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삶을 위한 역사 산책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전3권 중 제2권
시인 연산군과 내시들의 얘기
* 만약 사람이 착하지 않은 일을 하여 이름을 세상에 떨치면, 남이 비록 해치지 않아도 하늘이 죽인다. (장자)
1 연산군은 시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시집을 엮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1년 6월 10일 조의 "중종실록"에는 연산군의 시집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115p. 한문 생략)
위의 기사에 따르면 연산군의 자제시집은 불태워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천만다행으로 그의 실록인 "연산군일기"에 120여 편의 시가 등재되어 있어 그의 시적 재능을 살펴보는 데는 아무 불편함이 없다. 시인이란 감수성이 예민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학문적인 바탕(독서의 범위라도 좋다)이 없으면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없었다. 비록 연산군의 치세가 난정의 시대임이 분명하다고 해도 그가 시적인 상상력과 시적인 감수성으로 정무에 임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연산군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길은 멀고 땅은 미끄러워 다니기 어려운데 충성심 가시지 않아 대궐에 나왔구려 비노니 어진 정승들이여, 나의 잘못을 살펴주고 복령과 대춘처럼 오래오래 사시오.
연산군 초기의 시는 편수로도 얼마 되지 않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지극히 평온하고 다정하여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것은 곧 연산군의 폭정이 내재된 정서와는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고 할 것이다. 반대로 집정 중반부를 지나서 종반기에 들어서게 되면 갑자기 시의 편수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담겨진 내용도 평상의 그것과 달라서 읽는 사람들을 몹시 불안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화자가 드러내 보이자 하는 내심은 숨기지 않고 있다.
사시철 아름다운 경치도 놀이만은 못한 것이니 부디 그윽한 대 밝은 가을 달을 구경하리. 바람 이는 강에 물결 타고 건너기 좋아 마오. 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 주리.
얼마나 솔직한 심회를 토로하고 있는가. 연산군의 집정 후반기는 난정의 연속이었고, 종반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광태를 보았다. 그의 언행은 일치되지 않았고, 군왕의 체통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일도 비일비재 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가감없이 시에 담았다. 연산군이 남긴 125편의 시 가운데서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3년 동안에 쓰여진 것만 보아도 그는 자신의 과실을 시에 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던 것이다. 위에 인용한 시의 내용도 전반에는 자신의 파행을 솔직하게 적었고, 후반에 이르러서는,
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 주리.
라고 자신의 종말을 처연한 심정으로 예견하고 있다. 이 예견은 정확한 것이어서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섬으로 유배될 때 아무도 그를 구하고자 하지 않았다. 중종반정이 있기 며칠 전 연산군은 기생들과 풍악 사이를 내왕하면서 전혀 현실과 다른 환자의 상태를 마음껏 즐기면서도 문득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탄식하였음도 서로 적어서 남기도 있다.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연산군의 심저에 깔려 있었던 참으로 인간적인 심회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는 이 시를 쓴지 두 달 뒤에 보위에서 쫓겨나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 2 연산군은 성종대왕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조선왕조의 27왕 가운데서 성종대왕만한 성군도 흔치 않았다. 성종의 치세가 세종대왕의 그것과 비견되는 것은 그가 이끌었던 시대가 태평성대였기 때문이지만, 쿠데타(세조가 주도한 계유정란)의 상처가 치유되고 명실상부한 문민정부로 들어섰다는 점에서도 세종조와 유사하다. 성군의 적장자로 태평성대에 태어난 연산군이 포악무도한 난정의 주인공이 되자면 그럴만한 배경과 여건이 주어져야 한다. 아무 까닭 없이 그런 난정의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바로 그 배경과 여건은 어머니 윤씨(성종의 초비)의 사사(사약을 내려서 죽이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어머님 윤씨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연산군이 폭군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가정을 해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윤비의 폐출과 사시는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인수대비는 조선조의 여인답지 않게 한학에 통달하였고, 범어에도 범절을 하늘같이 소중히 하였다. "연려실기술"은 인수대비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수대비가 세조의 잠저 때부터 시부모를 섬기어 밤낮을 게을리하지 않더니 빈으로 책봉된 뒤에도 너무 부도를 삼가였으므로 세조가 효부라는 도장을 만들어서 내렸다. 그녀는 천품이 엄정하여 왕손들을 기르되 조금이라도 과실이 있으면 덮어 주지 않고 곧 얼굴빛을 바로 하고 경계하였으므로 시부모는 농담으로 폭빈이라고 하였다. 효성으로 봉양하는 여가에 부녀의 무식함을 걱정하여 "열녀전", "여교명감", "소학" 등의 서책을 가져다 그 절실하고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모두 일곱 장으로 나누어 이름을 "내훈"이라 하고 국문으로 번역하였는데, 상의(정품5직의 상궁) 조씨가 발을 썼다.
아무리 농담이지만 시부모가 며느리를 폭빈이라 하였다면 그녀의 성품이 어느 정도였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만할 일이다. 게다가 인수대비는 중전의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지아비를 잃어야 했고, 그로 인해 빈궁의 자리를 내놓고 잠저로 돌아가 무려 12년 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왕실의 과부로 지내다가 둘째 아들 성종이 보위를 이어 가게 되자 중전의 자리를 거치지 않은 채 대비가 되어 다시 입궐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기사회생이었다. 열두 살 어린 임금을 성군으로 다듬기 위해 그녀는 남다른 학문과 칼날 같은 성품으로 독단도, 전횡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한으로 뒤엉켰던 지나간 세월을 보상받고 싶은 자위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성종의 초비이자 연산군의 모후 윤씨는 상궁 출산이었으므로 국모로 간택되는 과정에서부터 인수대비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미 수태한 몸이었으므로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 윤비인지라 그녀의 행동거지가 인수대비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녀의 행동거지가 인수대비의 마음에 들 까닭이 없었는데, 비상을 간직하는 등의 투총의 기미를 보이다가 어이없게도 성종의 용안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되어 인수대비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윤비를 폐서인으로 삼아서 축출하라는 인수대비의 엄명은 서릿발과도 같았다. 아무도 반대의 뜻을 개진 할 수가 없었다. 윤비는 사가에 쫓겨나서도 인수대비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조정중신들은 원자(어린 연산군)의 모후임을 들어 용서를 청하였고, 때로는 양식과 의복을 내려서 편한 삶을 누리게 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인수대비는 오히려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였다. 그때 연산군의 나이 네 살이었다. ------ 3 인수대비는 원자에게 모후의 사사를 알리지 않기 위해 엄격한 교육으로 일관하게 하면서도 성종으로 하여금 '향후 백년 안에는 폐비의 일을 입에 담을 수 없다'는 엄명까지 내리게 하였다. 보령 유충한 원자는 유년기를 넘기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때 이미 어미 소를 따르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어머님을 그릴 만큼 사모의 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따라서 모후의 일을 입에 담지 못하게 하는 주변 분위기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것을 어찌 나무랄 수가 있으랴, 그러나 왕실과 조정으로서는 숨막히는 노릇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산군은 보위에 오르면서 모후에게 사약이 내려진 근원을 캐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조정의 중신들은 선왕의 고명을 들어서 만류하였고, 인수대비는 친할머니임에도 불구하고 폭빈의 위엄으로 어미를 찾는 손자를 가차없이 나무라고 나섰지만, 그 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연산군의 사모의 정에 불을 지르는 빌미가 되었다. 또 그것은 분노로 변해 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연산군은 모후의 처참했던 종말을 알게 되면서 어머님에게 내려지는 사약을 방치한 사림들에 대해 복수의 칼을 뽑아든다. 두 번에 걸친 사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흘리며 죽어갔던가. 뿐만 아니라 모후의 폐출과 사사에 관련된 부왕의 후궁들을 잡아들여 자루 속에 넣고, 그녀들 소생의 왕자들로 하여금 때려 죽이게 하는 무자비함도 거침없이 자행하였다. 인수대비는 병상에 누운 채 연산군의 광태를 전해 듣고 예전과 다름없이 진노부터 터뜨렸다. 부왕의 고명을 저버리는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가슴팍을 향해 술상을 던지는 패덕을 저지른다. 이 입에 담기조차도 민망한 패륜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수대비는 병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여기서 우리는 손자가 할머니에게 가하는 폭력과 만나게 된다. 아무리 포악무도한 사람이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패덕을 강상과 윤기를 목숨보다 소중히 유교국가의 임금이 저질렀다면 그 비난의 도가 더 클 것임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어미 잃은 어린 손자를 훈도하면서도 손톱만큼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았던 인수대비의 태산교악과도 같은 위엄이 어린 연산군의 가슴에 원한의 응어리를 심어 주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큰 깨우침을 주고 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4 연산군의 치세는 난정의 연속이었다. 강상과 윤기를 소중히 하였던 유교국가의 신하들이 임금의 잠자리 시중을 들어야 할 기생들을 공개적으로 뽑아들이는 일에 나서면서도 부끄러워하질 않았고, 임금은 궐안 경회루의 연못에 꽃배를 띄우고 그 기생들을 희롱하며 풍악을 즐겼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수많은 민가를 헐고 사냥터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역사는 난정의 연속이었던 연산조에 두 사람의 충절이 있었다고 적었다. 한 사람은 대사헌 홍귀달이요, 다른 한사람은 놀랍게도 환관 김처선이었다. 내시 김처선의 사람됨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연려실기술"에 적힌 그에 관한 기록을 상고하지 않을 수 가 없다.
김처선은 관직이 정2품이었다. 연산주가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양 정성을 다하여 간하니, 연산군은 노여움을 속에 쌓아 두고 겉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자신이 궁중에서 처용의 노릇을 하여 음란함이 한이 없을 때 김처선은 집안 사람에게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하고 궁으로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말하기를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에 대강은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님이 하는 것과 같은 이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연산주가 성을 참지 못하여 활을 당겨 쏘아서 갈빗대에 맞히자,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연산주는 화살 하나를 더 쏘아 맞혀서 공을 땅바닥에 넘어지게 하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라 하였다. 이에 김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상감님은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가 있습니까' 하자, 또 그 혀를 끊고 몸소 그 배를 잘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 죽을 때까지 간함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연산주는 그 시체를 범에게 주고 조정과 민간의 처자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김처선을 죽인 다음에 있었던 일들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다. 우선 모든 백성들의 이름이나, 처가 사용되는 용어에서 '처' 자는 다른 글자로 바꾸게 했으며, 김처선의 양자 이공신을 주살하였으며, 김처선 부모의 무덤을 뭉개고 석물을 치우라 하였고, 김처선과 이공신의 처는 내사복시의 종으로 삼아 평생 동안 말을 먹이는 일에 종사하게 하였다. 위의 두 기록을 읽노라면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을 발견하게 된다. 내시도 경서와 사서에 통달한 사람이 있었고, 따라서 대감이라고 불리우는 2품직에 오를 수가 있으며, 성불구자인 내시에게도 처, 첩이 있으며, 성이 다른 양자를 들여서 후계자를 삼고 있다면 족보도 있었을 것이며, 게다가 부모의 무덤을 호화롭게 꾸밀 만큼의 재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렇다면 내시의 실상에 대하여 좀더 소상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5 내시가 일종의 신체장애자임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들이 장애자임은 확실하지만, 어디가 얼마만큼의 장애인가 하는 문제는 왕왕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첫째는, 성기인 남근과 고환 자체가 없다는 설과 둘째는, 남근은 있으나, 고환만이 없어서(혹은 거세 하여서) 오직 생식기능만이 없다는 설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성행위가 불가능할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성행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생식 기능만 없다는 것이 된다. 어찌 되었거나 소위 고자라고 불리우는 장애자가 내시의 개념이 되겠지만, 여기에도 선천적인 고자냐 아니면 궁형과 같은 형벌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고자냐 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상의 상태, 즉 남근은 있으나 고환이 없다와 남근과 고환이 모두 없다는 두 종류의 장애자 중에서, 혹은 태어날 때부터 고자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애자 중에서 어느 경우가 내시에 합당할 것인가를 따진다면 논란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겠지만, 모두 내시의 요건을 갖추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선천적인 고자, 다시 말하여 고자로 태어나는 것은 남근이나 고환을 거세하는 것으로 생식 기능을 제거하게 된 연유나 배경에 대해서는 옛기록을 상고해 볼 수가 있다. 인위적으로 고환을 잘라내어 고자를 만드는 것(거세하는 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궁전에서 노래를 부르는 소년합창단이 있었는데, 소프라노 파트에 있는 소년들이 변성기를 맞으면서 목소리가 탁해졌던 탓에 좋은 화음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잘 훈련된 화음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변성기가 오기 전에 소프라노 파트의 소년들의 고환을 거세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환을 제거하면 호르몬 작용이 큰 변화를 일으키면서 수염이 나질 않고 목소리가 맑아진다는 의학적인 뒷받침까지 설명되어 있으니까, 일단은 신빙성이 있는 기록일 것임에 분명하다. 둘째는, 궁형이라는 형벌로 성적인 기능을 제거하여 임금의 여자들인 비빈들의 시중을 들게 하거나 감시하게 한 경우이다. 내시는 아니지만 비빈들의 거처를 출입할 수 있었던 사마천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셋째는, 스스로 고자가 되기를 자청하여 남근과 고환을 잘라내고 내시가 되는 경우일 것이다. 여기에도 그에 합당한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음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왕조의 초기까지는 내시가 고위관직을 겸직할 수 있었으므로 인위적으로 생식 기능을 제거한 예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 구체적인 기록은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중국과 같은 큰 나라에서는 내시의 지위가 상서(조선 시대의 판서와 같음)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기에 선천적인 고자만으로 그 수요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남성을 상징하는 신체의 일부를 훼손해서라도 내시가 되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남근과 고환을 제거하는 시술이 은밀히 성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록은 남근과 고환을 제거하는 시술과정을 세밀하게 적어 놓지는 않았으나 '^5,5,5^ 남근과 고환을 제거하고 나서 요도에 밀대롱을 꽂고 재를 뿌린다. 상처가 아물고 밀대롱으로 오줌이 흘러 나오면 시술은 성공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 과정은 오늘날 돼지를 거세하는 방법과 조금도 다르지가 않다. 시술은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절단된 부분은 어찌하는가. 더러는 찾아가기도 하고 더러는 시술한 곳에 맡겨 놓았다고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보관하였다는 기록은 없어도 보관의 필요성에 대한 해답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동양사상에,
신체불모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
라는 것이 있으니, 몸이며 머리칼은 물론이고 피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이니, 감히 훼손할 수 없음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뜻이고 보면 잘라 낸 남근이나 고환이 없고서는 죽어서도 관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고위관직에 오른 내시나 부를 누리게 된 고자들은 잘라 낸 부분을 비싼 값으로 다시 사들여야 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인위적으로 남근이나 고환을 제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심산 유곡에서 사는 화전민들이나, 극도로 빈한하여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갓 태어난 사내아이의 남근을 제거해 주는 것으로 가난에서 해방(내시라도 할 수가 있다면) 되기를 기원하는 풍조가 그것이다. 이런 경우, 갓난 아기의 남근에 명주실을 감아 놓으면 발육이 부진하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면 떨어져 나가게 된다. 또 다른 경우는 고위관직에 있는 내시들이 후계자를 위하여 양자를 들이고 거세를 하는 경우이다. 김처선의 양자가 성이 다른 이공신이며, 그의 행적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를 입증할 수가 있는 것이다. ------ 6 우리 나라의 내시들도 고려조 초기까지는 고위관직을 겸할 수가 있었음은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지만, 그러자니 내시들이 자행하는 패해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시는 군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조정의 기밀을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 수가 있었고, 각 정파간의 반목과 대립도 정확하게 파악 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각 정파나 문벌의 두령들은 내시를 매수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비싼 값에 사들일 수밖에 없었고, 또 군왕은 자신의 손발과 같은 내시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명목으로 토지와 재물을 자주 하사하였다. 내시가 대단한 부를 누리면서 여러 처 . 첩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여러 가지 여건이 그들에게 위세를 제공해 주었기 대문이었다. 따라서 희대의 명신 서열에 내시가 있고, 희대의 간신 서열에도 내시가 있었기에 당나라는 내시 때문에 흥했고 내시 때문에 망했다는 고사가 있는 것이다. 또 "조선인물고"에도 명신란에 내시가 소개되어 있음을 본다. 고려조 공민왕 때에 막강한 세도를 누리고 있던 최만생이라는 내시는 끝내 공민왕을 침실에서 시해하지를 않았던가. 바로 이 같은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조선조에서는 내시의 겸직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유용하게 쓸 수가 있었다. 내시부의 우두머리를 판내시부사라고 부른다. 관직의 위에 판이 붙으면 판서의 지위와 같은 1품직이고 보면 실제로 장악하는 업무가 없다고 하더라도 대감으로 불리우는 막중한 지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판내시부사의 밑에 상선이 두 사람이니 모두 종2품이요, 상온과 상다가 각각 한 사람이니 이들은 정3품이다. 이 같은 서열로 종9품까지가 55명이요, 그밖에도 수많은 무품의 내시가 있어 내시부의 정원은 1백 40명으로 되어 있다. 내시들에게 성한 관리들보다 더한 세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명문대가에서 내시에게 다투어 딸을 주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더욱 자명해 진다. 내시가 고자와 같이 성행위가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귀애하는 딸을 그들에게 출가하게 하는 것은 딸을 팔아서 치부를 하거나 출세길을 터보겠다는 탐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시 사위를 보는 명문가가 늘어나자 연산군은 10년(1504)5월 14일, 의정부에 다음과 같은 전지를 내린다.
내시들이 외간 사람들과 상통하니 궁중의 일이 혹시라도 누설 될 것인데, 더구나 인아(양쪽 사돈가 동서간의 통칭)와 관계가 되는 자임에랴. 지금 내관들이 많이 조정 관원들의 친족들에게 장가를 들어 아내로 삼으니 그 사이에 어찌 인연으로 왕래하여 궁궐 안에 일을 전파함이 없겠는가. 내시의 처족되는 조정관원은 외방으로 내보내어 서울에서 살지 못하게 하되 내관이 죽은 다음에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음을 중외에 효유하라.
이 같은 전지에 따라 조사를 하였더니 내시를 사위로 맞은 사람은 첨지사 조한손 등 무려 32명으로 나타났고, 또 정효창이라는 내시는 왕후의 친족에게 장가를 들었음이 밝혀지자 곤장 1백대를 때려서 귀양을 보냈다고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내시들의 비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내시들의 처족에 대해서는 이같이 엄하게 다스리면서도 내시 그 자체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어차피 가까이에 두고 부려야 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사대부가 1품의 벼슬에 오르면 그 부모에게도 벼슬을 추증한다. 이와같은 예에 따라 내시들에게도 직첩이 높은 자에게는 그 어버이에게 직첩을 추증하라는 전지가 있는가 하면, 직첩이 높은 내시들이 출입할 때는 길을 인도하는 구종도 쓰게 하였고, 벼슬아치나 사림들이 내시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 엄히 치죄하라는 전교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내시의 위세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내시와 궁녀들과의 사랑이 발각되어 대궐을 쫓겨난 사례가 있다면 고자가 아닌 가짜 내시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연산군 10년(1504)년 9월 7일 조의 "연산군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교가 등재되어 있다.
환관 이경과 석극산을 전의감 관원을 시켜 그들의 음근을 상고해 보도록 하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기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본다면 성한 사랑이 궁궐에 잠입하여 내시 행세를 하고 있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실례로 연산군은 가끔 전체 내시들의 바지를 내리게 하고 공개리에 그들의 하초를 살폈다는 기록 또한 "연산군일기"에 등재되어 있음에랴. 조광조와 정치 개혁의 드라마
* 비록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데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들 모두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임금이 마땅히 굽어보고 쫓아야 할 것이다. (황희)
1 나와 같이 역사드라마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의 눈으로 보면 요즘의 세태가 어수선하다 못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 한심하다는 작태도 따지고 보면 이미 우리 선현들이 겪고 체험한 일들이었던 까닭으로 심판의 결과 또한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책의 정답을 찾지 못한 채 허둥거리고만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외경심이 부족한 탓일 테지만, 간혹 정답 비슷한 것이 입으로는 거론되면서도 실행될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역사 앞에서는 참으로 송구한 노릇이지만 그래도 감시의 눈은 똑바로 뜰 수밖에 없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로 우리 사회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구조적인 비리와 부조리가 만연되어 있는 것이, 나와 같은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게는 기막힌 소재 제공이 아닐 수가 없다. 개혁세력은 주인공이 되고 개혁에 반발하는 기득권 세력은 악역으로 설정하기가 안성맞춤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의지에는 처음부터 '안정 속의^5,5,5^'라는 안일하고 위험한 부분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것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나 그들과의 마찰을 피해 가면서, 아니 그들과 동행하겠다는 뜻이었기에 그 개혁의 성사를 장담할 수가 없음을 자인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명예혁명을 이룩하겠다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음에도 마치 대통령이 법 위에 군림한 듯한 인상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에서도 기득권 세력의 결사적인 저항과 반발이 개혁의 실패를 거듭하게 하였고,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통치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개혁을 소리 높이 외쳤지만 구조적인 비리의 골은 더 깊어지기만 했다. 기득권 세력이란 언제나 권력의 주변에서 싹트는 것이며 권력이라는 토양에서 무성한 숲을 이루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그의 측근 중의 측근이 입에 담았다는 말이 당시의 어느 일간지에 소개된 일이 있었다. "우리가 혁명을 한 것도 아니고^5,5,5^ 인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5,5,5^"라면서 '개혁' 부분에 부담을 느끼고 있더라는 단서가 달린 기사였다. 그때 나는 문민정부의 역사 인식에 적이 실망하였고, 그로 인한 혼란과 고초를 자초하게 될 것임을 우려했었다. 역사를 읽으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만일이라는 가정을 정해서 마음의 위로를 찾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령,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란'이라는 쿠데타가 없었다면 이른바 사육신 등이 학문과 충정으로 세종 시대의 황금기가 다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위안 받듯^5,5,5^. 우리가 말하는 소위 80년, 서울의 봄을 구가할 때, 12 . 12와 5.18과 같은 불행을 겪지 아니하고, 강력한 문민정부가 들어섰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5.16군사 쿠데타가 역사의 심판을 받으면서 혹독하게 단죄되었을 것이고, 그 수괴들에게 중형을 내렸다 해도 누구 한 사람 반발하거나, 3공화국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하는 등의 넌센스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에 가까운 가정을 해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잘못된 과거를 역사의 이름으로 청산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잃었던 탓으로 오늘의 청산이 더 힘들고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백악관의 직원을 25%나 감축하고, 고위직 전용의 식당을 폐쇄하더니 장, 차관급 고위관료들에게 50달러 이상의 식사초대에 응하지 말도록 조처하였고, 95년까지 3년 동안에 연방정부의 공무원 수를 10만 명 감원하여 무려 90억 달러의 예산절감을 선언하면서도 개혁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결코 남의 일로 생각되질 않는다. 그 나라에는 권력의 비호를 받는 구조적인 비리나 부조리가 싹틀 여지가 없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나카노 고지라는 사람이 쓴 "청빈의 사상"이라는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린 때가 있었다. 발간된지 5개월도 안 되어서 무려 23판 30만부가 팔렸다면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아닐 수 없다. 책의 내용만 해도 그렇다. 우리식으로 설명하면 맹사성, 유관과 같은 청백리의 일화나 한석봉의 어머님과 같은 분들의 가난하면서도 좌절하지 않는,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삼았던 선현들의 지혜로운 삶을 엮은 내용이라니 '책의 해'까지 선포했던 우리의 현실을 더욱 참담하게 할 뿐이다. 부총리도 장관도 모두 24평 짜리 아파트에서 살 만큼 검소한 사람들이 청빈한 삶을 상찬하는 책을 경쟁적으로 사서 읽는다는 이웃나라의 엄연한 현실을, 60평짜리 맨션에서 아니 90평짜리 초대형 호화빌라에서 흥청망청한 삶을 즐기는 이땅의 졸부들에겐 웃기는 얘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 웃기는 얘기는 정말로 남의 일이 아니었다. 매국 5적의 증손자가 나타나서 나라를 팔아서 치부한 증조부의 땅을 여섯 건이나 되찾았는데 모두가 재판에서 승소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한일합병이라고 불리는 경술국치는 불과 90년 전의 일이다. 나라를 팔아서 작위를 얻고, 막대한 은사금으로 36년 간이나 계속된 식민치하에서 호의호식을 하고 나서 겨우 50여년 동안을 숨어 살다가 그 재물을 찾겠다고 나서는 호안무치도 어지간하지만, 거기에 동조한 변호사와 판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진실로 우리를 참담하게 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대명사나 다름이 없는 변호사는 그들에게 땅을 되돌려 주는 것이 온당하다고 강변하였고,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을 첩경으로 삼아야 할 판사가 그래야 옳다고 판결을 하였다면 도대체 이 나라에 역사의식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항일로 목숨을 잃은 애국지사의 유족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가르치려 하는지 물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나라를 파는 매국행위가 50년 정도의 유예기간을 거쳐서 법률의 보호를 받으면서 면죄될 수 있었기에 부정한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면서도 동정의 여지가 있다는 등의 가치관의 혼란을 거듭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 않을까. 따라서 그 변론문과 판결문이 공개되어 비록 법의 현실 인식이 상존한다 하더라도 평범한 윤리 인식을 앞설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는 것도 역사 인식을 바로 하는 첩경일 것이다. 개혁에 저항하고 반발하는 기득권 세력은 모두 드라마나 소설의 악역으로 등장되기에 안성맞춤이다. 10년이나 20년의 세월이 흐르면 오늘 우리의 현실은 대단히 흥미로운 역사드라마가 되어 다시 수치심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는 것도 또한 우리의 정서일 것이다. ------ 2 역사를 일러 범죄와 재난의 기록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고, 역사를 심판이자 법정이라고 정의한 사람도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타고르의 공언의 탁견이 아닐 수가 없다.
인간의 역사는 학대받은 자의 승리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당대의 학대받은 실패가 죽어서 그 용맹을 떨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경우 정암 조광조가 그 같은 역사의 비정함과 준엄함을 기막히게 잘 입증하고 있다. 조광조는 개혁을 주도하였다가 목숨을 잃은 실패자의 한 사람이지만, 아이러닉하게도 그는 개혁주도 세력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또 개혁의지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개혁하고자 했던 내용은 대단히 중하고 시급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조광조의 개혁의지를 그토록 참담하게 짓밟아 버렸는가. 말할 것도 없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몸부림쳤던 수구세력들이었다. 그들은 조광조의 목숨을 앗아내고서야 웃을 수가 있었다. 부패로만 살찌울 수가 있었던 기득권을 지켜갈 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은 어떠한 경우에도 기득권 세력의 명리와 실익을 응징하고서만이 성공을 거둘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기득권층으로 분류되는 특정집단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의 구조적인 비리와 부조리가 절대권력의 비호를 받으면 마치 암세포처럼 전신으로 번져가는 것이다. 이 기득권층의 병통이 깊어지면 도덕과 양식이 무너지는 양상이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다. 조광조가 살았던 시대도 그러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도 또한 그러하다. 문민정부의 대통령이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여 기득권을 지키려 는 수구세력과의 투쟁에서 완승하고서만이 그 성사를 장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다. 역사 앞에서는 참으로 송구한 노릇이지만, 우리는 군사문화 혹은 군사독재로 일컬어지는 그 불행했던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냉정히 뒤돌아보아야 한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정치나 정치인 주변만을 질타하고 정비한다 해서 성공하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경제도 문화도, 심지어 사회의 모든 현상이 거기에 동조하였기에 총체적인 부정과 부패현상이 일반화 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대명사나 다름이 없는 대학의 일부 교수들은 유신이나 5^3456,1,1245^의 당위성을 찬양하는 글을 쓰고 그것이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 등재된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고, 신문과 방송은 군부독재가 연출하는 갖가지 이벤트 등을 앞장서서 찬양, 옹호해 주었으며, 때로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정계(유정회 의원으로, 또다른 지원을 받으면서)에 진출한 사실도 부정할 수가 없겠고, 지금도 웬만한 개인의 부정은 이름이 아닌 그들만이 아는 이니셜(Y씨, K의원 등)로 적어서 독자들을 우롱하고 있지를 않는가. 또 재벌들은 공장을 짓기에 앞서서 호화로운 영빈관부터 먼저 지어야 했으며, 거기에 언제 올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방을 거창하게 꾸며 놓고는 어떻게 든 '각하'를 모시기에 혈안이 되었던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나는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역사는 시민의식을 거느리고 흘러왔고 또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기득권 세력의 서식처인 정치 주변의 도덕적인 붕괴를 철저하게 진단하고 개선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지만, 비리로 만연된 우리의 주변을 검증하면서 자정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 3 조국이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한 지도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그 동안 공화국 정부의 부침만도 여섯 차례나 경험했지만, 정권의 정통성 시비가 끊일 날이 없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죄되어서 마땅한 친일 주구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다시 군림하면서 그들이 곧 기득권 세력으로 둔갑하였기에 자신들이 저지른 사고와 그러한 현실은 일제의 행각, 일제의 상식을 고스란히 이어지게 하였다. 일제의 잔재라는 어휘가 광복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라면 절대권력의 비호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그러한 맥락으로 이승만 정부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치하의 연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며, 4^3456,1,24^ 학생혁명에 이은 장면 정권의 출현과 몰락도 역사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필연일 수밖에 없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세력들의 준동이 발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3456,1,124^ 군사 쿠데타의 주역들이 부정과 부패의 척결을 혁명의 명분으로 내세웠다면 그때 이미 기득권 세력이 집단화, 조직화되어 구조적인 비리가 만연되어 있었음을 입증하고 남자만, 그로부터 유신체제로 이어지는 군사문화는 비전문가들의 오만과 독선으로 모든 공직자들의 창의력을 박탈하였고, 중화학공업의 육성이라는 미명하에 대형 부조리와 부패를 만연하게 하면서 그것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게 함으로써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겠다고 소리 높이 외치던 쿠데타의 주역들이 어느 사이인가 기득권을 수호해야 하는 세력으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2^3456,1,12^로 정권을 장악했던 소위 신군부의 수괴들은 표면적으로는 부정과 부패의 척결을 내세웠던 5.16의 주역들과 그들과 손을 잡았던 기득권 세력들을 부패의 집단으로 몰아붙이면서도 앞다투어 그들보다 더한 부패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가, 마침내 그들 스스로 법정에 서야 하는 수모를 자청하였다. 역사가 빚어내는 반복의 드라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느 한 곳도 성한 데가 없다는 오늘의 암울한 세태는 바로 그러한 권력의 주변에서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뿌리내렸고, 그것을 토양으로 거대한 비리의 숲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구조적인 비리와 병폐의 치유가 논의되는 시점에서 조광조의 개혁의지와 비극적인 종말을 연관지어서 생각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 4 개혁의지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정암 조광조는 성종 13년에 태어났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청소년 시절을 혼탁의 극치랄 수 있는 연산군 시대의 암울했던 현상을 몸소 체험하면서 보냈다. 강상과 윤기를 치도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연산조와 같은 패덕의 시대가 생겨나는 것도 역사의 흐름이 빚어내는 필연의 결과일 것이다(독자들이여, 우리가 체험한 현대사와 비교하면서 음미해 주기를 바란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과 같은 수구세력을 창칼로 제거한 계유정란의 명분은 왕도정치를 표방하는 개혁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 13년은 개혁은 고사하고 쿠데타의 실세들을 새로운 기득권세력으로 만들어 내는 시시였다. 세조는 자신의 측근들이 자행하는 비리와 축재를 관대히 묵인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철저하게 비호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기득권 세력에 의해 자신의 왕권유지가 위험지경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세조는 말년에 이르러 기득권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개혁 세력(귀성군, 남이, 유자광 등)을 양성하려 했으나, 자신의 죽음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조 (재위 1년)에 이르러 귀성군과 남이는 유자광이라는 새 기득권 세력(어제까지는 동지였지만^5,5,5^)에 의해 무참한 종말을 맞게 됨으로써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예종의 뒤를 이은 성종은 13세의 어린 보령으로 또 다른 기득권세력(한명회, 신숙주 등)에 의해 옹립되었고, 그의 치세는 이른바 원훈의 자리를 굳히고 있던 계유정란의 주역들이 뿜어내는 경륜, 아니 그들의 전횡과 독단에 의해 태평성대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대항할 개혁세력이 고개를 들지 못했던 것은 권력의 핵이랄 수 있는 세조비 정희왕후와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한명회의 안사돈)의 철저한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산조의 탄생은 기득권 세력의 배후인물인 인수대비의 불호령에 대소신료들이 무릎을 끓었던 결과였음은 앞장에서 거론한 바와 같지만, 관원들의 창의력이 퇴화되고 줄 서기에 능해야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시대라면 개혁을 주장하는 새로운 세력의 태동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조광조가 16세 되던 해(1498)에 당대의 양식 집단이었던 사림들이 일거에 참살되는 '무오사화'의 참극을 지켜보게 된다. 이때 조광조는 아버지 조원강이 찰방으로 있는 어천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무렵 무오사화에 희생된 김굉필이 희천으로 유배되어 온다. 호가 한훤당인 김굉필은 당대의 대유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사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데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보다 더 급한 것은 없고 사람을 가리고 유능한 사람을 뽑는 데는 소인들에 가리워지고 통하지 않는 것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없다.
사림이 핍박을 받으면 나라의 경영이 온전할 수가 없다는 김종직의 인재론이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가 되어 그의 사상을 전수받게 된다. 후일 조광조가 이상정치를 구현하려 했던 이른바 '도학정치사상'과 '군자소인지론'과 같은 정심법으로의 접근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터득하고 다듬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성급한 것 같지만 그의 '군자소인지론'의 핵심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재이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는데 있다. 시실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소인은 군자를 소인이라 하고, 군자도 소인을 소인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인은 주야로 군자를 공박하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소인은 인주(임금)와 의 접견시에 예모를 갖추고 좋은 말로 수식함으로써 그를 가려내는 것은 용이 할 수가 없다.
참으로 기막힌 말이 아닐 수가 없다. 개혁이란 군자연하는 소인의 무리를 다스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 같은 소인의 무리를 분별해 내기가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소인의 무리는 권력의 주변에서 서식하면서 언제나 듣기 좋은 말로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칼로 기득권 세력을 몰아냈던 계유정란으로부터 연산조로 이어진 기득권 세력은 공교롭게도 '중종반정'이라는 쿠데타에 의해 몰락된다.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박원종 등의 실세들은 또 다른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그들의 개혁의지는 기득권을 지키는 쪽으로 퇴색한다. 타의에 의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중종은 새로운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한 '정국공신'들의 눈치를 살피는 일에 급급했고, 기득권 세력의 오만은 점차 친인척의 비리로 확산되어 갔다. 조광조가 진사시에 장원하고 성균관 적을 두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때 이미 그의 학문과 인품은 원숙의 경지에 들어서 있었다. 조정의 고위관직 중에서 그나마 양식을 대변하고 있던 이조판서 안당은 무력해진 조정에 새로운 기운을 진작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신진사류의 특채를 시도하였다. 그러자니 성균관 유생 중에서 믿음직한 인재들을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선발된 사람이 조광조를 비롯한 김식, 박훈 등 세 사람이었다. 과거에 등과하지 않은 사람이 관직에 등용되는 것은 선대의 공훈에 힘입어 음서의 혜택을 적용받는 것이 상례지만, 위의 세 사람은 음서의 혜택이 아니었으므로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34세의 조광조에게 주어진 첫 관직은 종6품의 벼슬인 조지서의 사지였다. 맡은 임무는 별것이 아니었어도 남의 부러움을 사서 마땅히 등용이지만, 조광조는 이를 탐탁히 여기질 않았다. 이 무렵 조광조는 "소학"을 몸에 지니고 다닐 만큼 애독하고 있었다. 결과론이지만 조광조는 성리학의 거벽으로 추앙받게 된다. 이미 그의 학문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음에도 "소학"을 들고 다니면서 애독한 것은 모든 고전의 엣센스만을 간추려 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소인배들은 바로 이점을 비아냥거렸다.
일부소학항근독 가지공명자연내(일부의 소학을 부지런히 읽으라. 사지의 공명이 절로 올지니)
조광조는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따가운 눈초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맡은 소임에 열중하면서 과거에 응하기로 다짐한다. 정정당당하게 입신의 길을 열어 나가기 위한 비장한 결기였다. 마침내 중종 10년 8월 22일에 시행된 문과전시에서 조광조는 차상의 성적으로 등과하였다.(조광조가 장원급제하였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 등과한 조광조는 성균관 전직으로 승진한다. 성균관은 그에게 있어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문학과 인품은 익히 알려져 있었으므로 옛 동료들과 후학들은 조광조를 따뜻이 맞아 주었다. 그러므로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들과 신진사류의 중심인물로 급부상된다. ------ 5 조광조는 도학정치 사상의 구현을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그 실례가 갖바치(피장)와의 교유였다. 갖바치는 가죽을 만진다는 뜻으로 '양수척' 혹은 '화척'이라고 불리는 백정의 부류를 뜻한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조선 시대의 지배계급인 사대부의 신분으로 갖바치와 교유하면서 도학정치 사상의 구현을 꿈꾸었다는 사실로도 조광조의 큰 인물됨을 알 수가 있다. 역사를 읽으면서 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터이지만, 만일 조광조가 그렇게 일찍 비극적인 종말을 맞지만 않았어도 그와 교유하였던 갖바치가 조정의 요직에 등용되었을 것이라는 설까지 있고 보면 조광조의 개혁의지가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조광조의 개혁의지가 중종 임금에게 전달되는 기회는 뜻밖으로 빨리 왔다. 그가 사간원 정언(정6품)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경연관을 겸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은 학문을 연마하고 경륜을 높이기 위해 경연을 열어야 하는데 경연은 열리는 시간에 따라 조강, 주강, 석강, 야대로 구분된다. 세종이나 성종과 같은 성군들은 경연에 나가서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침식보다 더 소중히 하였다. 경연관으로 발탁되어 조강이나 야대에 참석하게 되면 임금과의 직접대화가 가능하였기에 신하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 수가 없고 또 임금의 신임도 얻을 수 가 있었으므로 경연관이 되는 것은 출세길을 보장받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조선왕조는 전제군주 시대로 구분되지만 언론의 자유가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지금과 같이 신문이나 방송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연에서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밖에서는 상소문을 올릴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언관 혹은 간관으로 구성된 부처까지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헌부의 소임은 백관을 감찰하여 기강의 해이를 고발하고, 풍속의 문란을 감시하며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며, 부정과 비리를 근원적으로 발본하려는 사정기관으로 임금의 잘못도 직관할 수가 있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을 양사라고 하는 것은 기관명의 '첫'자를 딴 것이지만, 실상은 그 소임이 비슷하고 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항용 이르기를 '양사의 관원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이는 임금의 잘못까지도 질타할 수 있는 직책이었기에 조정의 고위관직들에게 큰 잘못이 있다는 뜻이며 동시에 거기에 저질러진 어떠한 비리도 여지없이 처단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며, 또 그것은 언로의 완전한 소통을 보장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혁에 뜻을 두었던 조광조가 언관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현실의 일로 다가온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조광조는 언관으로서의 첫 임무를 직속상관인 대사간 이행과 대사헌 권민수의 파직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조광조의 언론관은 이러하였다.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종사의 흥망과 가장 깊은 관계 위에 있다. 통하면 다스려지고 편안하며, 막히면 어지러워지고 망한다. 임금이 몸소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는 공경대부, 백집사로부터 아래로는 누항, 시정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말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언책이 없으면 스스로 말을 극진하게 할 수가 없으므로 종래에 가서는 언로가 막혀 임금은 백성의 일에 어둡게 된다.
요즘의 일로 바꾸어 설명하면 검찰청의 하급관리가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의 파면을 대통령의 면전에서 주장한 셈이다. 어찌 지금의 공직자들이 꿈엔들 상상할 수가 있겠는가. 직속상관의 파직을 요구하는, 그것도 언관의 우두머리격인 대사헌과 대사간의 파직을 직간하는 조광조의 뜻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조선 시대의 언로가 완벽하게 트여 있었음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훈구대신들의 오만과 독선에 시달리고 있던 젊은 지식인들은 조광조의 용기를 상찬하면서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훈구세력들은 조광조를 경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개혁 세력으로 등장한 신진사류들 못지 않게 조광조에게 매료된 사람은 중종 임금이었다. 그는 조광조의 도학정치 사상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치세에 그것을 실현하리라고 다짐하였다. "정암은 과인의 스승이로세." 중종 임금은 조광조의 강론을 들을 때마다 성군의 길이 열리고 있음을 완연하게 느낄 수가 있었기에 그와의 만남을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고, 조광조는 중종 임금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면서 '성왕지도'를 깨우치도록 충언을 거듭하였다. 그것은 요순의 시대를 재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광조는 '군자소인지론'을 열강하였다.
큰 간신은 충신 같고, 큰 탐관은 청백리 같다.
이 또한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뜻이지만 사람들을 가려쓰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에 감동한 중종 임금은 조광조를 한 달 사이에 네 번이나 승에 이르게 하였으니 파격의 승차가 아닐 수 없었다. 조광조가 자신의 개혁의지를 구체화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 6 조광조가 도학정치 사상의 구현을 시도하여 성공한 첫 번째 쾌거는 정몽주의 위폐를 문묘(성균관)에 배향하는 일이었다. 성리학을 학통의 근본으로 삼기 위해서는 조선 성리학의 시조격인 정몽주의 위상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의 창업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포은 정몽주의 학덕과 상을 높이는 일에 성공한 조광조는 일약 신진사류들의 영웅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 성공한 것이 과거제도의 개혁이었다. 요즘 입시부정으로 천지가 떠들썩한 우리의 현실과도 어지간히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조선 시대의 과거제도가 비리의 온상이었기에 조광조의 복안은 설득력이 있었다. 한 국가의 경영을 떠맡을 인재의 선발방법으로 반나절 동안의 시문만으로 평가하여 정하는 것으로는 참된 인재를 선별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고, 또 과거가 비리의 온상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각 고을의 수령방백들로 하여금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를 천거하게 하여 그들에게 시험을 보게 함으로써 이론과 실행을 겸비한 참된 인재를 가려 뽑을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제도는 이미 한나라 때에 시행한 바 있는 '현량방정과'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미 조광조의 개혁의지에 매료되어 있던 중종 임금이 이를 마다할 까닭이 있을까. 그렇게 해서 시행된 것이 '현량과'라는 과거제도였다. 이 획기적인 제도에 의해 새로운 인재가 등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현량과를 시행하는 것을 계기로 조광조는 다시 홍문관 부재학으로 승차하게 된다. 결국 조광조는 조지서의 사지로 관직에 나선지 3년이 채 못되어 당상관인 3품직에 서용된 것이었다. 이 승차가 얼마나 파격적인 당시의 사관들의 견해가 "중종실록"에 적혀 있을 정도다.
조광조는 소시부터 검칙청수하여 크게 이름을 날렸다. 처음에는 조행으로 성균관에서 천거되어 사지가 되었고, 얼마 안 가서 과거에 2등으로 뽑혀서 여러 번 청요한 벼슬을 지내다가 이때에 이르러 부제학의 직을 제수받게 된 것이다. 출사한지 30개월이 채 못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고금에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를 따르는 자가 날로 늘어났고, 주상도 그를 의중하였다. 그 사람됨이 청고하고 인물의 옳고 그름을 가려 개연히 세상을 바로잡고 풍속을 정하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공경 이하가 모두 외경하고 혹은 피하기를 원수처럼 하는 자도 있었다.
마지막 대목에 유념해야 한다. 조광조를 피하기를 원수처럼 하는 자가 있었다면 그들이 누구이겠는가. 자신들의 기득권이 박탈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수구 세력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개혁은 적을 만들게 되고, 그 적을 다스리고서만이 성과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조광조는 이상적인 임금의 조건도 제시하였다.
임금의 덕은 공경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안에서 실천이 있은 뒤에라야 아랫사람들이 보고 감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일을 제도하고 만물에 응하기를 마치 거울과 같이 비고 저울처럼 공평할 것이며, 임금의 용색도 단정하고 엄하면 환관이나 궁첩이 스스로 가까이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종 임금에게 있어서 조광조의 존재는 크나큰 의지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때 중종 임금 춘추 30세, 타의에 의해 임금의 자리에 올라서 자신을 옹립한 기득권 세력의 눈치만 살피다가 조광조에 의해 왕도정치에 눈뜨게 되었으니 자신의 치세를 요순의 시대와 같은 선정의 시대로 만들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또 그것은 조광조의 도학정치 사상이 꽃피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지 1백26년, 역대 어느 왕조에서 36세의 젊은 관원이 이 같은 영향력을 행사한 일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조광조의 존재는 신진사류들에게는 영웅이었고, 기득권 세력에게는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는 중종 임금의 신임을 등에 업고 보다 본격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한다. 이때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김식, 김준. 김정. 유인숙. 이청. 윤인필 . 박세훈 등은 한결같이 유림을 대표하는 젊은 사류들로 모두 요직에 올라 있었다. 이들은 소격서의 혁파를 주장하고 나섰다. 소격서는 중국의 도학사상에서 유래된 도교의 일월성신을 구상화한 성제단을 세우고 거기에 제사를 지내는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미신타파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비빈(왕비나 후궁)들의 낭비를 근절하는 개혁의 일환이었다. 비빈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행운을 비는 풍조는 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되오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을 부추기는 지경이었지만, 중종 임금은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다. 성군이라고 불리는 세종이나 성종도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았다는 것이 반대하는 명분이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비빈들과 종친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들의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 7 조광조를 비롯한 그를 따르는 신진사류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의 반발을 보였다. 대간들은 사임으로 항거하였고, 조광조 등은 무엄하게도 새벽이 되도록 어전에서 물러나지 않은 채 중종의 윤허를 강요하였다. 마침내 기득권 세력들은 익명서(익명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투서)를 만들어서 돌렸다.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들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임금을 협박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는데 정녕 보고만 있겠느냐는 등 격렬한 내용이었다. 이를 계기로 개혁 세력과 수구세력간의 갈등과 대립의 양상은 원한의 골이 파여질 만큼 깊어지기만 하였다. 중종 임금은 결사적으로 달려드는 개혁 세력의 집요한 강청을 끝내 물리치지 못했다. 중종 13년 9월, 마침내 소격서를 혁파하라는 왕명이 내려진다. 조광조를 정점으로 한 개혁 세력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들이 주장하여 되지 않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급기야 이 해 겨울에 이르러 조광조는 대사헌의 지위에 오른다. 대사헌은 언로와 간관의 요체인 사헌부의 우두머리다. 이를 다시 요즘 말로 바꾸면 37세의 검찰총장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시의 대사헌에게 주어진 막강한 책무는 기금의 검찰총장과 비길 바가 아님을 유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광조에게 주어진 대사헌의 자리는 용에게 여의주를 물려준 것이나 다를 바라 없었다. 이 엄청난 변화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구 세력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누려 온 기득권이 일시에 박탈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딸을 후궁의 자리에 밀어 올린 남양군 홍경주를 중심으로 밀계를 도모하게 된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아니 살아 남기 위한 방편이었다. 여기에 심정, 남곤 등 권부의 실세들이 가담을 했다. 이들의 밀계란 물론 조광조 등의 개혁 세력을 일거에 제거하는 일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한판 승부가 아닐 수 없었다. 중종의 치세는 어느 사이엔가 대간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왕명이 상소의 내용을 따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젠 조광조의 발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대간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야, 이것이 아니었어!" 조광조는 탄식하였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왕도정치가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뼈아프게 느끼면서 새로운 방도를 강구해야 되겠다고 다짐했을 때, 개혁 세력임을 표방하는 신진사류들은 참으로 엄청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정국공신들의 훈작을 삭제하라!" 정국공신이란 연산군을 밀어내고 중종을 옹립한 반정공신을 말한다. 이들의 훈작을 삭제한다는 것은 수구 세력의 기득권을 박탈하는 것이며, 원훈들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엄청난 선언은 조광조가 처음 발설한 것이 아니었지만, 기득권을 잃게 된 수구 세력 쪽에서 본다면 조광조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 신진 세력들의 주장은 이러하였다.
병인년(1506) 반정 당시 아무 공도 세우지 않은 무리들이 박원종, 성희안, 유자광 등에 아부하여 공신의 서열의 오른 사람이 허다하다. 1등신은 없어도 무방하다. 공신이 없는 공신들을 가려서 백성들에게 알림으로써 조정이 의롭다는 것을 보일 것이니^5,5,5^.
보다 구체적으로는 삭제 대상이 무려 80여 명이나 되었다. 14년전, 성공한 쿠데타에 의해 책봉된 공신들의 작호를 삭제한다는 것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홍경주, 심정, 남곤 등은 두 사람의 후궁이란 결탁하여 중종의 심기를 뒤흔들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의 후궁이란 홍경주의 딸인 희빈 홍씨와 박원종의 양녀인 경빈 박씨를 말한다. 이들에 의해 꾸며졌다는 음모가 야사에 전해지는 소위 '주초위왕'의 사건이다. 대궐의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졌는데, 주자와 초자를 합자하면 조자가 되는 것이니, 조광조가 곧 임금이 될 것이라는 풍설을 퍼뜨렸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홍경주의 주청이 주효했던 것이었다.
조광조 등이 작당하여 후진들을 끌어들여 궤격을 일삼고, 소가 장을 능가하며, 천으로 귀를 방하니 국세는 어지러워지고 조정은 날로 말이 아니니 그 죄를 엄히 다스려서 마땅하다.
중종 임금은 젊은 대간들의 주청과 강요에 기력이 쇠진할 만큼 지쳐 있었다. 그런 때에 홍경주의 간청이 있었으므로 며칠을 고심한 끝에 홍경주에게 조광조의 일당을 단죄하겠다는 밀지를 내렸는데, 특이하게도 이날의 밀지는 언문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 중에 중종의 고심한 대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저들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요즈음에는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자도 자리가 편하지 못하여 파리하게 뼈가 드러났다. 내가 이름은 임금이나 실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옛날에 유용근이 거만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으니, 이는 그가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은 먼저 저들을 없앤 뒤에 나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종의 고심이 아무리 컸기로 어찌 이 같은 밀지를 신하에 내릴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밀지가 개혁의 주도세력이었던 신진사류의 씨를 말리는 '기묘하화'의 신호탄이었다. ------ 8 조광조와 그를 따르고 받들던 신진사류들이 일거에 체포되어 하옥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애초에 조광조를 발탁하였던 안당은 그들에게 죄가 없음을 지성으로 탄원하였고, 성균관의 유생들은 자신들이 대신 죄를 받겠다고 자청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으나 역사의 흐름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수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명리를 위해 개혁에 반대하는 도를 넘어서서 개혁 세력의 단죄에 나선 것이었다. 잡혀 온 개혁의 주체들은 모질고 참혹한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자신들에게 사심이 없었음을 당당히 주장하였고, 조광조 또한 자신의 심회를 떳떳이 밝혔다.
신의 나이는 서른 여덟입니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이란 임금의 마음 하나뿐입니다. 망령되게도 국가의 병통이 이욕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한 까닭으로, 국맥을 무궁토록 새롭게 하려고 하였을 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영의정 정광필과 안당의 그들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애썼으나 끝내 무위로 돌아갔고, 병조판서 이장곤은 옥사에 술을 보내어 그 들의 마지막 밤을 위로하였다. 개혁의 주체들은 그가 보낸 술을 마시면서 자신들의 비장한 심회를 시를 지어서 달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날에 중종 임금의 어명이 내려진다.
조광조, 김정, 김구 등에게 장 1백을 가하고, 조광조는 능주, 김정은 금산, 김식은 선산, 김구는 개령, 윤자임은 온양, 기준은 아산, 박세희는 상주, 박훈은 성주로 각각 유배하라.
이에 항거하는 성균관 유생 1천명은 거리로 달려나와 엄중 항의하는 소동을 피우기도 하였으나, 끝내 중종 임금의 어의를 되돌려 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0일, 조광조는 유배지 능주에서 중종이 내린 사약을 받게 되지만, 금오랑이 압지를 만들어 사약을 가지고 와서 임금의 전지라고 말하자 그는 분연히 상소를 올리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말했다.
국가에서 대신을 대접하기를 이와 같이 초라하게 함은 옳지 못하오. 그 폐단은 장차 간사한 무리로 하여금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멋대로 죽이게 할 것이오.
사약을 내리는 절차가 허술하면 장차 어명을 사칭하여 미워하는 사람을 사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마치고 조광조는 의관을 정재하였다. 그리고 주군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38세의 극적인 삶을 마감하였다.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기 직전에 중종 임금을 그리는 시 한 수를 지어서 남겼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랫세상을 굽어보니 붉은 충정을 밝게 비추어 주리"
후세의 사람들은 정암 조광조의 개혁의지가 급진 과격하였기에 실패를 자초했다고 평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개혁하고자 한 사안들은 중대하고도 시급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암 조광조의 개혁의지는 숭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첫째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 세력들의 반발과 저항이 필사적이었고, 둘째 중종 임금의 성품이 우유 부단하여 초지를 관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장애 요인은 오늘의 현실과도 직결 될 것이다. 소년 국왕과 대비의 수렴청정
* 처음에 위쪽으로 올라갈 때는 한 걸음이 다시 어려웠는데, 한 걸음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데 있어서는 한 갓 발을 들기만 해도 몸이 저절로 아래로 휩쓸려 내려가니, 어찌 착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과 같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조식) ------ 1 조선왕조에는 스물 일곱 분의 임금이 있었다. 그러나 종묘에 배향된 위패는 영왕 이은을 포함하여 스물 여덟 분이다. 그분들이 모두 단명했던 것은 아니지만 평균 연령으로 보면 45세, 결코 장수했다고 볼 수는 없다. 비교적 장수를 누린 분으로는 영조(83세), 태조(74세), 고종(67세), 정종(63세), 숙종(60세) 순이고, 30세 안쪽에 승하한 분으로는 단종(17세), 예종(20세), 헌종(23세) 뿐이다. 그러나 30대에 승하한 임금이 8명, 40대를 넘기지 못한 왕비는 9명이다. 그밖에 열 살을 넘기지 못한 왕자와 공주, 옹주(후궁 소생의 왕녀)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같은 사정이라면 장수라기보다 단명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의학에 문외한이므로 임금의 단명에 대해 의학적인 진단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상식의 수준에서 말한다면 첫째 과다한 영양섭취, 둘째 운동부족, 셋째 무절제한 성생활에서 기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여기에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학이 없었다는 사실이 추가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임금의 수랏상에는 전 국토에서 생산되는 모든 산해진미가 동원된다. 저기에는 부족함이 없음도 간과되어서는 아니된다. 또 보신을 위해서는 철철이 보약이 올려지게 마련이다. 영양이 과다한 섭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운동량의 부족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고려 시대로부터 전해지던 격구와 같은 스포츠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격구가 주자학의 이념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점차 시들해 질 수밖에 없었고, 설혹 그렇지가 않다고 하더라도 매냥 거기에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러 사냥을 나갔다는 기록은 있으되 그 또한 일년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일 것이었다. 개항 후 테니스가 처음 들어왔을 때, 플레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대부가 가로되, "하인들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면 되는 일을 왜 저리 땀을 흘려야 하는고..?"라면서 혀를 차더라는 에피소드도 있질 않던가. 게다가 임금은 먼길을 걷질 않는다. 더구나 대궐 안의 전각과 전각을 옮겨 다닐 때도 연을 타고 다녔다면 운동부족의 현상은 심각하고도 남을 것이다. 예로부터 제왕은 무치라고 했다. 특히 여성관계가 그랬다. 거느린 후궁의 수는 말할 나위도 없었고, 그녀들을 선택하거나 접촉함에 있어서도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가령 임금이 궁원(지금의 비원과 같은 곳)을 산책하다가 마음에 드는 궁녀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성행위를 해도 무방하다. 따르던 내시나 상궁들은 잠시 뒤로 향해 돌아서 있으면 보지 않은 것이 되고, 임금의 성행위가 침전에서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지밀 상궁은 바로 문밖에 있을 뿐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 임금이 무치라는 것은 이 같은 일련의 법도나 관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궐 안에는 약방이 있고 의원들이 있다. 임금의 환후를 살피는 의원을 어의라 하고, 내명부의 병을 살피는 의원을 여의라고 하는 것은 대개 상궁들이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학이 아니었으므로 병의 종류가 세분되어 있지를 않았다. 물론 영험한 의약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전염병에 해당되는 병들은 대체로 '역질'이라고 표기하였고, 상처가 곪는 따위의 것은 '창질'이라고 표기하였다. 특히 천연두나 학질의 치유는 하늘의 소관이라고 믿었기에 백약도 효험을 구할 수가 없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왕자며 공주를 비롯한 수많은 왕실 사람들이 그런 병으로 생목숨을 잃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와 같은 봉건사회에도 성병은 있었다. 성병은 유럽에서 옮겨진 망국병이지만, 대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스며들었고, 고려나 조선에서는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에 의하여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병은 보균한 사신들에게서 상궁. 나인들에게 전해지고, 그녀들에 의해 임금에게까지 옮겨지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왕실에 창질이 흔하고, 말을 타지 못하는 임금과 왕족이 많았던 것이 그 때문이라는 설도 만만치가 않다. 약은 모두가 한방이었고 요즘과 같은 항생제가 없었기에 천하의 명의를 동원할 수 있었던 왕실이나 임금의 처지로도 병마를 쉽사리 뿌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 2 절대권력을 에워싼 여러 세력간의 갈등은 어디에고 있게 마련이다. 그 갈등이 크게 번지면 정변이 되고 혁명이 되지만, 암살이나 독살과 같은 비겁한 수단도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그런데도 조선왕조의 경우는 암살이 없다. 그것은 강상과 윤기를 치도의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왕조 시대에 있어서의 정적의 제거는 대개 상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것도 한두 번의 상소로 결판이 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사와 선대의 관례를 소상히 인용하는 장문의 상소가 수십 번 오르내리고 그에 반대하는 상소가 또 수없이 오르내리고서야 '사사하라!'는 임금의 윤허를 받을 수 있다. 이 같은 사정이고 보니 암살과 같은 비겁한 수단은 용인될 수가 없었을 것이리라. 그런데도 왕실의 일각에서는 독살설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설일 뿐, 독살이라고 단정되지는 않았다. 그 첫 번째가 인조 23년 4월 26일에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독살설이다. 임금이나 세자가 죽으면 소렴과 대렴시에 종친과 당상관들이 입회를 하게 되어 있는데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데 의혹이 있다. "인조실록"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세자의 시신은 진흑으로 변해 있었으며, 칠혈에서 출혈하고 있어 마치 독약에 중독된 사람과 같았다.
그렇다면 누구의 소행인가. 바로 이 점이 소상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이 독살설이 공통점이다. 이때는 인조의 총비인 귀인 조씨의 소행일 것이라는 풍설이 난무하였으나 그 내막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두 번째의 독살설은 경종4년 8월25일에 있었던 경종의 죽음이었다. 저 유명한 희빈 장씨(장옥정)의 소생이었던 경종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연잉군(후일의 영조)을 세제로 맞아들였다. 이 세제책봉의 일을 놓고는 노론과 소론을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명분론의 대립이었지만 살기가 도는 갈등이라고 할 만했다. 이때의 기록으로는 동궁에서 올린 게장을 먹고 경종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또한 애매한 것이 경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영조를 독살의 주모자로 몰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영조의 소행일 것이라는 풍설은 난무하듯 퍼져 나갔다. 이 사실을 노골적으로 입에 담았다 하여 이천해 같은 사람은 극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경종의 독살설은 근 30여년 간이나 설왕설래되고 보니, 궁색하게도 대왕대비 김씨가 게장을 올린 것은 동궁이 아니었고, 경종이 죽은 것은 게장을 먹은지 닷새 후였으므로 직접 사인이 아니라는 궁색한 해명까지 해야 했다. 그 후에도 독살설의 후유증은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더 세월이 흐른 다음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도 경종의 죽음에 관한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의 독살설은 1918년 12월 20일에 있었던 고종황제의 죽음이다. 고종의 독살설은 설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독살로 알려져 있다. 이때는 이른바 일제의 통감정치의 와중이었으므로 일본인들이 개입된 특수한 사건이었다. 고종은 식혜를 좋아했다. 그 식혜에 독을 넣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또한 설로 끝날 것 같았는데, 염을 할 때 시체에서 살이 묻어나는 것으로 확증이 드러났다. 전의 안모라는 자가 일본정부의 관리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이방자 여사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는 자전에다 밝혔다. 이 밖에도 고종의 총비였던 영보당의 소생인 완화군이 급사한 일이 있었는데 한때 민비의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나 실상은 천연두를 앓다가 사망하였다. 어떻든 권력의 정상부에서 곧잘 일어나는 독살은 대체로 설로 끝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때로는 함구령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입에 담는 것이 곧 불충이 되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기가 십상이었기에 풍설로 묻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 3 임금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거나, 반정으로 인해 폐위가 되면 가까운 종친 중에서 왕재를 골라 보위를 이어가게 한다. 전자의 경우 예종의 뒤를 이었던 성종이 그러하고, 헌종의 뒤를 이은 철종이 그러했으며,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의 경우가 또한 그러하였다. 후자의 경우는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의 경우가 그러하였고,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의 경우가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나 후사가 있어도 보령이 어린 세자가 보위를 이어가게 되면 대왕대비나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이란 어린 임금의 등뒤에 발을 치고, 발 뒤에 대왕대비나 대비가 앉아서 정무를 대행하는 경우를 말한다. 수렴청정은 중국에서도 시행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왕조나 조선왕조에서는 정치적인 관행이요, 미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수렴청정이나 섭정의 기회를 무산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일대 혼란을 겪은 뼈아픈 체험을 한 바가 있다. 문종이 승하하고 열두 살 난 세자가 보위를 이었을 때였다. 그때 왕실에는 대비(세종비)도 중전도 없었으므로 수렴청정은 불가능했지만, 섭정을 세워서 어린 임금을 보살필 수가 있었을 것인데도 대행대왕(승하한 임금의 장례전 호칭)의 고명이 없었다 하여 정승들의 보좌만으로 친정을 도모하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주도된 계유정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란을 겪으면서 왕통의 흐름까지 뒤바뀌는 불행을 자초한 것이었다. 세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예종이 일 년 남짓만에 다시 승하하고, 열세 살 어린 보령으로 성종이 보위를 이어가게 되자 대소신료들은 지난날 수렴청정이나 섭정을 두지 않았던 탓에 겪어야 했던 불행한 전철을 다시 밟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대소신료들은 소년 성종의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정희왕후는 조선왕조 최초의 수렴청정에 임하게 되었지만, 세조의 총신이자 그녀가 신임하는 훈구대신들인 신숙주, 한명회, 등에 원상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그녀의 수렴청정은 그야말로 형식뿐이었고 실제의 정무는 신숙주, 한명회 등에 의해 처결되었다. 정희왕후는 형식뿐인 수렴청정을 오래 고집하질 않았다. 신숙주, 한명회와 같이 믿을 만한 훈구대신들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학덕을 겸비한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가 있었기에 마음놓고 철렴(수렴청정을 걷우는 것)을 선언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왕조에서 두 번째로 시행된 수렴청정은 인종 1년 7월1일, 보위를 이은지 겨우 여덟 달째로 들어선 인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중종의 세 번째 계비)소생인 경원대군이 열두 살 어린 나이로 보위를 이어가게 되니 이분이 바로 명종이고 따라서 그의 모후이자 대왕대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불가피해진 것이었다. 수렴청정의 전례가 있다고는 하나 세조, 예종, 성종으로 이어지던 3대와 중종 인종 명종으로 이어지는 3대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세조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세조의 총신들이자 자신의 후광을 입고 있는 신숙주, 한명회 등이 원훈들이 막강한 위세로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고, 정희왕후에게는 한점의 사욕도 없었으므로 외척의 발호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중종의 왕권은 반정공신들에 의해 옹립된 것이었기에 세조와 같은 힘의 정치를 구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파벌이 나무하여 조광조와 같은 양식이 있는 인재들이 수없이 참변을 당해야 했고, 게다가 문정왕후에게는 사욕이 있었으며 탐욕의 덩어리와 같은 오라비와 아우가 가세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외척의 발호가 싹트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를 않았겠는가. ------ 4 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의 정치현상에 있어서도 대통령의 친인척의 비리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특히 그 처족의 부정이 불러들이는 부도덕의 양상은 치부에만 몰두한 그들 일신의 영달보다 더 큰 패가망신을 자초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정권의 몰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경험한 바가 있다. 태종 이방원은 외척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여 구조적인 부조리의 발생 원인을 제거한다는 신념으로 네 명의 처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였고, 임금의 장인인 국구에게까지 자진을 명하는 것으로 외척의 정치참여를 철저하게 차단하였다. 그 결과 세종 시대와 같이 청백릴 가득한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엄연한 사실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역사 앞에서 옷깃을 여며야 하는 당위성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사가의 친형제들인 윤원로와 윤원형 형제를 정치의 중심부로 등장하게 하는 불행의 요인을 안고 있었다. '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태종 이방원의 통치이념을 뒤흔들면서 조선조 최초로 외척이 발호하는 악례를 남기게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좌찬성 윤임은 의정부와 양사의 언관들을 총동원하여 먼저 윤원로를 탄핵하기 시작한다. 우선 그 하나만이라도 제거 할 수 있다면, 외척의 발호가 시작되기 전에 윤원형까지도 무력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수렴청정이라는 막강한 위세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문정왕후는 의정부와 육조 그리고 간관들의 벌떼 같은 강청을 물리치지 못했다. 더 밀릴 곳이 없었던 문정왕후는 사가의 오라비 윤원로에게 중도부처라는 중형을 내리고 패배의 눈물을 쏟아야만 했다. 중도부처란 거주지를 지정하여 일정한 곳에서만 기거하게 하는 일종의 유배형이다. 윤원로가 전라도 해남에 안치되자 조정에는 대윤과 소윤이라는 파벌이 생겨나면서 끊임없는 갈등을 되풀이하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대윤이란 윤임을 중심으로 한 조정일각의 기득권세력을 말하는 것이고, 소윤이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을 말한다. 이른바 정파 갈등이 정치표면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외척의 실세 윤원형은 비록 참의의 신분이면서도 호조판서 임백령, 병조판서 이기, 예조판서 허자, 지중추 정순봉 등과 결탁하여 윤임을 중심으로 한 영의정 윤인경, 좌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 등 이른바 사림의 청류들을 일거에 제거할 궁리를 한다. 그들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어린 임금과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조정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행사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명종 즉위년인 을사년을 피바람으로 얼룩지게 하였다 하여 '을사사화'라고 이름 붙여진 참변은 이른바 사림의 청류들을 무고,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쟁의 시작이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등에 업은 윤원형 일파가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이 이린 임금을 폐위하고 윤임의 생질인 계림군이거나, 봉성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했다는 실로 어이없는 무고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후일의 사가들은 '을사사화'를 평하여 청류의 씨를 말리는 참극이라고 적었지만, 윤원형은 이 사화를 계기로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외척의 실세로 군림하게 된다. 속은 세를 따른다는 속언이 있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거론하면서 '정쟁'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사색당파'라는 잘못된 표현을 즐겨 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식민지 사관의 잔재가 상존하고 있다는 실증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정쟁의 시초랄 수 있는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바로 윤원형의 집 객사에서 시작되었다면 얼마나 아이러닉한 일인가. 권력의 실세의 집은 예나 지금이나 식객들로 들끓게 마련이다. 기식을 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적극파가 있는가 하면 더러는 눈치를 살피면서 조석으로 드나드는 문안파도 있을 것이다. 왕실의 인척이기도 한 젊은 날의 심의겸이 공무로 영의정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곳에 김효원의 침구가 있음을 알게 되자, "문명이 있는 자도 권문에 아첨하는가!"라면서 그를 멸시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세월이 흘러서 선조 때에 이르러 김계휘가 심의겸에게 김효원을 이조전랑으로 천거하자, 의겸은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하여 불응하였다. 그후 심의겸의 아우 충겸을 전랑으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척족에게는 전랑을 맡길 수 없다' 하여 극력으로 반대하였다. 이를 기회로 두 사람은 평생을 불목하게 되었는데,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김효원의 집이 지금의 동대문 시장 근처인 건천동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지금의 정동에 있었다 하여 김효원을 따르는 사람들을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을 섬기던 사람들을 '서인'이라고 부른 데서 조선조의 정쟁이 시작되었다는 설이고 보면 그 당파 싸움의 시발이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 5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족보라는 개념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와 연결되어진다. 문벌가계와 성족파별을 분명히 하고, 존비와 항렬을 따르는 풍속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족보의 유래는 물론 중국의 후한대에서부터 조상의 관력이나 혼인에 이르는 가문의 제반사를 기록하여 남기는 것으로 타문화의 비교우위에 서고자 한 데서 시작되어 보학까지 성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면서 족보는 점차 신뢰성을 잃게 되어 각 가문의 사문서로 전락되기도 하였으나, 그 기록성까지 비방해야 할 까닭이 없었기에 명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북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가정각본"으로 명나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위에 적은 "가정각본"에 영향을 받아 조선조초기에 본격적인 '족보'가 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연려실기술"에 별집에 적힌 바를 따르면 가정 연간(1522--1566)의 '문화유보'가 최초라고 되어 있으나 그 실물이 현존한다는 얘기는 듣질 못했고, 문헌적으로 가장 오래 된 우리 나라의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는 종법과 보첩은 없고, 거가대족은 있으나 가승이 없다.
서거정이 쓴 안동 권씨보의 서문 한구절이다. 이로 미루어 조선조 초기 이전에는 제대로 된 족보가 없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족보를 총칭하여 계보라고 하지만, 그 외도 보첩, 세보, 세계, 세지, 가승, 가보 등의 많은 명칭으로 불리우면서 기재된 내용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예컨대 '가첩'은 동족 모두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직계만을 따로 발췌해서 엮은 것을 말하고, '가승'은 계도뿐만이 아니라 선조에 관한 전설과 사적까지를 함께 적은 것을 말한다. 또 일반적으로 '대동보'라고 불리는 것은 씨족 전체의 계보를 엮은 이른바 '종보'임을 말하는 것이며, 중시조부터 따로 독립하여 적은 것은 '파보' 혹은 '지보'라고 한다. 족보가 숭조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가문의 내력을 후세에 전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국민정서와는 불가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각자의 이름자에는 거의 반드시 두 자중 한 자가 항렬자로 되어 있다. 대체 이 항렬자를 누가 어떻게 정해 놓았기에 몇 백년을 써도 끝이 없는가를 생각해 본일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각 가문의 '종보'로 일컬어지는 '대동보'에 적혀 있다. 항렬자는 모두 스무 자(20세까지)로 정해져 있지만, 때로는 한 대에 두 자를 정하여 위나 아랫자로 쓰게 한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그 스무 자를 모두 사용하면(20세가 지나가면)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대를 15년으로 본다면 (실제로 '족보'는 15년을 주기로 증보 간행된다) 항렬자는 대충 3백 년을 주기로 처음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여기서 족보에 기재된 내용을 소상히 살펴보기로 한다. 외척의 두령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던 윤원형의 족보를 인용해 보면 이렇다. 윤원형은 윤지임의 아들이다. 윤원형의 부인 김씨는 본관이 연안이며 현감을 지낸 김안수의 딸이었으나, 윤원형은 적실을 물리치고 첩을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윤지임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장녀는 별좌 정식에게 출가를 하였으나, 차녀의 경우 사위의 이름을 적지 못한 채 '여 xxxx'라고만 되어 있고 그 끝에 견후비록 이라고 적은 것은 딸 xxxx는 왕비가 되었으므로 뒷장에 따로 적었으니 그 항목을 찾아보라는 뜻이다. 윤원형은 슬하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모두 서자와 서녀라고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적실인 연안 김씨를 쫓아내고 맏아들인 소실의 소생들이 분명하나, 그 소실의 인적사항은 한 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와 같이 역사 드라마나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그 소실이 누군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 때로는 절대절명일 수도 있다. 천만다행으로 율곡 이이가 자신의 "석담일기"에 윤원형의 애첩은 정난정이라고 기록해 두었기에 비로소 그녀의 출신과 가계를 알게 되었다. 윤원형의 족보를 읽으면서 주의할 점은 조선조에서는 소실의 소생인 서자와 서녀는 양가의 자제와 통혼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윤원형의 소실 소생들은 양가과 통혼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거짓을 적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 "명종실록"에 '원형의 자녀가 비록 서자요 서녀지만 양가와 통혼하게 하라'는 명종의 어명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외척의 두령이 누린 특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 그리고 운명적인 한일교류
* 나의 평생에 한 마디의 말을 체득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허물을 말해 주는 사람은 곧 나의 스승이요, 나의 좋은 점을 말해 주는 사람은 곧 나의 해적이라는 그 말이다. (금성)
1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조선총독부는 "간양록"을 분서로 지정하였다. 간행되어 있는 서책을 걷우어 불태우는 일은 문화를 말살하는 가장 비열하고 저급한 일이라 진시황과 같은 전대미문의 폭군들이나 저지르는 일이지만, 간악한 조선총독부는 일본 민족의 치부를 들추어 냈다 하여 "간양록"을 불살라 버리고자 하였다. 일본의 극우파나 삐뚤어진 지식인들, 특히 보수성향의 정치인들은 지금도 제 나라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왜곡하는 일을 다반사로 여기며, 조선침략을 미화하려는 파렴치를 심심찮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결여된 역사 인식은 아이러닉하게도 한국인들을 크게 분노하게 하였고, 마침내 '독립기념관'을 건립하게 하는 등 결집력을 날 세우는 일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대체 "간양록"에 적힌 내용이 무엇이기에 조선총독부가 그토록 불태워 없애고자 하였을까. 그 진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인 강항의 행적을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다. 강항은 세조 때의 큰 문장가였던 사숙재 강희맹의 5대손으로 1567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에서 태어났으며 자를 태초라 하고, 호를 수은이라 하였다. 일곱 살 때 맹자 안질을 하룻밤 사이에 읽어 버릴 정도의 신동이었던 강항은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을 때, 임진왜란의 침상을 체험하게 되었다. 때마침 고향에 내려와 있던 강항은 정유재란을 당하면서 두 사람의 형과 함께 왜장 후지도 다카도라 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땅 이요 주, 지금의 시고쿠 에히메 현의 나가하마로 끌려갔다가 곧 오즈 성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 비록 고관 대작은 아니었다 해도 조선 조정의 관원이었고, 또 주자학에 통달한 기개 있는 선비인지라 미개하고 보잘것없는 왜국 땅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하게 되지만, 실패만을 거듭하다가 2년 뒤인 1598년에는 교토의 후시미에 있는 번주의 별저로 이송되어 치욕의 포로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간양록"은 저자 강항이 적지에서 보고 들은 왜국의 실상과 왜인들의 무지한 모습을 소상히 적어 주군인 선조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 형식으로 된 글이다. 비록 1597년을 전후한 왜국의 실상을 적었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이 워낙 소상하고 적나라하여 오늘을 사는 일본인들에게조차 수치감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라면, 당연히 한국인들에게는 자부심을 부추기는 내용이 아니겠는가. 조선총독부는 바로 이 점을 두려워하여 "간양록"을 거두어 불태우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란 무심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어서 "간양록"의 초간본은 오히려 일본의 내각도서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아울러 그 귀중한 내용을 불태워 없애고자 하였던 조선총독부의 만행까지를 함께 적어서 전하고 있음에랴. 강항이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의 일본 문화란 문자 그대로 한심한 것이었다. 예컨대 도자기는 옥과 같이 귀한 것이라 지배계급인 상급무사들의 다기로 사용되었을 뿐, 일반 서민들은 밥그릇에서 물통에 이르는 모든 생활용구는 목기로 된 것을 쓰고 있었다. 또 백성이라고 불리우는 상민들은 평생을 잡곡으로만 살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 가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문자를 터득한 사람들이 또한 많지 않아서 학문은 그 개념조차도 정립되어 있지를 않았고, 따라서 인쇄술 등도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오랜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살았던 탓에 무기를 만드는 기술만은 조선에 비길 수 없을 만큼 발달되어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특히 정유재란 때에 이르러 여러 휘하의 장수들에게 주인장을 내어 도공, 인쇄공, 학자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올 것을 명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본에서는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다. ------ 2 오즈에서의 포로생활을 2년 남짓 보낸 강항은 번주의 별저가 있는 교토의 후시미로 옮겨졌지만, 후시미는 시골과 달라서 식자들이 더러 있었다. 비록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강항의 인품과 학덕이 알려지면서 그의 휘호를 받겠다는 사람과 글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강항은 그들의 도움으로 비교적 편안한 삶을 도모할 수가 있었고, 글씨를 판 돈이 모아지면 다시 배편을 마련하여 고국으로의 탈출을 시도해 보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실패만 거듭될 뿐이었다. 그러나 강항은 낙담하지 않은 채 다시 글씨를 팔아서 탈출자금을 마련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강항의 문하로 입문을 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 고장 묘수원(절)의 순수좌라는 승려였다. 여기서 미리 밝혀 두지만 바로 이 순수좌라는 왜승이 후일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는 후지하라 세이카인 것이다. 승려의 신분이었던 후지하라 세이카는 강항으로부터 조선 주자학을 배우면서 그 학문의 깊이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또 후지하라의 후견인이었던 번주용야의 성주인 아카마츠 히로미치, 해운왕 요시타 등도 조선 주자학에 매료되면서 강항과 후지하라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청한다. 후지하라는 조선 주자학에 빠져들면서 승복을 벗어 던지고 유학자로 변신하게 된다. 그는 몸소 조선 도포를 입고 서책을 대하는 것으로 조선 주자학의 진수를 온몸으로 터득하고자 하였고, 평소에도 유건을 쓰고 있을 만큼 명실상부한 조선 주자학의 신봉자로 자처하더니 마침내 강항이 친필로 써준 "사서오경"에 왜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왜훈'을 달아서 '일본 유학'을 싹트게 하였다. 또 그것은 일본땅에 심어지는 퇴계학의 싹틈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 유학이 정립되는 알찬 결과를 거두게 된다. 백제 때 왕인으로부터 '천자문'을 전해 받아서 문자를 익힐 수가 있었던 일본이 이때에 이르러 강항의 가르침으로 주자학을 배워서 일본 유학을 싹틔웠다면 그들의 학문적 근원이 어디에서 연유되었는지를 명백히 밝혀 놓는 것이며, 더구나 "간양록"의 내용에는 왜인들의 참담한 생활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데다가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기록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본인들의 복장을 끓게 하고도 남을 내용을 담고 있다.
도쿠가와 등은 발상하기를 꺼려 하여 이놈의 죽은 사실을 꼭 덮어 두기로 하였습니다. 죽은 놈은 배때기를 갈라 그 안에다 소금을 빽빽이 처넣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같이 꾸미기 위해서 평소에 입던 관복을 그대로 입혀 나무통 속에다 담아 두었습니다.
죽은 시체의 배를 가르고 거기에다 소금을 빽빽이 처넣었다는 구절을 강조하는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이 있을 때 조선으로 향하는 병사들에게 죽인 조선 병사들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오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강항은 그 명령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마다 귀는 둘이요 코는 하나야! 목을 베는 대신에 조선놈의 코를 베는 것이 옳다. 병사 한 놈이면 코 한 되씩이야! 모조리 소금에 저려서 보내도록 하라.
조선 병사들의 코를 베어서 소금에 절여 보내라고 하였으니, 죽은 그의 뱃속에 소금을 처넣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강항은 믿었을 것이었다. 지금도 일본국 교토의 번화한 거리에는 조선병사들의 귀를 묻었다는 미미스카(귀무덤)가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이 대목을 쓰고 있을 때 경도의 귀무덤이 한국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사를 치른 다음 그의 위패가 있는 곳에 황금전을 짓고, 그 밑에 '대명일본에 일세를 떨친 호걸, 태평길을 열었으니 바다는 넓고 산은 높다'라고 글을 써 붙였다. 강항은 구경삼아 그곳에 갔다가 그 문구를 뭉개고 다음과 같이 써놓고 돌아왔다.
반생 동안 한 일이 흙 한 줌인데 십층금전은 울룩불룩 누굴 속이자는 것이더냐.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
우연히 후지하라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그와 같은 글귀를 발견하고 황급히 뜯어내고는 강항에게 달려와 목청을 높였다. 글귀를 보아서는 분명히 당신이 지은 것인데, 왜 조심성이 그리도 없느냐고 항변을 겸한 충고를 거듭했다고 강항은 적었다. 이 또한 일본인의 수치심을 자극한 내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본땅에서 포로생활에 시달리던 강항은 잡혀간 지 4년 만인 1600년에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가 살아서 고향땅을 밟을 수가 있었던 것은 후지하라 세이카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막부의 수장에게 몸소 탄원하여 허락을 받아 낸 때문이었다. ------ 3 지금의 일본땅 시소쿠, 이요의 작은 교토라고 불리우는 에히메현 오즈 시에 가면 강항과의 인연을 소홀히 하지 않는 이 고장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만날 수가 있다. 4백여 년 전 강항이 포로로 머물렀던 오즈 성의 언덕에서 도보로 내려오면 오즈 시 문화회관에 이르는데 그 광장 왼편에 강항을 기리는 현창비가 서 있다. 화강석으로 된 비면에는 '홍유 강항 현창비'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고 그 하단에는 검은 오석판에 강항의 연보가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또 현창비 왼편에 두 개의 비문석을 따로 세웠는데 놀랍게도 똑 같은 크기의 비면에 일문과 한글로 비문을 새겼다. 일문의 제목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의 비'라고 적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 시대의 뛰어난 강항은 풍신수길이 조선에 재출병하였을 때 후지도 다카도라 군에 잡히어 두형(준, 환) 및 가족들과 함께 이여 대주에 연행되었습니다. 십 개월에 걸친 대주성에서의 강항 선생의 생활은 학자로서 우대 받고 금산 출석사의 중들과의 교유 한시의 창수로 나날을 보내는 자유로운 신분이었습니다. 경도 후시미의 후지도 저택으로 압송되면서부터 에도 유학의 개조가 되는 후지하라 세이카, 용야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 해운왕 요시타 소앙 등과의 자유로운 교제 속에서 세이카는 사서오경 왜훈을 완성하였습니다. 강항 선생과 두 형 등 십여 명이 사서오경의 대자본을 필사하고 거기에다 세이카는 왜훈을 붙여서 간행하였습니다. 근세 일본 사상사의 전환기에 강항 선생과 후지하라 세이카의 우정은 일본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였으며 세이카가 유학자로서 자립할 수가 있었음은 강항 선생에게 힘입은 바라고 생각됩니다. 강항 선생이 일본 유학사상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1990년 3월 연파 김용석 필사'
이 현창비가 세워지게 된 데는 일본의 오즈 시 시민들과 한국의 영광 군민들이 힘을 합쳐 건립기금을 모금한 탓도 있지만, 강항의 인품에 매료된 무라카미 쓰네오라는 한 일본인의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라카미 씨는 오즈 시의 호적과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는데, 실로 우연히 오즈 시를 찾은 외국인 1호가 조선 유학자 강항이라는 사실에 착안하고, 그에 대한 사료를 조사하던 중에 "간양록"을 읽게 되었다. 그는 "간양록"에 적힌 강항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강항의 고향인 한국의 영광까지 다녀오는 등 그의 학문과 인품에 매료될 만큼 한일양국의 문화교류에 열정을 쏟게 된다. 결국 무라카미 씨는 자신의 직장인 오즈 시의 호적과를 물러나와 "간양록"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는 강항의 발길이 머물렀던 모든 곳을 완전하게 답사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강항이 오즈에서 탈출하던 행로까지 찾아내면서 해당지역에 표석을 세우는 등 지나간 역사를 오늘에 되새기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는 또 '수은 강항 선생 행적지 순례단'을 조직하여 한. 일 양국의 방문객들에게 몸소 안내역을 자청하기도 하였으며, "유학자 강항 선생"이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강항의 출생지인 한국의 영광과 포로생활에 시달렸던 일본국 에히메 현의 오즈시에 강항 선생을 기리는 현창비가 건립되고, 그 제막식에 두 도시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교대로 참석하는 등의 아름다운 광경이 연출된 것은 한. 일 양국 문화교류의 원류를 밝히려는 무라카미 쓰네오 씨가 뿌린 씨앗에 싹이 트고 꽃이 피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 4 일본국을 대표할만한 역사소설가인 시바 료타로가 쓴 "고향을 어찌 잊으리까"라는 소설을 읽고, 나는 상당한 흥분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엄청난 얘깃거리가 있었던가 하는 것이 흥분의 요인이었고, 이런 얘기를 왜 일본인 작가가 써야 했으며, 대체 우리 나라의 작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읽고 다시 읽는 동안 시바라는 작가가 아무리 일본인이기에 상당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땅 구주로 달려가서 현장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이와타 레이몬이라는 일본 작가가 쓴 또 하나의 소설 "이조도공의 말예"를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소설도 앞서 소개한 시바의 소설과 같은 시대, 같은 인물을 다루고 있었다. 이 소설도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는 마찬가지, 내게는 어서 현장으로 떠날 것을 채근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사쓰마야키의 고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오래 전인 1977년 5월 19일의 일이었다. 일본국 구주의 가고시마. 임진, 정유년의 양란에 걸쳐 10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조선인 포로가 끌려와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4백 년 세월을 살고 있다면 우리와는 그때 일본인들에게 잡혀 온 10만여 명의 조선인 포로 가운데 약 5만여 명이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에 인신매매로 팔려 갔다는 기록이고 보면, 구주에 남아 있었던 조선인 포로의 수가 대충 5만여 명일 것이고,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4백 여년 동안 핏줄을 이어오면서 자손을 번창하게 했다면 지금의 구주인 들은 거의 대부분이 조금은 조선인의 피를 받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이 사실을 가고시마 대학의 교육학부 요츠모토 교수에게 물었더니 그는 서슴없이 대답해 주었다. "거의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요." 너무나도 명쾌한 대답이어서 듣고 있는 내가 민망해 할 정도였다. 가고시마는 일본 사람들이 동양의 나폴리라고 자랑할 만큼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긴고오만의 한가운데 떠 있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사쿠라지마는 그대로 활화산이라 이날도 분연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가고시마 시내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일본국 특유의 산과 농촌 풍경을 볼 수가 있다. 약 50분 가량 달려가노라면 이슈인을 지나 히가시이치키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다시 5분 정도의 거리에 유노모토라는 유황 온천장이 있다. 여장은 거기다 풀었다. 유황 냄새 물씬 풍기는 일본식 여관 하루모토소에. 심수관 씨 댁에 전화를 걸고 방문할 뜻을 전했다. 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다음, 그렇게 가고 싶었던(아니, 가야 했던) 미야마로 달렸다. 택시로 10분 정도의 거리였다. 지금은 미야마라고 부르지만, 이 지역의 옛 이름이 그 유명한 나에시로가와, 4백여 년 전 조선인 도공들이 포로로 잡혀 와서 자리를 잡았던 유서 깊은 고장이다. 우선 산세가 한국과 흡사했다. 물론 나중의 일이지만 심수관 씨는 '어떻습니까, 남원과 같지요. 우리 선조들은 남원과 지세가 유사한 여기에 짐을 풀었습니다'라고 했을 만큼 낯설지 않은 고장이었다. 이 미야마로 들어서는 초입에 '사쓰마야키의 발상지'라는 선전탑이 서 있어서 방문객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다. '사쓰마야키'란 일본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하는 도자기의 이름인데, 바로 이 사쓰마야키가 조선인 포로의 손에 의해서 구어졌다는 사실, 그 사실의 뿌리를 캐러 오는 나에게 '사쓰마야키의 발상지'라는 선전탑이 주는 인상은 하나의 충격이며 흥분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서 나직한 언덕을 하나 넘으면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이 포근하고 따뜻한 마을의 인상이 한국사람인 나에게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국적인 풍취가 느껴진다면 직경이 10센티 이상인 왕대가 즐비하게 서 있다는 것, 따뜻한 지방의 관상수가 많이 눈에 띈다는 정도였다. 심수관 씨 댁의 낡은 목조 대문이 첫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에도 필시 한국 사람이 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눈에 익은 대문이었다. 옛날 일본 사람들의 집은 담장이 없고 대문이 없었다. 담장을 치고 대문을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사무라이의 집안이나 허용되었던 일이다. 이것도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심수관 씨 댁의 이 대문은 가고시마에서도 세 번째로 큰 대문이었다고 하니 조선인 도공들이 누렸던 한때의 영화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심수관. 그는 어느 모로 뜯어 보나 그 골격부터가 한국 사람이다. 하긴 그렇다. 심수관 씨의 피에는 단 한 방울도 일본 사람의 피가 흐르지 않고 있으니, 그의 국적이 비록 일본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외모가 한국 사람임은 당연하질 않겠는가. 지금부터 4백여 년 전, 심당길이 일본땅에 포로로 잡혀 온 이래, 13대 심수관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한 조상은 단 한 사람도 없고, 오직 14대인 지금의 심수관 씨만이 일본인 여성을 아내로 맞았을 뿐이다. 여기서 먼저 밝혀 두고 갈 일은 심수관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다. 처음에 일본땅으로 잡혀온 초대는 심당길이었고, 2대가 심당수, 3대가 심도길, 4대가 심도원, 5대가 다시 심당길, 6대가 심당관, 7대가 심당수, 이런 식으로 11대 심수장까지가 서로 다른 이름을 쓰다가, 12대에 이르러 심수관이라는 습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14대인 지금의 심수관 씨의 본명은 오사코 게이키치였지만, 어버지(13대)가 세상을 뜨자 그 유업을 이어받게 됨으로써 심수관의 이름을 습명하게 되었다. "당신의 선조들이 낯선 땅에 끌려와서 사쓰마야키라는 명품을 남길 때까지의 노고를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담고자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하였습니다."라고 찾아온 목적을 밝히자, 그는 반가워하지 않았다. 몇 분의 순간을 흘려 보낸 다음에야 그는 일본의 여러 매스컴에 시달리고 있노라고 실토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제삿날도 아닌데,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절을 해달라는 주문도 너무 자주 받으니까 지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5,5,5^."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일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쓰고자 하는 드라마에는 유명한 탤런트가 등장하여 심수관 씨의 역을 맡아 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집을 오픈세트로 빌려 주고 당신은 가능한 협조만 해주면 될 것이라고 했을 뿐, 그는 안색을 바꾸면서 반가워 하였고 아낌없는 지원을 할 것이라는 확약을 해주었다. 이로부터 난 본격적인 취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는 가보로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흔쾌히 제공해 주었다. 인상적인 기록으로는 포로로 잡혀 온 처지면서 자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본이 만들어진 것이었고, 당시의 물산동향을 기록한 문서도 있었으며, 필사본으로 된 고전소설 "숙향전"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시바 료타로가 그의 소설에서 크게 잘못 설명하고 있는 "오날이소서"라는 시조에 관해서도 언급을 해야겠다. 이 시조가 잡혀 온 조선인 도공들에 의해 즐겨 불려졌던 탓에 마치 거기서 지어진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실상은 시조집 "청구영언"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원시가 약간 변형된 것이었다.
오날이 오날이소셔 매일에 오날이소셔 뎔그디도 새디도 마르시고 새라난 매양쟝식에 오날이소셔.
심수관 씨는 비로소 선조들의 즐겨 불렀다는 "오날이소서"라는 시조의 참뜻과 출전을 알게 되었다면서 기뻐해 주었다. 책상 앞에서 할 수 있는 취재를 대충 마친 나는 그를 따라서 마당으로 나갔다.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으로 꾸며진 후원의 담장 밑 풀숲에 이르렀을 때,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아야 했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었으며 또 감동을 동반한 슬픔이기도 하였다. 풀숲에는 두 개의 돌비석이 서 있었는데(높이 40센티미터 정도) 비석에는 놀랍게도 '반녀니'라는 한글 비명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녀니'라면 분명히 여자의 이름이 아니던가. 마치 '언녀니'와 같은. 그러니까 필시 성도 몰랐음직한 천한 조선 여인의 이름이 분명한데, 그런 이름을 가진 여인이 죽었다 하여 비석을 세우고 그 비면에 이름을 새겼다는 사실, 그런 일이 정녕 본국(그들이 본다면)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던가. 낯선 이국땅에서 끌려와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죽었으면, 보잘것없는 아낙의 죽음을 이렇듯 애통하게 기릴 수가 있을까. 심수관 씨는 내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가 무어냐고 물었다. 나는 조선조 사회의 유교적 개념을 설명하고 적어도 한국땅에서는 상민 여성의 이름자가 한글로 새겨진 비석은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기에. 만리타국에 끌려와서 형언 할 수 없는 고초를 겪다가 세상을 뜬 '반녀니'를 위해 비석을 세워 주었던 남성들의 마음씨를 떠올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적이 놀라면서 잘 보존하고 간수해야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그 비석이 세워진 연대를 물었다. 그는 구체적인 예증은 없으나, 어른들로부터 2백년 이상된 것이라고 들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내가 그에게 역사드라마 "타국"을 쓰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의 표정은 숙연해졌고 마치 선조의 유훈을 전하듯 진지하게 말했다.
슬픔이나 괴로움이 응결되어 있는 사람만이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습니다. 사쓰마야키는 일본인일 수 없으면서 일본인이어야 했던 조선 도공들의 응결된 괴로움과 슬픔의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풍속이 다른 이국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지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자신들을 위해서 반발도 참을 줄 알아야 했고, 아첨이 되지 않는 선에서 슬며시 손을 놓아 자신들의 긍지를 자위할 줄도 알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묵묵히 일해 가면서 생존의 집념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복잡 미묘한 감정이 사쓰마야키를 구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과의 대항 의식만은 가급적 삼가 주었으면 합니다.
놀라운 설명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지금도 국경일이나 명절이 되면 일장기를 내거는 일, 세금을 잘 바치는 일만은 미야마에 사는 사람들이 일본땅에서 손꼽힌다고 하면서 그것은 4백 년을 전해져 내려오는 일종의 지혜며 철학이라고 했다. ------ 5 옥산 신사를 찾았다. 미야마의 동서편 쪽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옥산신사의 본이름은 '옥산궁'이었다. 참으로 놀랍고 대견한 것은 일본땅에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 도공들이 옥산궁을 창건하여 거기에 단군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8월 한가윗날에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4백여 년 전) 단군의 위패(혹은 영혼)를 모시고 망향제를 지내자는 발의를 할 수 있었다면, 잡혀 온 사람 중에 상당한 지식인이 있었다는 뜻도 되지만, 만리이역에 잡혀 온 조선인 포로들이 자신들의 앞치레도 하기 어려운 마당일 것인데도 조상을 섬기고 크게는 나라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나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1867년, 게이오 3년에 쓰여진 "옥산궁유래기"에 '옥산궁은 개조 단군의 묘'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봐서도 당시의 조선인 포로들의 뜻이 참으로 당당했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도 쓰여지고 는 옥산신사의 제기를 보면 장고가 있는데 길이가 짧아졌을 뿐 모양은 우리 것과 같은 것이었으며, 시루떡을 찌는 작은 시루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과 같은 참으로 신기할 지경이며, 제주가 추는 춤의 형태도 우리 나라의 무당들이 추는 춤과 검무를 합친 것과 흡사하였다. 옥산신사는 미야마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조선인 도공들이 '옥산궁'으로 달려와서 그 염원을 단군신에게 빌고, 남지나해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며. 한가위 달밝은 밤에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오날이소서'를 불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 가슴도 미어지게 아팠다. 드라마 "타국"이 방송될 때 서울대학의 이두현교수가 "옥산궁묘제"와 같은 귀중한 자료를 우송해 주었다. 이러한 후의는 당시의 나에게 큰 격려였으며 용기와 분발을 일깨워 주었다고 기억된다. ------ 6 아름답고 작은 어항인 구시키노에 가면 조선인 도공들이 상륙한 지점을 기념하는 돌비석이 서 있는데, 14대 심수관의 필치로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경장 3년(1598) 겨울 머나 먼 풍토를 넘어 우리들의 개조 이땅에 상륙하다.
그 비석을 지나 섬의 언덕에 오르면 아름답고 푸른 구시키노의 남쪽바다를 건너다볼 수가 있다. 바로 그 해안을 시마비라하마라고 하는데, 여기에 조선인 도공을 비롯한 포로들을 태운 배가 도착하였다.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가미노가와의 하구가 있다. 여기도 조선인 도공과 포로를 태운 배가 도착한 곳이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구시키노의 시마비라하마에 박평의와 그의 아들 정용을 비롯하여 43명의 남녀가 상륙을 했고, 가미노가와 하구에 김해를 비롯한 남녀 10명이, 그리고 구주의 남단을 돌아서 가고시마에 남녀 20명이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평의와 김해는 일본 사람들이 하늘처럼 떠받든 도공들이어서 지금까지 그 기록이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특히 김해의 경우는 그 가계까지가 문서로 남아 있고, 박평의의 경우도 조선인 도공 최초로 쇼야 (촌장과 같은 지위)가 되어 사족의 대우를 받았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반해, 심수관 씨의 선조인 심당길은 도공으로 잡혀 온 것이 아니라, 후일 박평의의 문하에서 수련하여 도공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며, 심수관 씨도 이 같은 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해 주었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잡혀 왔던 김해는 구시키노에 도착한 지 3년 후인 1601년에 동족을 배반하고 호시야마라는 일본 성을 받았으며, 아이라 군 조오사우도에서 가마를 열고 당시의 사쓰마 번주인 시마스 요시히로(임진왜란 때 조선에 나왔던 왜장)의 극진한 예우를 받고 있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구시키노에 도착한 조선인 도공들이 최초로 도자기의 가마를 연 것은 도착한 다음해인 1599년이었고, 이때 처음으로 구워 낸 그릇은 검은색이었다. 그것은 백토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나 번주 시마스는 너무도 기뻐한 나머지 교젠쿠로라고 이름 지으면서 하나하나 검사할 만큼 대견히 여겼다. 그러면서도 북쪽 지방의 이리타(조선도공 이삼평에 의해서 주도된^5,5,5^)에서 생산되는 백자가 한량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시마스는 박평의에게 묘지다이토를 명한다. 다시 말하면 성과 이름을 쓰고 칼을 찰 수 있는 사족계급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병사와 말을 내려서 백토를 찾을 것을 몸소 독려하고 나선다. 이 같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실제로 박평의 부자가 백토를 찾은 것은 1614년, 그러니까 일본땅에 잡혀온 지 실로 16년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사쓰마야키의 특징은 빛깔에 있다. 아주 흰색이 아니고 엷은 베이지색인데, 백토의 성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들만의 색으로 자랑하고 있다. 이들 도공보다 먼저 가고시마의 본성 밑에 도착하여 사족 대우를 받고 있었던 주가선을 비롯한 역관들도 있었다.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고려촌이며, 지금도 도처에 이들이 살고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은 임진년의 왜란 때 역관을 지내다가 왜병과 더불어 철수한 사람들로 전해지고 있다. 그들이 조선땅에 남아 있었다면 동족들의 응징을 받으면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입증은 이들에게 그릇을 구울 수 있는 기술이 없었는데도 본성 밑에서 살고 있으면서 일본 이름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국에 산재하고 있었던 각 번의 도시 구조를 보면 본성 밑에서(혹은 곁에서) 사는 무사들을 죠카시라고 했으며 이들의 신분이 무사중에서도 상위에 속했기 때문이다. ------ 7 임진, 정유년에 걸쳐서 무려 7년 동안이나 조선강토를 초토화했던 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인적교류를 다양하게 하였고, 그것은 또 운명적인 교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유학자 강항이나 박평의를 비롯한 수많은 도공, 인쇄공 등이 일본땅으로 잡혀가 오늘의 일본문화를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기 도 하였지만, 그와는 반대로 일본인 사무라이가 한국에 귀화하여 그 자손을 번창하게 한 사람도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왜병 3천 여명이 현해탄을 건너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이른바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왜병의 선발대에 해당하는 이들을 가토기요마사의 휘하에 있는 왜병들이었다. 이들 3천여 왜병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우선봉장 사야가라는 무당이었고 나이는 스물 두 살이었다. 사야가는 일본에서 태어난 것을 큰 불행으로 여길 만큼 중국의 문물을 늘 사모하고 있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스스로 모화당이라고 자처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남자로 태어난 것은 천만 다행이나 불행하게도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의 나라에서 태어나서 오랑캐의 차림을 면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이 어찌 영웅의 한이 아니랴, 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비록 왜장일지라도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막상 조선땅에 상류하고 보니 조선의 문화가 중국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설사 그가 그리던 중국에는 못 간다 하더라도 중국에 못지 않은 조선땅에 왔으니 일대 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군진에 명을 내렸다.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남의 토지를 빼앗고 남의 재물을 탐내서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은 병가에서 가장 금하는 길이다. 너희들은 다만 진세를 바르게 하고 군기를 세우며 기운을 가다듬고 마음을 단속하여 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라.
왜병의 장수로는 취할 길이 아니었으나, 사야가는 이런 조처를 취해 놓은 다음 이틀 뒤인 15일에 이르러서는 조선 백성들에게도 싸울 뜻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효유서를 내다붙였으며, 20일에는 조선절도사에게 강화를 청하는 글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 무렵 울산군수 이언성이 좌위장이 되어 동래성으로 달려갔다가 왜병의 세력을 보고 황급히 도망치다가 죽으니 병사들도 앞다투어 도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딱하게 여긴 사야가는 울산 사람 서인충, 서봉호 등의 결사대와 힘을 합쳐 왜병을 공략하여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조선군 체찰사가 사야가의 귀환과 큰 공을 세웠음을 알고 이 같은 사실을 선조임금에게 아뢰자 선조는 크게 기뻐하여 사야가를 어전에 불렀다. 선조는 사야가의 무예를 친히 시험하고 그의 사람됨을 살핀 다음, 가선대부로 가자하고 사야가로 하여금 남쪽 방면의 방위를 책임지게 하였다. 사야가는 조선장수가 되어 조선땅을 방위하는 한편, 본도병영에 글을 올려 조선의 무기가 시원치 않으니 각도의 각 진영에 조총과 화약만들기를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또 각지에 있는 조선장수들과 서신을 내왕하며 작전 문제를 숙의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에는 선조 임금께서 사야가의 공을 치하하여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다시 자헌대부로 가자 하였다. 이 때에 하사한 이름이 김충선이다. 왜장 사야가가 명실상부한 조선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충선은 이후에도 우병사 김응서 장군과 만나 작전 수립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되어 그 용맹이 날로 더해졌고, 체찰사 유성룡 정승에게도 왜병과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해 주기도 하였다. 임진, 정유년의 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600년(선조 33년)에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따님인 인동 장씨와 결혼을 했다. 장장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자 김충선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중을 토로하였다.
8년간 나의 일은 거의 끝났다. 그러나 고국은 멀고 친척도 떠난 지라,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내가 고국을 사절한 것은 한의 이릉과 같아 돌아갈 수 없어서도 아니요, 조선에 붙어 사는 것이 흉노에 잡힌 소무처럼 갇혀서도 아니다. 나라를 떠난 것은 섭섭한 일이지만은 오랑캐를 벗어난 것은 나의 원하는 바라, 남산의 남이나 북산의 북, 어디에 간들 마땅하지 않으리오.
참으로 절절하게 표현된 김충선의 심중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이로부터 김충선은 그를 따르던 무리를 거느리고 우록동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 지금의 대구 근교에 있는 우록동이다. 우록동에서 조용히 기거하면서 슬하에 5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이후에도 이괄의 난을 평정코자 출병한 일이 있었으며, 병자호란 때도 몸소 출전하여 대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642년에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도 슬퍼하였고, 향리와 이웃에서도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왜장 사야가. 김충선은 자신이 몸소 쓴 문집에 성은 사가요, 이름이 야가라고 분명히 적어 놓고 있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소설가요, 일본 국민으로부터 국사라고까지 불리우는 시바 료타로는 김충선의 문집인 "모화당문집"을 확인하고서도 사야가의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본인의 성씨에는 사씨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시바 료타로와 아주 절친한 조선도공 14대 심수관은 사야가는 본명이 아닐 수도 있겠기에 여기에 소개해 두고자 한다. 일본어에 '사요오까'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 뜻으로는 '그렇던가?' '그렇군'이라고 감탄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가 된다. 조선땅의 문물에 소상하지 않았던 사야가는 이것저것 묻는 것이 많았고,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조선사람에게 맞장구를 치면서 '사요오까'라고 감탄을 연발한 것을 음독으로 적으면 '사야가'로 되질 않겠는가. 그러므로 조선인들은 사야가를 그의 별호로 불렀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으로 귀화한 사야가를 새 이름으로 정했을 게 분명하다면서 너털웃음을 토했지만, 나에게는 음미해 볼만한 탁견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거나, 이 대목을 쓰고 있을 때 시바 료타로가 향년 72세로 오사카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떴다는 부음이 들려왔다. 나는 그와 더불어 한, 일간의 역사교류에 관해 진술하고도 허심탄회한 의견교환을 한 일이 있었고 또 그가 역사소설만으로 일본인 독자(국민)들의 역사 인식을 새롭게 가다듬고 있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부음은 나에게도 큰 아쉬움과 허전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 8 임진, 정유년에 걸친 왜란은 한, 일 양국간에 몸서리치는 전율과 한을 심었지만, 그 인적인 교류를 소홀히 할 수가 없다. 특히 일본 쪽에는 그들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심수관 씨의 예와 같이 뿌리를 찾기 위해 선인의 유적지를 찾는 경우가 날로 흔해지고 있다. 비록 교류가 전쟁을 매개로 한 비극적인 교류라고 할지라도 4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하늘에 이르러서는 실로 운명적인 교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그 운명적인 교류 중에서도 아주 불가사의한 예가 있기에 여기에 적어서 역사의 묘미를 곱씹어 보기로 한다. 왜장으로 참전하였다가 조선인으로 귀화한 김충선은 우록 김씨라는 관향으로 한 가문을 형성하고 그 시조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4백 년 세월이 흐른 다음 한국 정부의 장관을 배출하게 된다.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치열 씨가 바로 김충선의 후예이다. 한편, 정유재란 때 일본땅 가고시마로 끌려갔던 조선인 도공 박평의는 '명자대도'의 예우를 받으면서 도오고라는 성을 쓰게 되었는데, 그의 후예에서도 일본국의 대신이 배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일본국 외무대신이었던 도오고 시게노리가 바로 그 사람이며, 그의 아명은 박무덕이었다. 선대의 운명적인 교류는 비극적인 것이지만, 4백여 년 뒤에 그들의 13대 손이라는 공통점으로 귀화한 나라의 장관으로 발탁되는 사실을 지켜보면서 정말로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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