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색의 낡은 티셔츠에 검정색의 후줄근한 바지를 입은 이 사내. 그의 몸이 언제부터 검정색을 제2의 피부로 고집했는지 끝내 기억해내지 못하는 이 사내. 그리고 이외수처럼 정리 덜된 긴 생머리칼을 대충 묶은 이 사내. 허술해 보이는, 그래서 처음 대면하는 이로 하여금 근육의 이완 같은 편안함마저 주는 이 사내를 어느 누가 영화 의상 디자이너로 본단 말인가.
배우들의 의상을 만들어 입히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그이지만 정작 자신의 옷을 매일매일 골라 입는 일은 직장인들의 점심 같은 고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상’을 위하여 ‘옷’으로부터 자신을 먼저 해방시키기로 했고, 그 대안이 바로 검정색 옷이었다. ‘편해서’라는 그의 단답에선 영화 의상에 대한 외고집과 열정이 진한 먹물처럼 뚝뚝 떨어진다. 최근 흥행가도를 달리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순박한 동막골 사람들의 백의(白衣)도 바로 그의 열정이 만들어낸 의상이다.
“동막골 사람들은 사소한 다툼조차 모를 정도로 순박한 이들이에요. 그래서 조선시대의 하얀 의상을 기본으로 잡고, 산골에 살기 좋도록 약간 변형시켰죠.” 풀색과 자연 염료를 사용한 동막골 의상들은 손바느질로 땀땀이 누벼 만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공들인 의상이라는 말. <간 큰 가족>과 올 12월에 개봉하는 국내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이야기인 <청연>의 의상에서도 그의 바느질 솜씨를 볼 수 있다.
권유진은 올해만 3편의 영화 의상을 끝냈다. 충무로가 그의 실력과 성실성을 그만큼 인정해주고 있다는 말이다. 충무로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1980년대 초부터 그의 바늘과 실로 탄생한 작품들은 무수히 많다.
<어우동>, <황진이>, <연산일기>, <그 섬에 가고 싶다>, <서편제>, <태백산맥>, <금홍아 금홍아>, <축제>, <노는 계집 창>, <사의 찬미>, <친구>, <낭만자객>, <청풍명월> 등이 그의 대표작. 26년이라는 영화 의상 경력은 세월의 단순한 퇴적과 그로 인한 작품의 누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긴 고통과 짧은 보람의 반복. 그 인고의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청풍명월>이다. 몇 백 벌의 샘플, 수십 번에 이르는 중국 출장, 지겹도록 진행한 사진 촬영과 테스트 촬영 등 살인적인 고생도 고생이지만 사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사극 의상이 그의 전공인데다 그만큼 매력과 보람이 크기 때문이다. 사극물이 드문 터라 현대물을 전천후로 소화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사극에 기울어져 있다.
영화 의상 디자이너 권유진을 말하기 위해선 그의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어머니는 누더기뿐인 한국 영화에 한 땀 한 땀 옷을 만들어 입힌, 영화 의상 디자이너의 대모인 이해윤 여사다. <단종애사>(1956년)를 시작으로 <마의 태자>, <폭군 연산>, <난중일기>, <물레야 물레야> 등, 이해윤 여사는 한국 영화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작업중에는 밥 달라는 소리도 못했을 정도로 평생을 재봉질로 살았던 어머니란다. 자식보다 영화를 좋아했다던 어머니란다. 그는 어머니의 고집스러운 그 바늘을 실처럼 이어받았다. “재봉틀이 놀이터였어요. 어머니가 바쁠 때는 아르바이트로 버선 한 짝을 만들어 돈을 벌기도 했고요. 중학교 때 재봉틀을 만지고, 고등학교 땐 재단까지 할 정도였죠.” 군을 제대한 그가 어머니의 가업을 잇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그늘이 굉장히 강할 수밖에 없었죠. 영화 의상 디자이너 권유진이 아니라 이해윤 여사의 아들 권유진으로 일단 통했으니까요.”
이름난 어머니는 자랑인 동시에 큰 부담이었다. 유명인 2세들의 콤플렉스인 셈. 엄격한 도제살이로 일을 배웠던 그가 어머니의 그늘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롭기까지는 꼬박 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바늘에 손가락이 수백 번은 찔리고 때로는 관통 당하고 피로 옷감을 붉게 물들인 후에야 누리게 된 한 조각 자유였다. 그 시절 그는 밥보다 꾸중을 더 많이 먹어야 했다. 그의 기억 상자에서 어머니의 칭찬을 끄집어내기란 모래톱에 숨겨진 바늘을 발견하는 일과도 같다. 아들이라고 대강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 바느질이 거칠다는 질책은 귀에 딱지가 내려앉았을 정도. 패턴지를 쓰지 않고 원단을 바로 재단하는 건방진 습관은 두고두고 어머니의 불만이었다. 그토록 엄한 어머니가 존재했기에 지금의 그가 있는 것이리라. 권유진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그의 제자들에게 도제로 전수하고 있다. 3년 전 차린 ‘해인엔터테인먼트’에서 배우고 있는 제자들은 모두 8명. 얼굴은 속여도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그는 매우 엄한 스승으로 소문나 있다. 요즘 세상에 말대꾸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란다. 현장에서 어슬렁거리거나 대답 소리가 작은 제자, 풀이 죽어 있는 제자들은 모두 그 앞에서 눈물 한 방울쯤은 찔끔할 각오를 해야 한다. 권유진의 엄격함은 제자들을 단순 기능인이 아닌 창조적 장인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어머니가 그에게 가르쳐줬던 것처럼 말이다. 이는 곧 단 한 벌의 옷을 위한 외곬 바느질 인생을 걷고 있는 권유진만의 ‘프라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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