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생활에 있어서 또 하나의 다행스러움은 풍경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문명의 발달로 우리의 일상이 날로 편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대기오염과 소음공해, 지나친 기호품의 범람, 그리고 업무의 과다 등등... 이러한 것에 잠시 비켜 나 대자연을 생각하고 그 실상과 변화하는 모습을 화폭을 통해서 생각케하는 서양화가 이승환.
그의 작업의 궤적들과 체험들을 다시금 일깨워 우리가 함께 공감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글. 심병석 편집인 (아트앤아트2005년 2월호 커버스토리)

일관된 자연사랑법
서양화가 이승환은 일관되게 풍경을 그려온 화가다. 간간이 누드와 정물도 그리지만 그를 유독 매료시키는 것은 ‘풍경’이다. 북한산을 비롯해, 송추, 일영 등 한국의 맛이 담긴 자연은 이미 그의 작품의 본향이자 변하지 않는 테마로 자리 잡았다.
학창시절부터 도심 속에 숨겨진 정원, 비원을 찾아 사생하던 감성이 그 동안 깊어진 연륜에 필연적으로 따를법한 퇴색감 없이 아직도 순수하게 묻어난다. 당시 손옹성, 이종무, 변시지, 박득순, 박광진 등 한국의 실경을 아름다운 필치로 담아내었던 <비원파>작가들을 통해 그가 배운 것은 풍경화가들 만의 지독한 자연사랑법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증하는 화가의 눈이었고 마음의 열정이었던 것이다. 초봄이면 어김없이 덕수궁의 목단을 그리기 위해 화구를 챙기곤 했던 어린 감성이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인 지금에도 여전히 유보되고 있는 것이다.

해외 여행길을 통해 느낀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
그의 화면은 스냅사진처럼 정지된 고요가 흐르는 것이 특징이다. 사람들은 이 정서를 ‘시정(詩情)’이라고 소개한다. 낮고 부드러운 톤, 절제된 화면구성, 시원하게 펼쳐진 자연풍경이 작가만의 유려한 미감으로 미묘한 정서적 환기를 유도한다. 시(時)적 미감인 것이다.
우리의 소담스런 풍경이 그의 눈에 포착되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함축적이고 단순하며 생략적인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즐겨 사용하는 은은한 파스텔조의 칼라는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생동감 있게 연출하는 장치다. 정련된 시어(詩語)의 이미지로서 그의 화면은 수줍다.
그의 화면이 보다 다채롭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해외 여행길에서다. 파리, 로마,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 벨기에 등의 유럽과 멕시코를 비롯한 북남미, 태국, 월남, 홍콩, 일본, 대만, 네팔 등지의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그는 지구적 스케일의 자연을 몸으로 느꼈다. 그러면서 ‘자연’은 자연이라는 일체감으로 다 같은 것이며 인간의 손이 닿은 인위적 흔적만이 틀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눈에는 다 감정이 들어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눈에 익었던 우리의 자연이 단연 아름답다는 사실도...

갤러리가 겸비된 독특한 작업실
“그동안 방송을 타다보니 조금 유명세 덕을 봤습니다. 십여 년 전에는 TV에서 나오는 아동미술교육프로그램은 거의 출연했거든요.” 원래 집은 당산동에 있지만 공기가 좋고 조용한 일산을 찾아 작업실을 마련했다고 한다. 사실 풍경화가들에게 공기는 중요하게 작용되는 요소이다. 시각에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일산의 경우는 공기가 맑아 서울보다 3~4도정도 기온이 낮다. 더군다나 그가 즐겨 사생하는 북한산을 비롯해 경기도 일원이 여기서 15분 내외의 거리이다. 건물은 지하1층과 지상 3층으로 외관이 몬드리안의 비례에 따라 조성되어 있다. “건물을 완공하고 1층은 세를 놓으려고 하니 맨 고깃집만 들어와서 정서에 맞지 않아 아예 갤러리로 만들어 버렸죠.” 일산지역은 아직 갤러리가 거의 없는 상태라 주민들의 정서에 좋은 역할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구상작가 모임 여명회 회장직 맡아
구상작가 모임인 여명회 회장직을 올해부터 맡은 그는 더욱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지난해 일본 ima회 초대 합동전시회로 꾸며진 여명회 제9회전을 통해 한.일 미술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계기로 그 여세를 몰아 제10회전을 기획하고 있다. 그 동안 초대전과 대작위주의 개인전도 최근까지 진행하였으며 금년 12월에도 서울갤러리에서 기획되어 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욕심은 여전하여 최근에 마련한 ‘스케치 차’를 틈틈이 활용하고 있다.
“풍경화가들이 자극을 받을 때는 새벽광선이 있을 때라든가 이슬이 촉촉이 내린 순간 등 느낌이 있는 풍경이지만 그 순간을 포착하기에는 참 어려운 자연적 난관이 있습니다. 자연의 시샘은 마치 여자와 같아 시감을 담으려고 하면 금세 변해 버리곤 하죠.” 특히 우리나라는 기상의 변화가 심해 실제로 풍경화가들이 사생 할 수 있는 기간은 일년에 고작 5개월 정도라고 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고민한 결과, 차안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스케치 차’를 고안해 낸 것이다. 딱 두 사람밖에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좁지만 추울 때도,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게 불어도 그 자연의 역동적 변화 안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풍경을 찾아 자연에 나가 화우와 나누는 술 한 잔의 매력
“저에게는 역마살이 있어서 기질적으로 풍경작품이 맞습니다. 좋은 풍경을 찾아 자연에 나가고, 그림을 그리고, 맘에 맞는 화우와 술 한 잔 하고... 정말 멋진 생활이라고 봅니다.” 또한 좋은 공기를 맡고 있으면 역시 좋은 그림이 생각나듯이 어둠이 개이기 전에 길을 걷다보면 시각이 변하는 과정이 보이고 거기서 다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단다.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자연’과 ‘그림’과 ‘내’가 하나 되는 과정이고 내 안에서 소화된 그림이 나와야 자연스러운 그림이 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냥 자연을 대상으로 보고 묘사하면 설명밖에 안되지요. 자연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나무뿐만 아니라 돌에도 나이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젊은 돌은 단단하고 옹골찬 반면 나이든 돌은 푸석하고 시간의 때가 묻어있죠.” 무슨 일이든지 30년 이상 집중하면 도가 트는 법이라는 그는 이제 자연과의 대화를 깊숙이 하고 싶은 마음뿐이란다.

늘 새로운 그림을 생각하는 것이 화가
그는 앞으로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낼 것 같다고 한다. 그림만 그리고도 싶지만 몸담고 있는 단체 활동에도 열심히 할 예정이다. 그러면서도 그동안은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작업실에서 마무리하곤 했는데 앞으로는 작품의 현실성을 위해 현장에서 100% 마무리하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스케치 차도 마련됐으니 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비 오는 날 이라던가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등, 남들이 기후 때문에 못했던 자연의 악조건을 오히려 극복하고 그 역동성을 그림으로 나타내보고자 합니다. 작가는 늘 새로운 그림을 생각하고 시도하는 과정 속에 자기 정립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이제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을 지나고 있다. 화가로서 50대에서 60대까지의 연령은 그림을 제일 왕성하게 그릴 수 있는 나이라고 하는 그는 그래서 더욱 바빠지는가 보다. 그것은 세상 살아온 경험과 그림의 역량이 한데 뭉쳐 완성도 있는 그림으로 표출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