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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극복하는 선 (禪)
옛날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게 될 때면 흔히 집을 떠나 하숙생활을 하였다. 그때 어머니 아버지는 아들 걱정을 하시며 “너는 지금부터 친구를 잘 사귀어야 사람 된다”며 신신 당부하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막상 하숙집을 정하고 나서 친구들이 집들이 한다고 막걸리를 사가지고 와서 못 먹는 술을 권하면서 누가 뭐라 해도 도둑질 강도 등 형사범행(刑事犯行)만 빼놓고는 무엇이든지 해보는 것이 장부(丈夫)의 삶이요, 인생의 경험이라고 솔깃하게 말하는 바람에 그 친구 따라 한참 헤매게 된다.
그러나 친구들은 사실은 술과 담배 속에는 중독성(中毒性)이 있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 어린 학생들의 경우 한번 중독에 걸리면 그 인생은 망치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어찌 술과 담배뿐이랴. 무엇이나 습관성(習慣性)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명장(名將)의 어머니는 신약(身弱)하게 태어난 자기 아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좋아하는 음식만 가까이 놓고 먹는 자기 아들을 보다 못해 그 아들 앞에는 아들이 잘 안 먹으려는 음식만을 갖다놓고 기어이 안 먹으려는 음식을 먹게 하고 난 다음 좋아하는 음식을 먹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항상 아랫목만 좋아하는 아들을 어느 겨울 밤 추운 날에 윗옷을 벗겨 냉수로 샤워를 시키는 등 마침내 아들을 강인하게 키워 장군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이것은 모두 자기 습관을 극복하여 강인한 일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마음으로 마음의 습관을 극복하는 것이 선(禪)에서 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이 습관은 인간(人間)의 제2천성(第二天性)이 되어 심리학적인 조건반사(條件反射)의 현상을 낳게 되며, 몇 생을 지나도 떼기 어려운 업장(業障)을 만들고 있다.
<정전> 무시선에서 밝혔듯이 ‘분별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性品)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좋아 하는 데에도 끌리지 아니하고 싫어한다고 버리지도 아니하며 모든 마음을 장중(掌中)에 놓고 마음의 자유를 얻어 살아가자.
천만 경계를 대하되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에 끌리지 않도록 하자.
한정원 원로교무의 마음 맑히는 禪2
경계에 물들지 않는 마음
이 세상, 우리의 마음에 서로 엇갈리는 가치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산전수전 다 겪고 자란 사람으로 쓴맛 단맛을 다 맛본 사람이라야 앞길을 알고, 잘 헤쳐 나가게 된다는 가치 판단이 있고, 또 하나는 어느 곳에서나 때 묻지 아니한 순수하고 고결한 인간이 되어야한다고 하는 가치 판단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말은 서로 다른 말이면서도 자주 입가에 오르내리며 우리의 가치판단에 편리할 대로 이용해 쓰고 있는 인상이다. 그 예로는 흔히 때 묻은 역사학자로 일제시대에 배우고 익힌 사람들은 때 묻은 판단을 가져서 젊은 사람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어 하루속히 과거의 때 묻은 역사로 청산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세상에 바르고 참신한 새 역사의 지평을 여는 지도자가 나와야 하는 길이 멀게만 느낀다.
이 말은 젊은 사람들이 노련한 사람들에게 잘못된 분야를 비판하는 한 단면으로 비교적 젊은 사람들에게서 자주 오르내리게 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분명히 때 묻은 사람은 이 좋은 세상에 오히려 때를 묻히게 되는 현상을 지적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현실에 너무도 경험부족으로 국제 사회에 노련한 인사들에게 주도권을 뺏기고, 상대하는 데에는 크게 못 미친다는 말들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연 이 두 가지의 엇갈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말이 서로 다른 말인 듯 하나 사실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는 경계와 관계없는 곳에서 공부하고 일할 것이 아니라 천만 경계속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훈련을 닦아야만 한다. 이것이 곧 대종사께서 밝힌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 이 아닌가.
그러나 이 다양한 경계 속에 때 묻지 아니한 물소리를 들어야 하는 점이 바로 그 것이다. 아무 소리도 없는 소리, 아무 형상도 낼 수 없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곧 근본적으로 어느 경계에 사로잡힘이 없이 건전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닐까. 이 현실이 그 무엇과의 관계된 판단이 아니고, 다만 허심탄회하고, 온전 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무시선법에서는 천만경계에 응하되 동하지 아니하는 대법(大法)이라고 밝히면서 이 것이 곧 금강경의 말씀인 ‘응용하여도 주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고 밝힌 말씀을 인거하고 있지 아니했던가. 바로 경계 속에 때 묻지 아니하고 섞이거나 물들지 아니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공부이다.
또한 보조국사는 창평 청원사에서 육조단경의 글, ‘진여자성(眞如自性)기념(起念), 육근(六根)수유(雖有) 견문각지(見聞覺知)나, 불염만경(不染萬境)에 진성(眞性) 상자재(常自在)’ 라는 글을 보고 크게 기쁘고 즐거운 마음 어디에 비길 데 없어 법당을 수십 바퀴나 돌았다고 전한다.
천만 경계 속에 이같이 물들지 아니하는 자성을 발견하고 보면 이는 다시 없는 기쁨으로 영원히 때 묻지 아니하는 소식을 찾게 된 것이니, 곧 본래 물들지 아니하는 자성의 본원에 따라 천만경계에 물들지 아니하고 힘을 내어 살아나가는 선을 공부하자.
한정원 원로교무의 마음 맑히는 禪 3
빈방(空室)의 체험
일년에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할때가 있다. 기내에서 식사와 음료수를 마시며, 하루 반나절을 한 자리에 앉아 상공을 날아야만 한다. 자유스러운 것은 화장실에 가는 것 뿐이지만 화장실 역시 사람들로 장사진일 때가 태반이다.
화장실의 빨간 등이 파란 불로 바뀌고 빈방(空室 Empty Room)이라는 불이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아쉽게 기다려지는지, 장거리 비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빈방이라는 글이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다. 이처럼 빈방이 간절히 요청되는 때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빈방은 비행기 특히 장거리 비행기 안에서는 가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빈방이 항상 붐비는 것이 아님을 안다. 빈방도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다. 한가한 때를 찾아 자유로이 내왕을 하게 되면 줄서는 수고로움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에 먹고 마시는데, 이에 따른 생리적 반응까지야 어찌 조절하겠는가? 달게 받아 들여 그 속에서 자유를 찾는 수밖에…
이 같은 빈집 찾는 길이 어디 이뿐이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일원상 법어에는 ‘일원상을 깨달으면 시방삼계가 모두 우리 집(吾家)의 소유’라고 했다. 그러나 시방세계 넓은 천지에 주인 없는 빈집은 어디 있을까. 오죽하면 암스트롱이 달나라에 까지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자신의 국기인 성조기를 꽂는 것이었을까. 그때 달나라에서까지 영토 전쟁이 시작되는가 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빈방과 빈집을 발견하는 안목에서 보면 사람이 쓸만한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런 것은 도가에서는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상의 물건들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천지를 다 소비하지는 못할 것이요, 우리가 사는 바탕인 허공(虛空)을 다 쓰지는 못할 것이 아닌가.
대종사께서는 “경편철도(輕便鐵道)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철도를 다 내 것 만들어도 도가의 안목에서는 이것 역시 가난을 면하지 못한 옹졸한 살림이라”고 밝힌바 있다.
그렇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무한경쟁의 상대적 세상에 속박되어 산다. 아무리 경쟁을 하며 쓰려고 해도 다 쓰지 못하는 넓고 광활한 큰 세상, 빈방 빈집을 찾은 사람에게만 진정한 자유를 찾는 오가(吾家)의 문(門)이 열린다. 이 사실을 안 사람이라야 참 자유의 경쟁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닐까.
중생들이 다 쓰다 남은 허공 천지라고 할지 모르나 부처님의 안목에서 보면 오히려 여기에서 더 넓고 큰 광활한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 몸이 죽어 다시 태어날 때, 중생들은 애착의 인연을 찾아다니다가 못 찾게 되면 악도에 빠지게 되지만, 이 모든 것을 내 것 삼는 사람이야말로 무한한 천지를 발견하게 된다.
부처가 거래(去來)함에 있어 세상 천지를 주유하다 빈집에 들어가 자기 집 만들 듯이 한가롭게 사는 것이 중생의 무한한 경쟁지를 바꾸어 넓고 한가로우며 광활한 천지를 개발하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생들이 넓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세상의 삶은 부처의 안목에서는 옹졸하고 작은 소꿉살림에 불과할 것이요, 중생들의 무한경쟁은 부처님의 안목에서는 해탈의 긴 숨결,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물거품일 뿐이다.
허공 천지 텅 빈집이 대자유인의 안식처가 되고, 유희장이 되며, 작업장이 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은 빈방과 빈집에 사는 체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고, 바로 이 깨달음에서 크고 멋있는 살림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한정원 원로교무의 마음 맑히는 禪 4
영(零)을 가리키지 않는 저울
나는 목욕탕에 가면 목욕물에 들어가기도 전에, 체중계를 찾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저울을 찾아 주위를 보니 저울은 선반 위에 얹혀 있었다. 그 저울을 내려놓고 몸을 재려고 하였다. 그 때 멀리서 내 거동을 본 아저씨가 가까이 오면서, “그 저울이 고장 났어요.” 라고 말한다. 그 저울은 영(零)을 가리키지 않았다. 영을 가리키지 않으면 그것은 당연히 고장 난 저울인 것이 상식이지만 그때 내 눈에는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물건 무게를 재기 전에는 영(零)이어야 하고, 무게를 재게 되면 측량(測量)된 수자(數字)를 정확하게 표시할 줄 알아야 하고, 물건이 저울대에서 내려오면 다시 영(零)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저울이다. 이것은 저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영으로 된 마음을 갖지 아니하면 사물을 바르게 잴 수 있는 마음저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영을 가진 마음으로 경계(境界)를 지내고 나면 다시 마음의 고향인 영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정상적인 마음이다.
원효대사(元曉大師)는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에 가던 도중 낯선 땅에서 한밤중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있던 물을 마시고 그 당시 갈증(渴症)은 면했지만, 다음 날 아침 그 물이 해골물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구토까지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것은 더럽고 깨끗하다는 관념(觀念)에 사로잡힌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한갓 관념이요 허상(虛像)임을 알고 본연의 마음 상태를 찾고 보니, 이것은 고장난 마음저울, 이른바 영을 가리키지 아니하는 저울로 사물을 재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원효는 한 마음 일어나면 모든 생각이 그 마음 따라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하게 되면 모든 생각이 따라서 멸해 진다.는 부처님 말씀이 떠올라 가려던 당나라를 가지 아니하고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마음의 습관이 이렇게 나를 괴롭혀 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 영(零)의 경지에 돌아간 마음을 확인하는 저울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경전(經典)에서 밝힌 위의 말씀이다.
나는 감정의 습관에 사로잡혀 사물을 바라보고 처리하지는 아니했던가.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선입감정(先入感情) 또는 선입주견(先入主見)으로 사물을 판단(事物判斷)하여 나도 모르게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는 때가 많았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참 마음과 거리가 먼 고장 난 저울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흥부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요, 놀부는 언제나 심술 궂은 사람이며, 콩쥐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요, 팥쥐는 언제나 심술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흑백논리(黑白論理)를 가지고 마음의 분단심리(分斷心理)를 낳는 마음은 아닐까.
나는 미리 좋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구분해놓고 영(零)이 없는 판단으로 살고 있을 때가 많다. 물론 그러한 판단이 비교적 맞는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 근본적으로 영을 갖지 아니한 판단은 모두 틀리거나 죄(罪)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마음이 얼마나 나의 마음을 바르지 못한 판단으로 이끌어 왔던가. 생각할수록 아슬아슬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이 된다. 따라서 이 영(零)을 가리키는 마음을 갖게 되면 반드시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뜯어 고치게 되고, 그 힘은 능히 세상에 자유 자재하는 마음의 힘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것은 곧 내가 사는 한계(限界)의 금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만 살아왔다가 능히 그 테두리를 지워 버리고 새롭게 살려는 마음의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