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303 문향 <선도협회장님의 깜딱출현>

[물고기]

오랜만에 문향에 실린 성욱이 형의 글을 보니까 반갑네요.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에...
우리는 글쓰려고 모인 사람들이니까, 말로 못푸는건 글로
풀어야 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글로 만나서 더 반가운가
봅니다.
이렇게 고학번 선배들도 글을 많이 써야
저학번 애들도 선배들을 많이 이해 할텐데 말이죠...
암튼 문향에 글을 실은 형의 힘든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참 잘 읽었습니다.



--------------------- [원본 메세지] ---------------------
<와산교를 건너며>

-28기 백 성 욱-

날이 많이 쌀쌀해졌다. 문을 나설 때 코끝을 쨍하게 하는 냉기도 냉기지만, '딱, 딱'하고 들려오는 스팀 들어오는 소리, 옅은 석유냄새가 반가워졌다는 게 더 확실한 증거 아닐까? 날이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맥주보다는 소주가 생각나는 것이 술꾼들의 생리일테고, 주량으론 술꾼 축에도 끼지 못하지만, 그래도 고즈넉한 소줏집 분위기만은 누구보다 좋아하는 나에게도, 늦가을은 귀가시간이 늦어지는 계절임에 분명하다. 이런 쌀쌀한 가을 저녁,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늘상 보는 사람들과 마시는 것도 좋지만, 오랜만에 만나 약간은 서먹해지기까지 한 친구와 잔을 부딪쳐가며, 얼굴이 벌개져가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다 박장대소하는 즐거움, 그것이 진짜 소주가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때였다. 학기초 회장선거에서 녀석이 회장이 되고, 내가 부회장이 된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녀석은 이미 1학년때부터 전교에서 유명한 '짱'이었고, 나는 학교-집밖에 모르는 책상물림이었다.(솔직히 이 말은 자신할 수 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학교와 집, 도서관밖에 몰랐다. 그러나 이건 자랑이 아니라 수치임에 분명하다.) 말이 부회장이지, 사실 우리나라에 넘버2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항상 뒷자리에는 무서운 축구부들과, 쌍무덤파 아이들(이런 토속적인 명칭이 아직도 살아있는 우리동네가 난 정겹다)이 버티고 있어서, 자습시간이나 회의시간에 나는 제대로 말도 못 꺼낼 처지였다.
그러나 녀석이 언성을 높이면, 그때는 반 분위기가 달라졌다. 살벌한 놈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집중하곤 했었다. 처음엔 녀석이 주먹으로만 아이들을 장악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차차 1학기가 지나면서, 녀석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져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첫 시험이었다. 2학년때까지 늘상 반에서 1, 2등을 해 오던 터라, 나는 최소한 2등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녀석이 1등이었고 나는 2,3등도 아닌 4등이었다. 솔직히 그때까지 '공부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졸라 재수없는 놈'이 나였기 때문에, 그때 느낀 실망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싸움만 잘 하는 줄 알았던 녀석에게 공부마저 졌다는 쇼크도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교무실 앞을 지나가다가 복도앞에서 담임과 얘기하던 녀석의 말을 듣게 되었다. "반 애들이 회장이랍시고 뽑아 줬는데, 딴반 회장보다 못보면, 우리반 애들이 얼마나 쪽팔리겠어요? 진짜 열심히 했다니까요." 담임은 한번에 전교석차가 100등이상 오른 녀석을 의심했고, 그래서 교무실로 부른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난 녀석이 다르게 보였고, 이런저런 일들을 같이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회장 임기가 끝날 때쯤 녀석의 석차는 다시 전교 100등 이상으로 밀렸다.) 항상 유쾌하고 활기찬 녀석 덕분인지, 학교에서 유일하게 진보적인 성향의 담임 때문인지, 우리반은 그 흔한 정학이나 자퇴, 퇴학, 구속이나 사망(부탄가스 불고 담배피다 폭발, 본드마시고 오토바이 타다 교통사고 등등) 한명 없이 모두 무사히 졸업을 했다.
이후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로 갔는데, 같은반을 해본적은 없었지만, 늘상 친하게 지냈다. 고등학교에서도 역시 녀석은 '짱'으로 통했지만, 녀석의 위대한 점은 한번도 떨거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위세를 부린 적이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녀석 주위엔 늘상 친구가 많았지만, 싸울때는 혼자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는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해줘도 늘상 익살스럽게 하는 편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어제 와산교 다리를 건너오는데, 어떤 X만한 새끼들이 잡잖아? 한 일고여덟명 되더라구. 그래서 도망갈려고 했지. 근데 가방이 너무 무거운 거야. 그래서 가방을 놓고 도망가려니까 가방이 너무 아까운 거야. 그래서 한마리만 때릴려고 했지. 근데 한마리가 맞는데 이 씹새끼들이 모두 가만히 있더라구. 그래서 또 한마리 때렸지. 근데도 가만 있더라구. 그래서 나머지 다 때렸지. 그런데두 가만히 있길래 졸라게 밟았지. 그래두 가만히 있길래 한 마리씩 잡아서 아스팔트 바닥에 갈았지" 이런 식이었다.
한번은 독서실을 다니면서 내가 워크맨을 도둑맞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범인으로 의심되는 녀석이 근처의 공고생이었고, 그때에는 인문계 고등학생이 공고생을 건드리는 일은 자살행위였기 때문에 나는 속만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녀석이 독서실에 나타났다. 녀석은 공고생을 데리고 조용히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나는 골목 밖에서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흘러나오는 녀석의 낮은 목소리 - "언제 갖고 올래?" 공고생의 말 - "제가 안 훔쳤어요", 다시 녀석의 목소리 "언제 갖고 올래?" "진짜 제가 안 훔쳤다니까요", 다시 "언제 갖고 올래?" "환장하겠네, 내가 안그랬다니까 왜그래요?" "언제 갖고 올래?"... "언제 갖고 올래?"만 14번만이었다. "내알 갖고 올께요." 그렇게 워크맨은 내 손으로 되돌아왔다.
녀석은 운동을 해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태권도나 유도, 하다못해 헬스도 다닌적이 없었다. 귀찮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타고난 싸움꾼의 체형이었다. 중학교때부터 녀석의 팔뚝은 내 허벅지보다 굵었으니까.
기억에 남는 '전설'중에는 이런것도 있었다. 겨울이었는데, 동네 양아치 몇 명과 싸움이 붙었단다. 동네 놀이터였는데(그 놀이터는 동네 양아치들과 날라리, 만취한 각종 비행 소년 소녀들의 집합소였다. 거의 격일제로 액션영화가 생방송되곤 했다.), 녀석이 한놈을 밟고 있는 사이, 딴놈이 눈쓰는 넉가래로 녀석의 뒷통소를 찍고 도망간 것이다. 쓰러졌던 녀석은 태연히 일어나, 피묻은 넉가래를 끌고 양아치들을 쫓기 시작했다. 하얀 눈위에 점점이 피가 흩뿌려지고, 녀석은 개천가까지 쫓아가서 한명을 잡았다. 모퉁이에만 피가 묻었던 넉가래는 이내 피칠갑이 되었고, 녀석은 또 넉가래를 끌고 나섰다. 점점이 뿌려진 피를 따라가면, 또한명의 양아치가 피떡이 되어있고, 또 점점이 핏방울, 따라가면 피칠갑된 양아치.. 이런 식이었다.
고3이 되고, 대학입시가 현실로 다가오자 점점 조바심이 들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늘 태연했다. 공부랑 담 쌓은것도 아니면서, 학교가 끝나면 놀러가기 바빴다. 가끔 마주치면 같이 놀자고 하기도 했지만, 나는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장남'이어서 같이 놀기엔 너무 불안했다. 그때부터였다. 녀석에게 미안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실상 녀석은 외로웠던 것이다. 녀석에게 있어 '친구'와 '의리'란 신성할만큼 값진 것이었고, 어떤 가치고 그것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 녀석의 주의였다. 공부하러 간다고 돌아서는 나를 잡지는 않으면서도, 내심 서운했던 것이다.
'친구'라는 영화를 평해놓은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 그때서야 그걸 깨달았다. 항상 든든했던 친구를 접어두고, 대학입시라는 좁은 문을 향해 달려가면서, 그리고 바쁜 삶에 치여가면서, 항상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그랬다. 나는 많이 미안했었다. 한번쯤은 같이 소주를 마셔도 되었을 텐데, 한번쯤은 같이 당구를 쳐도 되었을 텐데.. 그때 그렇게 녀석을 놓아두고 도서관으로 향해서, 실상 열심히 공부했던 것도 아닌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었던 것 같다. 매정하게 돌아서곤 했으니 말이다.
여하튼, 학교가 끝나면 나는 도서관으로, 녀석은 가스렌지와 삼겹살과 소주를 사들고 학교 뒤 돌산으로 올라가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수능이 끝나고, 본고사가 끝나고, 드디어 자유가 찾아왔지만, 나는 녀석을 찾지 않았다. 이미 더 새롭고 더 흥미로운 생활이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학이란 문턱을 넘어서고, 그렇게 녀석과 멀어져갔다. 가끔 동네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늘상 시험핑계, 동아리 핑계를 대고 술자리를 거절했고(사실 녀석의 주량은 가공할 만하다. 소주는 싱거워서 못먹겠다고, 고량주를 사들고 오곤 했으니까) 군대를 제대한 이후로는 복학생이란 무게에 눌려 더욱 학교를 벗어나지 못했다.
'친구'라는 영화를 보면서 녀석 생각이 많이 났었다. 그래서 다음날 녀석에게 전화를 했고, 녀석은 전화를 끊고 30분도 채 안돼서 오토바이를 끌고 C-SPACE 앞에 와 있었다. 녀석 뒤에 앉아서 성남을 지나 남한상성까지 갔다. 영화처럼 멋진 장면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대학생'이라는 모가지의 기브스를 풀고 녀석과 유치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마냥 즐거웠다. 사실 그리 어려웠던 것도 아닌데, 결국 그렇게 앞 뒤 꽉 막혀서 공부를 한 결과가 이건데, 결국 복학생 아저씨가 되어 학점따먹기나 하면서 9열람실 앞을 지나기는 미니스커트나 흘끔거리면서 동아리방에서 줄담배나 피우면서 그저 그렇게 나이를 먹고 있을 거였는데, 그때 나는 왜그리 불안했던 것일까?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그렇듯, 열여덟살의 나도 참으로 어리석고 옹졸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오늘도 나는 143번 버스에서 내려 와산교를 건넌다. 낯익은 당구장, 술집, 오락실들을 지나 개천을 건넌다. 녀석과 함께 수없이 많이 걸었던 길, 그 다리를 건너 녀석을 만나러 가야겠다. 그리고 허름한 곱창집에서 소줏잔을 부딪쳐야지. 비록 녀석도 이제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매달 월급에 아둥바둥이고, 여자친구 투정에 문자보내기 바쁘지만, 그래도 녀석은 와산교의 전설이다. 그 전설을 만나러 나는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