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8.15통일문화제
속초민예총에서 주최하는 제9회 통일문화제는 8월15일 오후5시30분에 속초시 상징탑이 높이 솟은 청초호유원지 엑스포광장에서 개막되였다. 풍물패의 길놀이가 징을 울리고 상모를 돌리는 흥겨운 마당에서 개막식을 알리는 테프끊기가 있었고 뒤를 이어 상징탑지하전시청에서 조선만수대창작사의 미술작품전람이 시작되고 광장의 로천무대에서는 국태민안을 소망하는 굿거리 한마당, 시랑송, 한국평양예술단 공연 등 다채로운 문예프로가 진행되였다.
장장 4시간에 걸쳐 막을 내린 이번 통일문화제를 평한다면 민예총 강원지회장 성희직시인의 말 그대로 "통일은 우리에게 무엇인지? 북쪽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있는지? 통일을 앞당기려면 남과 북은 어떤 마음으로 지금부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것들을 생각하는 시간"이였다.
나와 한선생은 바로 이런 행사에 초청받은것이다. 나는 이 문화제에 참가함으로 하여 두가지 배역을 놀아야 했다. 하나는 꽃을 달고 새하얀 수갑을 끼고 가위를 들고 도청과 시청의 지명인사들과 함께 개막식테프끊기에 나선것이다. 워낙은 한선생의 몫인데 내가 나이를 더 먹었다고 막무가내로 떠미는 바람에 난생처음 이런 정중한 자리에 나서보았다. 다른 하나는 초대시인으로 무대에 올라 시랑송을 한것이다. 작품은 사전에 련계가 있어 준비했지만 랑송을 해본지가 아득한 일이여서 저으기 근심스러웠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랑송이 잘되였는지 박수소리가 크게 울리고 유관 인사들이 기뻐하기에 망신을 면하였다.
살아보면 생각밖의 일들이 참으로 많다. 내가 이 나이에 고국의 문화행사에 참가하여 꽃다발을 받고 테프를 끊고 시랑송까지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적이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순수문화예술교류를 목적으로 분단의 아픔과 실향의 한을 달래보는 시간은 너무나 감동적이였다. 그리고 속초시민과 함께 평화통일의념을 키우는 마당에서 한민족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단합통일의 디딤돌은 만드는 작업에 중국 훈춘의 조선족인 내가 동참했다는것이 은근히 자랑스럽기도 했다.
9. 꽃누르미위원장
하루는 전지부장을 따라 중앙동 신상가에 갔다가 2층4호에서 민예총 속초지부의 변인미공예위원장을 만났다. 20평방 남짓한 작업실 네면에는 회화도 아니고 사진도 아닌 크고 작은 액자가 가득 진렬되여 있었다. 다가서서 보니 전부가 꽃잎, 풀잎으로 만든 <꽃누르미>라는 예술작품이였다.
한국의 한 녀사가 연길에 와서 <꽃꽂이>를 선보일 때처럼 그리고 광고물에서 <도우미>라는 낯선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선뜻 입에 오르지 않는 이름이여서 그 뜻을 물으니 식물을 눌러만든 공예작품을 한국식으로 이름지은 우리말이라고 하였다.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품이 많이 들어요. 철을 맞추어 각가지 야생화를 채집하고 그것을 상하지 않게 눌러 건조시킨 다음 자외선과 습기를 받지 않게 보관해야 하니깐요."
인미씨의 말이였다. 한어로 압화, 영어로 프레스플라워라고 하는 꽃누르미는 회화적느낌이 다분한 평면조형예술로서 우리의 생활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풀꽃 예술이다. 16세기초에 이딸리아에서 시작된것이 2001년에는 영국에서 <세계꽃누르미 예술제>를 펼치기에 이르렀고 2002년에는 서울과 요코하마에서 <월드컵기념 한일친선꽃누르미전>이, 2005년에는 SBS방송국에서 주최한 <세계꽃누르미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즉 꽃누르미는 할일 없는 아녀자들의 꽃장난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리매김한 하나의 예술업종이라는 말이다.
나는 "보시다시피 꽃누르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지요."라고 하는 인미씨의 가슴속에 작은 풀, 작은 꽃을 사랑하는 한쌍의 예쁜 눈이 있음을 느끼였다.
그후 그녀를 한번더 만난것은 문화제를 준비하는 엑스포상징탑아래에서였다. 그때 그녀는 핸드백에서 곱게 포장한 작은 함을 내놓으면서 선물이라고 하였다. 포장을 헤쳐보니 밑면을 불수강으로 감싸고 뚜껑에 작은 풀꽃을 박아넣은, 아주 정교하고 사치한 꽃누르미 명함갑이였다. 나는 그만 얼굴이 뜨거워났다. 이번 속포행에서 나는 명함장을 휴대하지 않아 받기만 하고 드리지 못하는 큰 실례를 했던것이다.
나는 귀국하자 명함장부터 갖추었다. 사회교제가 크게 없는 나에게 용도가 많지 못한 명함장이지만 나는 지금 변인미씨가 준 명함갑에 나의 명함을 넣어가지고 다닌다. 가끔 그것을 꺼내보면 눈앞에는 해맑은 웃음이 가실줄 모르는 그녀의 청순한 모습이 떠오르고 귀전에는 "이후엔 명함장을 꼭 지니고 다니세요">라고 하는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오는상싶다.
10. 민예총속초문학위원회
한국의 민예총은 민족예술인총련합회의 략칭으로 중국의 문련과 대등한 기구이다. 그 산하에 문학, 사진, 공예 등 여러 협회(분과)를 두었는데 우리와는 달리 모모 <위원회>라고 한다. 례컨대 문학위원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와 민예총속초문인들과의 만남은 전태극지부장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전지부장은 두 자매도시의 문화교류를 추진하면서 선후로 두차례의 재중국동포 시화전을 펼치였고 자금을 모아 재중국동포초대시집 <백두산에 가서는>, <백두대간의 겨울바람> 등을 출판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작품이 먼저 만나는 계기를 가지였고 지금은 문인들이 만나는 뜻깊은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우리는 김영호문학위원장을 비롯한 민예총속초문인들의 열정적인 환대를 받았다. 비록 국적이 다르고 자라난 문화환경이 다르지만 이어온 피줄이 같다는것과 같은 문학인이라는것으로 하여 우리는 초면에도 구면같이 스스럼없는 웃음꽃을 피울수 있었다.
우리가 만난 속초의 문인들은 모두가 30대의 젊은이들로서 또 모두가 분단의 아픔에 목메이는 시인들이였다. 훈춘에 한번 다녀간적 있는 김영호시인은 도문다리를 회고하면서 줄달음쳐 건널수 있는 곳이지만 <너와 내가 건널수 없는 다리>라고 읊었고 리주동시인은 <가슴 밑바닥을 치지 않고 부르는 노래>가 어찌 노래로 될수 있느냐고 정감의 깊이를 호소하였다. 김병우시인은 영금정등대를 가리키며 <안개비 내리는 날이면 영금정등대가 왜 저리 울고있는지 속초사람들이면 다 안다>고 하였고, 김창균시인은 속초역에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늦게 도착하는것이 어찌 기차뿐이랴>라고 통탄하였다. 그리고 강석현시인은 통일이라는 님을 찾아 <밤마다 돌아눕는 합장의 념주는 도무지 편안할수 없다.>고 토로하였고 리강현 시인은 <가만히 스며드는 슬픔에 온 누리가 강물이 되여 출렁인다>고 고백하였다.
우리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밤이 깊도록 앞으로 어떻게 하면 자주 만날수 있을가 하는 실제문제를 담론하였다. 우리는 또 이미 시작된 시화전과 중학생백일장을 이어 문학세미나, 시랑송모임도 펼쳐보자고 약속하였다. 목적은 단 하나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위하여!> 이것뿐이였다.
그 밤은 지나가고 나는 귀국하였다. 민예총속초문인들이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 우리를 접대해준 그 밤을 생각하면 그들의 뜨거운 혈육의 정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11. 비내리는 설악산
<속초에 갔다가 설악산에 오르지 못하면 평생 유감이 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설악산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설악산은 한국에서 한라산, 지리산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허리에 해발1.708메터의 높이로 우뚝 솟은 설악산은 봉이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량한 감개에 젖어들게 한다. 그러니 속초사람들이 <설악산은 백두대간이 이 땅에 빚어놓은 화려하고 장중한 예술품> 이라고 자랑하는것이 무리가 아니였다.
그런데 이래저래 설악으로 가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바람이 너무 강해 케이불카가 운행을 정지해서였고 후에는 우리가 서울쪽에 갔다오느라 안배할수 없는데다 비까지 억수로 쏟아져서였다.
드디여 귀국날자를 하루 앞둔 8월20이 되였는데 날씨는 그냥 흐린대로 비를 뿌리며 우리를 초조하게 하였다. 우리의 그런 마음을 알아차린 전지부장이 용단을 내리였다. "비가 내리여 불편하겠지만 오늘은 어쨌든 설악산으로 가야지요."하면서 우리를 자가용차에 앉으라고 하였다
우리를 태운 차는 비바람을 헤치면서 벚나무가 줄지어선 포장도로를 따라 설악쪽으로 달리였다. 산기슭에 당도하니 이렇게 비오는 날에도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그리고 회사단체로 모두가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로서 신통하게도 우리처럼 "속초에 왔다가 설악산을 못보고 가면 안되지" 하는 사람들이였다.
우리는 순서에 따라 케이불카를 타고 760메터의 높이에서 내린 다음 도보로 옛날에 몽골병과 싸울 때 권씨와 김씨 두 장사가 하루밤사이에 쌓았다는 전설의 성-권금성으로 올라갔다. 벼랑을 타고 오르는 300여메터의 등산길에는 벽간수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대력사의 전설로 굳어진 권금성은 풀도 몇대 없는 웅장한 대머리바위로 솟아있었다. 깊이를 알수없는 골짜기, 깎아 세운듯한 절벽, 산허리를 감도는 망망운해. 자연의 걸작이란 인간의 상상으로는 어림도 없는것임을 깨우치는 설악산! 설악산은 청초호반의 엑스포타워와 함께 속초라는 땅에 거연하면서 멋스러운 형상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설악을 보았기에 간절했던 소망 하나를 풀었다. 고마운것은 그날 우리가 산을 오를 때부터 내려올 때까지 비가 그쳐준것과 려관에 갈 사이가 없어 아침에 신은 구두발 그대로 등산했는데 비에 젖은 바위가 하나도 미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하늘이 나더러 설악산을 잘보고 가라고 모름지기 은총을 베푼것 같기도 하다. 딱히 그런게 아니라 해도 나는 그렇게 믿고싶다. 일월성신을 비롯해 삼라만상 모두가 하늘의 품속에서 살고있음에랴.
12. 신흥사 통일대불
신선이 되여 하늘을 날아다니듯이 케이불카를 타고 설악산을 내려 신흥사로 가는 길목에서 설악을 마주하고 련화방석에 정좌한 불상을 만났다. 몸집이 어찌나 큰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청동불상이였다. 모르긴 해도 현대의 교통수단과 운수능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움직일수 없는 그런 불상이였다.
사찰을 많이 다녀보지 못한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엄엄하게 큰 부처님은 본적이 없다. 소개를 들어보니 높이가 17.8메터, 무게가 108톤이나 되는 이 청동좌불상은 과연 한국 최대의 불상으로 그 정명은 <신흥사 통일대불>, 별칭은 <통일불상> 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는 통일이면 불상까지 통일이라는 이름을 지어 만들었을가? 그것은 분단의 력사에 어서 종지부를 찍고 통일의 새날이 밝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속초시민의 피타는 마음으로 주조된것이였다. 그리하여 명산대찰의 입구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벌레소리를 가려들으며 이 나라의 세기적소원인 통일을 위한 념불에 전념하고있는것이였다. 여기에서 나는 통일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아로새기고 살아가는 속초의 사유와 행위 방식이 왜 이럴수밖에 없는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였다. 총인구 10만으로 통계되는 속초시는 거주민의 80%이상이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실향민이 가장 많이 집중된 실향민의 도시라는 말이다. 한반도에 살고있는 사람치고 누가 통일을 원하지 않으리오만 그속에서도 속초사람 들의 통일념원이 누구보다 강렬한 원인이 바로 이때문이였다.
통일불상을 만들어 통일을 기원하고 통일문화제를 펼치여 통일의지를 키우고 통일전망대에 올라 통일을 바라보는 속초의 마음은 그만큼 경건하고 뜨겁고 깨끗하고 아름다운것이였다.
설악산과 신흥사를 찾아가는 수천수만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통일불상 앞에서 나도 중국조선족의 일원인 나의 이름으로 잠간 머리를 숙이고 마음의 두손을 모았다. 그리고 그날밤 나는 <통일불상>이라는 시조 한수를 만들어 내 마음의 갈피에 끼워놓았다.
나들이 속초길에 만나본 청동부처님
설악산기슭에서 비를 맞고있었어
불상도 통일때문에 가슴앓이 하더군
신흥사 가는 길목 정좌로 앉으신 몸
누구를 기다리시나 여쭈어 보았더니
어여쁜 통일아가씨라고 비에 젖어 답하더군
13. 속초여, 안녕 !
속초사람들의 말을 빈다면 속초는 <하늘이 내린 살아 숨쉬는 땅>이요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는 미래의 도시>이다. 설악의 절경과 청정 동해바다, 영랑호와 청초호, 그리고 워더피아온천 등 특이한 자연자원을 한품에 안고 사는 속초는 한마디로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의 극치를 자랑하는 천혜의 도시였다.
오죽하면 금강산으로 갔던 울산바위가 설악산에서 걸음을 멈춘채 굳어지고 금강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신라의 화랑 영랑이 호수의 물빛에 취하여 행장을 풀었을가. 높이 73.4메터의 국제관광엑스포상징타워는 속초의 오늘과 래일을 바라보는 전망대로 솟아있고 쌍벽을 이룬 영랑호와 청초호는 자연과 인간의 마음을 비추는 보석거울로 걸려있다. 이렇듯 장려한 산과 물을 지키여 체통이 우람진 범바위는 오늘도 영랑호 기슭에 엎드린채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속초가 펼친 꿈의 날개는 백두산으로 가는 배길과 금강산으로 가는 배길을 열었다. 년간 1.300만의 국내외관광객이 찾아오고 년관광수입 3천억원(한화)을 넘기는 속초의 전망은 동해일출처럼 눈부신것이다. 한반도를 철썩이는 동해안에서 국제관광도시로 부상하고있는 속초의 노래는 동해의 푸른 물과 함께 끝없이 출렁이는 가슴 벅찬 희망의 노래, 희열의 노래였다.
나는 이러한 속초를 보았다. 한번 보면 떠나기 아쉬워 다시 돌아본다는 항구도시-강원도 속초를 보았다. 하지만 비자에 약속된 날자가 다 되였으니 아쉬운대로 귀로에 오를수밖에...
8월21일, 우리는 민예총속초지부의 전태극지부장, 김영호문학위원장, 김창균시인의 전송을 받으며 동춘호에 몸을 실었다. 그동안 우리를 보살피느라 신고가 많았던 경기, 인천건어물해송상회의 전태일사장님, 지역사랑 나눔실천운동 본부장 김진기님 그리고 민예총속초지부 박정옥사무국장님의 뜨거운 동포사랑도 차곡차곡 내 마음의 그릇에 담아가지고 속초항을 떠났다.
나는 갑판에 올라 취항의 고동소리와 함께 나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속초시 의 외경을 바라보며 해풍에 날리는 작별의 인사를 남기였다.
잘 있으라, 속초여!
속초여, 안녕!
(훈춘) 김동진
연변통신 2006-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