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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00 지적공사 기고 15매 땅과 사람들 땅이름 이야기 `인천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 인천
인주이씨 왕비로 인해 얻은 고을 이름
- 고려 시대에 명문 지역으로서의 입지 굳힌 7대 어향 -
배 우 리 /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국토해양부 국가지명위원)
수도권의 가장 큰 항구인 인천은 8구 2군 1읍 19면 123동을 관할하는 우리 나라 5대 도시의 하나로, 현재는 국제공항과, 국제항만, 송도신도시 등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대도시이다.
한국문화 형성기로 보아서는 북방과 남방의 중간지대로, 가장 먼저 근대사의 여명을 맞이한 고을이다. 예부터 대륙의 문물이 한반도에 전파되고, 한반도의 문물이 해외로 나가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인천 일대는 5,6천년 전부터 인간이 거주하고 있었다. 문학산과 계양산 부근, 만석동 일대의 해안지대에서 돌도끼·돌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지금도 문학동, 학익동, 주안동 등에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이 고을의 비옥한 땅, 풍족한 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 고을 최초의 이름 미추홀은 '물골'의 뜻
인천 최초의 명칭은 미추홀(彌鄒忽). <동국여지승람>에 백제 시조 온조왕의 형인 비류(沸流)가 현재의 인천에 정착하여 미추홀로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이전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즉, 고구려의 왕자 비류가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문학산 부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을 세웠으니, 이것이 인천 고을 발전의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각국의 격전지였던 인천 지역은 고구려 영역이었을 때는 '매소홀'이라 하였다.
미추홀과 매소홀은 모두 '물의 고을'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미추홀의 '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水)의 뜻이기 때문이다. '홀'은 성(城)이나 골(고을)로 해석되며, '추'나 '소'는 모두 사잇소리 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은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소성현(邵城懸)이 된다. 경덕왕이 신라의 제도나 관직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토박이말로 땅이름을 모두 한자어로 바꾸었던 때의 일이다.
소성현은 고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仁譽) 순덕태후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는 왕의 어머니 인천이씨 순덕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또 승격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인천은 우리 나라 역사의 중심지에 서게 된다.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배출한 고을이 되면서 명문지역으로의 입지를 굳힌 인천은 '7대어향(七代御鄕)'이란 칭송까지 듣고 고을도 승격되며 관할구역도 넓어진다. '7대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천이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고향임을 말한다.
조선 초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인주가' '인천'으로 바뀐다. 모든 군이나 현에 '주(州)'가 들어 있는 고을을 모두 '산(山)'자나 '천(川)'자로 바꾸는 과정에서의 일이었다. '인산(仁山)'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 고을은 물에 가까워 '인천'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인천'이란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천이란 명칭은 인천이씨 왕비의 관향인 인주(인천)에서 유래된 것이며, 한자 뜻인 '어진내(仁川)'에서 비롯된 것이 절대 아니다.
◇ 부평과 인천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천'을 만들고
인천은 지금은 관할구역이 엄청 넓지만, 전에는 지역이 지금과 같지 않았고, 인접 구역과의 병합-분리도 꽤 심했다.
조선 11대 중종 21년(1526)에는 수원진을 인천에 옮겼는데, 19대 숙종 14년(1688)에 요망한 승려 역적 여환이 난 고을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하였다. 같은 24년(1698)에 복구되어, 부내, 조동, 신현, 전반, 황등천, 남촌, 원우미, 다소, 주안, 이포, 영종, 용유, 덕적의 13개 면을 관할했다.
26대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인천부가 되어 인천, 부평, 김포, 양천, 시흥, 안산, 과천, 수원, 남양, 강화, 교동, 통진의 12군을 관할하다가, 그 다음 해(1896)에 다시 인천군이 되었는데, 그 이듬해(1897) 3월에 경인철도 시설 공사를 시작함에 따라 일인들이 몰려들어서 요지는 모두 차지하여 왜식으로 송판, 화방, 지나, 해안, 중정, 본정, 산수, 항정, 산근, 용강, 경정, 사정, 궁정, 빈정, 화정, 도산, 부도, 유정이라 하여 새로 일인촌을 만들었다.
1914년 3월 1일 부군 폐합에 따라 조동, 신현, 전반, 황등천, 남촌, 다문, 주안, 영종, 용유, 덕적의 10개 면을 부천군에 넘겨 주고, 부내면의 금곡, 우각, 화촌, 만석, 내동, 외동, 용동, 답동, 화개, 신창, 율목의 11개 동리와 다소면의 수유, 독각, 장천, 송림, 송현, 신촌, 화도의 7개 동리를 병합하면서 관할 구역의 큰 변동이 있었다. 이 때, 인천에는 송판정 1~3정목, 해안정 1~4정목, 본정 1~4정목, 산수정 1~3정목, 항정 1~2정목, 화정 1~3정목 등의 왜식 지명이 다수 자리잡았다.
1936년 10월 부천군 다주면의 일부와 문학면의 몇 개 리를 편입하고, 1940년 4월 구역 확장에 따라 부천군 문학면, 다주면, 남동면, 부내면, 서곶면 등을 편입하여 동명을 거의 모두 왜식으로 고쳤다.
1947년 2월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1정목, 2정목, 3정목 식의 이름을 1가, 2가, 3가 식으로 바꾸고 '○○정(町)'식의 이름들은 '○○동(洞)' 식으로 고쳤다.
현재 인천 관할에 속한 부평(富平)도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였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는데, 1895년에 부천군으로 되고,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인천부, 강화군, 남양군, 각 일부 지역과 통폐합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부천시는 바로 '부평'과 '인천'이란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인천은 현재 동쪽은 경기도 부천시와 시흥시, 남쪽은 시흥시, 서쪽은 바다 건너 옹진군, 북쪽은 김포군에 닿아 있다. (글 ; 배우리) ///
※ 이 글은 지적공사 사보 '땅과 사람들' 09.7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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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인천사
고 대
신석기시대의 중간기인 금속병용기에 사람이 산것으로 추정(인천 각지방의 고인돌과 문학산, 계양산에서 각종 석기들을 발견)
삼국시대
백제를 세운 비류가 문학산에 도읍을 정하고 미추홀이라 부른 것 이 처음(옹진: 고구려의 용천, 부진이 강화:참성단, 삼랑성, 고구려혈구군 설치)
미추홀이 치정구역으로 등장한 것이 고구려 장수왕(413-491)때 고구려(475)백제를 침공하여 한강 유역 미추홀지역에 매소홀현을 두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매소홀현을 소성현으로 개칭 율진군(현과천)에 소함(부평: 장제군, 옹진:폭지군, 강화: 해구군으로 개칭, 원성왕 6년 혈구진 설치)
고 려
고려 현종 9년(1018) 소성현이 (수주:현 부평)에 소속됨. 숙종조에 이르러<경원군>으로 승격
인조때 다시 인주로 승격 (부평:수주로 개칭(940), 의종 4년(1150)안남도호부 설치,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로 개칭, 충렬 왕 34년(1308) 길주목으로 승격.
옹진:태조 23년(940) 옹천을 옹진으로 개칭, 백령진 설치, 강화: 태조23년 강화로 개칭, 현을 둠(995), 고종 19년(1232)강화천도군으로 승격, 우왕 3년(1377)강화부로 승격
공양왕 2년(1390)에 7대 어향이라 하여 경원부로 승격.(옹진:백령진 혁파, 강화: 유수부로 승격)
조 선
조선왕조 태조1년(1392)에 인주로 변경(옹진:태조 6년 옹현진에 진 설치)
태조 13년(1413)에 군이나 현에 주자가 들어있는 곳은 산이나 천으로 고치게 되어 인천군으로 재편하므로서 인천이라는 말이 등장.(부평:부평도호부설치. 옹진:병마사 현령 겸임, 세종 5년(1423) 첨절제사로 변경강화 :가오하호부로 개칭)
세조 6년(1460) 인천도호부로 승격(강화:인조5년(1627) 강화유수부로 승격)
숙종14년(1688) 현으로 변경
숙종 24년(1698) 도호부로 복구(옹진: 숙종45년(1719).황해수영 설치, 옹진현 - 도호부로 승격)
근 대
고종 12년(1875)운양호 사건 (강화 : 고종 3년(1866)병인양요 강화성 함락.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고종 11년(1812) 강화포대 설치, 고종 13년(1876)강화도조약 체결)
고종 19년(1882) 화도진에서 한미수호조약 체결
고종 20년(1883) 1월에 개항하므로서 통상사무를 권장하기 위한 감리서 설치
1885년 감리서 폐지되면서 인천부로 개편 (부평:인천부에 속함, 옹진: 해주부 옹진군 강령군으로 개편 호아해도로 이속)
1896년 지방제도를 개편함에 따라 경기도 인천부 (부평: 부평군으로 개편, 강화: 건양1년 강화부로 변경)
1899년 국내 최초의경인철도 개통
1906년 인천이사청 설치로 인천부윤이 감리사로 직무수행
(부평:부천군에 편입(1914), 옹진:강령군이 옹진군에 편입(1909), 백령도 장연군에 편입(1914). 강화:강화군으로 변경(1906), 교동군 편입(1914)
1936년 2차로 문학, 남동,부내, 서곶등 4개면이 편입되어 부평군 대부분이 인천으로 편입
1949년 인천시로 개편(옹진:벽석군 일부외 벽령도 편입(1945) 1949년 경기도로 이속(1949)편입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실시
1963년 부천군 작약도 편입 (옹진:백령면 대청 출장소 설치(1962), 부천군 도서 6개면 편입(1973), 대청면 신설(1974), 강화:강화읍 승격) 1981년 직할시 승격 (옹진:자월면 신설(1983), 강화:양오리 송해면 편입(1983))
1989년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영종면, 용유면 편입
1995년 강화군, 용진군, 김포군 검단면 편입으로광역시로 개칭
면적이 954.10제곱킬로미터로 3.56배 늘어서 현재 서울보다 면적이 1.5배된다.
인천 각 동의 이름
□ 계양구
옛 부평군 군내면
계산동(桂山洞) [부평읍, 부평구읍]
부평 도호부가 있어서 부평읍, 부평구읍.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고양골, 주막거리, 살나리를 병합하여 하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4월 1일 인천부 구역 확장에 의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대정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계양산(인천-) 밑이 되어 계산동으로 고치고, 1962년에 계산동을 갈라서 계산1,2동. 1977년에 계산1동은 계산, 계산2동은 서운동회의 관할
옛 부평군 서면
작전동(鵲田洞) [까치우물, 까치물, 까치말, 작전]
큰 우물이 있으므로 까치우물, 까치물, 까치말 또는 작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작천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화전리와 가현리를 합하여 작정과 화전의 이름을 따서 왜식으로 작전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62년에 작전동회가 됨.
서운동(瑞雲洞) [길머리, 도두머리, 도두리]
마을이 길의 머리쪽이 되므로 길머리, 도두머리, 또는 도두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동서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서운동으로 고치고, 1977년에 계산2동을 합하여서 서운동회가 됨. (계산동 참조)
옛 부평군 동면
임학동(林鶴洞) [예막골, 이막골, 임학골, 임학동]
고성산성(경기-)밑이 되어 막이 있었으므로 예막골, 이막골 또는 임학골 임학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임학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됨.
박촌동(朴村洞) [박말, 박촌]
박씨가 많이 살았으므로 박말 또는 박촌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마가묘, 송현동을 병합하여 박촌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방축동(防築洞) [박죽안, 방축동]
앞에 방죽이 있으므로 방죽안 또는 방축동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방축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병방동(兵房洞) [병방]
부평도호부 때 병대가 주둔하였으므로 변방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병방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용종동(龍宗洞) [용마루, 용종]
본래 부평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마을이 산 내룡의 마루가 되므로 용마루 또는 용종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용종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임학동(林鶴洞) [예막골, 이막골, 임학골, 임학동]
본래 부평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고성산성(경기-)밑이 되어 막이 있었으므로 예막골, 이막골 또는 임학골 임학동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임학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옛 부평군 마장면
효성동(曉星洞) [새벼리, 새별, 효성]
원적산(인천-) 밑에 큰 벼랑이 있으므로 새벼리, 새별 또는 효성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안말, 넘말, 아나지를 병합하여 효성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서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도로 효성동으로 고침.
옛 부평군 당산면
귤현동(橘峴洞) [굴재, 굴현]
굴재 밑이 되므로 굴재 또는 굴현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황어면의 노오지리 일부를 병합하여 귤현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 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옛 부평군 황어면
장기동(場基洞) [황어장터, 황어장, 장터, 장기]
본래 부평부(군) 황어향(면)의 지역으로서, 황어시장이 있으므로 황어장터, 황어장, 장터 또는 장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장기라라 하여 부천 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계양면의 중심지로서 면사무소, 경찰 지서, 학교, 시장, 우체국 들이 있음.
노오지동(老吾地洞) [노오지]
벌판이 되므로 노오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노오지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다남동(多男洞) [금륜, 역골, 역말, 역동, 다남]
조선 때 금륜역이 있었으므로 금륜, 역골, 역말, 역동 또는 다남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다남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둑실동(纛室洞) [둑실]
본래 부천군 황어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둑처럼 생겼으므로 둑실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성황당, 바래벌을 병합하여 둑실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목상동(木霜洞) [나무서리, 목상]
뒤에 있는 계양산(경기-)에 나무가 많아서 나무 서리를 하므로 나무서리 또는 목상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목상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선주지동(仙舟之洞) [선주지]
예전에 큰 장마 때 배가 이곳에 들어 와서 수재민들을 구했으므로 선주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선주지라 하여 부천군 계양 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오류동(梧柳洞) [오리울, 오릿골, 오류동, 오류울]
오리나무가 많았으므로 오리울, 오릿골 또는 오류울, 오류동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김포군 노장면 당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류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이화동(梨花洞) [배곶, 배고지, 배꼬지, 이화]
본래 부평군 황어면의 지역으로서, 벌판 가운데 배처럼 곶으로 되었으므로 배곶, 배고지, 배꼬지 또는 이화.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김포군 노장 면의 당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이화리라 해서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옛 부평군 당산면
동양동(東陽洞)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당미, 양지편, 모통말, 동녘말을 병합하여 동녘말과 양지편의 이름을 따서 동양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상야동(上野洞) [윗벌말, 상야촌]
벌판에 마을이 위, 아래로 둘이 있는데, 위쪽이 되므로 윗벌말 또는 상야촌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상야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평동(坪洞) [벌말, 평리]
벌판이 되므로 벌말 또는 평리.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평리라 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하야동(下野洞) [아래벌말, 하야촌]
벌판에 마을이 위아래로 둘이 있는데,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벌말 또는 하야촌이.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김포군에 편입
남구
주안동(朱安洞)
본래 인천부 다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충훈동, 소뎅이, 독점, 석바위, 상나무배기, 서낭뎅이, 사거리, 못머리, 사미, 고인돌, 솔안말, 잿말, 다수골, 양지께를 병합하여 사미와 충훈의 이름을 따서 사충리라하여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주안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주안동으로 고침
도화동(道禾洞)
본래 인천부 다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도마다리, 자골, 대지기, 화동(숫골), 소댕이, 오목골을 병합하여 오마다리와 화동의 이름을 따서 도화리라 하여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앵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도로 도화동으로 고침
숭의동(崇義洞) [장의리]
본래 인천부 다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장천리, 여의리, 독각리를 병합하여 장천과 여의의 이름을 따서 장의리라 해서 부천군 주다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대화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숭의동으로 고침
용현동(龍峴洞) [비랭이, 비랭이고개, 비룡현, 비룡, 용현]
본래 인천부 다문면의 지역으로서 비랭이 고개밑이 되므로 비랭이고개, 비랭이, 비룡현 꼬는 비룡, 용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비룡리와 독정리를 병합하여 용정리라 해서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일지출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용현동으로 고침
학익동(鶴翼洞) [학골, 핵굴, 학익굴, 학동]
인천부 구읍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학의 날개처럼 생겼다 하여 학골, 핵굴 또는 학익굴, 학동, 학익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노적산, 제운이를 병합하여 학익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외식으로 학익정이라 함
북성동(北城洞) [북성]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북성 포대가 있으므로 북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으로 화방정 1,2,3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북성동 1,2,3가로 고침
송월동(松月洞) [솔울, 송산]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았으므로 솔울 또는 송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으로 송판정 1,2,3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송월동 1,2,3가로 고침
송학동(松鶴洞)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산 위에 새로 된 마을이므로 왜식으로 산수정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갈라서 산수정 1,2,3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중앙동회의 관할
신흥동(新興洞) [꽃굴, 화개동]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꽃이 많이 피므로 꽃굴 또는 화개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창동을 병합하여 왜식으로 화정 1,2,3 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신흥동 1,2,3가로 고치고
항동(港洞) [제물포항, 이천항, 항구]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제물포항이 있었으므로 제물포항 또는 인천항, 항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으로 항정 1,2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면 변경에 의하여 항동1,2,3,4,5,6,7가로 고치고, 1977년에 모두 합하여 중앙동회의 관할이 됨.
해안동(海岸洞) [바닷가, 해안]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바닷가가 되므로 바닷가 또는 해안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으로 해안1,2,3,4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2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해안동1,2,3,4가로 고치고, 1977년 모두 합하여 중앙동회의 관할이 됨.
북성동(北城洞) [북성]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북성 포대가 있으므로 북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왜식으로 화방정1,2,3정목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북성동1,2,3가로 고치고, 1977년에 북성동1,2,3가와 선린동을 합하여 북성동회가 됨.
연수구
연수동(延壽洞)
본래 인천부 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부수지, 고촌말, 솔안말, 새터말, 장승배기, 마리, 구레매기, 머그미, 새말, 갱고지, 배꼽부리, 함박매를 병합하여 연수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연수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77년에 청학동을 합하여 연수동회가 되어, 남구에 편입됨.
동춘동(東春洞) [동촌, 동춘]
본래 인천부 서면의 지역으로서 청량산(인천-) 동쪽이 되므로 동촌 또는 동춘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쇠미, 풀무골, 각골, 자앞, 도굴, 동막을 병합하여 동춘리라 해서 부천군 문학면에 편입되었는데,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원정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동춘동으로 고치고 1968년 남구에 편입되어 동춘동회가 됨.
서구
가정동(佳亭洞) [가정]
본래 부평군 모월곶면의 지역으로서 고려 말에 숙위공 조 반이 이곳에 살면서 석호가정을 세웠으므로 가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돌고지, 각골, 되린곁, 싱아굴, 봉우재, 산저동을 병합하여 가정리라 해서 부천군 서곶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천대전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가정동으로 고치고, 1977년에 서곶출장소 석남동회의 관할이 됨.
가좌동(佳佐洞) [가재울, 가좌리]
본래 부평군 석곶면의 지역으로서 가재가 많았으므로 가재울 또는 가좌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감중절, 건지굴, 보도진과 마장면의 산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좌리라 해서 부천군 서곶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천대전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가좌동(회)으로 고침.
석남동(石南洞)
본래 부평군 석곶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번작리, 바그뫼, 고잔, 독굴, 옻우물, 명각굴을 병합하여 고잔과 번작의 이름을 따서 고작리라 하여 부천군 서곶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촌상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면 변경에 의하여 전 석곶면의 남쪽이 되므로 석남동으로 고치고, 1977년에 가정, 신현, 석남의 3개 동을 합하여 석남동회가 됨.
부평구
갈산동(葛山洞) [갈울, 가월, 갈산]
본래 부평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가울 또는 가월, 갈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사근다리를 병합하여 갈월리라 해서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길야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갈산동으로 고치고, 1977년 삼산동을 합하여 갈산동회가 되어 북구에 편입됨.
부평동(富平洞) [부평, 부평읍내]
본래 부평군의 지역으로서 부평 군청이 있었으므로, 부평, 부평읍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용동, 동수정, 신트리, 소반재말, 신촌을 병합하여 부평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신대리를 합하여 소화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부평동으로 복구하고, 1962년에 부평동을 갈라서 부평1,2,3동회로 하였다가, 1968년에 부평1동을 갈라서 부평1동 동부동, 중부동회로 하였는데, 1970년에 부평1동 동부동을 또 갈라서 부평1동 동부동과 서부동회로, 부평2동을 갈라서 부평2동과 부평2동 동부동회로 하였다가, 1977년에 부평1동 동부동을 부평4동으로, 부평1동 중부동을 부평5동으로, 부평1동 서부동을 부평1동으로, 부평2동 동부동을 부평6동으로, 부평3동과 십정2동과 산곡동 일부를 합하여 부평3동회로 고쳐서 북구에 편입됨.
산곡동(山谷洞) [뫼꼬지, 뫼꽃말, 산화촌, 산곡, 마장, 백마장]
본래 부평군 마장면의 지역으로서 산이 곶으로 되었으므로 뫼꼬지, 뫼꽃말 또는 산화촌, 산곡이라 하며, 또는 조선 때 말을 먹이던 곳이므로 마장, 백마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장끝 말을 병합하여 산곡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백마정이라 하다가, 1977년에 2동 일부를 부평3동에 넘겨 주고, 그대로 1동,2동회가 되어 북구에 편입 됨.
십정동(十井洞) [열우물, 십정, 십정리]
본래 인천부 주안면의 지역으로서 우물이 열이 있으므로 열우물 또는 십정, 십정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삼거리, 꽃밭골, 안터를 병합하여 십정리라 해서 부천군 다주면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10월 1일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대도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십정동으로 고치고, 1962년에 갈라서 십정1동,2동회로 하였는데, 1977년에 십정1동을 십정동으로, 십정2동을 부평3동과 합하여 부평3동회가 됨.(부평3동 참조)
청천동(淸川洞) [맑은내, 청천]
본래 부평군 마장면의 지역으로서 맑은 시내가 있어서 말을 먹였으므로 맑은내 또는 청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마장리를 병합하여 청천리라 해서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시)에 편입되어, 왜식으로 천상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청천동으로 고치고, 1977년에 산곡동 일부를 합하여 청천동회가 됨.
동구
송림동(松林洞) [송림]
본래 인천부 다소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으므로 송림 또는 송림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새말, 매하지, 장승거리, 샛골, 활터고개를 병합하여 송림리라 해서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에 왜식으로 송림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62년에 갈라서 송림1,2,3,4동회가 되고, 1968년에 송림3동을 갈라서 송림3동 동부동, 서부동으로 하고, 1970년에 송림4동을 갈라서 송림4동과 궁현동회로 하였다가, 1977년에 송림3동 동부동을 송림5동으로, 서부동을 송림3동으로, 궁현동을 송림6동회로 고침.
송현동(松峴洞) [솔고개, 송현]
본래 인천부 다소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은 고개였으므로 솔고개 또는 송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절굴을 병합하여 송현리라 해서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에 왜식으로 송현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62년 5월 21일에 송현동을 갈라서 송현 1,2,3,4동회로 하였는데, 1977년 시 조례 175호에 의하여 송현4동을 화수2동회에 넘겨주어 현재 송현 1,2,3동회가 됨.
화수동(花水洞)
본래 인천부 다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리, 화도동, 수유리를 병합하여 3마을의 첫자를 따서 신화수리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 왜식으로 화수정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62년 화수동을 갈라서 화수 1,2,3동회로 하였다가, 1977년에 화수1동과 3동을 합하여 화수1동으로, 화수2동과 송현4동을 합하여 화수2동회로 고쳐서 동구에 편입됨.
한국땅이름학회 www.traveleven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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