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재 요셉 신부
연중 제20주일
잠언 9,1-6 에페소 5,15-20 요한 6,51-58
성체성사 : 어리석음의 신비
8월 중순 늦여름의 무더위만큼이나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오늘 우리가 4주째 듣고 있는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 연중 제17주일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에 매료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갈릴래아를 샅샅이 뒤졌고, 마침내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나 당신께 열광하는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대뜸 건네신 말씀은
그리 친절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6,26)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사랑하는 모세를 언급하며 그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6,3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으로 소개하며 당신의 신원을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다인들에게 혼란을 줍니다.(6,52 참조)
급기야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메시아 상(像)에 예수님을 맞춰 넣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구세주의 모습은 광야에서 만나를 받은 모세만큼만 입니다.
그 이상은 원하지 않았죠. 그들이 원했던 구세주는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 친척들 모두
잘 알고 있는 어느 동네의 아무개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 땅에 강림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자기 살과 피를 먹으라고 내어주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자기들이 원한 메시아가 아닌 것을 확인한 군중은 그대로 예수님을 떠나 버립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 지혜는 “똑똑한 사람들”이 아닌 “어리석은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지혜는 처음부터 일곱 기둥을 손수 깎아 집을 짓고 짐승을 잡아 음식을 차리며 술과 향료를 빚어
상을 차리고 여종들을 보내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똑똑한 이들은 초대해 준 이에게 답례를 해줄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혜가 차려준 음식을
평가하며 “이건 좀 짜다, 이건 맵다, 이건 달다” 하고 말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답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지혜가 차려준 음식을 순수하게 맛볼 따름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코린 1,23 참조)
성체성사의 신비는 어쩌면 우리에게 어리석음을 강요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살과 피를 반드시 우리에게 내어주셔야 했는지, 왜 당신의 죽음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려오다(카타바이노 καταβαίνω)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이 땅 위에 하늘 나라를
소개하셨고 이 땅 위에서 한 인간으로 사신 분이 우리 주님 예수님이십니다.
각자의 삶 안에 내려오시어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다른 곳,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은
실은 유다인들의 불신과 닮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이 예수님이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대구대교구 오영재 요셉 신부
2024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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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 안토니오 신부
연중 제20주일
잠언 9,1-6 에페소 5,15-20 요한 6,51-58
배고프지 않기를 바랍니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들과 함께라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기쁘게 산을 올라갑니다.
올라갔다 내려오면 어김없이 배가 고파지고 산 아래 마을과 가까워지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보다 주변 국수집, 파전집으로 눈을 돌립니다.
적당한 가게가 나오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먹고 싶은 가게에 앉아 음식을
기다립니다. 국수 한입, 파전 한 조각이 입에 들어가고 막걸리 한잔이 입에 들어 가면
다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허기를 달랬기에 함께한 사람들이 다시 보이게 된 것 입니다.
하루를 열심히 사는 사람, 열심히 일한 사람들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배가 고파지고 배고픔을 해결하고 나면 내가 살아온 하루가
달콤했는지 씁쓸했는지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채워진 배는 지속되지 않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면 비워지고 채워지기를 반복합니다.
우리는 채워짐과 비움의 반복 속에서 끝나지 않는 허기짐을 느끼고 공허함 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치고 공허함이 몰려오는 순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 까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떠오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분명히 알고 있는 말씀인데 왜 항상 잊고 살아간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오늘 군중이
그러하였듯, 내 안에 티끌만한 의심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아니라고 다잡았지만, 그 의심은 나도 모르게 남아서 주님의 말씀 을 잊게 만든 것입니다.
그 티끌만한 의심은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어려움과 고통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의심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참된 음료를 잊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어려움과 고통에서 오는 의심이라는 티끌을 씻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참된 음료를 떠올렸다면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씻어낸 자리에 우리는 다시금 주님에 대한 믿음을 채울 수 있을 것이고,
그 채워진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배부름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맛보고 깨달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녀인 우리는 이제 하느님을 사랑 하는 마음을
주님께 보여드리며 약속하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맛난 음식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으십니까?
오늘도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에서 허기짐을 느끼십니까?
주님이 차려놓은 만찬은 오늘도 당신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 주님의 만찬으로 채워진 배부름의 기쁨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슬기 안토니오 신부
2024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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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일 마태오 신부
연중 제20주일
잠언 9,1-6 에페소 5,15-20 요한 6,51-58
슬기로운 신자생활
현대인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 바로 ‘삶의 질’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드러난 화두인 웰빙(well-being)이 아닐까 싶다.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바쁜 일상이나
인스턴트 식품에서 벗어나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추구하는 생활방식으로,
우리말로는 ‘참살이’다. 그리고 웰빙에서 다양한 용어가 파생되는데 ‘웰빙족’, ‘웰빙 푸드’,
‘웰빙 케어’ 등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고자 애씀에 뭐라 딴지를 걸 생각은 없다.
다만 육체적, 세속적인 것에서 한 단계 차원을 높일 줄 아는 지혜를 신앙인들만이라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물질문명의 발달에 편승하는 사조가 바로 세속화로서 이는
신앙인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의식, 그래서 하느님도 필요 없다는 생각,
혹 신앙을 갖더라도 현세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모습이 팽배하고 있다.
여기서 인디언 속담을 들어보자. “우리가 죽을 때 손에 쥐고 갈 수 있는 것은 생전에
우리가 남에게 베푼 것이다.” 웰다잉(well-dying)을 생각하지 않고는 웰빙을
논할 수 없다고 본다. 인천 승화원화장로에서 천이삼백 도의 불로 두 시간 만에 한줌 재로
변하는 것이 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은 너무나 허무하다.
신앙인은 그 이상의 것에 눈을 돌릴 줄 알아야 한다.
이미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은 진정한 웰빙을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4-58)
세상을 초월하여 우리 수준을 높여주는 웰빙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살되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가치를 누리고 차지하라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중 잠언에서는 우리가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가기를 바랐고,
바오로 사도도 구체적인 웰빙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 18-20)
성령으로 가득한 찬양과 감사의 삶이다.
이제 이 시대에 신앙인이 누릴 웰빙 방법은 무엇일까? 자주 고백성사를 통해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하느님의 작품인 대자연 속에서 자연 피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학생들도 점수 따기 식이 아닌 진정한 봉사활동으로 참 기쁨을 알고, 가진 바를 나눠주는
자선 활동이나 어려운 이웃의 소리를 들어주고 위로하기 등등은 어떨까?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기준은 자신의 몸이 쪼개지고 먹히기를 바랐던 예수님처럼
사는 것, 즉 나 자신도 쪼개지고 나눠지는 모습에 있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신앙인의 웰빙은 성체성사의 삶을 사는 것, 요약하자면 ‘예수살이’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인은 웰빙과 웰에이징(well aging)을 거쳐 웰다잉으로 초대된 사람임을
기억하고 오늘이 그러한 모든 과정을 잘 맞닥뜨리는, 성령으로 가득한 찬양과
감사의 삶을 봉헌하는 나날이 되면 참 좋겠다. 슬기로운 신자생활! 아멘.
인천교구 이근일 마태오 신부
2024년 8월 18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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