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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열하일기
<열하일기>는 꼭 한번이라도 읽어 보아야할 책입니다. 책 중에 고전을 읽는 재미와 그 맛은 남다른데가 있는데,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열하일기>를 빼 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해 보다 더웠던 여름 내내 두 권으로 된 박지원의 열하일기 읽기에 빠져 지냈다. 이제 박지원의 연행 루트 따라 열하를 찾아가야 할 일이 남았다. 책을 읽으며 박지원을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라 이르는 말에 대해 무릎을 치며 공감 하였다. 박학다식함에 감탄하고, 문장을 이끌고 가는 힘찬 필력에 놀라고, 여행하는 동안 가는 곳마다, 보이는 것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박지원의 왕성한 호기심에 감탄하고 또 감탄 하였다.
열하일기는 1780년(정조4년)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을 하례하는 ‘진하사’ 겸 ‘사은사’로 사행단을 구성하여 청나라에 가는, 삼종형 정사 박명원(금성위)의 군관자제 자격으로 따라 갔던 일을 쓴 것이다. 한양에서 5월 25일에 출발하여 연경과 열하를 걸쳐 다시 한양으로 들어오는 10월 27일까지의 5개월에 걸친 대장정 중, 의주에서 요양, 심양, 산해관, 북경, 열하, 다시 북경을 거치는 과정을 편년체형식으로 기록하고 그때그때의 견문과 여행 중에 만난 지식인들과의 필담을 별도로 기록한 방대한 작품이다.
박지원의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1737년 서울 서소문 밖 야동, 노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에서 벗어나 이덕무, 홍대용, 이서구, 백동수 등과 어울려 지냈다. 1780년에 삼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지은 책이 바로 [열하일기]이다.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자, 문체반정의 핵심에 자리하게 된 [열하일기]는 연암을 불후의 문장가로 만들어 준책이다. 69세에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말만 유언으로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열하일기는 연암이 집필했던 내용이 다소 누락되고, 삭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조 시대에는 열하일기는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었다. 사대부와 조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문체 또한 정통 성리학을 표방하던 당시의 식자들에게 이단이나 마찬가지의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연암 생전에는 물론이고 손자가 영의정이 된 후에도 출판이 금지되었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보아도 충격을 주는 작품인데, 그 당시의 충격은 대단 하였을 것이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으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내용을 보면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음악, 종교, 과학 등의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고 있는 최고의 작품이다.
원론(사행일자별 기록)
도강록 : (압록강에서 심양까지 6월 24일 - 7월 9일)
구요동기 / 요동백탑기 / 관제묘기 / 광우사기
성경잡지 : (요양에서 광녕까지 7월 10일 - 7월 14일)
속재필담 / 상루필담 / 고동록 / 성경가람기 / 산천기략)
일신수필 : (광녕에서 산해관까지 7월 15일 - 7월 23일)
북진묘기 / 거제 / 점사 / 교량 / 강녀묘기 / 장대기 / 산해관기
관내정사 : (산해관에서 북경까지 7월 24일 - 8월 4일)
열상화보 / 이제묘기 / 난하단주기 / 사호석기 / 호질 / 동악묘기
막북행정록 : (북경에서 열하까지 8월 5일 - 8월 9일)
태학유관록 : (열하 태학에서 8월 9일 - 8월 14일)
환연도중록 : (8월 15일 - 8월 20일)
각론(이론 / 견문 / 필담별 묶음)
경개록 : (열하일기 전반에 만난 청나라의 인사의 개인이력)
황교문답 : 반선시말 / 찰십륜포
(티벳불교의 수장인 반선(달라이라마)과의 만남과 그에 대한 기록)
행재잡록 : (연해중의 청나라의 행재소의 공문)
심세편(세상사에 대한 평론으로 북학에 대한 의견 피력)
망양록 : (중국 인사들과의 음악에 대한 기록)
곡정필담(중국학자 윤가전과의 쟁쟁한 토론)
산장잡기 : (열하까지의 견문기로 특히 ‘야출고북고기’와 ‘일야구도하기’가 압권이다)
환희기 : (북경에 체류하면서 본 요술구경)
피서록(열하 피서산장에서 주로 중국과 조선이 시문에 대한 논쟁)
구외이문 : (북경과 열하에서 들은 기이한 이야기)옥갑야화(옥갑에서 나눈 이야기 허생전)
황도기략 : (북경성과 자금성등에 대한 기록)
알성퇴술(공자묘 참배에 대한 기록)
양엽기 : (북경내 있는 사찰에 대한 견문기)동란섭필(수필)
보유금료소초(의학관련 지식에 대한 피력)
방대한 내용을 간추리기 어려워, 공동 번역 작업을 한 -고미숙-의 열하일기 '머리말'을 아래에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참고 하시고 꼭 <열하일기>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천의 고원’을 가로 지르는 유쾌한 유목일지 “열하일기”
1780년, 부도명예도 없이, 울울한 심정으로 40대 중반을 통과하고 있던 연암 박지원에게 중원대륙을 유람할 기회가 찾아왔다.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 황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가게 되면서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연암을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5월에 길을 떠나 10월에 돌아오는, 장장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 되었다. 이 여행의 기록이 바로 [열하일기]이다.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틀어 단 하나의 텍스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 [열하일기]는 흔해 빠진 여행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뜨거운 ‘접속’의 과정이고, 침묵하고 있던 ‘말과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굴’의 현장이며, 예기치 않은 담론들이 범람하는 ‘생성’의 장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열하일기]를 통해 아주 낯설고 새로운 여행의 배치를 만나게 된다.
* 여정
여행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되었다. 애초의 목적지는 연경, 압록강에서 연경까지의 거리는 약 2천 3백여 리, 길이도 길이거니와, 가없이 펼쳐지는 중원의 변화무쌍한 기상이변은 실로, 만만치 않았다. 찌는 듯한 무더위, 초 절정 스펙타클을 연출하는 폭우, 모든 걸 삼켜 버릴 듯 성난 물결 등을 무시로 겪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 요동으로 요동벌판을 지나 성경(지금의 심양)으로, 다시 성경을 거쳐 산해관에 이르는 여정은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모험의 연속이었다. 특히 연암은 비대한 몸집에 더위를 견디지 못하는 체질이라, 그 괴로움은 몇 배 더 하였다. 중국인 뱃사공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너는가 하면, 강 한가운데 있는 모래톱에 갇히기도 하고, 심하게는 하루에 일고여덟 번씩 강을 건너며 생사를 넘나드는 아찔한 수난들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고 쉴 수도 없었다. 만수절에 맞춰 연경에 도달하기엔 날짜가 빠듯했기 때문이다. 쉴 참을 건너뛰어 가며 쉴 새 없이 달리니, 말들은 지쳐 쓰러지고, 일행은 모두 더위를 먹어 토하고 싸고 하면서 마침내 연경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뿔사!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열하에 있는 피서산장에 가 있었던 것. 연경에 도착하여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이 벌어진다. 깊은 밤 발자국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오더니, 열하로 떠나라는 전갈이 당도 하였다. 황제가 조선 사신단 일행을 당장 열하로 불러들이라고 닦달을 한 것이다. 통관을 비롯한 사행단원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고 난리다. 목숨을 걸고 겨우 까지 왔는데, 다시 저 아득한 열하까지 가야 하다니, 맙소사 ! 그야말로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
연경에서 열하까지는 다시 700리, 길은 멀고 일정은 빠듯한지라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연암은 비공식 수행원이라 가지 않아도 무방한 처지, 하여 잠시 머뭇거린다. 조선인으로선 아무도 밟아 보지 못한 저 아득한 요해의 땅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평생의 친구 홍대용이 그랬듯이 연경에 남아 이국의 선비들과 우정을 나눌 것인가. 하지만 조선인으로선 처음 맞게 된 이 절호의 탄스를 놓치지 말라는 삼종형의 설득에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 지점은 실로 연암의 생애, 아니 18세게 지성사에 있어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연암이 열하라는 아주 특이한 공간과 만나지 않았다면, 이 여행기는 숱한 ‘연행록’ 시리즈 중의 한가 되고 말았을 터이므로.
열하로 가는가는 길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험준한 지세에 폭우로 인해 강물은 끊임없이 넘치고, 거기다 황제가 군기대신들을 급파해 빨리 오라는 재촉을 해대는 통에, 일행은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무박나흘’로 달려가야 했다. 그 와중에 연암의 견마잡이 창대가 강을 건너다 말굽에 밟히는 사고가 발생한다. 하는 수 없이 연암은 창대를 뒤에 남겨 두고 스스로 고삐를 잡는다. 칠흑 같이 어두운 야삼경, 손에 등불 하나만을 든 채, 한 줄기 별빛을 바라보며 동북부의 요새인 ‘고북구’를 통과하는 장면은 [열하일기]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이다. 그때의 경험을 글로 옮긴 것이 바로 ‘오천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라 일컬어지는 <야출고북기夜出古北口記>이다
굶주림과 ‘잠 고문’ 속에서 연암 일행은 마침내 열하에 도착했다. 열하는 당시 북방의 오랑캐들을 제어할 수 있는 ‘천하의 두뇌’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황제의 잦은 열하 행은 애초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목구멍을 틀어막자는 것’. 그러다 해마다 열하의 성지와 궁전이 날로 늘어 그 화려하고 웅장함이 연경보다 더하게 되었다. 열하는 과연 열광의 도가니였다. 연암은 이곳에서 온갖 특이한 인간 군상, 몽고, 위구르, 티베트 등 중국 변방의 이민족들, 코끼리와 낙타 등 각종 기이한 동물들과 마주친다. 어디 그뿐인가. 만수절 축하 공연으로 펼쳐진 불꽃놀이와 각종 연희들은 얼마나 화려했으며, 또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환희(요술)의 퍼레이드는 얼마나 신기했던지. 연암은 이 이질성의 도가니를 종횡무진 누빈다.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그토록 열망했던 중국 선비들과의 ‘고담준론’도 여기서 이루어진다.
열하에서 겪은 가장 큰 사건은 뭐니 뭐니 해도 티베트 불교와의 마주침이다. 당시 건륭황제는 티베트 법왕, 판첸라마를 스승으로 떠받들며 황금전각을 지어 영접하고 있었다. 황제는 조선 사신단에게 큰 선심을 쓴답시고 판첸라마를 친견하여 예를 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황제로서야 은혜를 베푼 것이지만, 사신단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떠받들고 있던 조선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티베트 불교는 이단 중의 이단에 속한다. 이단의 법왕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그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허나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 울며 겨자 먹기로 접견을 대충 마치긴 했으나, 사신단의 ‘꼬장’은 황제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사신단은 6일 만에 다시 쫓기다시피 연경으로 되돌아온다. 쓸쓸한 귀환. [열하일기]의 긴 여정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