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보호조류인 키위새는 모양이 키위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 새는 날개가 없다.
섬에는 맹수가 없다. 천적을 가지지 않은 키위새는 긴장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살다가 결국 날개가 퇴화하였다. 생김이 마치 둥그스럼한 게 키위를 닮았다. 특징이라면 길다란 부리 끝부분에 콧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통해 작은 벌레를 잡아먹는다.
키위새는 순하고 공격성이 붙지않아 세월이 가면서 점차 자연의 먹이사슬 속에서 살아남기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점점 자연의 깊이 숨어들게 되었으며 음습하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서식한다.
뉴질랜드의 한 개인농장에서 이들 암수를 한쌍씩 잡아다 번식시키기에 노력을 한다. 땅속으로 굴을 뚫고 투명유리로 막을 쳐 관광객들에게 서식처를 보여준다.
나는 날개가 퇴화한 키위새를 보면서 고통이 은총이라는 말을 실감하였다.
전란과 가난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남은 우리네 부모세대들은 위대하다. 돌아보면 너무나 아찔하여 자식들에게는 그런 세월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부모의 사랑일 것이다. 자신들의 가난과 어려움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보호만 하다가 날개를 퇴화시킨 키위새를 길러낸 사람들도 더러 있다. 사는 것이 진자 운동처럼 심하게 출렁거리면 반대쪽으로도 출렁가리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활에서 확인하게 된다. 날개가 퇴화하도록 보호하는 것이 강력한 생존경쟁 앞에서 기능을 상실하게 하는 양육법이 될 수도 있다.
길들지 않은 공격성으로 물러서다 보면 결국에는 음습한 곳으로 몰려나가고 마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는 자식 앞에 약자라서 눈이 멀고 만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키위새를 여러번 생각하게 될 지 모르겠다.
그 순하고 귀여운 키위새가 어두컴컴 곳에서 몸을 움츠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돌아와 내 아들을 보니 웬지 아들의 날개라도 만져보고 싶어진다. 퍼득이지 않아서 날개가 있는지 만져보는 부모의 심정을 알려나 모르겠다.
아직은 키위새라고 이름 붙이고 싶지 않으나 나는 늘 아들의 날개를 만져볼 것이다. 아무래도 이해하고 인기있는 어머니를 떠나 내가 천적의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선악을 동시에 늘어놓고 자유로 선택하게 하셨는지 알 것 같다. 어려움 앞에서 믿음으로 강력하게 힘을 얻으라는 가르침은 확실한 사랑이다. 먹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찾는 법을 가르치는 사랑이다. 단련시키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도 큰 사랑을 만나는 것이다.
첫댓글 +.멋진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