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식의 세계에서 항상 뭔가 설명될 수 없는 추상적인 미정의 개념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 바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이다.
과거의 과거 그리고 그 이전의 또 다른 과거를 규정하고, 이 공간의 둘러싼
공간과 그리고 그 위의 또 다른 공간을 한정 지으려는 시도에서,
현재의 이 공간을 살아가는 하찮은 존재로서의 나는 항상 어리석은 패배자일 뿐이었다.
한편의 영화 속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동감>의 모티브 역시 '시간과 공간의 공존'이라고 볼 수 있다.
1979년과 2000년이라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들이 '아마추어 무선통신'이라는
인간의 간접적인 매체를 통해 양립 되어, '하늘'과 '지태'에게 있어
공통적인 하나의 교감을 형성하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두 시간들은 결코
하나의 공간에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바로 3차원의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제 3자인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가슴을 울리게 한다.
'지태'나 '하늘' 두 사람은 그들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자신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바로
'알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호기심'일 것이다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호기심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전개되지만,
두 사람에게는 분명 차이점이 있다. 즉,'하늘'의 호기심은
미래의 시간 그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현재 자신이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결론에 더 치중되고, 한편
'지태'의 호기심은 우연히 알게 된 과거의 시간과 거기에 존재하는 한 여인
'하늘'에 대한 일종의 애정어린 호감에 더 치중되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냐는 '하늘'의 물음에 '지태'는 잠시 머뭇거리며
'있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의 근원은
두 사람의 현실적 관심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 하나.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의 비현실적인 관계는
결국 두 사람이 겪는 아픔과 눈물의 원인이 된다. 미래에 대한 의문 속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 대한 결말 즉, 운명을 알아버린 '하늘'은 결국
사랑과 우정을 모두 버려야 했다. 다시 말해, 그녀가 알게 된 미래의 꿈은
행복의 절정이 아닌 현실의 꿈과 사랑의 종결을 제시했고,
'하늘'의 그러한 운명적 선택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 '예언자(?)'로서의 '지태'는
안타까운 '하늘'의 선택에 대한 동정과,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가슴아파 한다.
두사람의 호기심은 결론적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그래서, 시인 '롱펠로우'는
"아무리 즐거울 지라도, 미래를 믿지 마라!
죽은 과거로 하여금 그 죽음을 묻게 하라!
활동하라! 산 현재에 활동하라!" 고 말했던가?
하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꿈꾸고 싶어한다.
꿈을 꾼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또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어떤 한가지로 단정 지어질 수 없기 때문에,가능성을 가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또 그만큼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꿈을 꾸는 우리,
굳이 미래와 운명에 대한 한가지 명확한 결론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첫댓글 우리는 멀마나 많은 사람과 같은 감동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공감하고 살아가는 일이 많을 수록 그만큼 상처도 적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