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지하철 2호선과 9호선이 만나는 당산역 4번출구로 나서 선유도답사에 나섰다.
양화진한강공원으로 내려가는 에레베이터 앞 전망대에서 밤섬과 여의도 일대를 바라본 절경이다.
밤섬과 여의도를 끼고 돌아나오는 강을 서강이라고 하였다. 서쪽 밤섬끝자락에 서강나루가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서강의 랜드마크로 서강대교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으로 서강이 밤섬과 여의도를 끼고
마치 뱀처럼 꾸불꾸불 감싸고 흘렀을 것이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배를 띄어놓고 서강의 절경을 만끽하였다고 한다.

여의도 서쪽 양말산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뉴욕의 맨허턴처럼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는 여의도이다.
여의도에는 예전에 지금의 국회자리에 있었던 야산인 양말산 앞에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어 옛부터 주로 양이나 말을 기르는
국립 목축장이 있었다고 한다. 홍수 등으로 목장이 철수 또는 그 규모가 작아지면서 차츰 민간인들에 의한 농업과 목축이 증가됨에 따라, 민간부락이 형성되어 조선 영조 27년(1751년)경「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여의도 주민만의 여의도계
(汝矣島契)도 결성된 것을 볼 수 있다.
1916년 일제가 양말산 일부와 그 앞 초지에 중국의 만주·중원진출을 위한 비행장을 설치하여, 1920년 이탈리아의 공군중위
<후에란이>와 <마세로>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처음으로 여의도에 착륙하였다. 특히 1922년 12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安昌男)이 스바식 비행기「금강호(金剛號)」를 타고 여의도에서 시범비행을 할 때 여의도일대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1929년에는 일본-한국-만주를 잇는 항공수송의 요지로 크게 확장하여 경성항공사(京城航空社) 등이
이용하고, 광복 후에는 이승만대통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主席) 백범 김구선생이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귀국하기도 했다.
1958년 김포 공항이 신설된 이후에는 군용 비행장만으로 사용하다가 여의도 신시가지 개발로 1971년 2월에 비행장이 폐쇄되고
여의도광장(5.16광장)으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여의도공원과 빌딩숲으로 변했다.

서강에도 계절은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양화진공원에는 가을꽃이 만발하여 가을분위기를 한껏 연출하였다.
한강양화진 공원 곳곳에 화려한 꽃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선유도 가는 길에 코스모스 밭은 찾은 이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선유교 서쪽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 공무도하가비가 서 있다.
이 시가(詩歌)는 고조선 A.D 2세기경 쓰인 작품이다. 1899년 「양천군읍지」에서 선유봉이 그 연원지(淵源地)로도 전해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옛 시가의 하나로 작자는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처로 알려져 있다. 이 시가에서는 남편의 익사를 슬퍼하는
설화(說話)를 노래로 만들었다.그 설화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알려져 있다.
"「조선땅 뱃사공 곽리자고(藿里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갈 때, 술에 취한 백수광부(白首狂夫)가
술병을 들고 강물속에 뛰어들어 강을 거슬러 건너는데, 뒤따르던 그 아내가 아무리 말려도 멈추지 않고
무리하게 강을 걸어 건너다 끝내 강물에 빠져죽고, 이에 그의 아내도 그 남편의 익사를 크게 슬퍼하며 통곡하다
마침내 강물속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곽리자고가 집으로 돌아와 그의 아내 여옥(麗玉)에게 아침에 본
그 참담한 광경을 들려주자 여옥이 백수광부의 처가 남편을 따라 자살하기 직전에 통곡하며서 읊은 대사를‘공후’라는 악기를
타며 노래화하여 주위사람들에게 구전(口傳)되었으며, 훗날 이 노래가 중국 진나라 최표(崔豹)의「고금주<古金注>」라는
책에 한역(漢譯)되어 오늘날에 전했습니다."


조선의 시인묵객이 즐겨찾아 서강의 풍광을 한껏 즐겼던 선유봉이다.
마치 신선이 찾아 즐기던 절경의 산봉우리 선유봉(仙遊峰)이다. 그러나 지금은 선유도로 그 이름과 모습이 확 바뀌었다.
서강의 선유도는 섬이 아니였다. 절경을 자랑하던 산봉우리 선유봉이었다.
현재 2만7천2백평(8만9천917제곱미터)의 선유도는 산봉우리가 해발 40미터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봉우리의 모양이 마치 고양이같다고 해서 고양이산(괭이산)이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선유봉과 양화진 사이에는 백사장이 아주 넓어 장관을 이루었으며 수심이 낮아 건기에는 걸어서 강을 건넜다고 한다.
안양천이 서강과 만나는 곳의 염창산(쥐산)과 대조를 이루었던 서강의 절경이 빼여나 시인문객들이 자주 찾았다.
이 선유봉은 암석의 꿋꿋함을 칭송하여 지주봉(砥柱峰)이라고도 불리웠던 곳이다.
또 마포와의 사이에는 강폭이 넓고 물결이 잔잔하여 강상(江上)에 취흥을 돋구는 배를 뛰우기 좋았다고 전한다.

선유봉의 모습은 겸재 정선의 그림 '선유봉'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18세기 당시 한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담아냈던 겸재 정선이다.
힘있게 우뚝 솟은 봉우리와 담백한 필치를 통해 축 늘어진 듯 잘 어우러진 수양버들. 소나무와 우측의 숲은 동양화의 전통기법과
사생에 의한 실경을 적절히 조화시켜 그 상쾌함이 3세기가 지난 지금도 전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봉우리와 함께 눈에 띄는
금빛 백사장과, 쪽빛 강물은 선유봉이라는 이름을 무색하지 않게 한다. 실제로 신선들이 봉우리에 술상을 차리고 경치를 벗삼아
바둑이라도 두며 놀았을 것 같은, 선녀들이 물놀이를 즐기기 위해 내려왔을 법한 선유봉.
더구나 이 절경이 서울의 한강에 존재했었다니 정말 놀랍기만 할 뿐이다.
선유봉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양화도(楊花渡) 나루터를 경유하여 잠두봉(蠶豆峰)을 잇는 한강의 절경으로서
중국 사신들도 그 경치를 사랑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시인·묵객들은 옛날부터 이곳에 많은 누정을 짓고 거처하기도 하였다.
양녕대군은 만년에 이곳에 영복정(榮福亭)을 짓고 한가롭게 지냈다 한다.

서강의 대표적인 경승을 뽐내던 선유봉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깎이고 깍여 이제는 평평한 곳에 생태공원으로 변모하였다.
무분별한 개발의 광풍으로 더 이상 정선이 묘사했던 힘있는 봉우리와 축 늘어진 수양버들, 황금을 깔아놓은 듯 한 백사장,
쪽을 풀어놓은 듯 푸르른 선유봉은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 수천 년 동안 봉우리에서 노닐었던 신선들은 60년대 밤섬의 주민들처럼 바둑판과 술잔을 양 손에 끼고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다.
선유봉은 1925년 대홍수 후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의 석연치 않은 한강치수사업을 계기로, 서울의 화표(華表)인 선유봉의 암석들이 마구 채취당해 제방을 쌓거나 대동아전쟁 물자조달에 사용되는 등 점차 봉오리 해체의 비운을 맞았다.
해방후에도 도시개발의 여파로 남아있던 선유봉 암석들 마저 계속 채취되었다.
1965년 양화대교가 관통되면서 선유봉이 대부분 허물어졌으며,이곳에 1978년 선유정수장이 설치됨으로써 안타깝게도 선유봉의
그 아름다운 옛모습을 모조리 상실했다. 예전에 선유봉에 있었던 사찰인 용화사(일명 선유봉절)의 부처와 미륵은 6.25전쟁 중
미군에 의해 노량진 본동 473-4 극락정사로 옮겨 모셔져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10만평 모래밭에 우뚝 솟았던 40m의 돌산, 선유봉 주변에는 30여가구가 살았다,
주민들은 모래 땅이라 수수나 보리, 메밀을 심거나 양화나루에서 짐을 나르며 살았다,
매년 10월 선유봉 중턱 당나무(느티나무)아래에 모여 홍수가 나지않게 해달라고 당제를 올렸다.
하지만 당제는 소용이 없었고 마을 사람들은 홍수가 나면서 다른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선유봉에는 옛부터 인가(人家)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주로 고기잡이와 밭농사
그리고 안성 유기그릇 등을 만들어 팔면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선유도공원 곳곳에는 영등포수원지 당시 서울시민들에게 수도물을 공급할 때 사용하던 정수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2002년 월드컵 개최전인 4월에 선유도공원이 문을 열었다.
선유도공원관리사무실 남쪽 한곁에 선유봉의 역사를 말해주는 비석이 서 있다. 비석 윗 부문은 달고 달아서 읽을 수 없었다.
간간히 눈을 크게 뜨고 읽어보면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 오면서 서강에서 노래와 시 그리고 그림을 즐겼던 경승지임을
어렵지 알 수 있었다. 달아서 읽을 수 없는 문장을 다시 손질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으로 옮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선유도는 막힘없이 바라보는 한강이 시원하고 고개를 돌리면 월드컵경기장에서부터 북한산 남산 여의도까지 한번에 볼 수 있는 것으로 봐서 매우 좋은 위치임에는 틀림없다. 선유도 공원에는 선유정 선유나루 원형소극 한강역사관 시간의정원 만남의 숲
열린마당 등 여러 가지 테마 공원 등 다양한 시설들이있으며 옛 정수처리장의 기둥들로 이루어진 멋진 정원과 이름모를 풀들사이에 튀어나와 있는 옛 벽의 흔적, 원형 구조물 등 자연과 인공이 평화롭게 어우러진 매력적인 공원으로 탈바꿈 하였다.
또한 한강시민공원 양화지구와 선유도 공원을 잇는 선유교 역시 공원과 조화를 이루는 멋진시설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선유도는 그 옛날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는 옛 명성에 버금가는 한강 속 풍유의 섬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세월은 제법 많이 흘렀다. 흐른 세월만큼 선유봉도 놀라울만큼 변하고 또 변하였다.
자연을 사랑하고 또 그 자연을 즐겼던 옛 선조들이 신선처럼 선유봉을 찾아 노래하였던 시와 그림은 변함이 없다.
그 시인묵객들은 선유봉이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매혹적인 경관이었음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이들 시인묵객들은 1>배를 타고 선유(船遊)하면서 선유봉의 경관을 관망하거나 2>직접 선유봉에 올라 주변의 경관을
조망하고 3>강변에서 선유봉을 바라보며 경관을 조망하는 등의 방법을 택하였다고 한다.
서강과 잘 어울리는 선유봉,
자연과 벗 삼아온 시인묵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선유봉,
이제는 개발에 밀려 그 이름도 선유도 섬으로 바뀌었다.
그 자리에 먹고 살기위해 건설하였던 정수장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정수장비와 시설을 자연 그 숲에 배치하여 세계적인 생태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이제 과거의 정수장 건축구조물을 재활용하여 국내 최초로 조성된 환경재생 생태공원이자 '물(水)의 공원'으로 바뀌어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선유도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