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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 간 사진작가 최민식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만 사진 속에 50년 동안 담아낸 사진가가 있다. 1957년부터 지금까지 사진작가 최민식은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만을 찍어왔다. 12권 분량의 ‘인간’ 시리즈는 그의 50년 세월을 말해준다. 한결같이 한 곳을 바라본 그의 사진은 이제 정부에서 기록유물로 가져갈 정도로 켜켜이 쌓였다. “리얼리즘 사진은 이제 철이 지난 게 아니냐” “구태여 가난한 사람만 찍을 필요가 있냐”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의 길을 고집했다. 추석이 지난 목요일 부산 대현동 그의 자택을 찾았다.
기자의 고향도 부산이라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은 실수였다. 대현동의 위치를 잘못 안 데다 최민식씨의 집이 골목길 주택이라 굉장히 헤맸다. 아파트에만 살아온 ‘아파트 보이’의 촌스러움이랄까. 시간은 늦어 어느덧 저녁이 돼야 도착했다. 골목길 저편으로 헌팅캡을 쓴 노신사 한 분이 나타났다. 최민식씨였다. “어이 반가워요. 여기까지 잘 찾아왔네. 이 분은 사진하는 분인가. 예뻐서 모델 해야 겠구먼.” 약속시간에 늦은 낯선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맞아주었다.
헌책방에서 만난 ‘인간가족’
“얼마 전에 YMCA에서 ‘어른들이 미워요’라는 사진전을 했어. 어린이들이 어른들 모습을 사진에 담은 건데. 술 마시고 쓰러진 어른, 싸우는 어른들을 그대로 사진에 담은 거야. 재밌게 봤지. 요즘은 애들도 사진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만 쓰면 아주 좋은 것 같아.” 리얼리즘 사진법으로 현실을 담아온 그에게 어린이들의 눈으로 어른들의 추한 모습을 담아내는 사진은 각별하게 여겨졌을 법도 하다. “참 많이 묻는 질문인데.” 왜 하필 가난한 사람들만 사진에 담느냐는 다짜고짜 한 질문에 최민식씨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복잡한 이야기는 좀 있다가 하고. 뭐 왜 가난한 사람 사진을 찍게 됐느냐고 묻는다면 일본의 한 헌책방에서 본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의 ‘인간가족’ 이야기를 또 해야겠네. 미술이 하고 싶어서 일본에 밀항해 들어갔던 이야기는 아는가? 어렸을 때부터 미술이 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땐 우리나라에선 예술을 배울 만한 곳도 없어 몰래 배를 타고 일본에 들어갔지. 기차에서 만난 처음 본 일본 아가씨에게 ‘난 공부하고 싶어 일본으로 온 한국인이다. 도와달라’고 부탁해 겨우겨우 동경에 도착했지. 낮엔 일하고 밤엔 미술학교를 야간으로 다녔어. 가끔 돈이 모이면 헌책방에서 책을 구해 봤고. 그러다가 ‘인간가족’을 만난 거야.”
‘인간가족’은 당시 전 세계의 리얼리즘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스타이켄이 엮은 사진집이다. 인류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모토 아래 세상을 힘차게 움직여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최민식씨는 ‘인간가족’을 보고 가슴 속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가난한 내 모습이었어. 내 주위 가난했던 이웃들의 모습이기도 했고. 그때부터 나는 평생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겠다고 생각했지.” 이 말을 하며 최민식씨는 사진집을 직접 꺼내보였다. “물론 이게 그때 그 책은 아니고. 낡아버려서 나중에 또 샀어. 요즘에도 가끔씩 봐.” ‘패추리’란 이름의 싸구려 카메라 하나를 구해 친구들과 일본의 가난한 이들을 찍었다고 한다. “그때는 뭐 일본도 못살았거든.”
경찰서에 100번이나 잡혀간 사연
“사진 찍을 때 고생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경찰에 한 100번은 잡혀갔지.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반공의식이 투철해서. 사실 포상금 3000만원이 크기도 하잖아.(웃음)” 작가라고 하면 감정이 풍부하고 또 예민한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최민식씨는 오히려 넉살좋은 아저씨 분위기였다. “뭐 고발한 사람들이 무슨 죄겠어. 어디서 누추한 놈 하나가 이상하게 생긴 카메라 들고 막 찍어대니 간첩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 그리고 경찰은 일단 누가 고발하면 조사를 해야 하거든. 강원도에서 사진 찍다가도 잡혀서 부산으로 오고, 서울에서도 잡히고. 뭐 많이 잡혔지. 근데 예전에 군사정권 때는 좀 그런 게 있어서. 사진 찍으려면 고속도로나 빌딩 같은 멋들어진 거 찍어야 하는데 나는 만날 가난한 모습만 찍거든. 그런 거 찍지 말라는 압력도 많았지. 국제 사진전에도 내 작품은 가는데 나는 못 간 적이 많아. 여권을 안 내줘서. 한 번은 독일에서 내 사진이 전시됐는데 또 여권이 안 나오는 거야. 그랬는데 나중에 독일 정부가 항의를 세게 해서 하루 만에 여권이 나온 적도 있어.”
그런 와중에도 사진집이 수십 권이나 꾸준히 용케도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문은 곧 풀렸다. “경북 왜관에 베네딕또 수도원이 있는데, 수도원에서 출판사를 하나 운영해. 거기 신부님이 나에게 30만 원을 주는 거야. 사진집 내라고. 당시 정부 국장 월급이 3만원이야. 정말 큰돈이었지. 10만원 생활비하라고 가족 주고. 20만원으로 사진 찍으러 우리나라 곳곳을 돌아다녔지. 12권까지 그래서 만들 수 있었어.”
거지작가 최민식
왜 구태여 가난한 사람만 찍느냐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구는 나보고 ‘거지작가’라고 해. 만날 거지만 찍는다는 거야. 인도나 네팔에 가서 가난한 사람을 찍으니 아예 ‘국제거지작가’라고 하더군. 그런데 난 거지를 찍은 게 아니야. 가난한 사람을 찍었어. 가난하지만 열심히 일하며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을 찍었어. 거지가 아니었다고. 나는 리얼리즘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생각해. 가난하지만 노력하는 사람들을 찍어 인간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싶었어.” 가끔은 제자들이 서운한 소리를 하기도 한단다. “내가 대학교 몇 군데 강의를 나가는데 학생 한 명이 ‘선생님 이런 사진은 추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더군. 내가 화가 나서 ‘너는 지구를 떠나라’라고 외쳤지. 가난한 사람을 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구에 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예쁘게 찍는 사진을 리얼리즘 작가들은 ‘살롱 사진’이라며 비판한다. 최민식씨 역시 마찬가지다. “살롱 사진은 저희들이나 하라고 그래. 사진을 찍고 포토샵으로 조작하고 고치고 그건 예술이 아니야. 사진은 스트레이트야. 한 번 셔터를 누르면 끝이야.” 사진이 대중화되고 있는 거 자체는 좋은 거지만 예쁜 것만 담으려는 것에 대해선 최민식씨는 반대한다. “사진을 조작하고 연출하고 그러면 안돼. 예술은 진실해야 하는 거야.” 사진 스타일이 지나치게 고정화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최민식씨는 여러 권의 사진집을 꺼내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유명한 사진작가들은 일생 동안 한 우물만 파. 난 내 사진에 진실을 담고 있어. 내 방식으로 진실을 담고 있는데 무슨 스타일을 바꿔. 딴 거 찍고 싶으며 저거들이나 딴 거 찍으라고 해!” 이런 비판을 오래 받았는 듯 여유롭던 최민식씨도 약간 노기를 띤다. 아니 이건 단순히 비판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작가 최민식의 고집일 수도 있다.
한국인의 표정이 변하다
“자갈치 시장에서 사진을 많이 찍으셨는데 제가 겪기론 자갈치분들이 사진 협조를 쉽게 해주실 분들은 아닌데.” “욕쟁이야. 자갈치 아줌마들 욕쟁이야. 여기 이것 봐. 아줌마가 얼굴 찡그리고 있는 사진 있지. 이게 욕하던 장면이야. 사진 한 번 찍었더니 욕을 욕을 하더라고. 어이쿠나 하면서 도망갔지.(웃음) 비일비재해 욕 듣는 게. 그래도 재밌어. 자갈치만큼 삶이 생생한 곳이 없어. 다대포는 친절한 데 표정이 좀 밋밋한 감이 있고.” 최민식씨의 사진에는 표정이 살아있다. 비를 막으려 비닐로 머리와 몸을 칭칭 감은 자갈치 아주메의 웃는 표정, 뭐가 신기한 것을 구경하는 아저씨들의 표정, 할머니 품에 있는 꼬마의 불만에 찬 표정. “이제는 시장 아줌마들이 다 알아. ‘아이구 또 사진 찍으러 왔네.’ ‘사진 찍어 돈도 많이 벌었다면서’ 돈을 벌긴 뭘 벌었다고 난린지.(웃음) 이래서 자갈치가 재밌어.”
“쭉 사진을 찍어보니 세상이 변하는 게 보여. 사람도 많이 바뀌었지. 잘 먹어서 몸이 서구형으로 훌쩍 커졌고. 옷차림도 좋아졌어. 옛날에는 형편없었어.” 60년대까지는 다 헤진 옷 입고 못 먹고 추워서 바짝 골아있는 이들이 태반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다가 경제가 발전하면서 좋아졌다고 했다. “내가 가장 분명히 느낀 건 표정이었어. 사람들 표정이 정말 많이 바뀌었어. 60년대까진 한국인들 얼굴에 웃음이 없었는데, 하루 종일 사진을 찍어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고. 지금은 달라. 시내나 바닷가에 사진 찍으러 가면 밝게 웃는 표정이 그렇게 많아. 누가 뭐라 해도 그때보다 살기는 좋아진 거야. 분명히.” 가난만이 그때 사람들의 표정을 어둡게 한 게 아닐 것이다. 최민식씨는 그 시절을 가난과 억압의 시대, 희망이 없었던 시대라고 회상했다.
경험이 사진을 만든다
요즘 디지털 카메라가 많아진 현실에 대한 생각을 물으니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디지털 카메라가 많아져서 걱정이야. 사진 찍는 사람이 많아져서 초상권 같은 게 다들 예민해졌어. 특히 여자들 사진 찍는 놈들이 있어서 사진도 이제 함부로 못 찍어.” 예전엔 어땠는지 물었다. “옛날에도 뭐 사진 찍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지. 그래서 난 일본인인 척 했다니까. 포켓에 일본국기 달고 누가 사진 왜 찍느냐고 시비 걸면 일본말을 하면서 일본 국기를 가리켰지. 말이 안 통하니 수가 있나. 그냥 그러다가 가더라고.(웃음) 가끔은 망원 렌즈로도 찍고.” 일종의 몰래 촬영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최민식씨가 하도 호탕하게 이야기하셔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사진 찍을 때 중요한 건 눈이야. 시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사회를 볼 줄 아는 시각을 말하는 거야. 그런 눈을 가지려면 경험이 필요하고.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던 경험이 사진을 찍는 눈을 만들어줬어. 4-6제, 농사지은 거 40은 주고 60은 우리 집안 식구가 먹던 소작 시절 굶기를 밥 먹듯 했어. 일곱 식구가 7개월 먹고 나니 나머지 5개월 동안은 먹을 게 없더라고, 막노동도 하고 나무도 베고 했지. 그런 기억들이 가난한 사람에 나 자신을 넣을 수는 눈을 갖게 했어.” 한 평론가는 현대 젊은이들을 무경험의 세대라 하지 않았던가. 굶주림도, 전쟁이나 민주화 항쟁도 겪지 않았던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게 그런 눈을 가져야 할 건가. 그에게 물었다. “간접 경험도 있잖아. 책을 늘 봐야해. 책에는 작가의 세상이 담겨 있어 책을 통해 그 경험을 해볼 수 있지.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경험을 스스로 찾아다녀야 해. 가만있으면 아무 것도 안 돼. 바보가 되지. 책을 보고 또 세상을 경험하고. 취업 준비만 할 사람은 하라고 해. 나중에 후회할 거야.” 그의 방은 책으로 가득했다. 책장으로 벽면 전체를 두른 것도 모자라 한쪽 편에 책들이 그냥 쌓여있었다. 나중에 흘끔 보니 심지어 방에 붙어있는 암실인 듯한 창고 안에도 책들이 가득했다. 인터뷰 도중 무슨 책 이름이 나오면 그 많은 책 중에도 정확히 찾아냈다.
나는 가난을 찍은 적이 없다
“나는 가난을 찍은 적이 없다. 가난한 ‘사람’을 찍었을 뿐이다.” ‘거지작가’, ‘자기 방식만 유지하는 옛사람’ 그를 향한 비판에도 사진작가 최민식은 자기 길을 고집했다. 자기 사진을 통해 인간들이 사실은 ‘지구마을’에 사는 한 가족임을 느끼길 원했다. 그의 사진들은 이제 하나의 역사로 남아 부산시립미술관에 영구보존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그는 올해 80세의 나이로 또다시 방글라데시로 떠난다. “후원이 잘 들어올 것 같아. 방글라데시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데도 국민들은 행복을 느낀다고 하더라고 한 번 가서 사진으로 찍어보고 싶어.” 돌아오면 사진집을 내고 사진전도 내겠다고 한다. 그의 열정이 부럽다. 그의 새 사진이 보고 싶다.
대학내일 이정섭 기자 / 사진 최선주 2007.10.1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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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은 배꼽만(^^) 보여 못올렸어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삼매경님 ^^
방글라데시,,,,가난한데도 행복을느낀다 ㅡㅡ 나두 가보고 싶어지네요 교수님 부럽습니다^^
최민식 선생님 존경합니다
"간절함"을 남기며.
너무... 묵직한 인터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