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평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이다.
윤원형과 정난정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산4-15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에 있다.
파평윤씨 묘역은 경기도 기념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원형은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넷째 아들이자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소윤의 영수였다.
명종의 외숙으로 윤임, 김안로, 이량, 심통원 등과 함께 인척세력의 대표적 인물이며 을사사화를 날조했다. 정난정은 그의 첩이었다.
또한 선조 때의 동인의 영수 김효원이 한때 그의 집에도 출입했다. 김효원은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였다.
뒷날 심의겸이 이를 문제삼아 공론화하면서 사림이 동서 분당하는 계기가 되었던 인물이다.
정적이었던 김안로는 그의 장인 김안수의 사촌 형제였고, 명종의 외삼촌이며 인종과는 10촌간이면서 조카사위가 되는 이중 인척관계였다. 세조비 정희왕후는 고조부 윤사흔의 누나였다.윤원형은 세력을 잡자, 세자(世子: 仁宗)를 폐위하고 문정왕후 소생인 경원대군 환을 세자에 책봉하려다가 이른바 윤임대윤(大尹)과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삭직 당했으나, 8 개월 만에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섭정하게 되자 다시 예조참의에 복직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이 죽고 명종 즉위 직후, 국왕의 장례는 5월장이 원칙이었으나 윤원로, 문정왕후, 이기등과 함께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인종의 장례를 박하게 치르게 했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은 크게 세력을 얻어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일파와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위력과 권세가 높아지자 뇌물이 폭주해, 성안에 집이 열여섯 채요,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것이 다 그의 손에서 나왔다.
또 아내를 내쫓고 기생첩 난정을 정경부인에 봉하니, 권력을 탐하는 조신들은 그 첩의 자녀와 혼인을 하였다.
생살(生殺)의 권한을 잡은 지 20년에 사람이 원한을 품고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1546년(명종1) 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었으나 윤원로가 유배되자 더욱 세력을 굳히고, 1547년 양재역벽서 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양재역 벽서 사건을 계기로 을사사화를 피한 사림이 대다수 끌려와 형문을 당하고
유배, 파면 당했다.
'정미사화' 이 과정에서 사림파의 희생을 막으려는 이언적 등과 갈등하였고, 이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언적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국구이자 정승으로 세도를 부리다가,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정난정에 의해 독살된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가 윤원형과
정난정을 관아에 고발하였으며, 이후 양사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잃고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을 받은 뒤 강음에 은거하였다.
일설에는 유배된 것이라 하며 사약을 들고 오는 금부도사를 보고 첩 정난정과 함께 자살하였다고도 한다.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의 묘이다.
부총관 정윤겸의 딸로 어머니가 관비인 탓에 서출로 태어났다. 미천한 신분에서 그녀가 택한 것은 기생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기생이었던 것은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며 정난정은 얼녀로 태어났다. 서얼이 중인 계층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기생이 될 일은 없었다. 중종의 셋째 부인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첩실이 되는데 성공한다. 이후 그녀는 윤원형의 권세에 비례한 인생을 살게된다.
인종이 갑자기 죽고 11살의 명종이 등극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은 인종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데 성공하여(을사사화) 천하의 권세는 윤원형의 것으로 돌아왔다.
정난정도 이에 발맞추어 명종 5년, 윤원형의 정실부인 김씨를 몰아내고 자신이 정실부인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듬해에는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여 완벽하게 후환을 없앴다. 이후 천하를 장악한 윤원형을 장악한 최고 실권자 정난정은
온갖 부정부패의 중심에서 돈에 걸신이라도 들렸는지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었다.
조선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는가 하면,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가지고 싶은 땅이나 집을 뺏기도 했다.
정난정의 끝없는 탐욕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아주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적어놓았을 정도이다.
정난정 역시 온갖 악행과 탐욕으로 성리학보단 불교쪽에 기울어서 문정왕후와 함께 불교진흥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의 후원으로 한때 보우를 중심으로 불교가 살아나는 듯했다.
문정왕후와 정난정의 권세에만 의존하는 이런 추세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윤원형과 정난정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사림들은 윤원형과 정난정을 탄핵했다. 결국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실부인 김씨에 대한 독살사건을 의금부에서 재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금부도사가 와서 잡아가기 전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윤원형도 시름시름 앓다가 5일 만에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