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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에서 열흘 현 종 헌 1. 원시시대를 찾아서 2004년 1월 10일, 토요일. 강원도 영월. 시내를 벗어나 동강의 리프팅하는 곳에서 우회전하여 산 중턱에 바위를 깎아 만든 외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다 보면 계곡이 나오는데, 다시 그 물줄기를 따라 10리를 더 올라간다. 길이 난 마지막 계곡에서 또다시 오른쪽으로 가파르게 나 있는 좁다란 고샅길을 500미터 정도 더 올라가면 조그만 슬레트 집이 곧 쓰러져 내릴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다. 차를 절벽에 바싹 붙인 채 써늘한 가슴을 안고 눈길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노라면 “곡예사의 첫사랑”이란 노래를 자기도 모르는 새에 흥얼거린다. 그래야 오른쪽의 가파른 절벽 아래 동강을 내려다보면서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다. 조용한 데서 글 좀 써보겠다고 찾아간 집이다. K대 교수가 폐가(廢家) 한 채를 사뒀다가 틈틈이 짬내어 가는 곳이다. 이튿날, 산 속에 나를 내버려둔 채 일행은 떠나버렸다. 우리 야생화 연구 교사 모임 팀과 YMCA의 오지체험 프로그램 사전 답사 팀 등 모두 10여 명이 1박 2일의 여행을 마치고 훌쩍 떠나버린 빈 공간은 을씨년스러웠다. 첫 날은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양철 처마 차양 끝을 가느다란 바람이 스쳐 지나가도 그 소리가 얼마나 나를 놀라게 하는지, 눈꺼풀이 무거워지다가도 얼른 잠에서 깨곤 했다. 열린 부엌 문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내는 굉음(轟音)은 나를 고문하는 것 같았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행이 떠나기 전에 얼른 산에서 땔감을 해왔어야 하므로 갑자기 힘을 쏟다가 허리가 삐끗한 것이다. 길이 5미터가 넘는 굵은 소나무를 여럿이서 잘 끌고 오긴 했는데, 그때 힘을 너무 썼던 것 같았다. 거기다가 물지게로 물도 여러 번 길어 날랐으니 가뜩이나 연약한 내 허리가 성할 리 없었다. 방바닥에 엎드린 채 꼼짝 못하고 독서만 했다. 중국의 젊은 여류작가 샨사의 “바둑 두는 여자”를 읽었다. 명작이었다. 다 읽고 싶었으나, 피곤이 밀려와서인지 자정이 가까워지자 자동 수면이었다. 새벽 6시 반.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일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떨 것 같았다. 내 소설 원고를 집어들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하여 내가 그동안 써놓았던 2,500매짜리 장편소설을 최대한으로 깔끔하게 1차 퇴고(推敲)해 가야 한다. 계획은 구정 전까지 열흘이다. 첫 날은 마음의 부담감 때문인지 진종일 열심히 했으나 300매 정도밖에 못 봤다. 짬짬이 시간 내어 독서도 여러 권 해야 했으므로 일정 계획이 빗나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눈팔지 말고 부지런히 교정에 매달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 생활이 나를 괴롭혔다. 삼시 세때 밥 다 챙겨먹어야지, 아궁이에 불 지펴야지, 설거지해야지, 방 청소해야지, 내 몸 닦아야지, 산에 가서 땔감 마련해와야지, 계곡에 가서 물 길어와야지, 녹초가 되다시피 한 첫날 하루의 일과는 이 생활에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허리의 통증이 점점 심해왔으나 문명사회에서 준비해온 의료보험 카드는 무용지물이었다. 나 역시 제주도 촌구석에서 태어나 모진 고생을 다 겪어내며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곳 화전민들의 생활상은 그야말로 삶의 전쟁을 연상시킬 만큼 끔찍해 보였다. 분당 이마트 옆, 토지공사의 토지박물관에 만들어 놓은 구석기 시대 모형의 밀랍 인형들이 진열대 창을 뚫고 나와 이곳에 모여 사는 것 같았다. 화전민(火田民)을 아시나요? 불 화(火) 자에 밭 전(田) 자를 써서, 멀쩡한 산에 불을 놓아 밭으로 개간해서 생계를 꾸려나가던 백성(民), 뭐 그런 뜻이다. 우리들이 강원도 산간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산 중턱 중간중간에 자리한 집들을 한두 채씩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소위 말하는 화전민이다. 이따금 텔레비전의 “오지 르뽀” 형식의 프로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 그러나 실제로 그들 속에 들어가 생활해 보면 사람 산다는 게 무엇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2. 삶의 전쟁 몇 년 전에 보았던 SBS의 대하사극 “임꺽정”에서 구월산으로 몰려든 임꺽정 일행과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죽했으면 산속으로 도망칠 궁리를 했을까. 오죽했으면 도적질로 생계를 꾸려나가리라 작정했을까. 밤이면 파도소리에 잠 못 들 것 같은 제주도 해안가 마을에서 20대에 과부가 되어 40여 년 간을 홀로 쓸쓸히 사시다 간 우리 할머니의 눈물어린 영상도 그 위에 클로즈업 되어 나타난다. 등불로 쓰는 동백기름을 아끼고자 어둠을 뒤집어 쓴 채 밤을 새셨고, 그 긴 시간을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적적함을 달래셨다. 군대 시절, 깊은 산속에서 훈련하다 보면 간혹 보이는 민가와 그곳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인생들 또한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없는 깊은 산 속에 집이 한 채, 또 재 너머에 한 채, 대열에서 떨어진 낙오병처럼,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것인지 궁금해서 못 견뎠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그들의 운명이었으리라. 문득, 내가 산업체 학급 담임하던 시절에 강원도에서 왔다는 한 여고생의 가공할 내용의 수기(手記)가 생각난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독감이 심했는데, 치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리어카에 어머니의 시체를 싣고 가 산 속에다 파묻었다. 뒤에서 리어카를 밀면서 나는 한없이 울었다.” 그런 식으로 어머니가 계속 죽거나 가출하여 일곱 번이나 새어머니가 바뀌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난 그 학생이 찾은 도피처는 성남의 공단이었고,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의 산업체 학급이었다. 전국대회의 금상이 확정되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수기를 낭송했는데, 발표하는 동안 두 손에 상금 봉투를 꼭 쥔 채 맹랑한 고 계집애는 놀랍게도 눈물 한방울 떨구지 않았다. 지금 내가 머무는 이곳엔, 십 리 되는 계곡 사이에 집이 여섯 채가 있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은 두 채뿐이다.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농사와 장사를 겸해서 사는 노부부와 지금 내가 머무는 집 100미터 위에 50대 홀어미가 살고 있다. 50대 홀어미는 농사지으며 생계를 꾸려나가지만 지금처럼 농한기(農閒期)인 겨울철이면 영월 시내로 나가 산다. 그러니까 지금은 노부부네 딱 한 집이 겨울을 외롭게 지키고 있는 셈이다. 사방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눈을 뜨면 새벽 여섯 시. 원고 좀 다듬고 오만가지 궁상을 떨다 보면 열 시, 밥해 먹고 닦고 하다 보면 해가 떠오르는 열한 시, 오후 한 시면 해가 넘어가니까 요 두어 시간 동안 숨고를 틈없이 하루의 일상을 준비해야 한다. 산에 가서 해 오는 땔감이 제일 큰 걱정거리다. 눈 올 때는 산속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얼마나 삶이 궁핍했으면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이곳에 조사단까지 파견했을까. 하도 살림살이가 짼다고 소문이 나서 실상을 파악하러 나섰던 것이다. 세금 걷기가 어려웠던 관계로 이곳 담당 공무원들이 진정서를 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조사단의 보고 내용이 가관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겨울에 겨울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겨울잠을 자느냐 하니까 하루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주먹만큼의 미음을 쒀서 먹고는 구들에 누워 눈만 말똥말똥 하더라는 것이다.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으려고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고향 제주도에도 여러 차례 기근이 찾아왔지만, 이 정도까지 험악했다는 말은 못 들었다. 그러나 이곳 화전민 촌은 해마다 그랬다는 것이다. 6․25전쟁 난 줄도 몰랐다는 동네가 이곳이다. 3. 나의 조그만 꿈 샨사(Shan Sa). 중국 출신의 여류 소설가. 1972년 베이징 시 생. 8세 때 이미 시를 쓰기 시작하여 9세에 첫 시집 발간. 1989년 “장래가 촉망되는 베이징의 별”로 선정. 1990년 프랑스 정부의 장학금을 받고 파리에 입성. 1997년 프랑스어로 쓴 첫 소설 “천안문”으로 세 개의 권위 있는 상을 휩쓸었고, 세 번째 장편소설인 “바둑 두는 여자”로 ‘프랑스 고등학생이 가장 읽고 싶은 책’에 선정되면서 21세기 벽두에 프랑스 독서계에 샨사 열풍을 몰고 왔다. 나는 축구 신동 호나우두를 보면서 브라질을 부러워했고, 지금 샨사의 소설을 읽으면서 중국을 부러워한다. 참으로 훌륭한 여자다. 프랑스어를 공부한 지 7년 만에 프랑스어로 된 걸작 “천안문”을 쓴 것도 그렇지만 “바둑 두는 여자”라는 대작을 낸 자체만도 대단하다. 나는 소설 한편이 국력을 좌우할 수 있다는 걸 샨사를 보면서 확신했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경구, “문(文)은 무(武)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나도 한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촉망받는 기대주였다. 문예특기생으로 대학을 갔고, 대학 4년 동안 13개의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전국대학생 문예현상에서 소설 ․ 수필 부문 당선 및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술발표대회에서 2군데 입상, 전국 독후감대회의 대상 ․ 금상 수상 등은 나의 오랜 자랑거리이다. 학술발표대회 상은 웬만한 학생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번 타기도 힘든 상이다. 적어도 23세 때에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서 최종심에 올랐을 때만 해도 작가로서 정상의 길은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는 듯 했다. 주변 사람들은 작가로서 나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로부터 사반 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25년이란 적잖은 세월 속에서 무엇을 해 왔던가. 하지만 나는 그동안 인내하는 법을 배워왔다. 한권의 시집과 한권의 시산문집. 내가 이룩한 조그만 업적이지만 욕심내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아직까지도 무명의 길을 걷고 있지만 길거리에서 1000원짜리 떨이 책에 섞여 팔려나가지 않을 만큼은 썼다고 자부한다. 1987년. 내 나이 스물 아홉 살.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소설가 윤후명 님과 현재의 아내. 두 사람은 내게 한 가지 길을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한 남자는 전업 작가의 길을 가라고 제촉했고, 다른 한 여자는 안정된 직장을 얻어 자기와 결혼하자고 보챘다. 20대 막바지에서, 나는 갈림길에 섰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곤 3년 간 다니던 무역회사를 나와 안산시의 한 지하실방에 틀어박혀 교사 순위고사를 준비했다. 봄이었으나 지하실 속은 겨울이었다.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그동안 머릿속에 구상해두었던 장편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여름부터 11월까지 공부하여 순위고사에 합격했고, 학교 발령받을 때까지 집필에 전심전력을 기울인 결과 원고 3,200매짜리 장편소설 “공포의 나라”를 불완전하게나마 써낼 수 있었다. 학교 생활하다 시간 나면 나머지 부분을 끝맺자고 했는데, 도중에 대학원 마치고 뭐 하고 하다보니 7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초조해 하고 있을 때, 모 신문사에서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광복 50주년 기념 장편소설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고 기지개를 폈다. 당선보다는 이 기회에 원고나 마무리 짓자며 남한산성 밑에 있는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발표 결과 최종심에도 못 올라간 낙방 작품이었지만, 일단 초고(草稿)를 완성시켰다는 데에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이게 웬 걸. 1986년, 산본에서 성남으로 이사하는 과정에서 286컴퓨터의 6.5인치 디스켓이 모두 구겨져 망가진 것이 아닌가. 백업 받아놓은 디스켓까지도 쓸모없이 돼 버렸다. 전엣 것은 프린트 해놓았으므로 재생이 가능했지만, 나중에 고시원에서 마무리한 1,000매짜리 원고가 문제였다.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다. 농약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3년을 넋 놓고 지내다가 IMF 사태가 닥치자 그때부터 다시 예전의 소설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틀은 그 전 것이었으나 소재는 관동군 731부대에서 IMF사태와 바둑, 야생화, 이런 걸로 바꿨다. 일본 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찌(森村誠一) 등에 의해서 관동군 731부대의 내용이 너무 많이 소개되었다는 불안감도 작용했다. 제목도 “나는 낯선 시간 속으로 간다”로 바꿨고, 포스트 모더니즘 형식을 취했다. 다시 3년 간 꾸준히 쓴 결과 이젠 대충 완성이 되었다. 이번이 첫 교정이다. 이런 식으로 금년 겨울까지 몇번 교정을 보면 내년이면 나의 또다른 분신(分身)이 탄생할 수 있을 것 같다. 1987년, 이 작품에 손댄 지 18년만의 일이다. 나는 긴 시간을 음지의 산 속에 갇혀 지내온 셈이었다. 이젠 좀 빛이 보이는 듯 하다. 이제는 어느 누가 나더러 제주도 촌놈이 서울 와서 출세했다고 빈정거려도 불쾌해 할 것 같지 않다. 조그만 꿈을 이루기가 이렇게 힘든데, 중국의 젊은 소설가 샨사는 넓은 스케일과 꼼꼼한 문체, 빈틈없는 구성, 디작(多作) 등으로 한 중년의 애숭이 소설가의 소박한 야망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4. 고뇌하는 문명 나는 열흘 간이지만 짧은 기간 동안 이 산속에서 살면서 줄곧 분당신도시를 생각했다. 1960 ~ 70년대의 가난했던 시절을 보냈던 우리 세대라면 이런 환경에 처했어도 옛 시절을 떠올리며 그런대로 적응하겠지만,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은 하루도 못 버틸 것 같다. 이젠 군대까지도 환경이 나아졌다고 하니 인간으로서의 극한상황을 체험할 곳이 없다. 허약한 군상(群像)들의 모습뿐이다. 환경이 좋아졌을 때 로마는 멸망했다. 노예들 덕택에 로마인들은 고급 문화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으나, 막상 전쟁이 터졌을 때 노예들은 목숨을 걸면서까지 적의 침입을 막아주지 않았다. 현대의 전쟁은 버튼으로 시작해서 버튼으로 끝난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전자전쟁이다. 그러나 최후에 적의 심장부에 깃발을 꽂는 것은 땅개, 즉 육군의 몫이다. 미국 - 이라크 전에서 보듯이 아무리 초현대식 미사일로 적을 초토화시켰어도 마지막 남은 게릴라를 무찌르고 적진의 중심부에 선 것은 육군이었다. 그들은 산악 오지에서 인간의 목숨이 찢겨져 나가는 상황을 감내해 낸 특수부대 용사들이었다. 우리에게, 죽을 때까지 쾌적한 환경 속에서 살다 가라는 법은 없다. 언제나 열악한 환경이 닥칠 것을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 현재까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안 원자력 폐기물 사태. 정부와 부안 주민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보면서 어느 한쪽에 대고 손가락질할 수가 있겠는가. 없다.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이를 보다못한 서울대의 핵 관련 교수 몇이 핵 폐기물을 서울대 뒷산인 관악산에 묻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는데, 그것도 우스꽝스럽다. 그들의 주장처럼 핵 폐기물이 인체에 전혀 해롭지 않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 다음이 문제다. 유사한 사건인데도 홍콩에서는 17명 부상인데 한국에서는 100명 넘는 사망자가 나온 대구 지하철 참사, 300만분의 1이라는 엄청난 확률을 뚫고 침몰한 서해 페리호 사건, 상상할 수 없는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무너진 모습, 거기다가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정치인들의 천문학적 액수의 횡령 등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해결책은 딱 하나뿐이다. 원자력 발전의 전력량 공급만큼을 전국적으로 줄이는 수밖에 없다. 옛날처럼 TV의 낮 방송을 없애고, 밤 열두 시면 거리 통행을 금지시켜 전국적으로 전력 공급을 막는다. 여름에는 에어콘을 틀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만들어 전력을 아낀다. 이래야 온 국민들이 뭔가 느끼고 공존의 참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핵 폐기물을 처리하지 못해 전력 공급을 끊겠다는데 어느 누가 머리띠 두르고 고속도로를 점거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너무나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하룻밤 전력 공급이 끊어지자 냉장고 속의 고기가 상했다며 소송을 거는 일이 벌어졌다. 하루만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머리를 못 감아 내 머릿결이 손상을 입었다며 소송 걸 날도 올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많은 부분을 반성해야 한다. 에어콘 켜지 않고도 한여름을 나봐야 하고, 샴푸 말고 비누로 머리 감는 습성도 키우고, 쓰레기 분리수거에도 적극 참여하는가 하면, 그늘진 곳에서 전쟁하듯 살아가는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 아량도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산속에서 힘겹게 겨울을 나는 화전민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지혜일 것이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늘 우리들 곁에 있다. 5. 지혜의 골짜기에서 간밤에 눈이 소리없이 내렸다. 하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산과 계곡이 몹시 아름다웠으나 다칠까 두려워 문밖에 꼼짝하질 않았다. 오후 두 시만 넘어가면 산기슭으로 어스름이 깔려오고, 먹이를 못 찾은 야생동물들이 음산한 소리를 뿌리며 내 주변을 맴돈다. 길들여지지 않은 산속 생활의 공포감에 떨어서인지 패트병에 쏟아놓은 내 오줌 빛깔마저 뻘겋다. 내가 글 쓰는 곳을 찾는다고 했을 때 자신의 이 집을 추천했던 K대 교수가 나중엔 은근히 꼬리를 내렸다. 그때 나는 기분이 찜찜했다. 시골에 별장 하나 갖고 있다고 재는 건가, 두어 달 좀 쓰게 하면 어디가 덧나나, 하면서 그를 향해 속으로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여기 와서 며칠 살아보니 왜 빌려주지 못하겠다고 뺐는지 이해할 만 했다. 곧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운 곳이다. 영월에 진입할 때, 점심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장릉에 들렀었다. 그곳에는 식당과 여관, 각종 민속 공예품 가게 등이 즐비했다. 장릉에서 볼 것이라곤 무덤 한 기뿐인데도, 단종 한 사람이 여러 사람 먹여 살리는구나, 하고 속으로 웃었었다. 그러나 이곳 화전민 촌은 어느 누구도 먹여 살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곳이다. 융성했을 때는 5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이곳으로 시집 와서 40년 간을 살았다는 아랫집 할머니는 25여 가구가 살았던 시절을 회상했다. 지금은 사시사철 이곳을 지키는 집은 그 할머니네뿐이다. 오죽했으면 주민들조차 이 땅을 버리고 떠났을까. 나라 세금 내는 데도 보탬이 되지 않는 이곳은 아무에게도 생의 찬미의 노래를 들려주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곳을 오래도록 기억에 각인시켜 두고 싶다. 국가에서 민속촌을 보존하려고 애쓰듯이 이곳도 그 형태를 먼 훗날까지 남겨주었으면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혜를 선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밤에 오줌 누러 자주 들락거리다 보면 바깥 추위에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실내에서 패트 병에 오줌을 담는다. 요강의 필요성을 알았다. 물 길러 갈 때 양동이 하나면 힘들 뿐 아니라 손도 시려웠다. 차라리 두 개의 양동이를 등에 지면 편하고 많은 양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 물지게는 필수품이었다. 분당 정자동의 토지박물관(토지공사)이나 오리역의 주거문화관(주택공사)에 가서 굳이 박제된 농촌 생활을 살펴볼 필요가 없다. 이곳에 며칠만 있어 보면 자연히 터득할 수 있다. 가렴주구(苛斂誅求)에 견딜 수 없어 세금 안 내기 위해 도망나온 사람들, 부족 집단의 따돌림에 못 이겨 쫓겨나온 사람들, 모두가 하류층 인생들이다.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이 화전민 촌이다. 민초(民草)들의 역사까지 배울 수 있다. 나는 여기 들어오기 직전에 보름 동안 서울대학교에서 사고력(思考力)에 대한 연수를 받았다. 그곳 교수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한껏 부풀어오른 자부심 저너머로는 은근히 빛바랜 자만심도 묻어났다. 나는 지금처럼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는 칼을 옆에 두고 사생결단하는 심정으로 이 잘난 원고를 메꿔 나가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만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대한민국의 최우수 학부를 지킨다는 명예심으로 끼리끼리 결속력을 맺으면서 이 세상 편히 살아가는 방법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묘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니 아니꼬우면 명문 대학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이 어디 꼭 그것만이 전부일까. 그걸 되돌아보게 하는 곳이 이곳 화전민 촌이다. 내가 머무는 이곳 윗집에 사는 50대 홀어머니의 외동딸은 지금 분당의 모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 병원은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녀를 생각하면 문득 내가 산업체 학급 담임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주간은 9시부터, 야간은 오후 4시부터, 산업체는 오후 6시부터가 수업 시작이다. 학교도 3부제로 운영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성남시내 실업계 고교에 야간․산업체가 모두 없어졌지만, 그게 불과 5 ~ 6년 전의 일이다. 산업체는 소속 직장이 있어야 입학이 가능했고, 수업료는 면제되었으며, 구성원들은 60 ~ 70%가 강원도 출신이었다. 어쩌면 요 윗집 딸은 내 제자였는지도 모른다. 학생들과 열심히 면담했지만 이 부분만은 꼭 숨긴다. 자기의 고향 이야기라든가 살아온 방식, 식구들과의 대화 내용, 그래서 껍데기만 선생과 제자인 관계, 나는 그 비밀들을 여기 와서 알게 된 것이다. 화전민 사회가 해체되면서 도시의 산업체 학급이 문을 닫았음도 여기 와서야 알았다. 지금쯤, 요 윗집 딸내미는 문명의 도시 한 복판에서 처연했던 유년기의 기억을 안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세상 사람들을 저주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건, 우리들이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6. 산 속의 단상(斷想) ◆ 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한 시까지, 해 보는 시간 두 시간. 필리핀 정글 속에선 일본군 병사가 50년 간을 숨어 살았다고 하는데, 설마 해를 쪼이지 못한다고 해서 무슨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여담이다. 그때 일본군 병사가 하는 말 “(태평양) 전쟁, 끝났어요?” ◆ 에베레스트 등정대를 보면, 한두 명이 정상을 밟는데, 무슨 짐이 그리 많은지 포터(현지 짐꾼)가 줄을 잇는다. 이 산속에 와서 열흘을 산다 해도 살림은 살림이다. 갖출 건 다 갖추어야 한다. ◆ 이런 집이 폐가가 된다면 흙담에 나무기둥, 바위 온돌, 이런 것들이 나중엔 모두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데, 분당 신도시가 버려졌을 땐 그 많은 시멘트와 냉장고, TV, 컴퓨터 같은 문명의 흔적들은 다 어떻게 처분될까. ◆ 내가 가끔 사용하기 위해 이 집을 헐값에 산다면 제일 관리하기 힘든 곳이 화장실일 것이다. 똥 치우는 게 걱정. ◆ 밤엔 대변보기 위해 화장실 가기가 곤란하다. 멀고 춥다. 그래서 낮에 속을 비워야 하는데, 대변 마렵지 않아도 억지로 힘을 준다. 쑥쑥 잘 내려간다. ◆ 눈이 왔을 때는 사람과 동물의 흔적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 집 주변에 발자국이 찍힌 걸 보면 괜히 두려워진다. 특히 동물보다도 사람 발자국이 더 무섭다. ◆ 볼펜이 다 떨어졌을 땐 참 암담하다. 올 때, 여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글 쓰는 사람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볼펜 한 자루가 없으면 모든 걸 포기하고 하산해야 한다. ◆ 괴한을 만났을 때 젤 먼저 노릴 것 같은 고급 노트북 컴퓨터. 혹시나 해서 가져와 봤는데, 역시 강력한 해결사 노릇을 해준다. 볼펜이 없어 걱정하다가 노트북을 보면서 무릎을 친다. 원고가 하드 디스크에 깔려 있어서 작업을 연장할 수 있고, 새로운 원고도 볼펜없이 쳐넣기만 하면 된다. 밤이면 형광등 안 켜서 전기세 아끼므로 일석이조(一石二鳥)다. 현대는 컴퓨터가 옆에 있지 않으면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 마지막날 하산할 때는 못쓰는 장판지를 이용해 썰매를 만들어 짐을 날랐다. 편했다. 알래스카의 개썰매를 응용했다. 산 속에 살아도 머리를 써야 고생을 덜 한다. ◆ 뜨거운 솥에 손목을 데었다. 아파 쩔쩔 매다가 얼떨결에 그 자리에 소주를 부었다. 나도 모르게 생각난 민간요법. 궁하면 별짓을 다한다. ◆ 동물의 겨울잠을 실험해 본다. 먹고 자고 가만히 눕는다. 하루에 한 끼니로도 견딜 만하다. ◆ 날짜 지나가는 감각이 없어지자 벽에다가 “바를 정”(正) 자를 써서 표시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 생각난다. ◆ 이틀을 머리 안 감으면 가려워서 미칠 것 같다. 그러나 물이 아까운 곳에서는 닷새도 견딜 만하다. 머리 안 감아 긁는 것도 마음의 병인 듯 하다. ◆ 거울(鏡)은 어디 가나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서부터 역사는 시작된다. ◆ 문득 제주도로 귀양갔던 조선의 15대 임금인 광해군을 생각한다. 유배된 자는 어명(御命)이 떨어지지 않는 한 자기 마음대로 생활할 수가 없었다. 광해군도 지금의 나랑 똑 같이 생활했을 것이다. ◆ 눈 온 날, 2km 떨어진 내 차 주변에 발자국을 많이 남겼다. 일행이 많은 척 해야 누군가가 쉽게 차에 손 대지 않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왜적들에게 아군이 많다는 걸 알리기 위해 부녀자들을 시켜 강강수월래를 부르게 했다. 나와 비슷한 작전이다. ◆ 영국의 사학자 토인비(A. J. Toynbee)는 역사 발전의 원리를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으로 설명했다.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지방에서는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기 위하여(도전) 바삐 움직여야 하고(응전), 그래서 문명이 발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적당해야지 이곳처럼 자연의 도전이 워낙 거세면 응전을 포기하게 되고, 따라서 문명은 제자리걸음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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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습니다. 지혜가 번득이는 것 같습니다. 벌써 좋은 교사로 인정 받고 있으니 유명한 작가로 거듭 났으면 좋겠습니다. -섬초롱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리 좋은 충고 주신 얼레지 님에게도 깊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