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인 한산 이씨 처지에서는 남편인 조광조가 외롭고 무서운 밤에는 서울 집으로 올라와 자신을 감싸 안아 주기를 바랐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조광조가 서울 집을 떠나 부친이 안장된 용인의 선산으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조광조에게 아버지 조원강의 존재는 남달랐다. 평안도의 큰 길인 어천도(魚川道; 개천에서 의주까지의 도로) 찰방을 지낸 아버지가 마침 희천에 유배와 있던 도학자 김굉필에게 아들의 스승이 될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 조원강은 유학의 진면(眞面)이라 할 수 있는 도학의 문을 열어준 첫 안내자나 다름없었다.
조광조는 3년 시묘생활을 마치고도 서울 집으로 올라가지 않고 부친의 묘 앞에 아예 초당을 짓고 살았다. 부친이 원했던 도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는 것보다 시골에 남아 도학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조광조는 그것이 바로 아버지에게 못다 한 효도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독 무서움을 잘 타는 조광조의 아내 한산 이씨는 3년상을 마치고도 사울 집으로 올라오지 않는 남편이 야속했지만 밤마다 허전한 잠자리를 견뎌내야 했다. 그녀는 집종을 데리고 조광조가 좋아하는 인절미나 밑반찬거리를 장만하여 한 달에 두어 번 용인으로 내려갈 뿐, 초당에 신혼살림을 차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초당의 침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특히 갑자년에 김굉필이 순천 유배지에서 사사 당한 이후, 조광조는 캄캄한 세상에서 등불 하나가 사라진 듯한 절망감으로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사람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여 초당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서지 않았다. 산사의 수도자처럼 하늘의 도를 화두 삼아 하루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세수는 물론 세끼 밥 먹는 것도 잊고 스스로에게 하늘의 도를 묻고 또 묻다가, 허기가 지면 방문을 열고 나와 샘가로 가서 찬물을 한 바가지 들이킬 뿐, 밥그릇에 담아 올려지는 낱알 하나 목구멍으로 넘긴 적이 없었다. 밤중이 되어도 등을 방바닥에 대고 잠을 자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새댁인 아내와 친인척들이 몰려와 걱정했지만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어 말을 붙이지 못했다. 나방이 고치를 뚫고 나오듯 그가 스스로 방문을 박차고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을 마시러 샘가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야 했다.
'아, 아무 탈이 없으시구나.'
그런데 스승 김굉필의 부음을 들은 날로부터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조광조의 얼굴에 미소 같은 것이 비치기 시작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선 듯했다.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그 무엇을 얻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열 하루째 되는 날에는 방문을 박차고 나와 입을 열었다.
"도란 행할 때 살아 있는 도가 되는 것입니다. 유도(儒道)란 유학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승 한훤당 선생을 도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도를 밤낮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도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조광조는 우울한 마음을 털고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자 아내는 서울 집에서 용인 초당으로 이사할 용기가 났고, 지인들도 예전처럼 멀리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조광조는 초당 앞에 집종을 시켜 연못을 파고 김식이 구해온 연꽃을 심기도 했다. 연꽃은 한여름이 되자, 희고 붉은 꽃을 피우면서 향기를 뿜어냈다.
'도학의 문인 가족들을 조문하여 마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
갑자년에 참극을 당한 선비의 가족들을 서둘러 찾아가 조문을 했다. 뒤늦은 조문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빚을 덜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혼자 가는 것이 망설여질 때는 적극적인 성격의 김식을 불러 동행했다. 상례에 따라 조위(弔慰)를 하는 것도 도학의 수련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스승 김굉필과 정여창 가족에게 가장 먼저 조위의 글을 보냈고, 연산주 아래서 영의정을 지낸 허침의 빈소에는 가지 않았다. 조광조는 가려고 하였으나 김식이 제지하고 나섰다.
"효직(조광조의 자), 허정승 집에 나는 가지 않겠네. 그 사람이야 연산주 아래서 부귀영화를 다 누린 사람이 아닌가. 목숨이 다했다고 해서 허물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은가."
"귀먹고 눈먼 임금 아래서 얼마나 고통이 컸으면 피를 토하고 죽었겠는가. 대감의 양심이 먼저 단죄했으니 그의 혼백이라도 위로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가 영상으로 있는 동안 화란이 일어났네. 동지들이 사사를 당하고 귀양을 갔어. 난 소인배 혼백 앞에서 곡을 할 수 없으니 자네나 가게."
허침을 소인배라고 단정하는 김식의 말에 조광조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도학의 입장에서는 소인과 군자의 구분이 행동의 기준이었다. 소인과 군자가 타협하여 어울리는 중간 경계나 그것들을 초월하는 중도(中道)의 가치는 없었다. 따라서 도학에서는 소인과 군자라는 이분법의 칼날이 언제나 예리했고, 행동 기준이 명명백백하여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조광조는 오랜만에 초당을 나섰다. 김식과 서울에서 만나 남산에 사는, 갑자년에 사사 당한 홍귀달(洪貴達)의 가족을 조위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심곡리를 나서자, 바람까지 불어 눈발의 기세는 더 거칠어졌다. 할 수 없이 조광조는 대문에 다장(茶莊)이라고 쓰인 여관을 찾아 들었다. 여관의 주인은 평안도 희천 출신의 초설이라는 여인이었는데, 조광조와는 구면이었다. 물론 조광조는 스승 김굉필의 적소에서 단 한번도 그녀를 눈여겨 본 적이 없었으므로 초면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녀는 울타리 너머에서 조광조를 늘 사모하는 눈길로 훔쳐보았으므로 낯이 익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조광조는 아직도 초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였다. 부친의 3년상을 마치고 난 후 지인들을 불러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초설이 주인으로 있는 여관에서 차를 시켜 마신 적이 있고, 그때 초설은 자리가 파하고 난 다음 조광조의 종을 은밀하게 불러 자신의 비녀를 빼어 주었으나 조광조는 거절하고 말았던 적이 있는데도 어느새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조광조는 그때의 일을 까마득히 잊고 또 그 여관 앞에 서 있었다. 문을 들어서기 전에 삿갓에 쌓인 눈을 털고 있자, 앳된 여인이 나왔다.
"나으리, 누구를 찾으시옵니까."
"아니다. 눈보라가 거칠어 잠시 쉬었다 가려고 들렀을 뿐이다."
"방이 따듯하오니 옷을 말리시고 가시옵소서."
볼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인은 조광조를 각별하게 대했다. 지난번에 주인인 초설이 자신의 비녀를 빼어 줄 정도의 손님이니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직도 여관의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한 조광조를 안심시키려는 듯 여인이 따듯한 차를 들고 들어와 말했다.
"차가운 술이 아니라 따뜻한 차이옵니다. 이 차를 마시면 한기가 가시고 정신이 맑아지실 것이옵니다. 초설 언니가 나으리께서 오시거든 술보다는 차를 먼저 대접하라고 일렀습니다."
조광조는 그제야 초설이라는 이름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때 집종에게 누구의 비녀냐고 묻자, 초설이란 이름을 대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여관을 나설까 하고 밖을 두리번거렸으나 여전히 눈보라가 거칠었으므로 여인이 안내하는 방으로 들고 말았다.
"초설이 주인인가."
"그렇사옵니다."
"주인에게 신세 진 일이 있는데 오늘은 감사를 표해야겠으니 주인을 불러 오거라."
"나으리, 초설 언니에게 무슨 신세를 지셨습니까."
"지난번 들렀을 때 내게서 찻값을 받지 않았느니라. 그러니 오늘은 회계를 하고 떠나야겠다."
"아니옵니다. 소녀가 대신 받기라도 한다면 이곳에서 쫓겨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직접 주어야겠구나. 주인은 언제 오느냐."
"오늘은 아주 늦거나 내일 아침에 올 것 같사옵니다."
"왜 그러느냐. 멀리 떠나 있는 것이냐."
"서울에 갔사옵니다."
"중한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중한 일은 아니옵니다."
"그럼, 무슨 일이냐."
"혜화문 선생 댁에 갔사옵니다."
"혜화문 선생 댁이라니, 처음 듣는 말이구나. 누구를 보고 혜화문 선생이라고 하는 것이냐."
"소녀는 단 한번 보았사옵니다. 선비의 행색은 아니고 혜화문 밖 낙산 산등성이 마을에 사는 백정들 중에서 덕이 높은 늙은 갖바치이옵니다."
"봉두난발의 갖바치를 선생이라 부르는 것을 보니 배움이 많은 사람인 모양이구나."
"그렇사옵니다. 초설 언니는 한훤당 어르신도 모신 적이 있사온데 그 어르신보다 갖바치 선생의 도력이 더 높다고 말했사옵니다."
"네 주인이 한훤당 어르신을 모신 적이 있다는 말이냐."
조광조는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놀랐다. 초설이 한훤당을 모셨다니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의 스승 김굉필을 초설이 모신 적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조광조는 차를 거푸 두어 잔을 마시고 나서야 가까스로 진정했다.
"나으리, 왜 그리 놀라십니까."
"한훤당이라면 김굉필 선생의 호이니라. 나의 스승을 네 주인이 모시었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느냐."
"한훤당 선생에게 무얼 배웠다고 하더냐."
"<소학>을 조금 배웠으나 갖바치 어른에게서 배운 것에 비하면 그것은 말 그대로 '작은 배움'일 뿐이라고 했사옵니다."
"허허허."
조광조는 문득 혜화문 밖 낙산 산등성이에 산다는 갖바치를 만나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조선 제일의 도학자 김굉필이 깨달은 <소학>의 경지를 '작은 배움'이라고 폄하하다니 기가 차기도 했다. 조광조는 옷이 다 마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소리쳐 말했다.
"네 주인에게 일러라. 나의 스승 한훤당 선생께서는 30세까지 오로지 <소학>만을 읽어 소학동자라고 불렸느니라. 작은 배움 속에 큰 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그러신 것이 아니겠느냐. 혜화문 선생인지 갖바치 선생인지가 나의 스승을 알지 못하고 네 주인을 현혹시킨 것 같구나. 머잖아 갖바치를 만나 직접 얘기를 나눠보면 반드시 알 수 있을 것이니라."
조광조가 찻값을 치르려 하자, 이번에는 여인이 얼굴색을 바꾸었다.
"나으리뿐만 아니라 나으리를 아는 선비들에게는 절대로 회계하지 말라고 했사옵니다. 만약 초설 언니의 지시를 어겼다가는 소녀는 오늘로 이 집을 떠나야 하옵니다. 그러니 나으리, 소녀를 위해서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럼, 오늘의 찻값도 네 주인을 만나 전해 줄 것이니라."
조광조는 말고삐를 집종에게 건네주고 자신은 말에 올라탔다. 눈보라의 기세는 조금 꺾였지만 눈이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조광조는 눈보라에 벗겨질 듯한 삿갓을 고쳐 쓰고는 광주 저자거리를 거쳐 과천 고갯길로 들어섰다. 과천 고갯길에서는 눈길이 미끄러웠으므로 말에서 내려 엉금엉금 걸었다.
조광조는 당장 혜화문 쪽으로 가 갖바치를 만나고 싶었지만 남대문 밖 주막거리에서 기다릴 김식을 생각해서 그만두었다. 홍귀달 가족을 만나 조문하고 그들을 위로하려고 집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지낸 홍귀달은 갑자년에 이르러 경원으로 귀양을 가자 단천에 도착하여 사사를 당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연산주 때 직언을 자주하여 연산주는 그가 옆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경기 감사로 내보낸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의 기개는 날뛰는 호랑이 앞에 다가선 듯하였으니 한 선비는 그가 죽은 후 백년이 지날 무렵에 이러한 글을 남겼던 것이다.
'내가 허백당(虛白堂; 홍귀달의 호) 홍공의 글을 보고 대절(大節)을 알았으니 (연산이) 신하의 간하는 것을 거부함과 사냥하는 것을 논한 두 장의 상소문을 보고나서였다. 연산이 한참 음란하고 포악하던 때에는 사람을 희롱감으로 삼아 죽이기를 장난처럼 하여 옥당의 신하들을 내쫓고 간관을 파면시키며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떼죽음을 시키어 그 흉포한 위엄을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으니, 그 위세가 마치 날뛰는 호랑이가 이를 갈며 입을 벌리고 사람에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 바른 의논을 굽히지 않고 (임금의) 욕심을 막으려 한 것이 태평스런 조정에서 홀(笏)을 단정히 잡고 밝은 임금과 의논하는 것 같이 하였다. 지금 백년이 지난 뒤에도 공이 붓을 잡고 상소문을 적을 때 신색(身色)이 태연자약하고 죽음의 마당에 있는 형틀을 오히려 편안한 수레처럼 생각하는 기상이 우리 눈앞에 보인다. 아, 장하다.'
두 장의 상소문이라는 것 중에 그 하나는 호랑이처럼 날뛰는 연산주에게 간관을 두둔하는 상소문이었는데 요약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임금이 어디에도 굽힐 데가 없사오나 오직 대간에게는 굽혀야 할 것이니 굽혀서 그 말을 좇아 정치의 업적이 백대의 제왕 중에서 뛰어난다면 그야말로 잠깐 굽혀 영원히 편 셈이옵니다.'
임금의 귀에 거슬리는 대간의 말이라도 잠시 굽힘은 영원히 펴는 것이라는 주장이었고, 또 하나의 상소문은 사냥을 자제하라는 내용이었다.
'안으로는 우레, 우박 등의 천재가 있고, 밖으로는 외적들이 트집을 잡고 있으니 마땅히 상하가 서로 덕을 닦아 재앙을 소멸시키고 환란을 막는 데 힘써야 할 것인데 사냥은 비록 종묘에 제사지내기 위함이라 하오나 지금 죽이고 사로잡힌 것들이 모두 선왕과 선후(先後)의 적자(赤子; 임금의 어린 자식)들이옵니다. 사냥하는 것만으로 효도를 다하려고 한다면 조상들이 그것을 운감(殞感)하시겠습니까.'
홍귀달은 경기 감사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왔으나 또 경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연산주의 사랑을 받는 궁녀 집에서 무리한 청탁을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궁녀가 모함을 하였던 것이다. 귀양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자식들에게 홍귀달은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내가 본래 함창의 한 농사꾼으로 재상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그것은 본시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니다. 또한 출세한 것도 내가 한 것이요, 실패한 것도 내가 한 것일 뿐이다. 다만 옛날의 나로 돌아갈 뿐이니 무슨 원한이 있겠느냐."
단천에 이르렀을 때 어명을 받든 도사가 말을 타고 달려와 한 장의 공문을 홍귀달 앞에 던졌다. 그때 홍귀달의 태도는 집을 떠날 때와 같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공문을 앞에 놓고 절을 한 뒤 홍귀달은 도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임금께서 나에게 죽으라고 명하셨다."
홍귀달은 공문대로 목 조르는 형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그가 사사를 당한 후 그의 네 아들들도 모두 절해고도로 귀양을 갔다. 특히 둘째 아들 언방(彦邦)의 딸이 용모가 수려하여 연산주가 왕자 빈(嬪)으로 삼고자 했으나 홍귀달이 끝내 듣지 않아 연산주의 미움을 크게 사 가족 전체가 극형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눈은 그칠 줄 몰랐다. 바람은 잦았으나 눈은 폭설로 변하여 계속 내렸다. 거리는 눈 속에 파묻혔고, 나뭇가지마다 설화가 피고지고 했다. 김식은 기다리기가 지루했던지 술을 몇 잔 들이켜 불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천, 그대가 남산 지리에 밝으니 앞서시게."
"효직은 허백당 어른 댁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단 말인가."
"그렇다네. 한훤당 문하에서 2년, 용인으로 내려와 3년상을 치렀으니 그 세월이 5년이 아닌가. 화살처럼 날아가 버린 시간일세."
조광조에 비해 조실부모한 김식의 학문은 분명 조광조를 한참 앞서 있었다. 그는 사서삼경을 앞뒤로 줄줄 외울 수 있는데다 이미 주역 점에도 달통하여 도인의 풍모를 풍기기까지 하였다. 다만 조광조가 과묵하여 실수가 적은 반면에 김식은 능란한 화술에 스스로 도취되어 다변(多辯)으로 빠지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김식은 홍귀달의 집에 도착하여 소리쳤다.
"이보게, 효직. 언덕 위에 꼬막처럼 엎어진 작은 정자를 보게. 허백당이라는 당호(堂號)와 어찌 저리 잘 어울리는지. 마침 정자는 허(虛) 자로 비어 있고, 백(白) 자로 백설이 덮여 있으니 그러하지 아니한가."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싶어 했던 허백당 어른을 뵙는 것 같으이."
정자의 한 기둥에는 홍귀달이 쓴 시 한 구절이 주련으로 걸려 있었다. 네 기둥 중에서 단 한 기둥의 주련이었으므로 정자처럼 개결하고 소박했다.
산비 솔바람이라도 역시 시끄러움을 싫어하노라.
山雨松風亦厭喧
퇴궐하여 정자에 앉아 단정하게 복건을 쓰고 책을 읽는 중에는 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나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일지라도 정자를 시끄럽게 한다면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홍귀달이 얼마나 서책을 좋아했는지 헤아려볼 수 있는 주련 구절이었다.
김식이 정자 밑의 초가로 가 자못 위엄을 부리며 아랫것을 불렀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그러나 초가는 텅 비어 있었다. 몇 번이나 소리를 질렀을 때 게으른 아랫것 하나가 나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아무도 안 계신데 누구를 찾습니까요."
"이 집이 홍대감 댁이 아니란 말이냐."
"대감마님께서는 단천에서 변을 당했습니다요. 아드님들도 모두 섬으로 귀양을 갔습죠. 안방마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쇤네는 알지 못합니다요."
"우리는 관원이 아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 없다."
"잡혀갈 사람도 없습니다요."
"안방마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아드님들과 함께 잡혀가신 뒤 소식이 없습니다요."
"허허, 세상에 이런 패악이 어디 있나. 부인까지 잡아가다니."
조광조와 김식은 눈을 맞으며 집안을 들어서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남산을 내려서려다 김식이 자신이 데리고 온 집종에게 말했다.
"술병을 가져오너라."
"노천. 이런 기분에 술을 마실 텐가."
"효직, 날 예(禮)가 없는 무뢰한으로 보지 말게. 좀 전에 효직이 한 말이 생각나서 술병을 가져오게 했네."
"또 괴변을 부릴 텐가."
"괴변이라니. 효직이 저 정자를 보고 홍대감을 뵙는 것 같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랬지."
"그렇다면 정자 앞에서 술을 따르는 것도 홍대감을 조문하는 일이 아닐 것인가. 내 말이 틀렸는가."
"노천의 변재를 따를 자가 누구이겠는가."
김식이 정자 앞에 술병의 술을 붓고는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을 했다. 조광조도 뒤따라 술을 붓고는 '바라옵건대 살피시어 흠향하옵소서' 하고 허백당이란 정자의 편액을 향해 두 번 절을 했다.
조광조와 김식이 타고 온 말들이 내리는 눈을 터느라 진저리를 쳤다. 그러자 말고삐를 잡고 발을 동동 구르던 종들이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치근대는 말을 달랬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