
당신은 계약의 궤,
참된 만나를 담은 황금 그릇,
신성이 머무르는 육신이로다.
... 당신 안에 온전한 발, 머리, 완전한 하느님의 온몸을 지니고 계시니,
당신이야말로 하느님께 쉬시는 거처로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리아 안에 주님께서 친히 와 계시니, 마리아께서는 ... 계약 궤이며,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다.”(교리서 2676항) 그래서 교종 비오 12세께서는 1950년 마리아의의 육신이
천상으로 들어 올림 받으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썩지 않는 나무로 지어져 주님의 성전에 안치된 계약 궤를 동정녀 마리아의
지극히 순결한 육신의 예형으로 여겼습니다. 마리아의 육신은 무덤의 부패로부터
더럽혀지지 않은 채 보존되었으며, 천상의 지고한 영향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습니다.”
(교종 비오 12세,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 26항)
이제 우리는 답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계약 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신약성경은 ‘참된 계약 궤’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말해줍니다.
바로 “하늘에”(묵시 11,19) 있습니다. ‘옛 계약의 궤’는 참된 하느님의 거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요한 1,14)의 어머니 마리아의 예형인 것입니다.
곧 마리아는 ‘새 계약의 궤’로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되시고,
육신의 부패로부터 보존되시고, 하늘로 들어 올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들어올림 받으신 마리아는 육신의 부활과 승천이 예수님께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부활하고 승천하리라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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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한 알베르토 신부
성모 승천 대축일
요한 묵시록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코린토 15,20-27ㄱ 루카 1,39-56
하늘을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오묘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인생길을 걷는 동안
그 생명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사연들이 담깁니다.
어찌 보면 사람의 시간이라는 것이 모두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모님의 시간도 그렇습니다. 작고 연약한 한 아이 안에서 인류의 구원을 믿고 맡기신
주님 사랑을 헤아려봅니다. 사람이 이뤄낸 것은 참 미약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담겨진
하느님 은총의 위대함을 만납니다. 한편으론 그 약함으로 인해, 늘 넘어지는 무력함으로 인해
하느님 섭리의 위대함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들의 약함의 위대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약함을 넘어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말입니다.
우리는 약하기에 하느님의 은총에 더 많이 기대게 됩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제 하느님 손에
달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되게 다시 희망할 것입니다. 오직 당신에게만 희망을 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만이 기어이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역사를 합당하게 바꾸어주실 것임을
우리는 성모 승천이라는 믿음 속에 담아 오늘 다시 희망을 간직하고 되새겨봅니다.
부산교구 김인한 알베르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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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균 예로니모 신부
성모 승천 대축일
요한 묵시록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코린토 15,20-27ㄱ 루카 1,39-56
성모님의 전구
세상에는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바람이 부는 날에 들리는 바람 소리,
비가 내리는 소리, 자동차 소리, TV 소리, 이 밖에도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인 수많은 소리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는 반면에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습니다. 아주 멀리서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 눈이 내리는 소리,
이러한 소리 이외에도 분명히 움직이고, 소리를 내지만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하는
소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는 그 기도 속에도 침묵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를 통해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는 분,
순명과 겸손의 모범이신 어머니가 바로 성모님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떠한 도움을 주시는가를 깨닫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우리의 기도를 채워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부족한 기도와 동기를 완전한 것으로 채워 전구해 주시는 것입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 살아있으면서도 지옥을 체험하는 순간에 우리는 선뜻
하느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 서는 그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성모님 앞에 서게 됩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승천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에게 익숙한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제자에게 말씀하신 대로 요한은 성모님을 모셨고 소아시아 지방에서
임종하신 성모님을 동굴에 모셨을 때, 멀리에 있던 토마 사도는 성모님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을 뵙고자 동굴에 들어갔을 때, 동굴은 비어있었고
그 안에는 장미 향기만 머물렀다고 전승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사도들의 어머니셨고, 이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의 어머니로 계십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녀들에게 좋은 것, 좋은 길을 인도하고자 하듯이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교구의 대부분 성당에는 진입로나 마당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성모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성당을 오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분이 성모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드리러 오거나 성당을 지날 때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겨주시는 분,
또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마지막까지 배웅해주시는 분이 성모님입니다.
무심코 지날 수도 있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듯 성모님을
바라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우리를 맞이해 주시고 또 배웅해 주심에
감사할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성모님의 우리를 위한 기도는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세상의 소리처럼,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조용히 지켜주실 것입니다.
대축일의 기쁨을 지내는 오늘,
성모님의 전구와 도움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인천교구 유민균 예로니모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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