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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 1일, 챈슬러슨빌에서의 양군 대치상황. 검은색이 북군, 점선이 남군
진흙행군에서 돌아온 번사이드는 굴욕감 속에서 자신의 부하장군인 프랭클린, 후커 그 외 6명의 장군에 대한 해임 건의서를 워싱턴으로 보냈다. 번사이드의 능력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부하장군들을 이끌수 없다는 것이었다. 번사이드는 이들을 해임하든지 자신을 해임하라고 링컨에게 건의했다.
링컨은 번사이드를 해임하는 것을 택했다. 1863년 1월 26일, 번사이드는 해임되었으며 후커에게 사령관직을 인계하였다. 대신 링컨은 프랭클린도 해임하였는 데,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보여준 무성의와 태만이 이유였다.
번사이드의 후임인 후커는 ‘파이팅 후커’라고 불리는 투지넘치는 장군으로 알려졌다. 7일 전투 이래 처음에는 사단을, 안티탐 전투부터 군단을 지휘하였다. 안티탐 전투 시 잭슨 군단을 공격한 최초의 북군 군단이었으며,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롱스트리트의 방어진지를 공격하였다. 그는 스스로 포토맥군 사령관직에 걸맞는 장군이라 생각했으며, 야심만만한 장군이었다.
파이팅 조 후커
먼저 후커는 프레데릭스버그의 참혹한 패배로 인해 사기가 저하된 포토맥군을 재정비하였다. 부대의 행정과 지원보급, 의료체계를 개선하여 환자의 발생을 낮추고 탈주병을 감소시켰으며 보급도 향상시켰다.
잠깐 사이에 북군은 다시 잘정비된 정예군이 되었다. 과거 맥클레란이 그랬던 것처럼, 후커는 뛰어난 행정가였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될 무렵, 포토맥군은 12만의 잘먹은 군대와 400문이 넘는 대포를 가진 대군이 되었다. 기병대는 스톤맨 준장 지휘하의 11500기였으며, 스톤맨은 스튜어트를 대적할 북군 기병장군으로 기대를 받았다.
4월 초 후커는 공들여 정비한 포토맥군으로 사열식을 하였다. 링컨도 참관한 이 사열식은 수천명이 동원된 일대장관이었다. 북군 병사들은 스스로 군의 위용에 넋을 잃었다. “이 거대한 대군을 감히 남군이 상대할 수 있겠는가?”
이 무렵 남군은 형편없이 상황이 나빴다. 연달아 북군을 격파하였지만 점점 보급이 악화되었다. 2차불런전투 후에도 식량이 없어서 메릴랜드로 진격을 했던 남군은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롱스트리트와 2개 사단(피켓, 후드 사단)을 노스캐롤라이나로 보내야 했다. 남은 사단은 6개 사단 6만 1천명이었고 포대는 220문에 불과했다. 스튜어트가 지휘하는 기병대는 2500기로 북군의 4분의 1이었다.
마침내 1863년 4월 27일, 후커는 북버지니아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지난 전투의 처참한 기억 때문에, 후커는 리의 진지를 정면에서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에 5, 11, 12군단과 스톤맨의 기병대가 멀리 서쪽으로 행군하여 라파핸노크강을 도하한 뒤, 프레데릭스버그에서 1군단과 6군단이 도강하여 양쪽에서 리의 군대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 작전의 관건은 적군이 눈치채기 전에 신속하게 강 상류로 이동하여 3개 군단이 도하하는 것이었다. 3개 군단과 병행하여 2군단과 3군단이 보다 가까운 상류에서 도하하여 앞서간 군대와 합류하기로 하였다.
4월 29일, 기병대와 3개 군단은 켈리 여울목에서 라파핸노크강을 도하하였다. 오전 3시, 스튜어트는 북군의 이동을 알게 된다. 안개 속에 가려졌기 때문에 정확한 병력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포로들을 잡고 보니 군단 표시가 3개나 있었다. 한 북군 포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거 밖에 없어. 빨리 도망가. 안그러면 너넨 확실히 잡힌다.”
스튜어트는 그 북군포로가 무엇을 말하는 지를 바로 간파한다. 주변의 모든 도하점에서 북군 보병이 쏟아지고 있었다. 상황은 심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강서쪽을 경계하던 기병대와 남군 본대와 분리될 상황이었다.
스튜어트는 일부 병력을 서쪽의 보급철도를 사수하도록 하고 나머지 주력부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신속히 이동하였다. 가면서 중간중간 도하한 북군에 의해 기습을 받았다. 스튜어트는 여러번 아슬아슬한 순간을 거친 뒤에 남군 본대와 합류하게 된다.
후커는 자신의 계획대로 성공적으로 강을 도하하였다. 5,11,12군단과 기병대가 도하를 성공했고 2군단이 곧 U.S 여울목에서 도하하여 이들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3군단도 2군단을 따라 올 참이었다. 이미 도하한 병력만 5만이었으며, 3만이 곧 추가로 건너올 참이었다. 프레데릭스버그에 남아있는 세지윅 지휘하의 병력도 4만이나 되었다. 북군 기병대 전체가 남군의 보급철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후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4월 30일 전군에 다음과 같이 공언했다.“이제 남군은 불명예스럽게 도주하거나 자신들의 진지에서 나와 우리가 선택한 지형에서 싸우게 되었다.” 어느 쪽이 되든 그동안 입은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을 대승리였다. 북군은 다가올 전승을 기대하며 부푼마음을 안고 행군하였다.
하지만 후커는 리라는 장군을 완전히 오산하고 있었다.
스튜어트의 보고를 전해 받은 리장군은 강을 도하한 북군의 목적지가 첸슬러슨빌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북군이 도하한 3군데의 여울목 중 2군데가 연결되는 지점이 첸슬러슨빌이기 때문이다. 전방에 있는 세지윅의 4만은 양동작전이었다.
상황파악을 끝낸 리장군은 자신의 군대를 둘로 나눴다. 잭슨군단에서 얼리사단을 차출하여 프레데릭스버그 뒤편의 고지를 사수하게 한 뒤 나머지 전군을 이끌고 후커를 상대하러 간 것이었다. 이는 후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좌우에 북군의 대군이 나타난 상황에서 리는 정면에서 대적하기로 한 것이다.
롱스트리트와 2개 정예사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잭슨과 리장군은 첸슬러슨빌로 향했다. 얼리에게 남겨놓은 병력은 1만이었으며, 나머지 5만으로 북군 8만을 상대하러 갔다. 롱스트리트의 남겨진 사단 맥크로우와 앤더슨 사단이 선두에서 전진하여 챈슬러슨빌의 적절한 방어선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이 때가 5월 1일이었다.
5월 1일, 북군의 선두부대는 남군의 방어선과 부딪치게 된다. 이 때가 오전 11시 20분으로, 북군과 남군이 서로 상대방을 향해 행군하다가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들이 만난 지점은 타베나클 교회와 첸슬러슨빌 사이의 도로 상이었으며, 잭슨과 리는 신속하게 전투대형을 취하고 포병지휘관 알렉산더는 포대를 배치하였다.
후커는 그토록 큰 소리를 쳤지만 막상 남군이 도전해 오자 위축되었다. 안티탐 전투에서 잭슨의 군단을 공격했던 처참한 기억 때문인듯, 후커는 전진했던 부대들을 후퇴시켜 숲속에 방어진지를 폈다. 당시 일부 북군은 공격하기에 적절한 능선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커의 지시에 항의하였다. 하지만 후커는 단호하게 부대를 철수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 시점에서 남군의 측면을 공격하기 위한 기동은 방어진지에서의 농성으로 변했다.
후커는 첸슬러슨빌을 중심으로 좌익에는 미드의 5군단, 중앙에는 슬로컴의 12군단, 우익에는 하워드의 11군단을 배치하였다. 남쪽과 동쪽을 바라본 진지였기 때문에, 이 방향에서의 공격에는 안전했다.
그날 저녁, 리장군은 적을 공격할 방향을 찾고 있었다. 정찰병에 따르면 적의 좌익은 강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회할 공간이 없었다. 공병장교의 보고에 따르면 적의 중앙은 돌파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렇다면 적의 서쪽은? 공격이 가능하다면 서쪽 뿐이었다. 리장군은 스튜어트에게 적의 서쪽을 정찰하도록 하였다. 스튜어트는 이미 5월 1일 아침에 적의 우익을 정찰하였다. 오후 4시, 스튜어트는 정찰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앤더슨 사단의 라이트 장군의 요청으로 기병포대를 빌려줬다. 이 전투에서 스튜어트는 자신의 우수한 참모인 프라이스 소령을 잃는다.
스튜어트는 해가 질 무렵에 리장군의 사령부에 도착하였다. 스튜어트는 자신의 정찰한 결과를 보고했다. 북군의 서쪽은 완전히 무방비상태였다. 만약 북군의 전방을 우회하여 서쪽에 부대를 보낼 수 있다면, 북군을 강타할 수가 있었다.
리장군은 스튜어트에게 서쪽으로 우회할 수 있는 도로를 알아보도록 지시하였다. 스튜어트가 다시 정찰하러 갔을 때, 리장군은 잭슨과 함께 내일의 작전을 논의하고 있었다. 리장군은 잭슨에게 적의 우익을 선회하여 배후를 강타하도록 지시하였다.
잭슨은 지도를 보면서 계획을 다듬고 있었다.
“잭슨장군, 병력을 얼마나 가지고 가겠소?”
“제 전 군단을 가져가겠습니다.”
잭슨은 이 우회공격이 단순한 견제작전이 아닌 주력공세가 되길 원했다. 리장군은 망설임없이 물었다.
“그럼 남는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맥크로우와 앤더슨 사단입니다.”
“좋소”
잭슨의 군단 3만 5천이 우회하는 동안 남은 병력 1만 5천으로 후커의 8만을 대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공격의 대담성이 리장군의 투지를 타오르게 했다. 리는 지도를 올려놓은 크래커 상자 위에 한줌의 짚단을 올려놓고 그것을 한 손으로 쓸어버렸다. 잭슨이 해야 할 일을 함축해서 보여준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북군의 우익으로 돌아갈 수 있는 행군로를 찾는 일이었다. 잭슨에게는 지난 계곡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해준 우수한 지도제작자인 호치키스 대위가 있었다. 호치키스 대위는 전쟁 전에 이 지역에 산 적이 있다. 또한 윌포드라는 남군 병사가 행군로 한가운데에 위치한 캐서린 제철소 감독이었다. 잭슨과 동행하는 목사인 레이시 목사도 이 지역 교회에서 일했다.
이들의 조언과 스튜어트의 정찰을 토대로 하여, 잭슨은 다음날의 행군로를 구상하였다. 3만 5천의 잭슨 군단과 120문의 포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북군의 우익을 선회해야 했다. 스튜어트 기병대가 이들을 선도할 것이며 리장군은 남은 부대로 계속 견제작전을 해서 북군의 주의를 끌 것이었다.
1862년 5월 2일 오전 7시, 잭슨은 남북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우회 기동을 시작하였다. 행군로 상에 리장군이 나와 잭슨장군을 배웅하였다.
“잭슨 장군, 저들을 물리칠 수 있겠소?”
“장군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저와 제 군단이 하는 일을 지켜봐 주십시오.”
그리고 두 장군은 헤어졌다. 이것이 리와 잭슨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두 장군의 최후의 만남
첫댓글 "가드엔제너럴"이란 영화에서 너무 멋있게 나온 장면이 기억나네요... 간지 짱 잭슨...
본인은 리빠지만 망할놈의 북군장군들이 전선을 통째로 말아먹는걸 보면...이제 곧 그 유명한 번사이드의 진흙탕행군이 나올듯 ㅡㅡ
jager님의 글을보면서 점점 리사마와 남부군에 빠져드는 1人 근데 이상하게 남군의 명장 잭슨에겐 정이 안간단 말야--;;;;
노예제 옹호하는 남부를...? (퍽!)
여기서 리 장군이 든든한 동지를 잃게 되는 군요;
이번 전투는 고전적인 모루와 망치 전술이지만, 승부사 리처럼 간이 배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실행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군요. ㄷㄷ
진짜 남군이 저렇게 불리한 전력으로 버텨내는건 리와 잭슨의 능력과 배짱덕분인거 같습니다.-_ - 잭슨이 죽고 나서는 저런 도박적인 작전이 안나오는게 좀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