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혁명가. 인터넷 신문 ‘오마이
뉴스’의 창간자 오연호(41)사장에 따
라붙는 꼬리표다. 오마이뉴스를 친노
홍위병언론으로 폄하를 하든, 대한민
국의 특수한 인터넷 토양이 생산한 민
주언론의 효시로 칭송을 하든 그것은
독자의 자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마이뉴스‘가 해놓은 각종 벽깨기가
우리 언론사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사실이다. ‘오마이뉴스’는 45면, 아니
그 이상으로 증면하더라도 결국 제한
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지면의 한계를
인터넷이란 공간을 이용, ‘뽕을 빼는’
기사로 승부수를 던졌다. 고작해야 서너번 판갈이(뉴스의 긴급도에 따라 뉴스를 교체하고 새로 지면을 편집하는 일)로 뉴스란 말
에 값하고자 하는 일간지에 ‘똥침을 놓으며’ 시시각각 생중계하다시피 하는 리얼타임 보도로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가장 큰 혁명은 무엇보다도 독자와 기자사이의 장벽을 허물었다는
데 있다. ‘보여주고 싶은 것 만을 보여주려는 이’와 ‘전하고 싶은 것 만을 골라 전하려는 중개
자’사이의 밀실거래가 더이상 존재하기 어렵게 됐다. 왜? 모든 시민은 기자고, 늘 뉴스게릴라
의 눈은 어디에서고 번뜩이며 그들은 득달같이 글을 올려 고발할 힘을 평등하게 갖게 됐기 때
문이다. 이미 참여 여론의 물꼬는 막을 수 없을 만큼 터졌기 때문이다.
기존 저널리즘에 도전, 독자·기자의 벽 허물어 지난해 매체 영향력 6위…디지털언론의 리더 "항상 2% 부족" 변신 꿈꾸는 영원한 현역기자
이같은 병기를 기반으로 다윗 ‘오마이뉴스’는 골리앗(메이저 종이신문)에게 도전장을 던졌고
‘어느 정도’ 기대이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2003년 방송 신문 통신 인터넷 통틀어 2003년 영향
력 평가 6위를 기록한 것은 그 반증이다.(시사저널 조사).
오연호 대표가 최근에 출간한 ‘대한민국 특산품―오마이뉴스’(휴머니스트 간)에는 대학교(연
세대 국문학과 83학번) 와서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보고 무서워 혼자서는 절대 안탔다는 에피
소드가 나온다. 산골 나무꾼 소년 오연호를 오늘날 디지털 언론의 선발CEO로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람이 거세면 깃발을 들라
“왜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를 창간할 것을 생각했냐고요? 기존의 주류언론에 편입되고 싶
지도 않았지만, 기자로서 한국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욕망은 너무나 강렬했습니다. 계
급장(신문사 브랜드 파워)을 떼고 기사의 질로 승부를 걸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는데…
단지 매체파워에 밀려 비주류가 되는 한국 언론의 실태가 싫었습니다. 보수 일변도의 여론형
성시장에 세상의 변화에 적극발언하는 진보적 주류를 선보이고 싶었지요. 20세기의 구태의
연한 일방통행 저널리즘,잘난척하는 한국언론실태를 혁신시키고 싶었습니다. 종이매체를 창
간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하고… 그래서 생각한 게 인터넷 언론
이었지요. 인터넷 언론은 내가 꿈꿔온 저널리즘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희망의 바다였어요. 자
본도 덜 필요할 뿐더러 폼잡는 일부기자가 만드는 신문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뉴스게릴라가
돼 다리품을 팔아 연대를 이루는 참여언론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니까요. 인터넷 신문을 영향력있게 만들면 왜곡된 한국의 여론시장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있었습니다.”
오대표는 “성공은 꿈과 현실사이의 갭을 메우는 작업”이라며 “보통사람은 현실에 자신의 꿈을 맞추고 포기하지만 자신은 꿈에 현실을 맞추고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말’지 기자로 있을 때 남들은 컴퓨터로 기사쓸 때도, 원고지로 기사쓸 것을 마지막까지 고집하던 아날로그적 인간 오연호를 오늘날 디지털 언론의 리더로 밀어붙인 원동력이란 설명이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가라는 그의 모토는 ‘말’지 기자시절, 95년 결행한 도미유학에도 발휘됐다. 자본이 넉넉잖은 월간지 형편에 주미특파원을 보낼 사정이 안된다는 것은 뻔한 사실. 그는 자신이 한국내 미국문제 전문기자로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굴에 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 하에 미국유학 결심을 굳히자 그 길을 찾아나섰다. 무급특파원을 자청하고, 방송사 통신원 등으로 생계책을 마련, 결국 미국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준비된 자는 반드시 쓰임을 받는다.
‘하면된다’는 꿈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 것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하니까 되더라고 승리의 환호성을 올리는 자와 해도 안된다며 좌절의 한숨을 삼키는 자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단지 소망의 절실함만이란 것으론 설명이 부족할 것이다.
오대표는 “성령이 충만되길 기다렸다”는 종교적 표현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성령 충만? 그는 자신의 꿈을 발화시키는 데까지는 시대의 사명을 포착하는 예민한 감각, 내공을 쌓는 12년간의 기간이 필요했다고 고백한다.
“내가 인터넷 언론을 창간한 것이 남들 눈엔 일시에 성냥불을 당긴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상 시뮬레이션을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12년간 말지 기자생활을 하며 이 분야에선 내가 최고란 자신감을 쌓지 않았다면 오마이뉴스 창간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인터넷은 내 익숙한 싸움터고, 어떻게 쓰면 독자를 빨아들일 수 있고, 어떤 기사를 써야 할지 난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어요.”
알려져있듯 오대표는 386운동권 출신 CEO다. 대학교 4학년때 고등학생들에게 반미를 부추기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교도소에서 1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운동권을 하며 시대속의 나를 읽고 희생하는 힘을 배웠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같은 이력을 통해 시대의 소명, 쉽게 말하자면 시대의 흐름과 문제대응방식을 남보다 좀 더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었지요. 오마이뉴스도 만일 돈 출세만을 목표로 했다면 잘됐을지 의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매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책임감이 강했기에 밀어붙였던 것이지요.”
인터넷 신문의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았어도 국내 인터넷 인프라가 쌓이지 않았다면 오마이뉴스의 히트가 불가능했을 것은 분명하다.
“오마이뉴스가 성공한 것은 개인 오연호의 능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기존언론들에 대한 불신이 수십년동안 축적돼왔고, 젊은 시민들의 참여정신이 그 어느 나라보다 높은 점, 인터넷 인프라가 세계 1위 수준이란 점, 우리 국토가 좁기 때문에 기사의 진위여부를 크로스체크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등을 제가 남보다 빨리 포착하고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한국의 뉴스 발원지는 정치란 점에서 그쪽으로 선택과 집중을 한 것이 먹혔던 것이지요.”
#자신과 궁합이 맞는 일을 하라
오대표는 지금도 후배들에게 “말지 기자생활을 하며 12년동안 나의 기사는 개근상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즉 자신의 아이디어가 늘 조직체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다.
“바꿔 말하면 회사에서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나갈 것인지를 알고, 그것에 부응하는 아이디어를 냈기 때문이지요. 회사와 궁합이 잘 맞았다고나 할까요.” 그의 기자에 대한 열망이 아직도 살아있음은 집무실에 대표이사란 직함 외에 대표기자가 여전히 붙어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CEO가 된 지금도 여전히 기자직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오마이뉴스를 창간한 이후로 2년간은 원맨쇼로 기자 사장 모두 다했지요. 요 몇 달사이엔 제 이름의 기사가 뜨지 않고 있지만… 당분간 책출간 등 무대뒤에서 서포트를 할 작정입니다. 나는 늘 변신을 꿈꿉니다. 다만 동떨어진 비약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모델이 제 변신의 핵심코드지요. ‘말’지가 만족스러운 일자리였지만 2%의 부족 때문에 오마이뉴스를 창간했습니다. 지금의 자리도 행복하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다음에는 세계 특파원을 하고 싶어요. 한 곳에 상주된 지역특파원이 아니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따스한 이야기를 따끈따끈하게 전달해주고 싶습니다. 영원한 현역기자로 말입니다.”
휴가에서 막 돌아왔다는 그는 다소 까칠한 모습이었지만 오마이뉴스와 자신의 꿈이야기가 나오자 점점 눈에 띄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앞으로 12년후, 오대표는 자신의 부족한 2%를 채우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변신해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김성회기자/saint@segye.com
■ 오연호 사장은…
1964년 전남 곡성 출생
1983년 연세대 국문과 입학
1988년 연세대학교 국문과 졸업
미국 리전트대학 저널리즘 석사 (매체창간론)
1988-1999 월간 ‘말’지 기자 , 취재부장
1995.3-1997.10 월간 ‘말’지 워싱턴특파원
현재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저서=‘식민지의 아들에게’(1989, 백산서당),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 (1990, 백산서당)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1998, 해냄) ‘노근리 그 후’ (1999, 월간 말) ‘대한민국 특산품 오마이뉴스’(2004, 휴머니스트) 등.
△성공이란=꿈이 현실에서 구체화되는 증거를 보았을 때 일단 성공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존경하는 인물=언론인 고 송건호씨. 현대사에 대한 차분한 글쓰기로 젊은이들에게 자극을 주셨기 때문이다. 또 생활면에서도 올곧은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책=성경. 진부하다면 진부할 수 있지만 성경은 질리지 않는 책이다. 어려울 때, 흔들릴 때 지속적으로 나를 붙잡아주고 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자극한다. 자만해질 우려가 있을 때 성경을 펼쳐들면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좌우명=스트레스를 즐겁게 먹고 살자. 스트레스를 끄는 순간 사명감 창조력도 사라진다. 농사를 업으로 삼던 어머니는 밭에서 김을 매는 중간에 일거리를 끊임없이 가져오더라도 늘 즐겁게 즐기면서 했다. 나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으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거부하기보다 수용하며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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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트레스를 즐겁게 먹고 살자 좀 색다른 면이 보이네요 - 젊은 CEO 희망..짱 -
글 감사합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좋은글이네요 퍼갈게요 ^_^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