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천지가 있은 이래로 생물의 종류와 혈기의 종속이 경쟁이 없는 때가 없었으니,
승자는 주인이 되고 패자는 노예가 되었으며, 승자는 영예를 차지하고 패자는 굴욕을 당했으며,
승자는 쾌락을 즐기고 패자는 고통을 받았으며, 승자는 존재하고 패자는 멸망하였으니,
그 경쟁의 시대에 처하여 무릇 지각과 운동 성질이 있는 자중 타인에게 승리할 것을 구하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
무릇 우리 동포의 부형(父兄)된 자는 한 번 생각할 지어다.
자기 자신 세대는 구습과 고루 속에서 생장하여 뇌수가 이미 굳어지고 세월을 따라 가기가 힘드니
신학에 종사하여 신지(新智)를 개발하기가 어렵다고 하겠으나, 차마 그 자손에게까지 배움에 게을러서
무식 무재로 하등 지위에 깊이 떨어져 타국인의 노예가 되고 타국인의 희생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인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오로지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를 저술하는 까닭이다. "
백암 박은식이 '한국통사'를 내놓으면서 밝히고 있는 '한국통사'를 저술하게 된 이유이다.
그의 한국 통사는 근대적 역사의식에 입각한 최초 한국 근대사로 독립투쟁의 필연성을 강조한 책이다.
백암 박은식은 여기서 역사란, 국백과 국혼의 기록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국가는 멸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역사란 국혼과 국백의 결합이라고 말하고 있다.
국혼이란 국어, 국사, 국교 등의 정신적 요소를 말하며, 국백이란 경제, 군사, 기계 등 물질적 요소를 말한다.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히지 않는다."
백암 박은식은 이 '한국통사'에서 한국의 비통함을 다음으로 나열하였다.
<대원군의 사심, 갑신정변의 명예욕, 동학운동의 미신과 무지, 독립협회의 허영,
지리적 요충지로서 세력 균형 도모의 실패> 등이다. 한국의 슬픈 역사를 우리 내적 요인으로 귀결시킨 것이다.
'한국통사'는 백암 박은식 선생이 수년의 집필 끝에 1915년 중국 상해의 중국인 출판사에서 순한문으로 편찬하였다.
백암 박은식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농촌 선비로 서당 훈장이던 부친 박용호(朴用浩)와
모친 노씨(盧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자는 성칠(聖七), 호는 백암․겸곡(謙谷)․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 이명은 박인식(朴仁植)․박기정(朴箕貞) 등이다.
백암 박은식은 언론인으로서, 구국계몽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활약하였고, 경학원(經學院)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사(1900),
오성학교와 서북협성학교 교장(1909)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활동하였다.
이를 전후하여「겸곡문고(謙谷文稿)」(1901)등 수편을 저술하고, 수십 편의 논설을 발표하였으며
많은 번역서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한다.
박은식은 그 무렵 역사 연구를 통해 1911년에「동명왕실기(東明王實記)」「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을 잇달아 저술 간행하였으며, 1915년에는「한국통사」를 펴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던 박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편, 1920년「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 간행하였다.
이는「한국통사」와 함께 그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는 것으로, 1884년의 갑신정변부터 1920년의 독립군 무장투쟁까지의 피어린
독립운동사를 서술한 것이다. 그러던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지병인 기관지염의 악화로 1925년 11월 1일, 독립쟁취를 호소하는 유촉(遺囑)을 남긴 채 서거하였다.
그의 유해는 상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68년만인 1993년 8월 5일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됨으로써 고국에서 영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