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먼 내 젊은 날의 이야기다
룸메이트와 생활하다
드디어 나만의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했다
룸메이트는 자면서 이를 갈고 나는 코를 골았다
우리는 서로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들이 자면서 한 일을 부정했다
거기다 룸메이트인 그녀는
단 5분 만에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만큼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다, 생각하고
우리는 결국 헤어져서 각자 따로 살기로 했다
그동안 경제적으로 참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지인의 소개로 일하게 된 곳에서
모은 돈이 좀 있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서
정말 운 좋게 아주 적은 돈으로
나만의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도배, 장판, 단열재, 방음등 논문을 쓸 정도로
상세히 알아보고 꼼꼼하게 따져서
적은 돈으로 나만의 정글 같은 집을 꾸몄다
큰 방은 서재 겸 음악실로 꾸미고
작은 방을 침실로 꾸몄다
침실의 침구는 흰색으로 심플하게 꾸미고
테라스에서 거리의 사람들을
여유롭게 내려다보며
친구가 선물해 준 영국제 찻 잔을 들고
우아하고 여유롭게 차를 마셔야지,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라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드디어 공사를 마무리하고
자축하는 기념으로 근처 대학가 술집에서
술을 시켜 마시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청년들 중 한 청년이 말을 붙인다
혼자 오신 것 같은데 저희랑 같이 술 마시며
대화할래요?
그때만 해도 내가 좀 까칠한 도시의 여자라
나도 모르게 "꺼져" 라는 말이 쉽게 나왔다
절대 쌩날라리는 아니었다
청년은 당황했는지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다음엔 그 무리 중에 다른 청년이 내 자리로 왔다
외로워 보이시는데 저희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요?
외로운 게 아니라 피곤하다
오늘은 절대적으로 혼자 있고 싶다
느그들끼리 재밌게 놀아라
이쯤 해서 포기할 줄 알았는데
그 무리 중의 또 다른 청년이 와서
에이! **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인데
저희 나쁜 사람 아니에요. 저희랑 같이 놀아요
혼자 술 마시면 재미없잖아요. 앙앙
뭐! 앙앙, 어디서 앙탈을!!
많이 피곤해서 조용히 술 먹고 나갈 거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했건만
내가 허락도 안 했는데 내 테이블로 와
세 명이 빙 둘러앉아 있는 것이다
이런! 무례한 놈들 같으니라고!
이 놈들이 말이 안 통하네
할 수 없이 일어나서 가려고 하는데
조금만 얘기할 시간을 달라고
하두 애원을 해서 다시 앉았다
지금 같으면 세상이 무서운지라
말 한 마디 안 섞고 개무시하고
상종도 안 했을 텐데...
그때는 간댕이가 부어도 한참 부었나 보다
남학생들은 가벼운 농담이나 하며 놀려고 했으나
철학사, 문학사, 음악사, 미술사, 세계사에 이어
스탕달의 '적과 흑' 과
'단테의 신곡' 에 관한 토론을 하자
지겹고 재미가 없었는지 화장실에 갔다 온다더니
슬그머니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말이나 하고 가지, 말도 없이 그냥 가냐?
근데 한 놈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제법 지적인 청년 같았지만
음흉한 눈 빛을 감지한 지라 떨궈낼 요량으로
재미없고 지루하면 스스로 떨어져 나갈 거라
생각하고 심도 있는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 에 관한 독서 토론을 했는데
예상 밖으로 청년은
소설 속의 인물들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자신이 느낀 바를 임팩트하게 논리적으로
제법 말을 잘했다
창백한 나의 지성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번뜩이는 언어로 내 정신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소설의 주인공인 줄리앙이란 청년을 통해 본
줄리앙의 세계와 인생은 욕망과 타락의 접점에서
스스로가 만든 덫에 부딪히며
허무한 추락으로 이어진다
한 젊은이의 야망과 좌절을 통해 본
프랑스의 정치와 시대적 배경은
스탕달이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하였다
이 책을 나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읽었는데
성인이 돼서 다시 읽으니
그때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나의 내면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
우리가 속한 세계와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 사이에서
고뇌하는 젊은 날의 슬픈 자화상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이켜보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음흉한 눈 빛의 정념과 매혹적인 지성이
팽팽하게 공존하는 이 청년은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얘기를 하다 보니 꽤 시간이 늦어져서
그는 내게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주며
시간 있을 때 못다 한 얘기를 다음에 나누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마법에 걸린 듯 몽롱한 상태로 테라스에서
별을 보며 상념에 사로 잡혔다
솔직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왠지 만나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처를 찢어버리고, 바쁘다 보니
청년에 대한 생각도 차츰 잊혀져 가던 어느 날
별생각 없이 예전에 그 청년을 만났던 술집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갔는데
웨이터가 나를 알아보고 쪽지를 건네준다
지금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게
어떻게 한 번 보고 내 얼굴을 기억했는지
정말 그것이 알고 싶다
느낌상 이곳은
그 청년의 단골 술집이었던 것 같다
청년한테서 온 쪽지를 읽어 보니
"당신의 연락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은 나한테 빠질까 봐 나를 두려워하시는군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당신 일상의 질서와 마음의 고요를 깨뜨렸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하숙비도 밀리고
경제적인 사정이 좋지 못해 지금 많이 힘듭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혹시 여유가 있다면
돈 좀 꿔 줄 수 있나요?"
뭐야? 이거였어?
차암나! 나를 물주로 생각한 거야?
청년에 대한 얘기를 듣고
친구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어떻게 초면에 돈을 꿔달라고 하니?
정말 황당한 인간이다
친구들은 깔깔깔 웃는데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나한테 접근한 건가!
결국 돈 때문에 나한테 접근한 건가!
짧은 순간이나마 나는 정신의 스승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감격스러웠는데...
차라리 쪽지를 읽지 않았더라면
젊은 날의 풋풋한 추억으로 간직됐을 텐데...
쪽지를 읽기 전, 딱 거기까지가 좋았는데..
기대가 너무나 컸던 것일까
갑자기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 같은
이 느낌은 대체 뭘까?
친구들 중의 한 명은
그날 내게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남자는 말이야
아무런 이유 없이 여자한테 다가오지 않는단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 착한 여자, 섹시한 여자
똑똑한 여자, 돈 많은 여자한테 관심이 많지
그리고 마지막에 계산서를 내민단다
그 대가를 치르는 건 여자의 몫이겠지
남자의 본심을 알았을 땐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단다
근데 아무리 돈이 궁해도
어떻게 초면의 여자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하니?
나는 어떤 여자일까?
나는 예쁜 여자도, 착한 여자도, 섹시한 여자도
똑똑한 여자도, 돈 많은 여자도 아닌 것 같다
나는 그저 웃기는 여자가 되고 싶다
남자를 웃게 하는 여자...
남자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게 하는 여자
이 얼마나 근사하고 매력적인 여자인가!
그리고 나도 재밌고 웃기는 남자가 좋다
그래...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내는 것...
그것이 인생이리라...
첫댓글 웃기는 여자...
저도 되고 싶습니다 ㅎ
ㅎㅎㅎ
저랑 같은 과군요
무쟈게 반갑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일단 겨드랑이 간지럼부터
태우세요. 웃기는 여자로 등극될겁니다. ㅎ~
@적토마
ㅎㅎㅎ
미치긋다
진정 나를 웃기는
남자네요!!
@삶의지혜
2차 리그의 챔피온으로 등극하려면 부위별로
간지럼 강도를 연구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어요.
겨드랑이는 반응을 보여도 발바닥은 요지부동
곰발바닥 같은 사람도 있더라구요. ㅋㅋ~
@적토마
곰발바닥이라는
말에
빵 터졌습니다
혹시
적토마 님이
곰발바닥? ㅎ
@삶의지혜
저는 적토마 말이므로 말발바닥입니다.
어느 누가 와도 편자에 단련된 발바닥이라
반응이 없어요. 족저근막염도 발생안하고...ㅋ~
@적토마
ㅎㅎㅎ
참 저같으믄 우리지혜님 하고 머리복잡한 이야기 안할텐데요
지혜님이 깐깐한여인 이란 ㅎㅎ
ㅎㅎㅎ
저 웃기는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이 꿈인
뇨자랍니다
그때는 몰랐겠지만..
돌이켜보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을법 합니다..
그때 그청년 ..
마법같은 언변으로 쓴 쪽지의 내용들
참으로 용감무쌍 합니다,,ㅎㅎ
혹시 알아요
속마음은 솔직히 돈을 빌리려는게 아니고
당신의 속마을을 알아보고 싶었을런지??? ㅎ
즐감합니당~~~
ㅎㅎㅎ
정말 말을
잘 하더라구요
언어의 마술사
같았어요
내 속마음을
알고 싶었으면
그냥 말을 하쥐! ㅎ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ㅎㅎ
무거운것보다 재미난것이 좋지요^^
그쵸~
웃음은 우리 삶의
최고의 양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홍실이 님의
하루하루가 늘
웃음꽃으로 활짝
피시길 바랍니다
글을 잘 쓰시네요.
장면들이 눈에 그려져요.
그 남자
말은 잘 했을지 모르나
연애기술은 좀 부족했나보군요 ㅎ
이야!!~~
글의 핵심을 간파하는
윈도우 님의 센스에
엄지척 입니다
그렇지요~
말 잘하고, 말 많이 하면
뭐하나요?
연애의 기술이 부족해서
다 놓치고 미움만 받는다면
참 답답한 노릇이죠~ㅎ
저는 재미있고 웃기는 남자이면서 하숙비
밀린 얘기는 하지 않을테니 스탕달 얘기나
해주세요 (^_^)
ㅎㅎㅎ
스탕달은 필명인데
이 책을 중학교때
읽었을 때는
인물에 꽃혀 읽었는데
20대, 30대, 40대, 50대
를 거치면서
사실주의에 입각한
스탕달이라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과
당시 프랑스의
시대적 배경과
인간 내면의 굴절된
욕망과 자의식을
접목시키며 읽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닌 꽤 심도 있는
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인 줄리앙의
과도한 출세욕과 허세
사랑과 배반
상류층과 하류층
군인, 종교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조명해주는 묘사들이
깊이 와닿았고
사랑과 삶, 그리고
허무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처참한 말로를 읽으면서
인간이 나아가야 할
삶의 행로를 스스로
탐색하고 깨우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책이라서 참 의미있게
읽은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삶의지혜
오호~ 책 한권 그대로 읽은 듯한 느낌이네요.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_^)
@적토마
다 얘기하면
재미 없을 것 같아서
대충 제 느낌만
간략하게 썼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 콩트 한 편을 읽은 느낌입니다.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그 남자의 인내심이 대단하네요.
제는 남을 잘 웃기지를 못하지만 웃어주는 것은 잘 한답니다.
재밋는 글 자주 올려주세요. 웃어 줄게요.ㅎ
현덕 님도
은근히 웃기십니다
글속에서 깨알같이
웃음을
선사해 주시는 건
안비밀~ㅎ
제 글을 읽고
웃어 준다면 저는
많이 기쁘겠지요~
글을 너무 잘쓰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저는 글을 못써서 요런 말 밖에는 요..ㅎ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이렇게 읽어주시고
잘 읽고
간다는 말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요
편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