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의 대표적 민속놀이인 놋다리밟기이다.
1361년 안동 여성들은 노국공주가 하천을 건널 수 있도록 줄지어 엎드려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놋다리밟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전까지는 놀이에 참여한 모든 아녀자들이 번갈아가면서 등을 밟고 지나가는 형식이었다.
이때부터 한 사람만 밟고 지나가는 형식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잔잔하면서도 그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안동사람들의 충성심을 배경으로 한 여성들의 대동놀이 놋다리밟기이다.
놋다리밟기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초겨울 안동으로 몽진해 소야천(솟밤다리)에 다달아 다리가 없는 큰 내를
건너기 위해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왕후인 노국공주를 태워 강을 건너게 했다는데서 유래된 민속놀이다.
이 놀이는 주로 정월대보름에 행해졌던 놀이로 풍요와 다산의 의미가 담겨진 여성집단의 춤 놀이다.
고운 한복을 입은 부녀자들이 만들어 낸 인교를 따라 노국공주가 고운 자태를 뽐내게 된다.
놀이는 공민왕이 포로가 되는 형상의 실감기, 포로에서 풀려나는 실풀기, 웅굴놋다리, 줄놋다리, 꼬깨싸움,
외줄놋다리와 퇴장 순으로 진행된다. 놋다리밟기는 1984년 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묘일에 왕 일행이 출발했다. 노국공주는 연(輦·임금의 가마)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次妃) 이 씨가 탄 말이 너무 약하였으므로 보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1361년 11월 19일 고려의 수도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시).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공민왕이 몽진(蒙塵·임금의 피란)에 올랐다.
얼마나 다급했기에 왕비가 가마를 탈 수 없을 정도였을까.
공민왕은 경기 광주에 이르렀다.
주민들은 모두 산성에 올라가 버리고 겨우 관리 몇만 남아 공민왕을 맞았다.
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충북 충주에 도착했을 때는 주민은 물론 관리조차 왕을 맞이하지 않았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이 난을 극복하고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단 말인가.
공민왕의 마음이 무거웠다. 공민왕 일행은 경북 문경새재를 넘고 예천을 지나 12월 15일 안동에 들어섰다.
개경을 떠난 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풍산을 지나 안동 도심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물길이 나타났다.
송야천이었다. 추운 겨울, 저 물길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안동의 아녀자들이 나타나더니 줄지어 엎드렸다. 금세 다리가 되었다. 인교(人橋)를 만든 것이다.
노국공주는 여인들의 등을 밟고 무사히 송야천을 건넜다. 공민왕은 감동했다.
한 달에 걸친 고단한 몽진의 여정에서 이렇게 극진히 대접 받기는 처음이었다.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 목신상(木神像)입니다. 이 자리가 고려 때 공민왕의 어가(御駕)가 쉬어갔던 곳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여기 사당을 짓고 공민왕을 모셔왔습니다. 옛날엔 여기서 가면극(수동별신굿)도 했다고 합니다.”
수곡리 이장 오기식 씨는 마을사람들이 공민왕을 위해 매년 장월 대보름이면 동제(洞祭)를 지낸다고 말한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수곡리의 국신당(國神堂)에서 두 개의 나무 인형이 나타났다.
공민왕이 마을을 지켜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를 비롯해 안동 사람들은 공민왕을 환대하고 극진히 모셨다.
홍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안동 학가산성, 봉화 청량산성 등 여러 개의 산성을 쌓기도 했다.
공민왕은 안동에서 마음을 추슬렀다. 영호루 아래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활을 쏠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1362년 2월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돌아간 공민왕은 “안동이 나를 중흥시켰다”고 말했다.
공민왕은 감사의 뜻으로 복주목(福州牧)이었던 안동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했다.
영호루, 안동웅부, 봉정사 진여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과 복식 식기류를 하사했다.
이에 대한 안동 사람들의 화답이 바로 공민왕 숭배신앙이다.
충렬왕은 한 달 동안, 공민왕은 70일 동안 안동에 머물렀다.
이들 고려왕의 안동행은 안동의 문화를 낳고 현재까지 전승되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