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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원문---------------------------------------
미국을 떠나던 무렵(1937년 말)부터 독일에 정착(1938)한 후 독일을 떠나는 때(1944)까지 안익태가 보여준 활약은, 이에 관해 현존하는 모든 검증/미검증 기록을 통틀어 볼 때, 그야말로 세계적이었다는 평가를 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는, 1930년대 빈 공연 예술계의 큰 손이었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1863~1942)랄지 그 무렵 독일 음악계의 대부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 등과 교분을 갖고 있었다. 이 기간 그가 보여준 지휘 경력 역시 화려하다. 그가 이 당시 섭렵했던 유럽의 악단들은 북으로 아일랜드의 방송 교향악단으로부터 파리, 베를린, 부다페스트, 빈을 거쳐 남으로 로마에까지 전 유럽에 걸쳐 있다.
이 같이 빛나는 활동상에도 불구하고 윗 기간 동안 그가 보인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들은 대부분 미확인 상태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안익태 사후 그가 한국 음악계에서 철저히 ‘매장’당했다는 데에 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민족에게 그들 나라를 위한 음악인 ‘애국가’를 선사한 사람이 오히려 바로 그 한민족으로부터 배척을 당했으니 말이다. 내가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은 바로 그 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나아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두 가지 음악 사전-즉, 독일어권의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와 영어권의 <The New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의 최근 개정판에서도 안익태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록 그가 유럽인도 아니었고 정기 연주회에서 지휘를 했던 것이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유럽 음악계 한복판에서 여러 해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음악가라면, 한편 안익태보다 결코 더 눈에 띌 만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유럽인 내지 비 아시아계 음악가 이름이 그 사전들에 등재되어 있는 형편이라면, 그의 이름 누락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며 그의 활동 비중에 비추어 온당한 대우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장차 이와 같은 흠결을 메우기 위해서는 우선 안익태에 관한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 하에, 그 사전 작업으로서 일단 그가 베를린에 머물렀던 약 8년의 세월을 되짚어 보는 작업에 뛰어 들기로 하였다. 나는 작업 목표로서 두 가지를 계획하였다: 1)그의 베를린 주소지 확인, 2)그의 연주 활동 기록 검증.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뜻하지 않게, 3)그의 민족적 정체성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것은, 모습을 드러낸 자료들이 무언가 석연치 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1) 안익태의 베를린 거주지
현재까지 안익태에 관해 쓰여진 연구서 형태의 저술로는 전정임 교수가 펴낸 <안익태>(시공사, 1999년 1판 발행)가 유일하다[1]. 이에 따르면 안익태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베를린에 거주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36~37쪽). 그러나 베를린 시 당국에 문의한 결과, ‘안익태’라는 발음의 이름으로 기재된 전출입 신고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해 왔다. 그렇지만 과연, 안익태가 베를린에 거주하였던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의 주소지는 아마도 ‘Gustav-Freytag-Strasse 15’번지였던 것 같다. 즉,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1942)에서 그는 자신의 주소를 위의 것으로 밝히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하라 씨와 저는...선생님과 사모님을 꼭 저희 집에 모시고 싶습니다. 저희 집은 선생님과 사모님께 안락하고 조용한 장소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실제로 이 주소지는 베를린 중서부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가한 고급 주택가로
2) 연주 활동과 안익태의 위상
38년 경부터 45년까지의 연주 활동에 대해서는 <안익태>에 정리된 바를 따랐다. 즉, <안익태>에서 구체적인 사항이 언급된 모든 연주회에 대해 사실 확인 작업을 벌였으나, 독일어권과 영어권 국가를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예컨대 프랑스, 헝가리, 이태리 등)의 여타 단체들이 그리 협조적이지 않아서 사실 확인이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따라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들은 38년도 더블린 연주회에서 <한국 환상곡>이 연주되었다는 점, 1942년도에 두 차례 연주회 지휘를 한 점, 43년도에 한 차례, 44년도에도 한 차례 연주회 지휘를 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 가운데에서, 이미 <월간 객석> 2000년 5월호 진화영 씨의 취재 기사를 통해 알려졌듯, 독일연방 문서 보관소 산하 필름 보관소(Bundesarchiv-Filmarchiv)에 보관되어 있는 안익태 필름에 대해 먼저 알아 보았다. 확인 결과, 연주회의 동기는 ‘만주 괴뢰국 창설 10주년 기념’이었고 그 기념으로 안익태 작곡의 축하곡(Festmusik) <만주국(Mandschoutikuo)>이 연주되었다. 연주 연도는 1942년, 연주단체는 베를린 방송악단과 라미 합창단이었다[2]. 곡은 남녀 혼성 4부 합창을 수반하는 관현악곡이었는데 그 텍스트 작성자는 고이치 이하라였다. 연주회가 열린 곳은 폭격으로 부서지기 이전의 옛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장이었다[3]. 무대 전체를 정면에서 잡은 화면일 경우 그 무대 뒷막 한가운데에 일장기가 커다랗게 걸린 것을 볼 수 있다. 연주 시간은 약 7분 정도이다[4]. 놀랍게도 그 곡에서, <한국 환상곡>에 나오는 선율 두 가지(“삼천리 금수강산 길이 빛나라”와 “영광의 태극기” 패시지)가 그대로 나타남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내가 파악한 연주회들 – 1942년도의 또 한 차례 연주회(빈)를 비롯, 1943년도의 두 차례 연주회(빈, 베를린)와 1944년도(파리)의 연주회 – 은 연주곡목 선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모두 일본과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이 연주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5]:
1942년 3월 12일
장소) 빈 음악협회 홀
단체) 시립 빈 교향악단(Stadtorchester Wien Symphoniker)
연주곡) 에크몬트 서곡(베토벤); 토카타, 아다지오, 푸가, C 장조, BWV 564 (바하-안익태);
에텐라쿠(작자 미상); 야상곡(안익태)[6]; 피아노 협주곡 2번(리스트); 일본 축전곡
(슈트라우스);
1943년 2월 11일
장소) 빈 음악협회 홀
단체) 시립 빈 교향악단; 빈 국립오페라 합창단(Konzertvereinigung Winer Staatsopernchor)
연주곡) 레오노레 서곡 3(베토벤); 7번 교향곡(베토벤); /(중간 휴식)/ 오케스트라와 혼성 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국>(곡: 안익태. 텍스트: 고이치 이하라)
1943년 8월 18일[7]
장소) 미상
단체) 베를린 필하모니(Berliner Philharmoniker) (피아노: 다그마 벨라)
연주곡) 리엔치 서곡(바그너);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안익태); 피아노 협주곡 D
단조, K. V. 466(모짜르트); 교향곡 5번(드로브작)
1944년[8] 4월 14일
장소) 플레에 홀(Salle Pleyel), 파리
단체) 파리 콘서바토리 연주 협회 오케스트라 (le orchestre de la sociètè des concerts du
conservatoire)
연주곡)[9] 일본 축전곡(슈트라우스)
현재까지 발굴된 이 자료들이 그의 1940년대 연주 활동을 모두 아우르지는 못할 수 있지만, 안익태 재구성을 위한 몇 가지 실마리는 제공하는 듯하다. 먼저, 안익태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36개월동안 객원 지휘했던 횟수가 불과 7회(1942년 2회, 1943년 2회, 1944년 1회, 1944년 편지에 언급되어 있는 부카레스트 연주회와 바르셀로나 연주회[10])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만일 그가 역량 있는 지휘자로 인정받고 있었다면 그가 더 많은 연주회를 소화했었을 것이라는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치 뒤에 숨어 있는 ‘개별 연주회 성격’을 고려해 볼 때, 몇 가지 사례는 지휘자 역량과 그다지 관계 없는 ‘이벤트’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11]. 따라서 위의 자료를 모두 같은 값어치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이벤트’ 성격을 갖는 비정기 연주회들은 그의 ‘인지도 가늠’ 연주회에서 제외되며 그렇다면 이 경우 안익태에 있어 ‘지휘자 역량에 기인한 초청 연주’의 횟수가 실상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같은 기간동안 그가 지휘했던 악단은 최대 6개(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빈 심포니커, 베를린 필하모니, 파리 콘서바토리 오케스트라와 1944년 편지에서 언급되고 있는 부카레스트와 바르셀로나에서의 연주회가 그 지역 오케스트라였다는 가정일 경우)였으며 이 가운데 그가 다시 초빙 받았던 경우는 오직 빈 심포니커 하나뿐이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그 자체로도 그가 그다지 각광 받던 지휘자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하지만, 나아가 빈이 슈트라우스의 입김이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었다라는 점까지 감안하자면 그 같은 추정을 더욱 뒷받침해 주는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안익태가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을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던 1942년 3월 12일의 연주회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즉,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Japanische Festmusik)은 이미 1940년 12월 일본 토쿄에서의 초연 때부터 신통치 않은 반응을 받은 후 1941년 10월 슈트트가르트에서 있었던 유럽 초연과 연이은 1942년 1월 빈 음악협회 홀에서의 빈 초연에서도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달 후 안익태는 동일한 곡이 레퍼토리로 포함된 빈 연주회를 지휘하여 큰 호평을 이끌어 내었다. 연주 후 환호성이 계속 되자 “슈트라우스는 특별석(loge)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가 끝날 무렵 점잖게(höflich) 박수를 보내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슈트라우스가 그 이듬해에 다시 한 번 안익태를 빈 무대에 세워준 것은 아니었을까?
안익태가 유럽 악단에서 그다지 인정받는 지휘자가 아니었을지 모른다라는 추론은 다른 각도에서도 도출된다. 즉, 그가 당시 다루었던 오케스트라들 대부분이 이른바 ‘최상위’에 속하는 것들은 아니었다는 점이 그 같은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한 일이 있으므로 이는 마치 가설에 대한 반박 근거가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 그 단원들이 안익태의 지휘 능력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등과 같은 원로 단원의 증언(<월간 객석>, 101쪽)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를 통해 그가 유럽 ‘주류’ 음악계에서 대체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비록 그가 그 무렵 수석/부수석 지휘자 등으로 선임되었다라는 기록이나 또는 어떤 악단에서 어떤 지휘자 지도하에 긴밀하게 일하고 있다라는 등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도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물론 그가 그 당시 샛파란 나이의, 더군다나 동양 음악가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지나친 기대일 수 있겠지만,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여 독일 음악계의 영향력이 광범위하게 미치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고정직에 임명된 예가 없다면 이는 슈트라우스를 제외하고서 아마도 그에게는 음악적 후원자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윗 연주회 연주곡목에서 슈트라우스와의 관련성 내지 그의 영향력이 전반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는 안익태가, 독자적 지명도를 갖고 있던 지휘자였다라기보다는 슈트라우스의 후원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만 운신의 폭으로 갖고 있던 지휘자였다는 점을, 최소한 어느 정도, 암시하기 때문이다[12]. 이제, 슈트라우스 사후 안익태가 부인 로리타 안에게 털어놓았던 푸념이 어떤 의미에서였는지 드러나는 듯하다: “아! 슈트라우스 선생님이 아직도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선생님 생전에는 선생님에게 도움만 청하면 만사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일사천리격으로 해나갈 수 있었는데…. 그저 그 분의 편지 한 장이면 어느 오케스트라든지 나를 위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곤 하였는데…. 그러나 오늘날 선생님을 잃고 나서 나 혼자 고군분투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구나(전정임, 94쪽).” 전후 그가 유럽의 전통 있는 어떤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도 되지 못하고 마요르카라고 하는 음악적 ‘변방’의 신설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주저앉은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종합적으로 볼 때, 안익태는 지휘자로서 인정받는 경우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3) 1940년대 안익태의 민족적 정체성
먼저 몇 가지, 일본과의 친밀한 관련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나열하면서 그들에 관해 언급하겠다. 첫째는 “만주 괴뢰국 창설 10주년 기념 연주회”이다. 이를 위해 안익태가 작곡하고 직접 지휘하였던 곡은 ‘만주국’의 일본식 발음을 따 <Mandschoutikuo>였다. 이 연주회가 – 연주회 취지, 곡의 텍스트, 연주회장 전면에 큼직하게 현수되어 있는 일장기 등이 보여주듯 – 명백한 친일본 음악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익태가 이에 매우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띤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그는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보인다. 더 심하게 말해, 열과 성을 다해, 몸과 정신을 다 바쳐 – 혼신의 힘을 다해 – ‘자신의 곡’을 지휘하고 있었다. 큼직한 일장기 아래에서 말이다. 그 영상물은 좌석에 앉아 있는 일본 신사와 귀부인을 두 번이나 근접하여 보여주었는데 이 때의 그 남자가 혹시 ‘이하라’가 아니었을까? 그는 주독 일본 외교관이면서 또한 <Mandschoutikuo>의 텍스트 작성자였으니 그 음악회에서 그만큼 주목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연주회가 끝나서 박수 소리가 들리자 안익태는 객석으로 몸을 돌려 답례를 한 후 객석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그의 좌측, 즉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객석 우측을 바라보더니 누군가를 발견한 듯 대단히 반색하며 손을 들어 일어서라는 동작을 취했다. 그 대상이 누구였을까? 필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에 더 이상 정확한 사항을 말할 수는 없으나 그가 만일 그 ‘이하라’가 아니었다면 그는 다른 어떤 누구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연주회와 관련하여 매우 심각하게 음미해 보아야 할 대목은 바로, 이 일본 괴뢰국 축하곡에 나타나는 두 개의 선율이 <한국 환상곡>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이미지, 그가 특히 미국에서 보여주었던 이미지는 다름 아닌 ‘애국 청년’이었다[13]. 미주 한인학생회보 16권 3호(1938년 4-5월)에 실린 더블린 인터뷰 기사도 한 예가 된다: “…그(안익태)가 말하기를 많은 한국인들이 아일랜드가 보여준 자유 쟁취 투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한국인들은 노일 전쟁 후 국가 지위를 상실해서 일본 지배 하에 놓여 있지만, 주권 회복을 위해 일하고 있는 강력한 민족주의 세력이 존재하며 그 수장은 이 왕자입니다…많은 민족주의자들이 현재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습니다…우리 이천만 동포들은 일본의 지배 하에 있지만 독립을 얻기 위한 정치적 투쟁은 매일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내 소망은, 이것은 또한 모든 한국인들의 진정한 소망이기도 합니다만, 어서 빨리 내 조국이 여러분 나라와 같이 독립국가가 되는 것입니다(전정임, 260~261쪽으로부터 번역).” 또한 그는 <한국 환상곡>이 일본의 금지 조치로 인해 한국에서는 공연될 수 없다고 폭로하고 있다(260쪽). 어째서 이 같은 입장을 견지했던 사람이 그처럼 일본 꼭두각시 정권을 축하하는 곡에 사용했던 선율을 그대로 가져다 해방된 한국의 영광을 노래하는 곡조로 둔갑시켰을까?
실은 그 영상물을 보기 전부터 나는 1938년 인터뷰에 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몇 군데에서 매우 미심쩍은 내용들과 마주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 이천만 한국인들은 음악을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259쪽).” 안익태가 구한말 음악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음악을 하늘이 준 선물’로 생각해 왔다는 근거를 어디에선가 발견해야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상황은 그러하지 못하다. 악학궤범 어디에도, 또는 樂記 어디에도, 삼국유사를 비롯한 민간 전설 어디에서도,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우리에게 있어 ‘음악은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악학궤범에 ‘음악은 하늘에서 와 인간에 거하는 것이다(樂也者出於天而寓於人)’는 구절이 있긴 하지만 이 때 이것이 ‘받은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음악을 논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음악은 인간의 인격 완성을 향한 또는 위한 적극적 노력의 표현이자 그 구현체 그 자체이므로 ‘음악’을 둘러싼 본질론에 있어 그 같은 ‘수동’의 의미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안익태의 설명은 이어진다: “그것은 2000년 전 하늘에서 내려온 우리 첫번째 황제와 더불어 받게 된 것입니다(259쪽).” 여기서 ‘2000년 전 하늘에서 내려온 우리 첫번째 황제’라는 문구를 읽는 동안, 정말 유감스럽게도, 머리 속에 단군이 연상되는 대신 아주 자연스럽게 일본 진무텐노(神武天皇)가 떠올랐다. 단군 신화의 시점은 BC 2333년인 반면, 고사기와 일본 서기에 실린 일본 신화의 시점은 BC 660년이다. 따라서 안익태가 한국 신화를 염두에 두고 주장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일본 신화상의 시점을 기점으로 이야기했다고 보야야 한다. 또한 단군 신화를 비롯 우리 나라 고래의 역사에서 ‘황제’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한 이는, 적어도 현존 사서상으로 볼 때, 고종 황제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 백성과 일제 치하의 한민족이 우리 민족 첫 지배자를 ‘황제’라고 여겼을 것이라고 봐야할 만한 근거가 희박하다.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음악을 ‘황제와 더불어’ 받은 바에 관해 들어본 적도 없다. 환인의 아들 환웅은, 신화에 따르면, 천부인 세 개를 받아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에 거하며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통해 세상의 일을 다스렸을 뿐이니 이가 곧 환웅 ’천왕’이다. 반면, 안익태의 설명은 일본 신화와 아주 잘 부합한다. 일본 신화에서의 진무텐노는 이른바 태양 여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자손으로서, 정확히 말해 하늘에서 내려온 이 여신의 손자가 세상에서 본 후손(손자)이라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음악)은 여러 세대를 거쳐 그 모습 그대로(faithfully) 보전되어 왔습니다, 노래와 기악 음악 형태로 말입니다(259쪽).” 한국 전통음악에는 ‘하늘로부터 받은 음악’이라는 개념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보존’이라는 말을 꺼낼 게재가 못 된다. 나아가 일제가 조선 왕조를 강점하면서 조선의 많은 왕실 제례를 - 종묘, 문묘 제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 폐지함으로써, 더불어 장악원 – 정확히는 장악과 – 을 폐쇄함으로써 유실되었다. 그러므로 안익태가 1938년에 조선의 음악에 대해 그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못 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황실’은 이른바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신의 직계자손이기 때문에 그들이 보유한 음악, 즉 일본 황실의 음악, 다시 말해 ‘가가쿠(雅樂)’는 그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즉 그들이 선사받은, 하늘의 음악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가가쿠는, 일본이 자랑하듯, 그 성립 당시인 8~9세기 경의 연주 모습과 관행을 지금 이 21세기까지도 견지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1938년에 이에 대해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왔다”라고 말할 근거는, 일본의 그 당시 국수주의적 풍조에 비추어 볼 때, 넘쳐나도록 충분하였을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주장이 그 다음 면에서 발견된다: “…서로 다른 종류의 악기 47개를 가진 민속 악단들이 있습니다(260쪽).” 중요한 점은 ‘서로 다른 47종의 악기’를 가진 민속 악단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있었다는 점이다. 장악과가 해체된 후 당시 국내에 ‘민속 악단’이 있었는지 아직 아는 바가 없지만, 이왕직 아악부 전습소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상설 민속 악단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1930년대에 47인조 악단이 여러 개 구성될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 않겠는다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 당시는 한 악단이 47개 씩이나 되는 상이한 악기로 이루어질 만큼 한국 음악 활동이 왕성한 시기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전문 음악인 계층의 상황이 그러하였다면 민간 차원에서 그와 같은 악단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더욱 낮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악기수 ‘47’도 또한 재미 있다. 장사훈의 <국악총론>(1991년, 214쪽)에 따를 경우 악학궤범에 등재된 악기수는 총 65개이다. 그러나 실제 연주되는 악기가 아닌 장식용 악기의 숫자와 궁중 음악 폐지 후 일실된 악기수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40개에 달한다. 한편, 호시 아키라의 책 <일본 음악의 역사와 감상>(최재륜 역. 1994년, 176~192)에 의할 경우 일본 앙상블의 악기수는, 흥미롭게도, 정확이 47개로 정리된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이 인터뷰에서 안익태가 ‘한국것’이라면서 설명하는 내용들은 실상 ‘한국것’에 부합하는 바가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안익태가 ‘한국것’이라고 하면서 실상 ‘일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인터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제가 ‘내선 일체’를 부르짖으며 한국인 세뇌에 박차를 가한 때는 중일 전쟁(1937년) 무렵부터였다. 그의 ‘내 나라’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 내지 이중성은 아마도 이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나 1930년를 일본 점령지가 아닌 미국에서 보냈었고 이 당시 안익태가 일본 세력과 가까운 접촉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발견된 바 없는 현재로서는, 그가 ‘내선 일체’에 물들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뜻밖이다. 아마도 그는 일본 세력들과 이미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지 모른다. 그의 1940년대 연주회 프로그램에서 심심찮게 <에텐라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가 미국 체류 시절 고노에 히데마로(1898~1973)가 편곡한 <에텐라쿠>를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 되지 않을까? 이 곡은 이미 1935~36년 중반 미국에서 스토코프스키 지휘로 몇 차례 연주된 바 있다. 안익태는 당시 필라델피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였던 스토코프스키와 관련이 있었던 점(전정임, 30쪽)을 생각한다면 그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둘째는 바로 그 “에텐라쿠”이다. 본래 이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 음악의 제목으로서 매우 오래된 일본 궁중음악의 한 가지이다. 이 곡명을 한자로 쓸 경우 <월천악(越天樂)>이 된다. 제목의 의미를 놓고 두 곡을 비교해 볼 때 이 곡과 안익태의 <강천성악(降天聲樂)>은 차이가 없다. 두 곡은 과연 제목 만큼이나 서로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까? 곡조 상으로 두 곡의 관련성을 단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안익태의 <에텐라쿠>와 <강천성악>은 곡 해설상 상당한 유사 구조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1943년도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 프로그램에 실린 곡해설은 다음과 같다: “그의 환상곡 에텐라쿠는 교향시(ein symphonisches Gedicht)이다. 먼저 우리는 독주 플룻 소리를 듣는다 – 비밀스런 밤이다. 한 방랑자가 수심과 동경에 가득차 그의 샤쿠하치(즉, 일본 플룻)를 분다. 그가 멀리 사라지는 동안 우리는 하늘로부터 온 음악 에텐라쿠가 궁궐에서 장엄하게(feierlich) 연주되는 소리를 듣는다. 음악은 점점 강도를 더한다. 차츰 소리가 잦아들어 우리는 그 소리가 마치 하늘로부터의 반향인 듯 느끼게 된다. 재차 그 방랑자의 플룻 소리가 들린다, 마치 외로운 새벽녁의 슬픔(traurig)과 비애(wehklagend)처럼. 이윽고 사원의 종(Tempelgong)이 울리고 다가오는 아침을 알린다…. 이 구조는 전정임 교수 책에 실린 <강천성악> 설명과 대동소이하다. 적어도 선율이나 화성 구조를 통해 두 곡 사이의 관련성을 밝히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곡 구조 측면에서 두 곡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같은 연주회 프로그램이 밝히기를, “에텐라쿠는 1938년에 작곡되었다. 이 곡의 1939년 4월 30일 로마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 하에 로마 이태리 방송 악단(das Orchester der EIAR)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 기사를 놓고 생각할 때, 안익태가 1936년 베를린을 다녀간 후 밝힌 바 “힌데미트 교수와…조선 아악을 주제로 작곡한 관현악곡에 관하여 고견을 들었는데…”라는 부분에서의 힌데미트로부터 조언을 얻었던 ‘조선 아악을 주제로 작곡한 곡’, 그래서 그의 조언에 따라 수정하여 최종 완성한 곡이 <에텐라쿠>였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 그가 이 <에텐라쿠>를 재손질하여 우리 앞에 내놓았던 곡이 바로 <강천성악>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14].
셋째는 그의 주소지이다. 그가 발송했던 편지에 쓰인 주소는 ‘Gustav-Freytag-Strasse 15’였다. 이 주소지 소유자로서 옛 베를린 전출입 장부에 올라 있는 이름은 이하라 고이치였다. 그는 1940년 말 독일에 부임한 일본 ‘외교관’이다. 즉, 태평양 전쟁 직전, 즉 일본이 독일과 굳건한 관계(1940년 9월, 3국 동맹)를 맺은 중대한 시점이었다. 이런 시점에 만주국 건승 10주년 기념 음악인 <Mandschoutikuo>가 안익태에 의해, 그 텍스트가 일본 외교관 고이치 이하라에 의해 작성 되었다는 사실은 그 두 사람이 ‘독일 내 일본’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한편 안익태는 1942년 편지에서 슈트라우스에게 그가 빈에서 지휘했던 연주회(3월 12일)에 대한 후원에 심심한 감사를 전하는 중에 그 연주회의 성격을 “독일-일본 연주회”라고 명기하고 있다. 또한 같은 편지에서 그는 슈트라우스의 내방을 희망하며 “사무실”로 자신이나 이하라에게 전보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도대체 그 ”사무실”은 무엇이었을까? 현재로서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가 사무실로 “자신이나 이하라 씨” 앞으로 전보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점으로 미루어 그와 이하라는 한 곳에서 일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일본 외교관과 한 곳에서 근무한 그 곳은 어디란 말인가? 일본 공관 이외의 다른 곳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안익태가 독일에 건너 와 짧지 않은 기간동안, 적어도 1942년부터 44년까지, 일본 외교관과 한 집에 거주 또는 한 곳에서 근무했다는 점은, 그가 실상 어느 때부터인가는 종래 알려진 ‘애국 청년’의 이미지와는 달리 ‘일본측과 가까운 거리’에서 활동하였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넷째로는,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연주와 관련한 안익태의 활동이다. 일본은 1940년 초 서구 몇 나라 작곡가들에게 이른바 ‘일본 황실 존속 2600주년 기념곡’을 위촉한다. 이 당시 재정적으로 곤궁하였던 슈트라우스는 괴벨스(Goebbels)로부터 이와 같은 내용을 전달받은 후 기꺼이 창작에 응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작곡 자체가 즐거웠던 것도 아니고, 약속했던 보수가 일본 정부로부터 지급되었던 것도 아니고, 곡에 대한 평도 좋지 않았다. 이 곡을 살린 것은 안익태였다. 그가 비록 이 곡의 세계 초연자도 아니고 유럽 초연자도 아니었지만, 유럽 초연과 근접한 시기에 빈에서 이 곡을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이 곡은 1944년까지 몇 차례 그의 연주회 프로그램에 등장한다. 어떻게 해서 그가 이 곡에 간여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현재로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이 곡을 지휘함에 있어 아마도 ‘일본인’으로 행세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15]. 그가 슈트라우스와 함께 있는 사진에 관해 지금까지 그 정확한 촬영 연도나 촬영 계기가 확인된 바 없지만, 쿠어트 빌헬름이 편집한 슈트라우스 전기(Richard Strauss persönlich. Eine Bildbiographie, 1999) 속에 그 사진은 <일본 축전곡>을 일본측에 전달할 때 촬영된 사진들과 함께 실려 있다(365쪽). 더군다나 사진 해설에는 안익태가 아예 일본 지휘자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안익태가 슈트라우스와 함께 앉아 논의하고 있는 이 사진은 1938년 작곡 지도를 받고 있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16],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을 어떻게 지휘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라고 보아야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비록 여권상 일본인이었을 안익태였지만, 그가 더블린 연주 시기까지 내비쳤던 한국 독립을 희구하는 발언들이 이 무렵 그에게는 어떤 의미였던 것인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안익태의 1940년대 행적은 <애국가> 작곡가로서의 안익태, <한국 환상곡> 작곡가로서의 안익태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천착이 있지 않고서는 안익태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째서 이 시절 그가 그렇게 ‘협력’을 하였는지, 그와 같은 오해를 사고도 남을 행동을 하였는지 그에게 물어볼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깝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제기된 여러 질문들과 가능성에 대한 해답은 차차 구하기로 하고, 그의 이름이 세계 유명 음악 사전에서 누락되어 있는 현실을 적시하며 안익태 연구의 지상 과제는 ‘그를 부활시켜 그의 음악적 활동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도록 한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1] 이 저작물은 폭넓은 사료를 인용하여 안익태의 삶과 활동에 관한 전반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에 성공하고 있기는 하지만, 종전 자료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종전 자료들은, 신문 기사 등 보도 자료를 제외하고 나면, 신빙성을 인증받기 어려운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로 인해 뜻하지 않게 오류와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 담겨 있다. 이 글에서는 몇 군데 그와 같이 곳이 언급될 것이다.
[2] 진화영씨가 102쪽에 밝힌 곡 해설과 작곡가 이름은 필름 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누군가가 필름을 자료 정리할 때에 기록 카드에다 보속적으로 기입해 둔 것을 것을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필름 자체에 기입되어 있는 작곡가 이름 표기도 진화영 씨가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한국식 “Ik-tae AHN”이 아니라 일본식 “Ekitai Ahn”이다.
[3] 전정임 교수의 책 <안익태> 35쪽에 인용되어 있는 사진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이 책에서는 연도를 1940년도로 표기하고 있으니 이는 시정되어야 한다. 또한 101면의 <1939년 베를린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안익태>라는 사진 역시 재검토 되어야 할 부분이다. 왜냐하면 안익태가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한 것은 1943년 오직 1회였고, 그 밖에 베를린 지역 악단과 연주했던 경우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42년 만주 괴뢰국 창설 10주년 기념 음악회 뿐이었다. 혹시 이 사진은 35쪽 연주회 때의 또 다른 사진이 아닐는지. 왜냐하면 무대는, 35쪽 사진과 비교해 보았을 때, 구 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맞는 데다가, 독일연방 문서 보관소 필름 보관소에서 내가 보았던 영상물 마지막 장면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4] 그러나 이 곡의 실제 길이는 더 길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즉, 영상 중간 부분에서 곡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존재하는데 이는 곧 긴 필름이 편집되어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43년 2월 11일 연주회에서 보다시피, 선곡상으로 보았을 때, 연주회 1부 소요 시간(약 1시간 남짓으로 추정할 수 있음)에 비해 인터미션 이후의 2부를 불과 7분 남짓한 짧은 곡으로 채웠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만주국 경축 음악>은 상당한 길이의 곡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5] 이 연주회들이 안익태가 1940년대에 지휘했던 것들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 프로그램(1943)의 작곡가 해설에서 그가, 위에 언급된 지역 외에도, 스위스에서 지휘한 일이 있다는 점이 언급되고 있으며 또한 안익태가 1944년 2월 23일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방금 전 부카레스트 연주 여행에서 돌아 왔고 다시 연주 여행을 위해 그날 밤 바로 파리로 떠날 것이며 곧이어 바르셀로나로 이동하여 두 차례 지휘하게 될 것임을 알리고 있다.
[6] 책 <안익태>에서 전정임 교수는 <야악(夜樂)>이란 곡이 아악에 의한 작품이라는 설명이 있고 이 곡에 대한 언급이 1940년 로마 연주회 이후에는 전혀 없다는 점에 입각해서 이곡이 <강천성악>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1942년도 연주회 프그램에서 보듯이 <야상곡>이라는 곡은 연속성을 가지고 존재하였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이 곡이 훗날 <강천성악>으로 개명된 것인지 또는 개작된 것인지의 여부 판단은 위의 <야(상)곡> 악보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유보되어야 할 것이다.
[7] 이 연주회에 얽힌 에피소드 및 연주회 프로그램 사본이 앞서의 <월간 객석> 2000년 5월호에 실려 있다.
[8] 안익태의 1944년도 2월 편지에 따르면, 그는 1944년 이 파리 연주회 직전 부카레스트에서, 파리 연주회 직후 바르셀로나에서 지휘(2차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가 없다. 한편, 전정임 교수는 38쪽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안익태가 지휘하는 모습을 촬영하여 독일 선전국이 유럽 각국에 배포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안익태가 바르셀로나에 초청되어 연주회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또 한 번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39쪽 사진을 바로 그 연주회 사진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진의 제목은 ‘1940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콜릭 대회’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안익태가 이 연주회를 위해 바르셀로나에서 있었던 시점으로서 1940년도를 지적해야 하는데, 이 연도와 다시 38쪽 이어지는 문단을 함께 읽으면 어딘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즉, 안익태가 바르셀로나에 있어던 시점을 1940년도로 정하고서 38쪽의 다음 문단을 읽어 내려가면, 안익태와 탈라베라가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는 때(‘그 후’)도, 안익태가 계획 되어 있던 유럽 순회여행을 위해 스페인을 떠났다가 되돌아 와 공항에 내리자마자 탈라베라에게 전화를 걸어 프로포즈한 때도 1940년도 또는 늦어도 1941년도 여름이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결혼한 시점은, 불쑥 시간을 뛰어 넘어, 1946년 여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는 두 가지 의문점이 발생한다. 첫째, 만일 위의 일련의 일들이 불과 1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로서 받아들인다면 안익태가 1940년 무렵에 그렇게 자주 바르셀로나에 갈 일이 있었을까? 둘째, 안익태 기념재단 홈페이지에 따르면 안익태는 2차 대전 막바지에 이르자 스페인으로 피난을 갔고 거기에서 탈라베라와 결혼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탈라베라가 안익태를 알게 된 시점은 차치하고서, 안익태가 탈라베라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스페인으로 피난간 이후로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따라서 안익태가 바르셀로나에 1940년도 있었다는 주장과 두 사람이 1946년도에 결혼하였다는 사이에는 설명되기 힘든 부분이 있지 않는가?
[9] 연주곡목 전체가 무엇이었는지 현재까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10] 물론 바르셀로나 연주회는 2차례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한번의 연주 여행 내에서 발생한 것들이기 때문에 지금 논의에서는 1회 연주회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11] 1942년의 ‘만주 괴뢰국 건립 10주년 기념 음악회’랄지 1943년의 ‘여름밤 음악회’ 가 그 예이다. 따라서 윗 프로그램 상의 다른 연주회들도 그와 같은 ‘이벤트’성 연주회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지만, 아직 연주회 프로그램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에 관해서는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볼 뿐이다.
[12] 안익태는 1944년 편지에서도 슈트라우스에게, 부카레스트 연주회에서 그가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정화”(Tod und Verklärung)를 지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3] 전정임 교수의 책 <안익태> 100, 102쪽에 실린 안익태의 진술은 모두 193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14] ‘한국 아악’을 주제로 한 안익태의 곡은 <강천성악>이기 때문에 앞서 그 기사의 ‘조선 아악을 주제로 작곡한 곡’은 <강천성악>일 것이며, 로리타 안의 진술에 따르면 안익태의 첫번째 교향곡 작품이 <강천성악>이므로 따라서 이미 1936년에 <강천성악>을 작곡하여 힌데미트에게 보여주었을 가능성이 있고, 1940년 이탤리 연주회의 연주곡 중 한 가지가 <야악>인데 이 곡이 ‘아악에 의한’ 작품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강천성악>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전정임. 164~165)은 설득력이 없다. 더군다나 <강천성악>의 작곡연대가 1959년이고 더 이상의 증빙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 한, 다음과 같은 추론이 합리적이다: 힌데미트에게 보여준 ‘조선 아악을 주제로 작곡한 관현악곡’도, 로리타 안이 말하는 <강천성악>(92~93쪽)도 모두 그의 <에텐라쿠>였으며 이것이 훗날 가필 수정되어 <강천성악>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을 것으로 본다.
[15]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는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법적으로 아무 결격 사유가 없는 일본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6] 안익태의 부인인 탈라베라가 쓴 <나의 남편 안익태>(1974, 신구문화사)가 아마도 이 사진과 위와 같은 해설을 담고 있는 첫번째 자료로 보인다.
© 2005 Nov. B. W.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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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논문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됩니다. '안익태'는 제가 다루고 싶었던 주제인데 한 발 늦었네요. 수고 수고!!!
여름 방학때 읽었던 내용 조만간 보내드릴게요, 지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