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大) 사도와 가리비
사도 요한의 친형인 사도 야고보는 성령강림 후 갈릴래아에서 선교했고 서기44년 헤로데 아그리파 1세 때 순교. 열 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된 인물이다.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데 이는 스페인 선교가 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전승에 기원한다. 그는 '천둥의 아들'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의 불같이 급한 성격과 사방에 떨친 설교의 위력 때문이다.
문장은 푸른색 바탕에 순례 여행을 상징하는 3개의 황금색 가리비 조개로 구성돼 있다. 부르심을 받기 전, 어부인 아버지 제베대오와 어머니 살로메 사이에서 태어나 가업인 어업에 종사하였던 것과 그의 순례여행을 암시하는 듯하다. 대 야고보는 성화에서 보통 순례자의 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진다. 스페인 미술에서는 이슬람교도로부터의 해방자로서 말을 타고 깃발을 든 기사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스페인 성당에서는 말을 탄 기사의 성인 동상을 제단 위쪽에 모셔두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순례자의 보호성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고 순례지팡이, 가리비, 표주박을 든 모습 등이 많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즉 '큰 야고보'가 서기 44년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 중 가장 먼저 순교(7월25일:순교축일)를 당한 후, 그 시신이 언제 어떤 경로로 왜 현재의 Santiago de Compostela로 옮겨지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진다. 이를 알기 위해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그 스토리가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며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우선 왜 야고보의 시신이 오늘의 스페인 땅으로 향해지게 되었는지는 쉽게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야고보의 선교여정이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과 포르투갈) 끝까지 이르렀다는 여러 보고에 기인되기 때문이다.(이로 인해 야고보 사도는 이베리아 반도, 특히 스페인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러면 어떤 경로로 이베리아 반도 선교에 헌신한 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을 그 선교지의 땅 끝에다 묻게 되어졌을까?
야고보 사도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7년간 선교한 후 신실한 7명의 제자들을 얻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박해의 여파로 당시 헤로데 아그리파 1세 왕에 의해 야고보는 제자인 요시아스와 함께 붙잡혀 참수형을 당하게 되자,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그의 다른 제자들에 의해 야고보의 시신이 욥바 항구로 옮겨졌고, 바로 그 때 출항 직전의 선편에 실려 서쪽으로 향하다가 7일간의 항해 후 오늘날 파드론이라는 지명 근처인 당시 이름으로 이리아 플라비아에 당도하게 된다. 그곳에 당도하게 된 후, 당시 그 지역(루파리아 소왕국)을 다스리던 루파(암늑대)라는 여왕에게 묘지를 부탁했으나, 오히려 박해를 받아 다시 시신을 야고보 사도가 땅 끝까지 이르러 선교한 원래의 목적지인 이베리아 반도의 땅 끝(피니스떼라/피니테라)을 향해 배로 운구하게 된다. (야고보 사도가 이곳 땅 끝까지 왔을 때 바닷가에서 주워 기념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던 가리비가, 그들이 도착한 땅 끝 마을의 해변가에 가득 깔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이 그 가리비로 야고보의 시신을 덮어 주었는데, 그 가리비 모양이 오늘의 산티아고 순례길의 표지상징이 되었으며, 산티아고 순례자들의 기념목걸이 또는 기념메달이 되었다.)
그 후, 지금의 리브레돈(당시는 리베룸 도눔)에 목숨을 걸고 동행한 야고보의 제자들에 의해 야고보의 시신이 안치되었는데, 얼마 후 개종하게 된 루파 여왕의 배려로 궁궐 근처의 작은 이방신전 터를 넘겨받아 그곳에 야고보 사도의 시신을 안장하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고 난 후, 다른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테오도루스와 아타나시우스 두 제자가 끝까지 남아 야고보의 무덤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까지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이들 두 야고보의 제자들이 죽고 난 후에는 자연히 야고보의 무덤이 잊혀지게 되었다가, 서기 700년대 초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무슬림 회교군들이 쳐들어와 이베리아 반도 남쪽을 점령하게 되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힘을 중심으로 이를 저지하고 방어할 필요가 절실히 요청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위해 선교하다가 순교한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찾고자 할 때, 서기 800년대 초에 펠라요(펠라기우스)라는 은둔 영성가를 통해 환상이 주어진다. (별빛이 내려 비치는 들판 한 가운데서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발견하는 계시환상이었다.)
이 환상을 직접 전해들은 당시의 그 지역 주교였던 테오데미루스의 주도로 3일간의 금식 후 현재의 콤포스텔라 일대를 뒤지기 시작하여 오랜 세월동안 잊혀져 잃어버린 야고보의 무덤을 드디어 찾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한밤중에 벌판에서 별빛에 반사되는 세 개의 흰 대리석 관으로 된 무덤(야고보 사도와 두 제자의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일로 그곳을 캄푸스 스텔라(별빛이 비추는 들판)와 '무덤'이라는 단어인 콤포스티움과 결합되어 콤포스텔라로 불려지게 되었는데, 오늘날의 지명의 상세한 뜻은 "무덤을 비춘 별빛" 마을의 "성 야고보"(Santiago de Compostela)가 된다.(Sant(o)+iago(b)=성 야고보)
이 소식은 당시 그 지역 아스투리아 왕국의 알퐁스2세(791-842)때 알려진 후, 899년에 알퐁스3세 왕에 의해 지금의 전신인 교회를 건립하게 되었고, 그 후 1075년에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카테드랄/커씨드럴/두오모) 건립이 시작되고, 1095년에는 주교좌가 야고보 사도의 시신이 처음 머물렀던 지역인 이리아 플라비아에서 콤포스텔라로 옮겨졌으며, 1188년에 산티아고 대성당의 서쪽문(영광의 문)이 건축가 마테오에 의해 완공되어졌다. 이어 계속 건축된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을 둘러 감싸고 있는 현재의 산티아고 대성당을 비롯하여 이곳에 이르는 800킬로의 순례길 전체(28일간 소요의 도보여정)가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게 되었다.
첫댓글 효성동본당의 주보성인에 대한 자세한 안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도 야고보에 대한 자료 감사합니다. 이 내용은 처음 접하는군요.^^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 길 )800킬로를 28일 동안 걷기 정말 어려워요. 하루 18-9킬로 하루도 안쉬고 걸어야 하는데요? 나의 계산으로는 40일 정도 소요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주보성인 야고보사도와 가리비
이제야 자세히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