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중계란 실제로 경기장에서 뛰는 것만큼 힘든 일이 아닐까.
선수 개개인의 정보와 특징, 수시로 변하는 현장 분위기 등을 일일이 체크해 생생하게 안방까지 전달하려면 웬만한 선수 못지 않은 집중력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거기에다 과열된 관중들의 열기가 합세한다면 완급조절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축구중계 역시 일종의 전쟁에 비유될 만하다. 아나운서 최승돈씨는 그런 전쟁터에 갓 뛰어든 신예전사이다.
1994년 KBS에 입사한 최승돈씨가 처음 했던 방송은 축구가 아닌 야구중계였다. 그것도 메인 아나운서가 아니라 이원으로 생중계되는 다른 경기장의 경기를 공수 교대 시간에 잠깐씩 알려주는 역할이었다. 최승돈씨는 그 일을 '야구중계를 중계하는 일'이었다고 표현한다.
"스포츠를 두루 좋아하긴 하지만 처음부터 스포츠 프로그램만 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1996년 올림픽 때 큰 기회를 잡았어요. 당시 메인 캐스터였던 서기원 선배님 후임으로 마이크를 잡게 되었는데, 20대 후반의 신출내기였던 저로서는 엄청난 경험이었죠."
그는 이후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축구에 대한 호감과 스포츠 중계 노하우를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떠난 이 유학 경험은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 축구는 문화적 행위
축구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은 그야말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축구가 생활 속에 뿌리내린 나라였다. 매 경기 때마다 스탠드를 꽉 메우는 관중들의 열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곳곳에 축구용품 매장과 축구 카페들, 그리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미끈한 잔디구장들이 즐비해 있는 모습은 동양의 한 변방국가에서 날아온 젊은 방송인의 축구에 대한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말았다.
최승돈씨는 축구가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닌 거대한 문화적 행위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신선한 충격의 여파 속에서 최승돈씨는 축구를 자신의 삶 깊숙한 곳까지 단숨에 빨아들인다.
실례로 영국에서 쓴 그의 석사학위논문 제목은 '축구중계에 나타난 국가 정체성의 문제'이다. 그만큼 그는 축구를 보다 거시적이고 문화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넓힌 것이다.
"축구는 이데올로기일수도, 문화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축구를 그런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영국생활에서 실제로 많은 컨텐츠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행을 아주 좋아해요. 대학 시절에는 중국에서 한 달 정도 산 적도 있어요.
축구를 통한, 또는 축구에 담긴 여러 가지 문화적 의미, 그리고 삶의 이야기들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거기에는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 무궁무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최승돈씨는 영국에서 축구 체험을 할 때마다 일기 형식의 글을 썼다. 그 글들을 20∼30명의 지인들에게 안부도 전할 겸 이메일로 띄우다보니 축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보다 명확하게 정리되었다고 한다. 축구장, 축구 매장, 축구 카페, 그리고 유로 2000 같은 국제적인 대회를 참관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정리한 그 글들은 이른바 '선진 축구문화의 르포'의 성격을 띠고 있다. 몇몇 축구 사이트에 칼럼 형식으로 연재되기도 했던 그의 글들을 모아 최승돈씨는 조만간 책을 한 권 발간할 예정이다.
'아나운서 최승돈의 축구세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 책의 제목은 '월드컵도 하는데 축구장 하나 살까?'이다.
* 비바 코리아, 비바 월드컵
얼마 전 신설된 KBS 1TV의 <비바 월드컵>은 최승돈씨가 요즘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월드컵 풍물기행>이란 프로그램도 있지만, 그가 <비바 월드컵>에 남다른 애정과 정열을 기울이는 건 축구에 투신하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그가 메인 아나운서로 기용된 첫 축구전문 프로그램인 까닭이다. 최승돈씨는 그 프로그램에서 요즘 축구팬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히딩크 감독을 직접 인터뷰하기도 했다.
"전 처음부터 히딩크 감독을 신뢰했어요. 히딩크 감독을 직접 만나 본 결과 저의 기본적인 신뢰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더군요. 주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소위 '농땡이'도 아니구요. 그는 월드컵에서 4강까지 진출해본 경험이 있는 감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월드컵이 어떤 대회인지를 한국의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고, 거기에 대비해 우리 대표팀이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서 있습니다. 굉장히 프로페셔널한 사람이죠."
최승돈씨는 아직 우리 나라 국가대표팀의 A-매치 경기를 중계해본 경험이 없다고 말한다. 추측컨대, 아직 '방송짬밥'이 모자라서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내년 월드컵에서는 그가 하는 중계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물론, 전인석, 서기철 등 쟁쟁한 선배 아나운서들이 자리를 버티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의 축구중계방송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전인석 아나운서가 차분하면서도 정겨운 어조로 게임의 밀도를 부드럽게 완급조절하고, 서기철 아나운서가 특유의 논리와 폭넓은 안목을 바탕으로 다이내믹한 목소리 톤을 순간마다 폭발시킨다면, 그의 특기는 게임 외적인 자잘한 소품들을 활용해 경기를 보다 다채로운 각도에서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그건 문화적인 관점에서 축구를 바라본다는 그의 기본 컨셉이 효과적으로 방송에 투영된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문화 월드컵의 선봉에 서 있는 아나운서이다.
* 아나운서 최승돈의 축구실력은?
고려대 영어교육과 87학번인 최승돈씨는 홍명보 선수와 동기동창이기도 하다.
고대 방송국출신이자 소위 '열혈 고대맨'이라고 자처하는 그는 요즘 고려대 축구부와 학교 방송국간의 축구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 코칭 스태프와도 틈만 나면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 축구스타의 산실이랄 수 있는 고대 축구부와 고대 방송국간의 축구시합이라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대 축구부의 경기를 고대 방송국이 중계한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두 집단은 기회가 날 때마다 축구장에서 축구공을 사이에 놓고 만난다. 누가 보아도 엽기적인 이 경기는 축구부 팀이 먼저 15점을 접어준 상태에서 방송국 팀이 한 골만 성공시키면 무조건 승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방송국 팀이 승리한 건 단 한번, 그것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할 일이 없어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축구부 골키퍼가 간만에 날아온 공을 우산으로 쳐내려다가 실수로 자기편 골대로 밀어 넣는 바람에 이겼다는 것. 어쨌거나 그는 이런 행사가 자칫 폐쇄적일 수 있는 선수와 비선수 간의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어 보다 대중적이고 폭넓은 스포츠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역시 그의 석사논문 주제의 어떤 부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토록 축구를 사랑하는 최승돈씨의 축구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그러나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한국축구의 루키 이천수와 말쑥한 차림의 최승돈 아나운서가 비 오는 어느 날, 각기 다른 유니폼을 입고 축구장에서 '맞장 뜨는' 모습을 상상해 봄으로써 해답을 찾는 게 좋을 듯하다. 아나운서 최승돈의 축구실력은 방송가와 축구계의 공공연한 극비사항이니까.
프로필
학력 고려대 영어교육과 졸업.
영국 Cardiff University 언론학 석사.
1994년 KBS 입사.
주요 경력
<스포츠 중계석> <스포츠 파노라마> <애틀랜타/시드니 올림픽 중계방송> <방콕 아시안 게임 중계방송> <감동 깜짝쇼> <행운의 일요특급> 등 진행
현재 <비바 월드컵> <월드컵 풍물기행>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