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북정맥 제 2 구간 산행기(옥정현 ⇔ 엽돈재)
1. 산행일자 : 2007년 1월 14일 (일요일)
2. 산 행 지 : 서운산(547.7m) - 경기 안성
3. 참 가 자 :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이정연, 이정자(5명)
4. 일정 및 소요시간 : 총 산행 약 15.4km, 7시간 정도
[1] 구간별 거리
■ 옥정현(320m)--3.5km--470.8봉--3.5km--장고개(410m)--1.3km--배티고개
(350m)--2.3km-- 서운산(547.7m)--4.8km--엽돈재(320m)
[2]소요시간
■ 수원(06:00) ∼ 동수원IC ∼ 경부고속도로 ∼ 안성IC ∼ 안성(07:00/아침식사/07:30) ∼ 옥정현(08:00)
■ 옥정현(302번, 08:00) → 409.9봉(08:24) → 470.8봉 → 송전탑 ① (08:50) →안부 사거리 (09:10) → 전망 좋은 헬기장(09:30)→ 35번,53번철탑②(10:15/10:25) →납골묘원(10:35) → 헬기장(11:06) → 배티고개, 점심(이티재, 11:30) → 서운산(13:05) →헬기장 갈림길(13:10) → 청룡사 갈림길 → 묘, 안부사거리→395.4봉(14:10) → 엽돈재(14:47)
■엽돈재(34번국도) ∼ 옥정현(차량회수) ∼ 안성 ∼ 수원
[3] 탈출로 : 배티고개(이티재, 313번 지방도)
5. 날 씨 : 맑음(최상의 산행 날씨)
6. 산 행 기
[1] 산행전
1월 6일 정기산행 때 학교 행사로 참석을 하지 못했다. 다음 구간(3구간) 시행 전 2구간을 혼자라도 가 보겠다는 생각으로 2구간 때 참석하지 못한 강동규사장, 안상경교감 그리고 박상호 사장에게 연락을 해 보니 함께 가겠다고 한다. 한일타운 아주머니들도 참여를 한다고 한다. 나 홀로 산행을 걱정했는데 여러 명이 참가하게 되 다행이다.
1월 14일 6시 박사장 전화, 아파트 입구에 도착 해 있단다. 급히 배낭을 챙겨 나와 차에 올랐다. 한일 타운에 들려 아주머니 두 분을 태우고 동수원물류센터로 이동, 안교감이 기다리고 있다. 강사장은 안성으로 직접 가겠다고 했으니 혼자 잘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궁금해 전화를 해 보니 감기가 완쾌되지 않아 함께 산행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쉽다. 몸조리 잘해 다음 산행 때는 꼭 참석했으면 좋겠다.
[2] 안성 오가네 황태 해장국집
07 : 00시경 안성 도착.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은 곳이 『오가네 황태 해장국집』분위기가 좀 썰렁하다. 주인장, 이른 아침에 찾은 손님인데도 반기는 기색도 없고 손님도 없다. 썰렁한 식당 분위기만큼이나 무뚝뚝하다. 아무래도 맛있는 아침상 받기는 틀린 것 같다.
우거지 해장국에 김치 한 접시를 받았는데 食慾이 나질 않는다. 굶고 산행을 할 수 없어 억지로 식사를 하고 공기 밥과 김치로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다.
[3] 전망대 헬기장 가는 길
07 : 30여분을 넘겨 안성 시내를 빠져나와 옥정현으로 향했다. 저수지(금광)를 끼고 돌아 08 : 00시에 도간 경계 표지판이 세워진 옥정현에 도착했다.
차를 고개 마루 공터에 주차 시키고 밖에 나오니 싸늘한 찬 기운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차에서 내려 곧바로 신발 끈을 졸라매고 산행 준비를 하고 기념 촬영을 한 후 꼬리표가 붙은 시맨트 포장길로 올라붙었다. (08 : 15분경)
T 자 갈림 길을 지나 첫 산봉을 오르니 억새가 무성한 넓은 공터, 헬기장이 나온다. 응달진 곳에는 지난 번(1월 6일)내린 눈이 그대로 남아 있고 낙엽 쌓인 아래로 땅이 꽁꽁 얼어 있다. 평년보다 높은 기온이라 하지만 겨울은 겨울인 모양이다.
08 : 24분, 삼각점이 있는 409.9봉 도착했다. 잠시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걸음을 재촉하기를 20여분(08 : 50분경), 거대한 송전탑이 앞을 가로막는다. 송전탑을 지나면서부터 비교적 완만한 능선 오르내림 길로 이어진다.
09 : 10분, 안부 4거리에 도착했다. 길은 뚜렷하지 않지만 지도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대명동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현동을 연결시켜주는 고개쯤 되는 것 같다.
대명동(大明洞)은 성대에서 북쪽으로 3km 지점에 있는 마을로 「대명」이라는 뱀이 무리를 지어 군집하던 곳이라고 한다. 안부 사거리를 지나 5분여를 더 가니 길옆에 작은 돌탑을 쌓아 놓았다.
[4] 헬기장에서의 조망
09 : 30분, 완만하게 이어지던 길이 급하게 오름 길로 이어진다. 殘雪과 얼어붙은 오름 길을 오르느라 다리에 힘을 주고 양 지팡이로 버티며 봉(470.8m)에 오르니 시야가 툭 터지며 넓은 헬기장이 반긴다.
이곳 헬기장은 철판을 깔아 조성한 곳으로 평지 같은 땅이면 어느 곳에서라도 설치가 가능하고 필요에 따라 쉽게 철수할 수 있도록 기동성을 고려하여 제작이 되었다. 누군가 참신한 생각을 제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헬기장에 올라 360도 회전을 해 보니 막힘없이 사방이 툭 터져 전망 또한 일품이다. 주변 山色과 遠近의 景觀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첩첩이 이어지는 산봉이며 골짜기의 작은 민가와 멀리 안성 시가지가 보이고 지난 산행 때 올랐던 칠장산, 칠현산도 조망이 된다. 단체로, 혼자서 주변 경관을 배경삼아 기념 촬영을 하며 잠시 휴식을 가졌다.
옷 속으로 파고드는 寒氣를 오래 견디기 힘들어 다시 배낭을 메고 출발이다. 표시기는 진행 방향 우측으로 매달려 있다. 다소 급한 내림 길이다 싶은데 다시 오름길, 내림 길을 반복하며 소나무가 群落을 이룬 능선으로 길은 이어진다.
[5] 납골묘(연안 이씨)
10 : 15분, 사거리 안부(금광면 새터와 백곡면 학동(鶴洞) : 성대에서 북쪽으로 5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에 학이 많이 서식하여 학동이라 함).을 연결시켜 주는 고개?)를 지나 20여분을 더 진행하니 35번, 53번 철탑을 연이어 나타난다(약3분 간격).
거대한 두개의 철탑을 지나 5분여를 더 진행하니 호화스럽게 꾸며진「납골묘」가 나타난다(10 : 35분). 延安 李氏 가족묘다.
중앙에 「숭례당」을 안치하고 바닥은 石板을 깔았다. 그리고 숭례당 앞쪽으로 연안 이씨 묘비와 床石이 배치 되 있고 돌난간과 계단을 만들어 묘를 꾸몄다. 더하여 300여 평의 넓은 공간에 잔디도 심고 정자도 만들어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 공원 같은 묘를 만들었다. 보통 사람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잘 정돈되고 호화롭다. 납골묘 바로 아래가 중앙컨터리 클럽인 것으로 보아 컨터리 클럽 회장의 가족 묘 쯤 되는 모양이다.
납골 묘에서 10여분 휴식을 갖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안부로 내려섰다. 지도에 표시된 것으로 보면 『두멍골』안부가 되는 것 같다. 두멍골은 성대에서 북쪽으로 5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골이 매우 깊어 두멍골이라 命名했다고 한다.<출처 :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지명유래>
[6] 배티(이티)고개 가는 길
안부에서 절개지 나무 계단을 따라 峰(421.8봉)에 오르니(11 : 06분) 넓은 공터가 나온다. 헬기장인 듯한데 억새가 무성하게 자라 헬기장이란 느낌이 와 닫지 않는다.
헬기장에서 100m를 더 진행하다 보니 능선 상에 삼각점이 있다. 삼각점을 지나 약 7분여를 진행하니 진행 방향 좌측으로 포장도로가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며 정맥 길과 보조를 맞추며 이어지고 도로에 내려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포장길을 따라 그물망이 설치되 있다. 아마도 이 포장도로는 중앙CC로 진입을 하는 도로인 것 같다.
안부, 갈림 길, 『장고개』에 도착한 것 같다. 장고개는 상백에서 북쪽으로 3km 지점에 있으며, 옛날 신립장군이 이 고개를 넘어갔다 하여 『장고개』라고 했다 하며, 안성군 금광면으로 장을 보러 다니던 고개라 하여 『장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다시 峰 하나를 올랐다 내려서니 7,80도 절개지 아래로 2차선 포장도로(313번 지방도)가 가파르게 올라다 고개를 기점으로 굽이를 돌며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쪽으로 빠져 내려간다.
[7] 역사가 살아 숨쉬는 배티(이티) 고개
고개 마루에 내려 선 것이 11 : 30분, 오늘 산행 구간(옥정현 ↔ 엽돈재)의 중간지점 『배티고개=梨峙』에 도착을 한 것이다.
고개 마루에는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임을 나타내는 대형 표지판과 『이티재(梨峙), 해발 370m, 』표지판, 그리고 1999. 3월 백곡 번영회에서 세운 『生居鎭川』표지석, 「서운산 정상 (2.1km)」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 등이 세워져 있고 중앙컨트리클럽 진입로와 대형 입간판도 눈에 들어온다.
『배티고개』를 『이티재』라고도 부르는데 이 고개는 배티(배나무골 : 성터에서 동북간 1km 지점에 있는 골로 배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에서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으로 넘어가는 가는 고개가 된다. 「마을(진천군 양백리)어귀에 꿀배나무가 많아서"배나무 고개"로 불리다 한자로 훈독하는 과정에서 이치(이티,梨峙)재가 되었다」고 한다.
『배티고개』를 진천군 백곡면 이티(梨峙)마을 지명유래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하고 있다.
「이티 마을을 배티라고 한다. 배티는 양백리 동북 계곡을 따라 차령산맥을 넘어 안성군 금광면 상중리로 가는 고갯길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무신년(戊申年)에 신천영(申天永) 이 반역의 뜻을 품고 역도(逆徒)를 규합하여 여기에 주둔할 때였다. 과거 북병사(北兵使)를 지냈던 이순곤(李順坤)이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80노령이었지만 의분을 참지 못하여 사방에서 의병을 모아 한바탕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신천영이가 이끌던 반역군은 80농인인 이순곤 公의 의병에게 견디지 못하고,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도주하다 잡히고 말았다. 이 때부터 신천영이 敗한 고개라 하여 『패티(敗峙)』라 하다 『배티』로 변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곳은 천주교 탄압당시 신자들이 이 곳 차령산맥속에 은거하면서 주로 옹기장사로 포교활동을 하며 난을 피하여 오던 중 이 곳 『배티』에서 교도(敎徒) 30여명이 관군에 잡히며 모두 학살을 당하였다. 지금도 무명(無名)의 묘소들이 즐비하다. 천주교회에서는 매년 연례행사로 전국의 교도들이 이 곳까지 순례행군을 하는 대행사가 실시되며 앞으로 성역화(聖域化) 시킬 것을 추진하고 있다. 배티는 이미 옛날이 배티가 아닌 전국의 명소(名所)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배티고개는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천주교 교회사에 길이 남을 聖地가 되는 곳이다.
[8] 진수성찬 버금가는 점심 식사
도로를 가로 질러 옹벽을 타고 올라 백곡 번영회에서 설치한 『生居鎭川』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서운산 정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11 : 40분을 좀 넘긴 시간, 예정된 점심시간이 온 것 같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아침 식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꺼내 놓는다. 준비된 찬이래야 김치 뿐. 그런데 오늘 정맥 산행에 처음 참석한 한일타운 아줌마 대원들, 준비를 단단히 했는지 이것저것 찬을 꺼내 놓는다. 보온병에 따끈하게 담아 온 미역국, 김무침, 알타리 김치 등 알뜰히도 준비를 했다. 덕분에 푸짐한 찬은 아니더라도 珍羞盛饌 버금가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미리 준비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고맙다.
[9] 서운산 정상
가볍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가파르게 서운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이정표 하나가 나타난다(12 : 25분). 「↑ 서운산 정상 1.4km, ← 무명 선교자의 묘, ↓ 배티고개 0.6km」라 표시 되 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무명순교자의 묘』가 있다고 하는데 진행하는 데만 급급하여 둘러보지를 못했다. 천주교의 聖地를 咫尺에 두고 지나치는 아쉬움이 남는다.
5분여를 더 오르니(12 : 30분) 능선이 분기되는 삼거리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서운산 정상 1.2km. 배티고개 0.7km, 배티성지 충정묘, 무명 순교자 6인 묘」라 되 있다. 무명순교자묘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통나무로 간이 의자도 만들어 두었다.
이곳에서는 우측으로 진행, 한바탕 숨을 몰아쉬며 오르니 완만한 길로 이어진다. 12 : 50분, 서운산 정상과 석남사 갈림길에 이정표가 세워진 곳에 도착. 「서운산 정상 0.6km, 배티고개 1.3km, 석남사(우측) 1.5km」
서운상 정상 방향으로 3, 4분 진행하니(12 : 57분)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서운산 정상 0.4km, 석남사 1.3km, 배티고개 1.3km」, 이곳에서 좀더 진행하니 또 하나의 갈림 길 이정표(13 : 00시), 「←배티고개, ↑서운산, 좌성사/청룡사→」라 표시 되 있다. 서운산 정상은 정맥 길에서 우측으로 벗어나 있다.
먼저 도착한 박사장, 정맥 길로 방향을 틀고 있다. 오늘 산행 중 가장 높고 안성시민들이 자주 찾는 산이라고 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가던 길을 돌려 삼각점이 있는『서운산』 정상에 오른 것이 13 : 05분. 이미 여러 사람들이 정상에 올라와 있다.
「서운산 (瑞雲山, 547 m,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충북 진천군 백곡면)은 한남금북정맥이 칠현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져 서해로 향하다가 솟구친 금북정맥의 한 봉우리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안성군과 충북 진천군의 경계에 있다.
나지막한 肉山으로 능선이 부드럽고 산세가 완만한 유순한 산이다. ---<중략>--- 서운산 주변에는 산간저수지들이 여러 개 있어 저수지를 끼고 보는 경치가 또한 아름답다. 그 중 남쪽의 청룡리 청룡저수지와 북쪽의 장죽리 마둔 저수지가 쌍벽을 이룬다.
산정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과 이덕남 장군이 축성한 길이700m의 토성이 남아 있어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산행시간이 길지 않고 길이 험하지 않아 가족 산행지로제격이다. 그러나 교통이 다소 불편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떠나야 한다.」라고 OK mountain에서 소개하고 있다.
산 정상에는 「서운산 정상(赤), 해발 574. 4m(靑)」라고 쓴 표지판이 있고 그 옆으로 「서운산 정상 해발 547.4m(전면), '산불조심 / 산지정화(뒷면)」라 음각한 정상석이 있고「서운산성 안내판」이 있으며 5,6m 거리에 안성 시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바위 하나가 솟아 있다.
그런데 정상석과 안내판을 앞에는 막걸리를 파는 가판대가 설치 되 있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멸치 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있다. 좀 심한 상행위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산정까지 막걸리를 날라다 팔아야 하는 생활의 고달픔이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안내판에는 『서운산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하고 있다.
서운산성(瑞雲山城)은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북산리 서운산(瑞雲山)에 있는 城으로 1985년 6월 28일 경기도기념물 제81호로 지정되었다.
북산리성이라고도 불리는 서운산성은 금북정맥의 주봉인 서운산에서 뻗은 서쪽 능선에 서남 방향으로, 골짜기처럼 비탈진 경사면을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싼 반면식(半面式) 土築山城이다. 동서 양쪽 끝이 높게 축조된 말안장 모양의 북벽은 대부분 자연지세를 이용하였다. 해발 535~460m에 있으며 성벽 둘레는 약 620m, 높이 6~8m이나 현재는 길이 300m, 높이 1m 정도만 남아 있다. 성문은 소실되었으며 남문과 북문 터로 추정되는 입구만 낮은 형태로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洪季男)이 북상하는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의병을 지휘하여 수축(修築)하였다고 전한다. 성 안에는 높이 2m, 너비 1m의 석불이 있고 용굴(龍窟)이라 부르는 작은 동굴이 있다. 남문 터 밑으로는 근래에 세운 사찰인 약천암과 토굴암이 있으며 동남쪽으로 1km 정도 아래쪽에 청룡사(靑龍寺)가 있다.
<출처 : 서운산 정상, 서운산성 안내판 내용>
[10] 엽돈재 가는 길
서운산 정상을 뒤로하고 『좌성사』방향으로 약100여 m를 진행하니「헬기장(13 : 10분)」이 나온다. 헬기장에는 큰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데 우리가 가는 방향인 『엽돈재』표시가 없다. 잠시 주변을 살펴보니 안내도가 있는 좌측으로 정맥 꼬리표가 달려 있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直進 길은 『좌성사』가는 길로 『서운산성』과 연결 된 길인 모양이다.
꼬리표가 달린 길로 빠져 나오니 정맥 표시기들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인가? 헬기장에서 直進해야 할 것을 좌측으로 접어 든 것은 아닌가?
박사장, 지도를 펼쳐 보고 먼저 다녀 온 산악대장의 설명서를 보면서 제대로 가고 있다며 부지런히 앞서 내려간다.
갈림 길 이정표(13 : 20분), 「서운산 정상 1.3km, 청룡사 2.2km」
꼬리표가 보이지 않아 불안한 마음으로 청룡사 길을 버리고 직진하여 앞서가는 박사장을 열심히 따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얼음이 언 저수지가 언뜻언뜻 보이는데 『청룡저수지』라고 한다.
13 : 37분, 급하게 봉우리 하나를 오른다. 오늘 정맥 산행에 처음으로 참가하는 한일타운 아주머니(이정자), 다소 지쳤는지 오름 길을 만나면 앞서 가라고 길을 비켜 준다. 『오서산』 산행 때 비하면 나는 걸음인데 장시간 산행에 무리가 따르는 모양이다. 그래도 쉼 없이 보조를 맞추며 산행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인다. 나이를 극복하고 생활해 보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13 : 45분, 또 하나 작은 봉에 올랐다(13 : 45분). 이정자 아주머니 배가 고파 더 못가겠단다. 잠시 휴식, 안교감, 남겨 두었던 귤을 꺼내 하나씩 돌린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 침을 가득 고이게 만든다.
해가 중천을 넘었지만 그래도 겨울 날씨라 옷 속을 파고드는 찬 기운으로 오래 휴식을 취하기 힘들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14 : 10분, 완만한 능선 길로 이어지고 산 아래쪽에서 요란한 機械音이 들린다. 대단위 토목 공사가 진행 중이다. 도로 공사, 주택지 조성, 아이면 공단 지역을 조성하기 위함인가? 산자락을 자르고 골짜기를 메워 평토 작업을 하고 있다. 행여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정맥 길이 뚝 잘려 나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機械音을 들으며 묘 1기를 지나고 안부에 내려섰다가 7, 8분을 더 진행, 오늘 산행의 마지막 峰으로 생각되는 395.4봉에 오른다. 진행 방향 좌측 나무 사이로 으로 2차선 포장 도로(34번 국도)가 굽이굽이를 틀며 오름 길로 이어지고 있다. 큰 화물차가 도로를 따라 오르는 모습이 무척 힘겹게 여겨진다. 오늘 산행의 목적지『엽돈재(해발323m)』가 멀지 않은 모양이다.
[11] 엽돈재
14 : 47분, 『엽돈재』 도착했다. 고개 마루에는 「천안시∥여기는 / 천안시 입니다(입장면)」라고 쓴 대형 표지판과 「충절의 고장 충남 입니다」라고 陰刻한 道 境界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고개 아래쪽(진천 방향)으로 라이온스클럽에서 세운 『生居鎭川』표지석과 좀더 아래로 충청북도의 캐릭터 「고드미, 바르미」가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과 경기도 안성시에서 넘어오는 길손을 환한 웃음으로 반기고 도로 건너편에는 「충청북도 ∥진천군/백곡면」표지판을 세워 三道(충청 남/북도/경기도)의 경계 지점임을 알려주고 있다.
『엽돈재(해발 323m)』는 『엽둔고개, 엽둔티, 엽전리, 율둔티』라고도 하는데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서 충청북도 진천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도둑이 많아서 엽전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모두 빼앗겼다고 하며 혹자는 이곳에서 엽전을 생산하였기 때문에 『엽돈재』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출처 : 천안시 입장면 도림리>
※ 근간에는 엽둔째 중턱에서 나오는 물이 일급수라고 소문이 나서 서울․경기 방면에서 매일 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함.
[12] 귀향 길
고개 마루라 바람도 심하고 기온도 차다. 엽돈재 도착 전에 안성 택시를 호출해 두었으나 고개에 도착해 10여분을 기다려도 택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연락을 해 보니 옥정현에 가 있단다. 엽돈재에서 옥정현으로 간다는 것을 逆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30여분을 추위에 떨며 기다린 연후에야 택시가 도착했다.
진천을 거쳐 옥정현에서 차를 갈아타고 안성 『할머니 설렁탕』집에 들려 장부장이 두고 온 스틱을 찾아 곧장 수원으로 향했다.
[13] 산행 뒤풀이
17 : 00시를 넘겨 수원 도착, 박사장 가게 건물 아래 층(1층)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 겸 소주 한 순배로 금북정맥 2 구간을 마무리 했다.
산행 중 전화로 격려를 해 준 산악대장, 산행 뒤풀이에 자리를 함께해 준 윤사장님, 모두 관심과 걱정을 해 주어서 너무 고맙다. 그리고 정맥산행에 처음으로 참여 했으면서도 끝까지 완주한 이정자, 이정연 두 아주머니 대원에게도 讚辭를 보내고 싶고 강사장은 고뿔로, 김미환 사장은 사모님이 몸이 불편 해 함께 산행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쉬움으로 남는다. 늘 함께 했던 노부장도 대학원 졸업 논문 작성으로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후일에 따로 시간을 정해 2구간 산행을 하리라 생각된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고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하지 않는가.
丁亥年 1 月 23 日
[14] 참고자료
<참고자료 1> 또 하나의 전설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
충청남도 진천 지방과 경기도 용인 지방에서는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구전되어 온다. 이는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구절에는 삶과 죽음의 질서를 오가며 생긴 기막힌 사연 하나가 숨어 있다.
옛날 진천 땅에 추천석이란 사람이 살았다. 하루는 그가 잠시 잠들었다가 애절한 통곡 소리에 잠을 깬다. 그 통곡 소리의 주인은 바로 옆에 있던 자기의 아내였고, 곧이어 자식들도 따라 우는 것이다.
“왠 갑작스런 울음이요?”
아내에게 물었지만, 아내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목놓아 울기만 했다.
“우리를 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시다니…. 흑흑!”
그는 싸늘하게 누워 있는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제야 지금 자신은 혼(魂)이 된 상태라는 걸 알아차리고서 멈칫거렸다.
곧이어 저승사자들을 따라 명부전(冥府殿)으로 인도되어 간 그는 염라대왕 앞에 엎드렸다.
“어디서 왔느냐?”
“예, 소인은 진천에서 온 추천석이라 하는 자입니다.”
“뭐라?”
염라대왕은 대경실색하였다.
용인의 추천석을 불러들여야 했는데, 저승사자들의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진천 땅의 추천석을 즉각 풀어주고 용인 땅의 추천석을 데려오라고 명을 다시 내렸다. 일이 꼬이려 했던지 두 사람은 이름과 생년월일이 똑같았던 것이다.
그는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이승의 자기 집으로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육신은 땅에 묻히고 집에는 위패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몸둥아리를 되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아내를 연이어 불렀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실의에 빠진 채 멍하니 있다가 문득 묘한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용인으로 냅다 뛰었다. 혼이 떠난 용인 땅 추천석의 몸엔 다행히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얼른 몸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슬프게 통곡을 하던 용인 땅 추천석의 가족들은 꿈틀대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을 보며 기뻐 날뛰었다.
“여보, 다시 살아났구려!”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린 그는 여인에게 자초지종을 그대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여인과 아들딸은 죽음에서 깨어난 헛소리로만 여겼다.
어떠한 말도 먹혀들지 않자, 그는 하룻밤을 마지못해 보내고 다음날로 즉시 진천을 향해 내달렸다. 아내라는 여인과 자식들은 그런 그를 실성한 사람인양 생각하고는 붙잡고자 뒤따라 뛰었다. 진천 고향집에 도착한 그는 상복을 입은 아내에게 외쳐댔다.
“여보, 나요 내가 돌아왔소.”
“뉘신지요, 여보라니요…?”
그녀는 돌아온 남편이라 외치는 남자의 말을 곧이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모멸감이 들었고 이내 동네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뒤따라 온 용인 땅 추천석의 아내는 남편이 잠시 미쳤다며 계속 용서를 구했다. 그는 계속 자신의 처지를 필사적으로 설명하지만 동네사람들에게 매질까지 당하고선 결국 관가로 끌려갔다.
고을 원님은 그의 사연을 쭉 듣고서 다음과 같은 명쾌한 판결을 내렸다.
“진천 땅의 추천석은 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이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이라 생각하노라.
진천 땅 추천석은 조상의 내력과 그 가족의 생년월일은 물론 논밭 등의 재산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알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 死居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
진천 땅 추천석의 혼이 들어간 그 사내는 생전에 자기의 주장대로 진천 땅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고, 이후 세상을 뜨자 그 육신은 본래 용인 땅에 살았던 추천석의 것이므로 그곳 가족이 찾아가게 되었다.
한편 이런 일이 있어서인지 그 이후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현재 충북 진천 땅에 입구에 다다르면 ‘生居鎭川’이라는 표지석을 만난다.
<출처 : 블로그명, 우주의 꿈을 알고계시나요? >
<참고자료2-1> 배티성지
1866년 병인박해 때 인근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으로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박해 소설《은화》(隱花)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차령산맥 줄기의 산간 지대로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군의 경계가 되는 고개에 자리잡고 있는데 마을 어귀에 꿀배나무가 많아서 ꡐ배나무 고개ꡑ로 불리다가 이치(梨峙)라는 한자로 표기하고 그 훈독인 배티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곳에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20~1830년대 무렵으로 기록상으로는 1839년 기해박해로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이 순교한 뒤 그의 아들들이 친척 집에서 양육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당시 최경환의 장남 최양업은 마카오에 유학하고 있었다. 그후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3일에 귀국하여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임지를 부여받고 배티 이웃의 동골에 거처를 정하고 6개월 동안 전국 5개도에 있는 교우촌들을 순회하였다.
1857년 무렵에는 배티와 절골 주변의 삼박골(양백리), 용진골(용덕리), 정삼이골(용덕리), 발래기(백곡면 명암리), 명심이(명암리), 지구머리(백곡면 사송리), 새울(이월면 신계리), 지장골(진천읍 지암리), 굴티(문백면 구곡리) 등지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깊은 산촌이었던 까닭에 성직자들의 휴식처로 알맞아 M.A.프티니콜라[朴德老] 신부가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목회(사목)활동의 중심지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61년 최양업 신부가 사망하고 프티니콜라 신부도 배론의 신학교로 떠나자 한동안 성직자가 없다가 경상도 서부지역을 담당한 칼래(Calais) 신부가 1866년 문경의 한실 교우촌에서 박해 소식을 듣고 인근으로 탈출하였다. 병인박해는 배티 인근의 교우촌에 큰 타격을 주어 1866~1868년 사이에 이 지역 출신이거나 거주자로서 순교한 이는 오반지(바오로), 이 생원 등 모두 27명에 이른다.
1870년 무렵 흩어진 신자들이 다시 모여 교우촌을 재건하여 1888년에는 E.C.두세[丁加彌] 신부에 의해 배티 공소가 설립되었고 이후에 새울과 용진골, 삼박골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이후 이 곳 공소는 여러 명의 성직자를 배출하였고 1901년 안성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956년 이후에는 모두 진천 본당 관할 공소로 변경되었다.
1970년 청주교구에서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와 함께 인근의 교우촌과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을 조사하여 현재의 위치에 경당을 지었고, 1993년 4월에 배티 사적지 전담 신부가 된 장봉훈(張奉勳, 가브리엘) 신부가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1997년 4월15일에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서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 운동이 전개되었고, 배티 순교자 묘역 조성할 계획도 추진되어 왔다.
-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EnCyber.com,
<참고자료 2-2> 배티성지
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박해시대(1784~1886)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첫본당이자 12년간 사목활동을 한 본거지로 배티를 중신으로 은골, 삼박골, 모니, 새울, 정삼이골, 전골, 발래기, 소골, 용진골, 통점, 지구머리, 동골, 지장골, 굴티, 불무골 등 16곳이 된다.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참고자료 3> 석남사
서운산 남쪽 기슭에는 청룡사가, 그 너머 동북쪽 기슭에 석남사가 있다. 안성시내에서 마둔저수지 너머 진천방향 313번 지방도로를 타고 호젓한 계곡길로 접어들어 10여 분 올라가면 세월의 무게와 역사의 기품을 간직한 천년고찰 석남사가 푸근하고도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수도승들이 유난히 많았던 석남사인지라 스님들의 손길이 곱게 묻어나는것만 같다. 고려 광종이 아들 혜거국사가 크게 중건하는 등 이름 높은 스님들이 석남사를 거쳐갔다. 석남사는 당시 수백인의 참선승이 머물렀던 수행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겹쳐마 맞배지붕으로 단촐하면서도 당당해 보인다.
대웅전 바로 아래 학이 나는 듯한 팔작지붕집이 영산전과 조화를 이루며, 옹기종기 터를 다스린 석남사 경내는 서운산의 풍취에 푹 빠져들게하는 매력이 풍겨난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공포를 갖춘 팔작지붕집이다. 날렵한 지붕끝이 숲속에 살포시 가려있어 단아한 운치를 더한다.
이 건물은 공포의 짜임새가 조선 초기와 중기 사이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신라 문무왕 20년에 고승 담화덕사가 창건했으며 이후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크게 중수했다. 경내에는 16나한이 모셔진 영산전을 비롯해 대웅전, 마애석불 등의 도지정문화재와 석탑, 부도 등 향토유적이 있다.
<참고자료 4> 서운산성
서운산성은 안성시 남쪽 12㎞ 거리에 있는 서운상 (547㎞) 꼭대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임진왜란 때 우찬성이었던 홍자수 대감과 서자 홍계남 장군, 생질 이덕남 장군이 이곳을 발판으로 3,000여명의 의병과 함께, 복진하는 왜군을 무찔러 전략적 요충지인 안성 고을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현재 성의 위쪽에는 숲이 우거져 있고, 성문은 없으며, 남문과 북문터로 추정되는 곳만 남아 있다. 경기도 기념물81호인 이 산성안에는 높이 2m,폭 1m의 석불이 있고, 남문 아래쪽에는 약천암, 토굴암 등의 암자가 얼마전에 세워졌으며, 남동쪽으로 1㎞거리에는 청룡사가 있다.
<출처 : 안성문화관광>
<참고자료 5-1> 청룡리 청룡(靑龍)마을
이 마을은 광산김씨(光山金氏)와 원주원씨로 형성된 마을로 용등봉에서 청룡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청룡이라 부르게 되었다
<참고자료 5-2> 청룡사
한여름 무더위를 가르며 수상스키를 즐기는 청룡호수를 지나 청룡사에 닿는다. 충남 천안시 입장면과 맞닿은 청룡사 쪽은 안성에서 가장 남쪽인 셈이다. 자연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 또한 진천, 천안, 평택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러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많다고 한다. 소문을 듣고 찾았던 여행객들은 소박하고 아담한 청룡사의 인상에 정겨움을 느낄수 있다.
1265년(고려 원종 6)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법당 안에는 1674년(조선 현종 15)에 만든 5톤 청동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지주까지 마련해 놓았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무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남사당패는 불당골에 살면서 겨울을 뺀 세 계절동안 전국을 돌다가 겨울에는 돌아와 기예공부를 익혔으며, 청룡사 사적비에서 부도군을 지나쳐 시멘트길을따라 올라가면 제법 산중의 운치를 느낄 수 있는 불당골도 볼거리이다.
※ 주변관광지 : 박우덕이 묘, 청룡호수, 서운산과 서운산성, 이덕남장군묘,
<참고자료 5-3> 청룡사 대웅전
○ 보물 : 제824호 / 1985. 1. 8 지정
○ 시대 : 조선시대
○ 위치 : 서운면 청룡리 28
○ 형태 : 정면 3間, 측면 4間, 팔작지붕
○ 재료 : 목조 기와지붕
○ 상세설명
서운산에 잇는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대산(明本大師)가 창건하여 공민왕 13년 (1364)승려 나옹(懶翁)에 의해 중창된 유서 깊은 사찰로 조선 초기까지도 왕실의 원찰이었던 곳이다. 대웅전의 중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 34년(1601)에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7세기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숙종 46년(1720), 순조 21년(1821), 헌종 15년(1849), 칠종14년(1863)에도 중수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규모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에 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운 다포계 팔작집이다. 지붕가구는 7량으로 구성되었고, 내부 천장은 일반적인 불전과 달리 반자 없이 연등천장으로 구성하였다.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을 만들어 석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그 위에 부처를 보호,장식하기 위해 닫집을 달아 장업하다. 이 건물에서 주목할 부분은 원래의 생김새대로 다등어 사용한 부재들의 치목 수법이다. 특히 전면 기둥은 비교적 가지런하지만 양 측면과 후면에 사용된 기둥은 휘거나 아래는 두껍고 위는 가는 것 등 여러 형태의 기둥이 사용되었고 지붕가구에도 휘어진 대들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이 불전의 중수 당시에 목재가 부족했던 형편을 반영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부재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주의 미학과 비정형의 부재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목수의 기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닫집 : 궁전 안의 옥좌 위, 또는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의 모형.
※ 반자 : 방이나 마루의 천장을 편평하게 만드는 시설.
※ 연등천장 : 서까래 사이에 흙을 발라서 정리한 경사진 천장
<참고자료 5-4> 청룡사 사적비
○ 유형문화재 : 제124호 / 1985. 6. 28 지정
○ 시대 : 조선시대
○ 위치 : 서운면 청룡리 62-4
○ 규모 : 높이 1.9m, 가로 0.73m, 세로 0.31m
○ 재질 : 화강암
○ 상세설명
청룡사에는 묵서(墨書)의 사적기는 현존하지 않으며, 다만 사찰의 창건 연대와 변천과정 등 사찰에 관한 사항을 사적비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청룡사 부도군(浮屠群)이 있는 길의 입구 좌측에 위치한 사적비는 장방형으로 비좌(碑座 : 134×86×31cm)위의 객석은 이수 형태로 정면에 용두(龍頭)가 있고, 사우(四隅)에 여의주를 물은 용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동현거사(洞玄居士) 안정라준(安定羅浚)이 지었고, 글씨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직산현감(稷山縣監) 황하민 선생이 썼으며, 조산대부(朝山大夫)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김진상 선생이 전액(篆額)을 썼다. 비석은 큰 돌 하나로 조성되었는데, 용의 비닐 모양인 용린(龍鱗)을 조각하였고 사우의 용두에는 여의주를 물었고, 눈과 코가 조각되어 있으며, 명문은 앞면과 뒷면에만 있고 비신의 크기는 높이가 190cm, 가로가 73cm, 세로가 31cm의 화강암이다. 비문에 의하면 고려말 승려 나옹이 이 절을 중창할때,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아서 서운산 청룡사라 했고, 그 후 세조가 수원지역의 논을 하사하고, 서울 신흥사와 진관사의 기물을 보냈으며, 인평대군이 이곳을 왕실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삼아 새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숙종때 사간스님이 영정을 비롯하여 대웅전 관음전 문수전 등의 전각을 중건했다고 하며, 뒷면에는 시주자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참고자료 6-1> 바우덕이(김암덕)묘
○ 묘 : 제38호 / 2001. 9. 7
○ 위치 : 서운면 청용리 산1-1(바우덕이사당:서운면 청용리 39-1)
○ 상세설명
바우덕이는 안성남사당의 전설적인 인물이며, 우리나라 남사당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로 알려진 인물이다. 구전에 의하면 5살 때 머슴살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남사당패에 맡겨져 살면서 재주를 익혀 염불, 소고춤, 출타기 등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15살 때 당시 안성남사당패를 이끌던 윤치덕이 사망하자 남사당패의 관례를 깨고 바우덕이를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선출했다. 바우덕이는 여성꼭두쇠라는 특성과 탁월한 기예로 안성 남사당패를 최고의 인기패로 육성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865년(고종2)년 경복궁 중건 공사 때, 인부들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의 남사당패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때 안성에 거주하던 이승지의 후원으로 바우덕이패와 안성 돌우물패가 최고의 인기를 얻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기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바우덕이가 살던 곳은 청룡사가 위치한 불당골인데, 이 곳은 예로부터 남사당패가 겨울을 나던 장소이다. 이 곳 남사당패는 청룡사의 신표를 받아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이곳에 와서 월동을 했다고 한다. 바우덕이는 23세 때 폐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마지막에 그를 돌보던 이경화가 망인의 유지에 따라 청룡골 입구 개울가 양지바른 곳에 매장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6-2> 바우덕이 연보
○ 1848.
*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
○ 1853.
*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남사당 입단 (당시 5세)
*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 학습
○ 1863.
* 안성남사당 꼭두쇠 추대 (당시 15세)
*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 꼭두쇠로 활동 시작(당시 꼭두쇠 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됨)
○ 1865.
* 고종 2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
* 최고의 영예인 정3품 당상관 벼슬 상당의 옥관자 수상
* 남사당을 전국 예술집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림
○ 1865. ~ 1870.
* 안성남사당패가 ꡒ바우덕이ꡓ로 통칭됨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침→ 대한민국 연예문화 탄생 → 최초의 연예인 : 남사당 바우덕이
○ 1870.
* 폐병으로 사망 (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함)
* 남사당 단원들이 바우덕이를 청룡리 골짜기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냄
<참고자료 7> 청룡호수
청룡호수는 만수면적이 3만5천5백여 평의 아담한 낚시터로 고지대에 위치한 계곡형 저수지이다. 주 어종은 잉어, 향어, 특히 씨알 굵은 떡붕어가 많다. 수질이 깨끗하고 주변경관이 수려하며 수상스키, 모터보트 등의 수상레포츠도 즐길 수 있다. 진천방향의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며 인근에 청룡사와 서운산 등산로와 연결되어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다.
<출처 : 안성 문화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