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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용
우한용우한용
첨부팡일리 혹시 전다이 안 될까 해서 바탕화면에 올려 둡니다.. 참고하세요.
홍성암, 에세이 소설집, < 불면증>, 도서출판 비움과채움, 2025, 532 쪽 2,5천원
홍성암 교수께서 에세이소설집 <불면증>을 냈다.
‘에세이소설’이란 말이 친근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낯설다.
문학의 장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법하다.
거반 10년 전의 일이다. <떠돌며 사랑하며>(수필과비평사, 2017)라는 산문집을 낸 적이 있다. 시골에 거처를 두고 드나든 지 10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시골에서 사는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쓰기는 운치가 없다. 그렇다고 ‘수필’이라고 장르 표시를 하기 또한 꺼려졌다. 내가 수필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수필가로 등단한 적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크게 분류하면 ‘수필’이 될 터인데, ‘허구성’을 가미한 글이라는 뜻으로 ‘허구에세이’라는 명칭을 달았다.
이른바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이야기(narrative)에 해당하는 형식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 ‘본문’ 앞뒤에 그 글을 읽는 타인들이 등장해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바꾸었다. ‘내용’은 사실에 가깝고, 앞뒤에 붙은 ‘평설’은 허구다. 일종의 액자소설 같은 형태의 글이 되었다. 再版을 내는 행운이 온다면 ‘액자’ 이야기를 본문에 녹여 넣을까 한다.
홍 교수는 ‘에세이소설의 장르적 의미’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장르의 통합개념을 지향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수필에 허구를 가미하거나 꽁트에 사실성을 강화할 경우에 에세이소설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는 심리소설과 기전체소설에 풍성함을 더하는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작품의 깊이를 확보하는 방법 모색이 에세이소설의 목적인 셈이다.
평문을 쓴 김봉진 작가는 홍교수의 에세이소설을 일본의 ’사소설私小說‘ 개념과 대비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김윤식 교수가 황순원의 어떤 단편소설을 두고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는 점, 최인훈의 <화두>를 두고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는 점을 들어 ’소설‘이라는 용어의 속성을 반성하고 있다. 소설은 ’상상력과 허구‘라는 속성을 기본으로 하여 수필이 할 수 없는 삶의 의미 천착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장르의 확산이나 융합을 넘어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허구개념으로 인간의 심연을 파내려가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인문학 일반이 그렇기는 하지만 문학논의에서도 용어 규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윤식 교수는 글을 쓸 때마다 당신이 소설이라 하는 것은 ’유럽 근대 자본주의‘라는 항목을 전제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는 한국 소설을 설명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한국소설을 논하는 자리에서 유럽 소설 개념을 전용하지 말아야 한다. 근대성이 드러나지 않는 작품은 논의 대상에서 배제한다. 자본주의의 경제논리를 벗어나는 소설은 논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일종의 방법론적 선언이다. 이런 장치를 하지 않으면 개념에 혼란 때문에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황순원의 <학>이 소설이 아니라는 판단은 근대 이데올로기 대립을 ’학사냥‘ 놀이로(우정으로, 심정적 의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 따라서 <학>은 당신이 말하는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탈>은 산문시에 가깝다.
이 책의 제목은 표제작의 제목이기도 하다. <불면증>insomnia은 우울증 멜랑꼴리아 등과 더불어 현대인이 겪는 대표적인 질병이다. 소재로서 시대적 보편성을 띤다. 그런데 작품을 읽다 보면 그야말로 엄격하게 규정되는 ’소설‘이 아니라는 느낌에 빠지게 된다. 서술자이면서 작중인물인 ’나‘와 나의 아내 ’길녀‘... 길녀는 뱀을 유난히 무서워한다. 첫아이를 가진 몸으로 어떤 무당을 접하게 된다. 무당은 당신 내년 못 넘긴다는 점괘를 낸다. 다른 더 용한 무당을 찾아가도 같은 점괘를 낸다. 두려움에 떨며 생활을 하는 중에 설을 쇠게 된다. 그믐밤 안채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가 허깨비를 만나 기절한다.(본문에는 아내가 기겁을 한 게 무엇 때문인지 밝히지 않았다.) 소생하지 못하고 다음 날 아이를 잉태한 채 죽고 만다. 나는 아내를 묻은 무덤을 찾아가, 무덤 속에서 울려나오는 아내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 황홀한 꿈을 꾸면서 저승으로 실려간다.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어른에게 공양함으로서 어른의 목숨을 살린 이야기도 나온다. 割股療親 이 설화는 연유가 매우 오래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 그런 실천을 한 인물이 있어 효도해야 한다는 이야기 끝에는 늘 그 이야기가 따라나왔고, 나는 늙은 할아버지 쳐다보면서, 무서움에 떨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와 제목 불면증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얼마간의 해명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읽을 수 있다면, 이 작품은 설화성을 조금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작중인물 내가 겪는 불면증과는 거리가 있다. ”낮에는 죽어있던 모든 것들이 깊은 밤, 잠깨어서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p.264) 이러한 두 가지 불면증의 길항작용이 주제로 건너가는 문턱인지도 모른다. 현대에도 운명은 상존한다는 세계인식 방법을 일깨운다.
문학의 장르 파괴가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벨라루스 출신 노벨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세이비치(Svetlana Alexievich)의 공이다. 그의 소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서술하고자 하는 내용과 작품의 형식 사이에 유기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으로 생각된다. 대참사가 있고 증인은 없는 게 현대의 참사 본질요건이다.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 사건은, 그 사건의 진행 과정을 증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다. 소재는 흩어져 있는 목소리(미세한 디테일의 증언)뿐이다. 그 목소리를 채집해서 서사성 없는 서사를 형성했다. 소재가 양식을 규정한 셈이다. 이는 서사성이 파괴된 상황의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허구 서사적 방법론이다.
글쓰기의 원형적 형식은, 말의 모순이지만, 수필이다. 수필이라기보다는 양식 명칭을 부여받지 못한 그 글무더기는 문학의 원형이다. 거기다가 ’수필‘이란 명칭을 허용한다면, 수필은 기존의 장르개념에 따라 분화된다. 서사적 수필, 서정적 수필, 극적 수필... 수필적 수필은 용어로 적절치 않다. 구태에 이름을 달자면 ’비평적 수필‘이 될 법하다. 아무튼 홍교수의 글들은 장르의 순정성을 고집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경종을 울린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나를 불면증에 빠지게 하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2026.1.9.)
첨부팡일리 혹시 전다이 안 될까 해서 바탕화면에 올려 둡니다.. 참고하세요.
홍성암, 에세이 소설집, < 불면증>, 도서출판 비움과채움, 2025, 532 쪽 2,5천원
홍성암 교수께서 에세이소설집 <불면증>을 냈다.
‘에세이소설’이란 말이 친근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낯설다.
문학의 장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법하다.
거반 10년 전의 일이다. <떠돌며 사랑하며>(수필과비평사, 2017)라는 산문집을 낸 적이 있다. 시골에 거처를 두고 드나든 지 10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시골에서 사는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쓰기는 운치가 없다. 그렇다고 ‘수필’이라고 장르 표시를 하기 또한 꺼려졌다. 내가 수필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수필가로 등단한 적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크게 분류하면 ‘수필’이 될 터인데, ‘허구성’을 가미한 글이라는 뜻으로 ‘허구에세이’라는 명칭을 달았다.
이른바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이야기(narrative)에 해당하는 형식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 ‘본문’ 앞뒤에 그 글을 읽는 타인들이 등장해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바꾸었다. ‘내용’은 사실에 가깝고, 앞뒤에 붙은 ‘평설’은 허구다. 일종의 액자소설 같은 형태의 글이 되었다. 再版을 내는 행운이 온다면 ‘액자’ 이야기를 본문에 녹여 넣을까 한다.
홍 교수는 ‘에세이소설의 장르적 의미’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장르의 통합개념을 지향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수필에 허구를 가미하거나 꽁트에 사실성을 강화할 경우에 에세이소설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는 심리소설과 기전체소설에 풍성함을 더하는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작품의 깊이를 확보하는 방법 모색이 에세이소설의 목적인 셈이다.
평문을 쓴 김봉진 작가는 홍교수의 에세이소설을 일본의 ’사소설私小說‘ 개념과 대비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김윤식 교수가 황순원의 어떤 단편소설을 두고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는 점, 최인훈의 <화두>를 두고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는 점을 들어 ’소설‘이라는 용어의 속성을 반성하고 있다. 소설은 ’상상력과 허구‘라는 속성을 기본으로 하여 수필이 할 수 없는 삶의 의미 천착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장르의 확산이나 융합을 넘어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허구개념으로 인간의 심연을 파내려가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인문학 일반이 그렇기는 하지만 문학논의에서도 용어 규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윤식 교수는 글을 쓸 때마다 당신이 소설이라 하는 것은 ’유럽 근대 자본주의‘라는 항목을 전제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는 한국 소설을 설명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한국소설을 논하는 자리에서 유럽 소설 개념을 전용하지 말아야 한다. 근대성이 드러나지 않는 작품은 논의 대상에서 배제한다. 자본주의의 경제논리를 벗어나는 소설은 논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일종의 방법론적 선언이다. 이런 장치를 하지 않으면 개념에 혼란 때문에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황순원의 <학>이 소설이 아니라는 판단은 근대 이데올로기 대립을 ’학사냥‘ 놀이로(우정으로, 심정적 의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 따라서 <학>은 당신이 말하는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탈>은 산문시에 가깝다.
이 책의 제목은 표제작의 제목이기도 하다. <불면증>insomnia은 우울증 멜랑꼴리아 등과 더불어 현대인이 겪는 대표적인 질병이다. 소재로서 시대적 보편성을 띤다. 그런데 작품을 읽다 보면 그야말로 엄격하게 규정되는 ’소설‘이 아니라는 느낌에 빠지게 된다. 서술자이면서 작중인물인 ’나‘와 나의 아내 ’길녀‘... 길녀는 뱀을 유난히 무서워한다. 첫아이를 가진 몸으로 어떤 무당을 접하게 된다. 무당은 당신 내년 못 넘긴다는 점괘를 낸다. 다른 더 용한 무당을 찾아가도 같은 점괘를 낸다. 두려움에 떨며 생활을 하는 중에 설을 쇠게 된다. 그믐밤 안채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가 허깨비를 만나 기절한다.(본문에는 아내가 기겁을 한 게 무엇 때문인지 밝히지 않았다.) 소생하지 못하고 다음 날 아이를 잉태한 채 죽고 만다. 나는 아내를 묻은 무덤을 찾아가, 무덤 속에서 울려나오는 아내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 황홀한 꿈을 꾸면서 저승으로 실려간다.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어른에게 공양함으로서 어른의 목숨을 살린 이야기도 나온다. 割股療親 이 설화는 연유가 매우 오래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 그런 실천을 한 인물이 있어 효도해야 한다는 이야기 끝에는 늘 그 이야기가 따라나왔고, 나는 늙은 할아버지 쳐다보면서, 무서움에 떨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와 제목 불면증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얼마간의 해명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읽을 수 있다면, 이 작품은 설화성을 조금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작중인물 내가 겪는 불면증과는 거리가 있다. ”낮에는 죽어있던 모든 것들이 깊은 밤, 잠깨어서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p.264) 이러한 두 가지 불면증의 길항작용이 주제로 건너가는 문턱인지도 모른다. 현대에도 운명은 상존한다는 세계인식 방법을 일깨운다.
문학의 장르 파괴가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벨라루스 출신 노벨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세이비치(Svetlana Alexievich)의 공이다. 그의 소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서술하고자 하는 내용과 작품의 형식 사이에 유기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으로 생각된다. 대참사가 있고 증인은 없는 게 현대의 참사 본질요건이다.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 사건은, 그 사건의 진행 과정을 증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다. 소재는 흩어져 있는 목소리(미세한 디테일의 증언)뿐이다. 그 목소리를 채집해서 서사성 없는 서사를 형성했다. 소재가 양식을 규정한 셈이다. 이는 서사성이 파괴된 상황의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허구 서사적 방법론이다.
글쓰기의 원형적 형식은, 말의 모순이지만, 수필이다. 수필이라기보다는 양식 명칭을 부여받지 못한 그 글무더기는 문학의 원형이다. 거기다가 ’수필‘이란 명칭을 허용한다면, 수필은 기존의 장르개념에 따라 분화된다. 서사적 수필, 서정적 수필, 극적 수필... 수필적 수필은 용어로 적절치 않다. 구태에 이름을 달자면 ’비평적 수필‘이 될 법하다. 아무튼 홍교수의 글들은 장르의 순정성을 고집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경종을 울린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나를 불면증에 빠지게 하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202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