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에제키엘 16,1-15.60.63 마태오 19,3-12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오 19,6)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묻습니다(마태오 19,3). 당시에 샴마이 학파는 간음죄 외에는 아내를
내보낼 수 없다고 보았으나 힐렐 학파는 어떤 이유로도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논쟁에 예수님을 끌어들이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논쟁에 말려들지 않으시고,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니,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밝히십니다(마태오 19,4-6). 혼인은 남녀의 인간적인 결합일 뿐 아니라 도무지 갈라 설 수 없는
하나의 혼인인격을 이루는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마태오 19,7-9)
곧 이혼과 재혼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지만, 아내가 혼인을 무효화하는 불륜을 저지른
경우에만은 예외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고 재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외 규정은 혼인의 신성함을 강조한 것으로서 마태오가 소속되었던 시리아 교회의
소박법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다시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오 19,10) 하고 말씀드리자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독신을 택한
이들을 칭찬하십니다(마태오 19,12). 예수님께서는 독신생활의 우월성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독신생활을 선택한 이들처럼 혼인한 이들도 오롯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우리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성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듯 우리는 부부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하느님의 선물인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는 하느님의 선물임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키워가는 자리로 바꿔가야겠지요.
부부란 평생을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살아가야 할 ‘영원한 벗'입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과 영혼이 일치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껍데기만 부부요 진정한 부부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쉽지 않음에도 상대방의 인격을 통째로,
끝까지, 조건 없이 받아들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혼인으로 맺어진 가정공동체는 하느님의 집이며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따라서 기도안에서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늘 함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에페소서 5,22-33) 서로의 결점, 약점, 악습, 고통,
상처, 시련, 기쁨 등 상대방의 전 존재를 남김없이 받아들여야겠지요.
함께 기도하면서 충실하고 헌신적이며 몰아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행복에 이를 순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상호신뢰와 인격존중,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과 경청의 자세도 필수적이겠지요.
이런 사랑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영원을 지향하며, 모든 인간관계의 뿌리요 원동력입니다.
오늘도 몸과 마음과 영혼의 기쁜 상호 교환을 통한 사랑의 깊은 일치에 이를 수 있도록 더 기도하고
죽기까지 경청하며, 전 존재를 건네고 받아들이는 사랑을 실행하려 힘썼으면 합니다.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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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에제키엘 16,1-15.60.63 마태오 19,3-12
이미 이혼하였거나 혼인 생활의 위기로 고통을 겪는 신자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듣기
힘겨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생활이 파경에 이르게 되는 이유들을 이해하지 못하시나?’
그런데 이런 의문은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실패한 이들에 대한
단죄나 심판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부부의 결합이 깨지는
고통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율법적인 바리사이들과 논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옭아맬 구실을 찾고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처럼,
또 기회만 되면 언제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을 거슬러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말한 “이혼장”이라는 것은 ‘단절 증서’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혼인의 유대가 깨진 여인이 나중에 다른 남자를 만날 수도 없고, 만일 남자를
만나더라도 죽음의 형벌이 내려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을
보호하고 해방시켜 주려는 조항을 만들어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말씀의 핵심은 혼인과 이혼에 대한 법적인 다툼이 아니라 남녀의 성소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상기시키는 데에 있습니다(창세 1,27; 2,24 참조).
사람은 아무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서로 자기 몸처럼 대하고 돕고 협력하면서 사랑을 이루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시고 혼인을 통하여 당신께 부르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혼인이 법적 문제로 귀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혼인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온갖 시련과 위기와 갈등 속에서 모든 부부가 매순간 다시 출발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면서
“한 몸”의 과업을 아름답게 이루어 가기를 기도합시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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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에제키엘 16,1-15.60.63 마태오 19,3-12
행복에로의 부르심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은지 묻는 것으로
시작하여 혼인 성소와 다른 성소에 대한 것까지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얘기의 전개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남편의 처지가 그렇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라고 하시는데
바리사이나 제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인간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옛날 결혼의 경우 어른 또는 집안이 결혼 상대를 결정한 것에 비해 요즘은 당사자들이
서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진정 어떤 것입니까? 결혼이나 수도 생활이 하느님의 부르심입니까? 나의 선택입니까?
아무리 하느님의 부르심일지라도 내가 싫으면 걷어찰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결혼이나 수도 생활 모두 부르심이지만, 그 부르심을 내가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나의 몫이고, 그렇기에 아무리 하느님 뜻이어도 내가 싫다고 걷어차면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부르심보다 먼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것이 그분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보다 먼저 자유를 주셨고 그것이 그분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은총보다 먼저 자유를 주셨고 그것이 그분 사랑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거나 걷어차는 것은 자유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로 사랑하게도 하시고 싫어하고 미워하게도 하셨으며,
그 자유로 당신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신앙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그 부르시는 뜻을 사랑이라고 믿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신앙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거나
알더라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정치 않기에 걷어차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결혼이건 비혼이건 이혼이건 졸혼이건 또 수도 생활이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데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랄까 사랑은 행복이어야 하고,
신앙인이라면 그것을 사랑의 부르심이라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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