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걸으면서 건강을 챙기는 실속파 둘레꾼들이 많아지면서 지자체마다 아름다운 길 내기 문화가 이어졌다. 그중 제주 올레길이 가장 유명하여 간단한 짐만 챙겨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집과 집 사이도 돌담이요, 밭과 밭 사이도 돌담이요, 무덤에도 돌담으로 얹혔으니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길들이 매력으로 사람을 끄는 것이다.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는 삼다도, 세찬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얹어놓은 돌담들이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처럼 정겹게 다가들던 기억.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걷기 좋게 만들어 놓은 길옆의 목책도 색다른 길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커다란 바위를 타고 넘어 디디면서도 수만 년 전에 생성되어 세상에 뒹굴다가 마모되어 둥글어진 돌
들을 디딘다는 뿌듯함에 힘든 줄도 모르고 걷고 또 걸으며 도시에서 묻힌 문명의 때를 한 꺼풀 벗기고 돌아오는 것이다.
길이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감성을 어루만져주는 길이란 자연 친화적이고 토속적이기도 하며 포장된 아스팔트길이 아닌 황토흙길이어야 제 맛일 것이다. 제주의 올레길은 모래사장으로, 소나무 숲으로, 갈대밭으로 자연 그대로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말들이 사는 목장도 지나치며 말똥 냄새도 맡을 수 있어 어릴적 외양간에서 살던 소들의 두엄을 치우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비용이 만만치 않다. 일년에 한번 찾아가는 길이라고 해야 얼마나 가슴에 담아 올 것인가. 자주 찾아가서 올레길을 다 섭렵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경제적으로 부담도 되는 것이다.
지리산에도 둘레길이 생겼다고 '1박2일'이라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서 요란하게 방송을 타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찾아가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온통 쓰레기요, 주차 문제도 심각하니 숲이 인간들로 인해 미쳐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괴롭힘을 당하는 형국이다. 길도 가끔은 쉬고 싶고 울고 싶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안개를 둘러쓰고 꽁꽁 숨어 축축이 젖어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파주에 있는 명산 심학산에도 둘레길이 만들어졌으니 아파트 촌에서 시멘트 상자에 갇힌 듯 살던 사람들이 숨통을 틔우고 싶어 주말에는 둘레길로 몰리기도 한다. 사람들에 치어 걷는 길이 불편해지면 심신의 안정을 얻으러 갔다가 오히려 피곤이 겹쳐 얼굴에 내천 자를 그리며 올 때가 가끔 있다.
'DMZ 평화누리길'이 파주에도 열렸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우연히 사진 공모전에 관심을 가지면서 내가 사는 동리 옆에 평화누리길 파주1코스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파주에 4개 코스의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임진강 옆으로도 갈 수 있고 군인들이 철문을 열어주어야 가는 길도 있다고 한다. 인근 김포, 연천, 고양에도 있다고 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아침 산책길에 만난 축구국가대표 트레이닝장 옆의 푸른 리본을 어느 단체가 놀러 와서 길잡이로 매달아 놓은 것인 줄 알았다. 경기도 걷기길 카페를 방문하니 10월 16일, 벌써 모여서 비무장지대 길을 걸어 보았다는 소식이 올라와 있다. 진작 알았다면
같이 동행이 되어 길을 걸어보았을 것을... 2010년 5월8일 개장했다 다시 천안함 사건으로 닫혔던 길이 가을이 되자 뜨문뜨문 사람들의 행보가 이어진다고 한다. 물론 자전거 길과 같이 경기도 걷기 길이 열렸으니 너무 길지도 않은 길을 천천히 음미하며 걸어볼 일이다. 특히 분단된 조국의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곳을 걸으면 누구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자유분방함도 좋지만 좀더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틔일 것이라 생각이 미친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나서 언덕 하나를 넘어서 성동사거리 공원길로 접어들었다. 프로방스라는 음식점으로 가는 2코스의 시작지점이기도 하고 파주출판단지로 향하는 1코스의 역 시발점이기도 하다. 넓게 만들어 놓은 통일동산 공원길엔 갖가지 조형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벚나무 아래엔 쉬어갈 수 있는 나무 의자가 예쁘게 네모로 놓여져 있다. 울긋불긋 단풍잎을 사람들 대신 얹어놓은 나무의자가 정겹게 다가든다. 한산하여 누구와도 같이 걸으면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길, 파란 리본이 매어진 길을 따라 걷는다. 자동차극장 뒤로, 파주 축구국가대표 트레이닝 장 뒷길로, 길을 건너 새 도로 옆으로 붙은 군인들이 사용하던 홈이 많이 파인 길로 접어드니 노란 산국이 향내를 풍기며 방긋거린다. 보이는 산야엔 단풍이 제법 자태를 뽐내고 산책하던 길 아래로 걸으니 낯설긴 해도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길이다. 자전거 한 대가 쓰윽 내 옆을 지나친다.
철새들은 무리지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추수가 끝난 빈 들판엔 짚을 둘둘 말아놓은 큰 원통형의 짚가리가 보인다. 드문드문 차들이 오가고 하수종말처리장 앞으로 군인들의 초소가 있는 철책을 끼고 송촌교에 다다른다. 마을길로 접어드니 이 길인가 저 길인가 헤매게 되니 파랗고 노란 리본만 보이길 고대한다. 인생길도 이렇게 표식을 놓치면 헤매기도 하려니와 많은 시간이 허비되는 이치이다. 길섶엔 아직도 쓰레기들이 보여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누구라도 길을 걷다가 임시폐기물처리장 같은 걸 보면 다시는 걷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리라.
붉은 깃발이 여기 저기 꽂힌 걸 보니 길을 다시 정비하려
는 모양이다. 자유로와 맞닿은 유휴지가 걷기 길로 산뜻하게 만들어지기를 고대해본다. 송촌교 아래도 떠내려 온 스치로폼들이 보기 흉하게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여기저기 건축물들을 짓다가 막아놓은 가림막도 눈에 거슬리기도 했다. 샛강엔 철새들이 놀이터 삼아 유유자적 헤엄을 치며 놀이를 즐기고 있다. 쓰레기 때문에 어둡던 얼굴이 한참을 내려다보니 나도 새처럼 단순해지며 유유자적해지는 마음이다.
송촌리, 신촌리, 10년 넘게 살면서 가보지 못한 동리를 지나친다. 자연스레 생성된 구불구불한 길을 걷고 걸으며 농촌의 허물어져 가는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도 만난다. 곤궁해 보이는 이웃의 집은 울타리도 없다. 물론 깨끗하게 잘 지어진 집들이 더 많아 다행이다. 굴참나무가 무성한 길도 만나고 사람 하나 앉아있지 않은 버스종점 정류소도 만나고 바람소리만 들리는 길에 내 마음을 얹어 놓고 걷는다. 미로 같은 길을 헤매기도 하고 차들이 다니는 도로에선 비켜서서 기다리다 출판단지까지 다다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반려견들과 아침 일찍 나선 길이 점심때가 훨씬 지나 집으로 돌아온 날도 있고 오후에 낙조만 찍으러 나서기도 하고 일요일 남편과 출판단지에서부터 시작하여 걸어온 날도 있다. 취재를 위해 세 번 걸어본 1코스의 길,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다.
저녁에 송촌교 다리에 기대서서 해가 빨리 지기를 기다렸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 때 황금빛이 갈대들을 물들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철제다리가 비스듬히 그곳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몇몇의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휘익 지나간다. 나는 내려서 바라보아 주기를 고대하지만 그들은 가는 길이 바쁘다. 느리게 느리게 가다보면 좋은 풍경도 만나는 법이지. 인생도 음미하며 가는 사람에게 아름답게 다가드는 것이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곱게도 걸려있다. 이글이글 해가 끓어 넘치더니 드디어 붉은 기운을 토해낸다.
군 초소에도 붉은 노을이 내려앉으니 장관이었다. 자유로변의 나무들도 거인처럼 붉은 기운을 맞고 있다. 노을 속으로 철새들이 끼룩이며 날아간다. 이런 광경을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보랴! 강물로 잠기는 낙조를 바라보니 오두산전망대에도 붉은 기운이 스민다. 오래도록 길 위에서 노을을 즐기다 어둑하여 벼가 다 베어진 농로를 따라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누구든 와서 파주의 걷기 길을 맘껏 즐기길 바란다. 넓은 길은 누구와도 부딪는 일이 없으며 내 지역 길을 사랑하면 그곳에서 문제가 보이고 해결할 능력도 저절로 생기지 않을까?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즐길 수 있는 경기도 걷기 길
을 적극 추천한다. 좋은 사람들끼리, 분단의 아픔도 같이 느끼며 낙조도 오래도록 바라보며 철새들의 자유분방함도 환호로 대답하며 번잡하지 않은 길, 그 길 위에서 평화를 얻어가길 바란다. 역설적이게도 긴장감이 도는 곳에는 잔잔한 평화가 깃들어 있다. 살랑거리는 바람마저 평화로움이다. 한적한 길도 가끔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촉촉이 입 맞추고 싶은 날이 있을 것이다.
파주1코스는 합정역에서 출판단지에 오는 200번이나 2200번 버스를 타고 씨너스 이채에서 내려 걷기에 좋다. 또는 금촌에서 100-87이나 073번 마을버스를 타고 와서 걷고, 코스가 끝나는 곳인 성동사거리에서 다시 버스로 서울 2200번이나 일산 200번으로 돌아갈 수 있기도 하다. 900번을 타고 금촌역으로 나갈 수도 있다. 참고로 평화누리 길에선 제1회 사진공모전도 준비하고 있다. 여행길에 아름다운 사진 한 장이 어쩜 당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평화누리길 파주1코스》
◆ 파주1코스 소개 l 이국적 정취가 느껴지는 출판도시를 통과해 인공습지를 지나면 곧바로 농촌마을로 이어지고, 문발리, 신촌리, 송촌리를 지나면서 좌측으로 한강하구와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눈에 들어와 탁트인 오솔길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출판도시에서 통일동산까지 약 12.4km 3시간 10분이 소요된다.
◆ 구간 l 파주출판도시 이채사거리→문발IC(2.0km,30분)→송촌리다리(5.0km,75분)→파주NFC(4.4km,65분)→통일동산(1.0km,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