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스물세 번째 사람
자장면 축제와 애국가수 서 희
특이하다고 말해야 할지, 속되게 괴짜라고 불러야 할지, 자신만만하다고 평해야 할지,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왜 그런지 입이 붙어 얼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대한민국 싸우지 마’같은 신랄한 세태 풍자 노래를 불러 화제를 모으기도 했고,
또 ‘아 고구려’라는 중국의 동북 공정에 대항하는 노래로도 유명한 가수라면 더욱 자신이 없다.
시 몇 줄 읽고, 눈이나 축축해지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둑어둑한 인류에게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주 뻑뻑하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첫 인상은 가수라기보다 적당히, 잔치 마당 같은 데서 사회를 보아 주는 그런 부류의 연예인 같았다.
그가 풍기는 자신만만함, 활기 같은것…, 이런 축제의 날만을 위해서 노래 부르고 사는 사람처럼 그는 한없이 행복해 보였고 몸속은 활력이 충만한 듯 느껴졌다.
저토록 자신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니까 날씨는 가을 같지 않게 따갑고 땀은 겨드랑이를 적셨다.
그러면서 갑자기 입에는 전에 없던 버릇까지 생기고 말았다. 말을 더듬적거린 것이다.
“그럼 월요일에 만나 뵙는 걸로….”
“아아, 그, 그래요.”
자기가 바빠, 흔한 말로 자신이 먼저 약속을 펑크 내는 것이어서 그가 퍽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오히려 반대쪽 사람이 더 안심이 되어 얼른 그러자고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는 틀림없이 못 보았을 것이지만 그의 머리 뒤쪽 하늘에,
그 순간 무리지어 남쪽으로 내려가는 기러기 떼를 흘끔흘끔 올려다보다가, 그것들이 지나간 빈 하늘에 대고는 들릴락말락한 작은 소리로 빨리 추워지기나 했으면 하는, 전혀 엉뚱한 발음을 해 버렸다.
그것은 아마 당황스런 기분과 함께 그 한금(寒禽) 무리가 만드는 가슴 서늘한 가을의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수, 서 희(徐熙). 지난 10월 8일, 그날이 토요일, 옥상 방에 앉아 있는데 하도 귀 밑이 시끄러워 밖으로 나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곳이 그 자장면 소용돌이였다.
그날은 ‘자장면 축제’라는 걸 벌여 놓고 중구 전체가 온통 뒤집어지도록 떠들고 노래 부르고 먹고 술렁거리면서 볕 좋은 가을 하루를 신명나게 보내는 잔치날이었다.
거기 금색과 붉은색으로 요란하게 벽을 칠한 한중문화관 뜰에서 徐熙라는 예명을 가진 가수를 만난 것이다.
물론 그는 행사 사회자로도 유명하다는 것이었다.
작은 체구여서 금색 수를 놓은 연미복이 썩 잘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는 자장면 먹기 대회 무대 위에서 열심히 아이들에게 자장면을 먹이고 있었다.
그 무렵이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듯 한껏 고조된 분위기였다.
검은 테의 동그란 안경, 민족 지도자 한 분을 닮은 듯한 얼굴의 윤곽, 먼지와 피로에 젖어 있을 터인데도 마이크에 울려 나오는 신나는 목소리, 박수소리. 그의 주특기대로 그렇게 사람들을 소란과 웃음 속에 몰아넣고 얼마 있다가, 햇빛을 피해 그늘에 앉은 이쪽 사람들에게로 그가 온 것이다.
그런 그를 그냥 이런 장터 같은 곳을 흘러 다니며 사회도 보고 노래도 하는 가수려니…,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시간이 빠듯하다며, 몇 가지 팸플릿, 신문 스크랩을 내놓고는 재빨리 말했다.
1990년대 청와대에서 벌이는 어린이날 축하 행사 사회를 대통령이 두 번 바뀌도록 보았다는 이야기, 한 TV 방송의 ‘야! 일요일이다’프로에 1년 반 넘어 고정 출연을 했다는 이야기,
또 무슨 국제마라톤대회 오프닝 행사의 사회자라는 이야기, 레크리에이션협회 회장을 지냈다는 이야기,
그리고 끝으로, 사회도 보기는 하지만 실제 본업은 가수라며 제법 유명한 5개의 독집 디스크가 있다는 이야기를 줄줄 털어놓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 노래 중에는 바로 애국 정신을 고취하는 ‘아 고구려’ ‘간도 of 코리아’ 같은 노래도 있다고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
비록 오늘은 자장면 축제 사회를 보기는 해도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잘못 보았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작 잘못 보았다고 생각한 때는 그가 장검을 빼어 든 순간이었다.
일자로 다문 입술, 안경 속에 가늘게 힘주어 뜬 두 눈, 그렇게 몇 초 동안 허공을 겨누더니 스르르 품새를 풀었다.
그리고는 그것이 그가 전하고자 하는 고구려인의 기상이라고 했다.
위의(威儀)! 그런 느낌 때문에 시선을 그에게 바로 둘 수가 없었다.
오히려 몸이 스멀거릴 듯한 이 엄숙을, 이 진공의 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몰랐다.
그는 장바닥 가수가 아니었다.
그가 월요일에 다시 만나자는 말에 아무런 이의를 말하지 못한 채 그냥 동의를 하고 만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의 활기, 그의 기상, 그의 애국심, 얼굴 가득 행복한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 삶을 진정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
저요? 대한민국에서, 긴장한 채 출발선에 서 있는 마라톤 선수들을 웃기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월요일에 다시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물어야 하고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하나.
“본명은 서선택(徐先澤)입니다. 원래 인천 토박이이고요.”
부러운 생각이 들어,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 같다고 이쪽이 던진 말에, 엉뚱하게 그에게서 나온 대답이었다.
학교는 서림초등학교 23회, 동인천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 동인천고등학교 10회 졸업생이라면 그의 나이도 이미 쉰을 넘은 셈이다.
“사실 학교 때부터 이런 끼가 있었지요. 왜 그때 JRC라는 학생 활동이 있었지요?
적십자 클럽 말예요. 거기 가입했는데 제가 클럽 친선분과장을 맡아 그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지요.
특히 ‘오 몸부림스’라는 트리오를 결성해서 인기를 독차지했는데…, 사회에 나와서는 두 명만 남아 ‘수수깡’이라는 듀엣으로 활동했지요. 인천서 리사이틀도 열고….”
수입은 들쭉날쭉이라고 한다. 그건 그럴 것이다.
이렇게 자장면 축제 같은 것이 일 년 내내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가족으로는 성장한 딸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러니 뭐 걱정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제가 이름을 ‘서 희’로 바꾼 것은 고려 초기 서 희 장군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거란이 침입했을 때, 서 희 장군이 소손녕과 멋지게 담판을 지어 나라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름을 바꾸었지요. 물론 처음 서선택이라는 이름으로 가수로 나서니까 그 사람 사회 보는 사람이지 무슨 가수냐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서 희 장군 이름을 떠올리고 그 이름을 감히 흉내 낸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사랑 노래보다,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철학, 즉 국민들에게 희망과 힘을 주는, 위로와 위안을 주는, 끝끝내 그런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남겠다는 것이다.
공인(公人)으로서 늘 표정 하나까지도 신경을 쓰고, 처신도 바르게 갖도록 노력한다는 서 희 씨.
그런 그가 든든하다.
낡고 작고 양철통처럼 생긴 다마스 자가용에 오르는 그의 뒷모습에서, 좀 때 묻은 표현이지만 ‘작은 거인’의 당당함 같은 것도 느껴진다.
이제야 처음 가졌던 그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제대로 바꾼다.
“기름값도 덜 먹히고 이 차 하나면 탈의실, 분장실, 소도구실, 침실 겸용으로 안성맞춤이거든요.
전국 어디든지 달려가기 편하구요. 참, 다음 달에는 단양 온달 축제에 불려 갑니다.”
부산스럽게 시동을 걸고,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손을 흔들고, 고개를 꾸벅 하며 환한 얼굴로 웃는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이 말만은 꼭 다시 한 번 더 써 달라고 말한다.
저 말입니다.
정말 인천 사랑하고 나라 사랑합니다.
이쪽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를 따라 한 번 크게 웃는다.
글 _ 김 류(시인·eoeu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