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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제2강 學而편 2
제9절
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증자왈, 신종추원, 민덕귀후의.
ㅇ 愼이라는 글자는 원래 뜻이 참 진(眞)이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옆에 마음 심(心)이 붙어 있는 것은 마음을 붙이지 않은 참 진 자가 독특한 하나의 글자로서 뜻이 바뀌니까 바뀐다기보다는 넓어지니까 마음 심 자를 붙인 것에 불과하구요. 몸과 마음이 일치되도록 하는 것이 眞 아닙니까? 몸과 마음이 일치되도록 하는 마음가짐, 자세 그런 것을 愼이라고 하니까 단순히 삼가하다 이런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굳이 삼가하는 것도 의미를 따지고 보면 자기 몸으로부터 마음이 멀리 달아나지 않도록 단도리를 잘 하는 것, 그것이 삼가하는 것이겠지만 보다 깊게 본다면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도록 애쓰는 행위, 애쓰는 자세 그런 것을 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ㅇ 終이라는 것은 임종에 있는 사람, 즉 죽어가는 사람 또는 막 죽은 이, 임종자, 생명을 끝내는 돌아가시는 사람이죠. 돌아가신 분에게, 그 분을 보면 반드시 삼가서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마음과 몸을 일치해서 그 분을 대하고,
ㅇ 遠이라는 것은 이미 떠나 가신 분이죠. 돌아가신 지 한참 되신 분이죠. 쉽게 말해서 遠과 終 다 돌아가신 분인데, 終이라는 것은 아직 祭를 받지 않는 분이고 遠이라는 것은 기년제, 1년 제사를 이미 받아 드신 분 이상, 돌아 가신지 오래 되신 분이죠.
ㅇ 해서 지금 막 돌아가실려고 하는 분을 대할 때는 내 몸과 마음이 한 가지로 되도록 애쓰고, 돌아가신 지 오래 되는 분은 늘 그 뜻을 쫓는다면 民德歸厚矣, 사람들의 진실된 마음이 참마음이 두텁게 돌아올 것이다. 그 두터움이 바로 돌아오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두터운 데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도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려 애쓰고 돌아가신 지 오래 되신 분일지라도 그 뜻을 쫓으며 애쓴다면 사람들의 진심이란 자연히 두터운 데를 향해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두터운 것이 大學에 나왔던 其所厚者에 薄하고 其所薄者에 厚하는 本末에 해당하겠죠. 사람들의 진심이란 결국은 뿌리를 향해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愼終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놓고 본다면 상례를 잘 치르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고 유교에서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겠죠. 追遠은 제사를 잘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겠죠.
ㅇ 이 문장은 쉬운 문장으로 그렇게 특별한 해석상의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깊이 생각해볼 문제가 있겠죠. 왜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되는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나의 덕목으로 잡으셨는지, 돌아가신 분의 오래된 뜻을 쫓는다는 것이야 역사적 계승을 한다는 의미니까 바로 이런 면에서 유교라는 공자님의 학문과 그의 어떤 내면의 깊은 세계가 상당히 기마종족과 가깝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追遠이라는 것은 돌아가신 분을 追從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고 과거에 대한 단절보다는 과거에 대한 연속이 오히려 그 새로움을 낳는다. 바로 이런 신종추원하는 입장과 연결되는 것이 溫故以知新이겠죠. 온고이지신이 느닷없이 나오면 단순한 사람의 마음자세라고만 여겨지지만 이런 구체적인 행위 그걸 통해서 결국은 온고이지신이 가능하다. 이런 면에 따라서 신종추원이란 것도 새로운 것, 다가올 것을 알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자세죠. 단순히 과거를 답습하기 위한 자세가 아니라, 그런 면에서는 많이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ㅇ 앞 문장 君子不重則不威---가 하나의 정리부분이라고 한다면 앞의 부분에서 자기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으로써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사적인 문제에서 고침을 애쓴다. 여기서는 지나간 것을 살펴보라는 것이죠. 신종추원은 단순히 돌아가신 분(막 돌아가신 분, 돌아가신 지 오래된 분)에 대해서 예의 한다는 의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죠. 그것을 충분히 내 몸과 마음을 모아서 정리를 해본다라는 의미가 있죠.
한 시대를 분명하게 정리를 하고 넘어간다, 지금은 보면 과거의 시대, 과거의 어른들을 무시를 하면서도 실제로 과거의 시대를 정리를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뒤집어서 보면 과거의 이해가 지배가 되거든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우리도 젊은 사람들이지만요) 우리 한국에서 대개 해방전이나 한국전쟁 전을 중심으로 전후세대, 전전세대 그러잖습니까. 2차대전이나 한국전쟁을 이렇게 어느 것이 기준인지는 참 모호한데요. 어떤 경우에는 한국전쟁이 되었다가, 어떤 경우에는 2차대전이 되었다가 하지만, 그 전전세대를 무조건 비판하거든요. 하나도 인정하지 않을려 하거든요.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까? 그 대신 오히려 거꾸로 그 사람들의 논리들이 더 많이 남아있죠. 묘한 현상이죠. 그래서 오히려 충분히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 극복하거든요. 과거의 그런 면을 따르려고 하므로써 극복할 수 있다라는 면, 이런 면이 현실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ㅇ 앞에 것(제8절)은 자기 개인의 과거에 의해서 현재가 지배받지 말 것을 결론으로 내리지 않습니까?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고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현재의 내가 지배받지 않는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자기로부터 오랫동안 지배받는 것은 바로 고칠 것을 그 순간에 못 고치고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過則勿憚改와 愼終追遠이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 내부의 자기 과거로부터 자기 업연이나 자기 행위나 그런 것으로부터 지배받는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것에 비해서 신종추원에서는 사회적인 과거에 의해서 지배받지 말라는 것이죠.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과거를 소중하게 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반성을 하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듯이 과거의 자신을 몽땅 없는 것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안되거든요. 오히려 새로운 자기가 창조가 안되고, 또다른 과오를 낳을 뿐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도 그런데 문장이 이렇게 와 있으니까 전혀 다른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10절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자금문어자공왈, 부자지어시방야, 필문기정. 구지여, 억여지여.
子貢曰,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자공왈, 부자온량공검양이득지. 부자지구지야, 기저이호인지구지여.
ㅇ 사회적인 참여의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에 있어서 갈등에 관한 부분을 나름대로 정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메시지(?)는 조금 넘는 것 같고 약간 불완전한 형태로 제자들의 상호대화를 통해서 그것도 이 대화에 참여했던 子禽과 子貢은 물론 높은 수준의 공자님의 수준에 못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아직 공부가 덜 됐을 때에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조금 이야기가 설 익었습니다만 보면은 ‘子禽問於子貢曰’ ‘夫子’ 선생님께서는 ‘至於是邦也’ 이 지방에, 이 곳, 방이라는 것은 옛날 내 땅이요 하고 국경에 표시하는 국경선, 일종의 국경을 나타내는 푯말 그것이 邦이니까요. 그래서 결국 정치적인 단위입니다.
ㅇ 지방이라고 표현할 때 요즘 이 표현을 많이 쓰지만 실제로 지방이라고 할 때 이 표현을 쓰는 것은 물론 행정구역상 쓰면 말은 되는데요. 보통 이것은 내 나라라는 의미에서 기둥을 말뚝을 박은 것을 邦이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이런 邦을 세울 때에 죽은 나무를 가지고 세울 수도 있고, 돌을 가지고 세울 수도 있고 때로는 산 나무로 세우기도 했지요. 그 때 산 나무로 세웠던 것이 社稷할 때 사로 연결됐지요. 과거에는 오히려 산 나무로써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우리가 지금 성황당에 가면 성황당 나무들을 보통 모시잖아요. 한자로 번역해서 서낭당이 좋을지 성황당이 될지 말입니다. 서낭당에 계시는 나무들이 과거에 말하면 다 邦이죠. 일종의 邦이죠. 여기는 우리 지역 하고 알리는.
ㅇ 뒤에 邦을 나무로 하는 예가 ‘방군수색문 관중역수색문‘ ‘누가 묻기를 관중은 예를 압니까? 하니까 관중이 어떻게 예를 아느냐, 방군이 제나라의 임금이 나무로 그렇게 邦을 세우니까 관중도 되는대로 나무로 세웠으니 관중이 예를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다음 관중이 검소합니까? 하니 관중이 어디 검소하냐, 관중은 임금이 외교를 하기 위해서 중간에 중요한 길목에다가 별장을 하나 지었는데 관중 또한 그렇게 별장을 지었으니 어찌 검소하다 하겠는가.’ 해서 관중을 비판해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번 더 나옵니다.
ㅇ 선생께서 이 나라에 이르셨는데, ‘也’라는 것은 그런데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 나라에 이르셨는데 必聞其政,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를 들어보십니다. 여기서 ‘是’라는 것은 꼭 이 나라 ‘this’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께서는 어느 나라든지 대충 그 나라에 이르시면 반드시 정사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시더군요. 그 이유가 뭘까요 하고 물어보는 거죠.
ㅇ ‘求之與, 抑與之與’ 그렇게 정치를 듣고자 하는데 그러한 것이 그런 자리를 정치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선생님께서 구하신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그런 기회가 주어진 건가요. 누가 준 건가요. 공자만한 분이 이미 명성도 알려질 만큼(춘추시대에) 알려졌고 그런 분이 가면 그 당시 정치인들이 눈 앞에 있는 정사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국가의 대계 같은 것을 물어보고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을 텐데요. 이를 가만히 지켜보니까 공자가 돌아다니면서 그런 위치를 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위치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인지 요게 의문스러웠던 모양이죠. 자공이 조금 선배격이니까 그리고 子貢이 이 대답을 할 무렵에 子禽은 공자를 따라다니면서 밥하고 이런 정도의 처지에 있었거든요. 아직 제자로서 높지 않은 반열이었어요. 참여한 지 얼마 안되는 반열이었고, 그리고 자공에 비해서 마치 이렇게 보면 비슷할 거예요. 자금과 자공과의 관계는 꼭 그렇게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자공은 오조 홍인의 원 제자였던 신수에 해당되는 사람이라면 그만틈 많이 배웠고 또 정통적인 과정을 거쳤고 그런 사람이라면 자금이란 사람은 육조 혜능에 해당되는 배운 것도 별로 없고 단순한 것을 보고 이것 굉장히 촌스러운 질문이거든요. 이런 질문을 툭 던지고는 맨날 어떤 면에서는 요즘말로 구사리나 먹고 그러다가 배운 것 없이 앞에 “나는 그가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배웠다고 할 것이다”라고 한 삶이 자금이예요. 자금과 안희 둘 중에 한 사람인데 안희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자금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안희라는 사람은 무식에서 시작해서 나중에 유식까지 되고 나름대로 행실에서까지 깨친 업을 이룩했던 사람인데 비해서 자금은 끝까지 문자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자금이란 사람의 뒷날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고 얼마나 오래 살다 갔다, 언제 갔다 하는 것은 불분명하고 그렇습니다.
ㅇ 그래서 대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자공께서 대답하시기를 선생님께서는(이 해석이 여러 가지 입니다) 溫良恭儉讓해서 得之, 溫良恭儉讓 다섯 가지를 다해서 그런 것을 얻으셨으니 이렇게 해석하기도 하구요. 溫良恭儉讓 이 다섯 가지가 다 以자에 걸리는 것으로 보는 거지요. 以는 …따라서, …가지고 이런 뜻 아닙니까. 도구격 또는 자격격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溫良恭儉讓에 따라서 그런 것을 얻으셨으니 그렇게 하실 수 있었으니 ‘夫子之求之也’ 선생님께서 구하신 것은 이 때 ‘之’자는 명사절을 만들어주고 있는 거죠. ‘之’용법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구하심은 이렇게 해석하면 좀 곤란하구요.
ㅇ 선생님께서 구하신 것은, 구하시는 일은 ‘其諸異乎人之求之與’ 其諸(기저) 諸가 之於 약자일 때는 저로 읽습니다. 其之於 ---에, 其---與(乎)는 maybe, must와 같은 강한 추단의 결론이죠. 자기 일이 아니니까 아마도 다를 것이다. 뭐가 다를 것이냐. 人之求之, 다른 사람들이 그런 위치를 구하는 것과는 다르시지 않겠나, 諸는 해석상에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저를 빼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죠. 奇異乎 이렇게 해도 큰 문제는 없죠. 그것은 아마도 남들이 구하는 것과는 다를 거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溫良恭儉讓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ㅇ 해석이 溫良恭儉讓으로 해서 번역한 사람도 있다 했는데 뒤집어 말하면 달리도 해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溫良恭儉과 讓 이 다섯 가지가 같은 수준에 걸려있는 덕목인가 하는 문제거든요.
ㅇ 溫은 溫氣 따뜻한 마음으로 늘 모든 것을 감쌀려고 하는 따뜻한 마음 아닙니까. 水丞火降의 대목 아닙니까. 火氣가 밑으로 가라앉고 水氣運이 위로 올라오면 水氣運에 따뜻함이 배어서 溫 아닙니까. 이 세상의 모든 기후도 마찬가지죠. 위네 있는, 벼락치는, 이 모든 햇빛이 내려쬐이는 천상의 모든 불기운들이 땅으로 내려앉고 땅에 있는 물기운들이 위로 솟아 올라가면 그것이 기운 아닙니까. 수기가 돌아다니는 것이 溫 아닙니까. 그래서 溫이라는 것은 수승화강이 되어있는 자연스럽고 따뜻한데서 나온 그것이 溫이구요.
ㅇ 良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어질 良 해가지고 어질다라는 것으로 굉장히 번역을 많이 하거든요. 어질(?), 어질 仁, 어질 良 아주 애매모호하게 쓰이는 게 있는데 그렇다고 량과 인, 그 (?)이 그 뜻이 같은 게 아니 거든요. 여기 량이라는 것은 신께서 음식을 내리면 그 음식을 받아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을 량이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제사장입니다. 良자를 보면 白+衣로 구성되어 있는데 衣는 손을 말합니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白자는 뭐냐. 원래 白자의 위에 ‘이 없었습니다. 白자와 日자는 뜻이 같은 경우가 많죠. 청천대길(?) 흰 해, 희다는 것 자체가 밝다 또는 태양 그런 것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래서 태양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들고 있는 모습이 良입니다. 그래서 모든 음식이 있으면 그 음식을 먹기 이전에 하늘로부터 허락을 받는 거죠. 그것은 왜냐 신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들어서 신께 감사드리고 그리고 그 음식을 받아서 자기들의 식구들에게 나눠주는 사람, 제사장이죠. 어떤 의미에서 가장도 될 수 있구요. 良이 번역되면 몽고어로 우리 말로 ‘바이’입니다. 우리 말에 아바이라고 그러다가 아바이가 아부지 되지 않습니까. 부지와 바이의 원래 뜻은 다른데 나중에 같이 쓰이는 말이지만 바이라는 말이 지도자라고 했잖습니까. sain bai할 때 바이라는 것이 지도자라고 했는데 바로 그런 의미가 있죠. 그러고 보니까 가부장의 의미가 아닌 가추장, 가장으로서 의미죠. 어떤 의미로 남자 良자가 되다 보니까 이 량자가 때로는 옆에 郞자를 붙이면 신랑할 때 랑자가 되지 않습니까. 뜻이 변화되어 남자를 랑이라 그러죠. 요즘은 그래서 결혼할 때 남자는ㄱ청웅 술애서 똘우사렁웅 많은데 정말로 신랑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신남은 있고 신녀는 있는데 신랑은 없는 것 같아요.
ㅇ 恭이라는 것은 마음 위에 있는 것이 제단이거든요. 마음으로 제단을 보는 것이 恭이거든요. 우리가 공경할 때 恭이라는 것이요. 그런 온과 량, 공 아직까진 개념이 비슷하죠. 같은 수준에 있는 낱말이죠.
ㅇ 儉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검소하다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데 위엄이 있는 것을 儉이라고 합니다. 옆에 人자를 빼고 해석하면 쉽습니다. 집 속에서 모든 식구들을 잘 먹여 살리는 사람을 儉이라고 합니다. 이 검이라는 말은 우리 말 임검의 검에서 신의 검에서 간 겁니다. 신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하느님이라는 게, 한님이라는 게 이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주잖아요. 다 먹여 살릴 수 있도록 어느 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는데 사람들이 이제 때로 그 길을 몰라서 하느님이 주신 것이 뭔지 몰라서 굶어 죽는 것이 과거였다면 지금은 하느님이 주신 것을 도용하고 악용을 해서 사람이 사람을 굶어 죽게 만드는 세상이 되었죠. 과거에는 사람이 스스로 몰라서 굶어 죽다가 요즘은 하느님이 주신 건지도 모르고 자기들이 다 만든 줄 알고 막 돌리다가 굶어 죽죠. 그래서 儉이라는 것은 신처럼 마찬가지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먹을 것을 다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儉이니까. 그래서 위엄있는 사람이죠. 지도자죠. 온량공검 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따라서 생활을 하는 모습들.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거든요. 그런 사람들의 내면적인 모습, 추상명사로 쓰인다고 그런 거죠.
ㅇ 그렇지만 讓은 그런 것이 아니예요. 양은 의미가 좀 달라요. 양은 앞에 言이 붙었습니다만 그것 없이 보더라도 먼저 길을 비키는 것이 양이라고 합니다. 길을 가고 있다가 예전에 사람들이 길을 가면 그 길이 요즘처럼 그렇게 넓은 길이 아니고 사람 한 둘 지나갈 수 있는 길인데 한 사람이 맞은 편에서 오면 그 사람이 자기가 공경해야 될 대상이면 먼저 이렇게 손을 펴서 가십시요 하고 피해주고 나서 자기 길을 가거든요. 충분히 지나갈 수 있어도. 요즘 종로 같은 데서는 상상도 안되는 일이고요. 그래서 양이라는 것이 양보의 뜻도 있습니다. 임금자리도 마찬가지로 임금 한 명 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니가 먼저 이렇게 양보하는 거죠. 양보라는 개념으로 쓰이는 뜻으로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단순하게 온량공검에 비해서 이 讓은 어딘가 약간 부사적인 의미가 있거든요. 명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선생께서는 온량공검하시고. 이렇게 된다고 봐야죠. 선생님께서는 수승화강으로 溫하시고 하늘의 뜻을 받들어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하시며 진심으로 하느님을 받드시며 또는 모든 이에게 다 그렇게 흡족하게 살 방안을 제시하는 그런 분이시니 그런 분이신데 그런 분이면서도 겸양해서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내가 할 수 있을까 한 발짝 물러서서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니 얻으시는 것이니 선생님이 비록 세상에 구하신다 하더라도 그 구하심이 어떻게 남들이 구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이야기입니다.
ㅇ 그래서 대답이 잘 나가다가 온량공검양이득지까진 잘 나가다가 뒤에 가서 조금 질문이 가벼워졌습니다. 기록으로 남기에는. 여하튼 여기 부분에서는 사회 참여에 있어서의 자기 자신과 다시 말하면 온량공검양이득지, 온량공검에 해당하는 전체 내용이 어쩌면 자신에 있어서의 몸과 마음이 하나됨, 그 몸과 마음의 하나됨이 결국은 공자라는 분이 끝까지 쫓던 天이거든요. 하늘이거든요. 한님이거든요. 하늘에 죄를 지면 (?)으로 또 제자가 아프시니까 손쓸 방도가 없는 병에 걸려 있으니까 한 제자가 “기도를 하시죠.” 그러니까 “옛날부터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었다더냐 하니까” “있었습니다. 하늘에 기도한 옛날 기록이 있습니다”하고 대답하니 “그런 기도라면 내 기도는 이미 오래 되었다” 하신다. 끝까지 한님을 모시는 태도니까 한자로는 天, 천이 되어 있는데 우리가 기마종족의 입장에서 보면 쉽거든요. 한님을 모시는 거든요. 한님을 모시는 입장에서 온량공검하셨는데 양이득지까지 하셨는데 그 다음에 구하는 부분이 좀 그렇습니다만은 여하튼 바로 한님과의 일체는 나 자신과의 일체, 나와 과거의 사회와의 일체 그런 것을 통해서 재창조하는 과정 그런 모습이 그 다음 문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구체적인 가정에 있어서의 이런 것을 전체 사회와 모든 사람 여기서 온령공검과 관련된 것은 어느 사회도 아니고 어느 특별히 지정된 국가도 아니고 그렇잖아요. 국가를 핑계로 댔지만. 그래서 이 대사가 조금 정확하게 삽입될만한 적절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는데 100% 적절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는데 여하튼 어떤 특정한 나 밖의 외물과 접하는 나 자신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부분이죠. 이 기법을 조금 넓혀가지고 가정 속에서의 과거와 현재를 일치시킴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이 뒷문장의 그 의미를 모르면 아 이것은 효에 관련된 문장인데 왜 갑자기 제1절에 와 있지. 효와 관련된 부분은 주로 제2절에 가 있는데 이런다 말이죠. 그게 아니라 바로 앞에처럼 과거를 존중하고 이어받는 습관 그럼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나 자신에 있어서 몸과 마음의 일치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세상의 모든 것과의 만남. 구체적으로 가족과의 만남이 나오거든요. 가족과의 만남이 바로 이 다음에 나오죠.
제11절
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자왈, 부재관기지, 부몰관기행, 삼년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ㅇ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버이께서 여기서는 부모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겠죠. 특히 현대에 와서는 부모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겠지만 과거에는 父라는 것이 바로 지도자였잖습니까. 단순히 아버지다 해서 어머니보다 높여갖고하는 의미가 아니라, 여기서 효도의 그런 개념이 아니라 지도자죠. 우리 집안의 지도자라는 아버지죠. 혈연개념으로서 아버지, 어머니로써의 아버지를 더 높이 치는 게 아니라 우리 집안의 지도자로써 父를 보는 거죠. 이 父라는 발음조차도 물론 바이에서 간 거니까요.
ㅇ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집안 어버이께서 살아계실 적에는 觀其志하고 志자가 선분으로써 意가 아니고 志 아닙니까. 홀이 아니고 志잖습니까. 선분으로써 그 志를 觀, 살피고 관했는데, 이 관이라는 것과 살핀다 에 관련된 단어가 여러 가지라고 대학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察자도 있고, 찰자는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라 했잖습니가. 視는 대충대충 보는 것이라 했구요. 관이라는 것은 뭔가 흐름을 보는 것이 관이죠. 관광하러 가서 여기 찔끔 저기 찔끔 보고 나서 연결이 되지 않으면 관광한 게 아니죠. 그것은 視하고 돌아온 거죠. 소풍하고 온 거죠. 관이라는 것은 처음 갈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쭉 꿰고 와야 관광을 한 거죠.
ㅇ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그 뜻을 쭉 지켜 그 뜻의 요체를 보고,
父沒(우리 집안의 지도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觀其行(그 행적을 쭉 살펴서)
三年無改於父之道 이때 於자는 목적어를 강조하기 위해서 들어간 겁니다. 三年 無改父之道라면 되는데요. 3년 자체를 앞에 끌어낸 것도 부사인 3년을 강조 하려고 끌어낸 거고요. 3년 동안 아버지께서 가시던 길을 고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길을 고침이 없다면, 이게 於자가 들어감으로써 강조가 됐지만 강조가 됨으로써 동사도 바뀌었습니다. 만약에 於자를 빼고 문장을 제가 한번 바꿔 보겠습니다. 그러면 차이를 금방 아실 수 있을 겁니다. 三年不改父之道 입니다. 만일 於자가 빠지면 부정사인 不자가 들어가야 합니다. 존재를 나타내는 있다 없다가 아니라 유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於자가 들어가니까 직역을 하면 아버지의 도에서 고침이 없다면 그리 돼버리는 거죠. 중국의 과거 문장들이 재미있는 면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것을 시험에 내면 다 틀려버릴 겁니다. 三年無改於父之道에서 於자를 지우면 고쳐질 글자 하면 알 수 있을는지 몰라요. 3년無改(고침이 없다). 3년不改는 어딘가 과정상의 행위 같거든요. 3년 동안 고치지 않는다는 각오 비슷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無改하는 것은 평가거든요. 각본에 있다 없다라는 것으로 판단 나버린 것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객관적이죠. 不改라고 한다면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거든요.
ㅇ 三年無改於父之道면 可謂孝矣. 효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효의 정체가 나오는 것이죠. 앞에서도 몇 번 안 짚었읍니다만 孝라는 것이 바로 과거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이음으로써 일정한 기간 동안 三年無改於父之道 하는 기간이 공부기간이죠. 내가 가장이 되기 위해서 과거를 먼저 익히는 기간이죠. 무턱대고 3년 동안 고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적어도 네가 3년 동안은 과거의 지도자가 했던 것을 고치지 않고 연습을 해봐야 네가 무얼 알 거 아니냐 하는 거죠.
이 논리에 입각해 가지고 나중에 왕에 있어서 자기가 죽기 전에 아들이 좀 불안하잖아요. 그러면 아들을 예비임금 시키는 거예요. 자기가 상왕되고. 이런 개념들이 가끔 등장했죠. 과거에는, 그런데 3년 동안 아들에게 임금질을 가르쳤는데 3년이 되면 자기가 죽어야 되는데 안 죽거든요. 난감하죠. 그래서 그런 제도가 없어지게 됐지만 태종 같은 경우도 세종을 앉혀놓고 연습을 한참 시켰죠.
자기는 상왕이 되어가지고. 어쩌면 세종은 그 사이에 공부를 많이 했을지도 몰라요. 아버지하고 부딪치는 부분이 많거든요.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다 보니까 새로운 길이 자꾸 속에서 느껴지거든요. 요렇게 하면 좀 더 좋을 건데. 근데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면 그걸 모르거든요. 여기서 三年無改라는 것이 결국은 과거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자기 재창조의 과정, 자기공부의 과정 그렇게 해서 과거를 이어서 새로운 나를 정립시키고 그럼으로써 조금 더 인간 본 모습을 발전시켜 가는 것이 바로 孝라는 거죠. 孝의 개념이 확 달라지는 거죠. 까마귀처럼 끌어다 갖다 받치는 것이 아니죠. 잘 봉양하는 것이 효도라 한다면 까마귀나 개도 그렇게 잘하는데 사람이 개와 까마귀와 다를 게 뭐 있느냐 하고 공자가 제2장에서 그것은 공자답지 않을 정도로 가혹하게 비판해버리지 않습니까.
ㅇ 여기서 三年無改於父之道면 可謂孝矣가 한번 나왔잖아요. 이 문장이 뒤에 또 한번 나오거든요. 여기서 나왔는데 뒤에 한번 더 나오니까 사람들이 쓸데없이 한번 더 끼었다 이러거든요. 다르죠. 똑 같은 말이 두 번 오더라도 여기서 쓰임새가 다르고 거기서 쓰임새가 다른 거니까. 나중에 볼 거구요. 여기서는 바로 단순히 느닷없이 효에 관한 부분이 나온 것이 아니라 제일 앞에 이야기한 것이 자기 자신의 과거로부터 지배 받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미래의 자신을 창조하고 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과거의 전통을 존중함으로써 새로운 현재를 넓은 의미에서 이끌어가고 民이 중심이 되고 앞에는 개인이 중심이 되구요. 그 다음에 와가지고는 그러한 상황에서 앞에는 수직적인 관계 아니었습니까. 약간은 수평적인 면에서 어떤 식으로 모든 사물과 접할 것인가. 개인 자신의 새로움. 그 다음 전체 民으로써의 새로움을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개인과 民이 연결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연결시키는 논리가 子禽問於子貢曰에서 나온 거구요. 그 다음에 그 다리로써 가정이 하나 나온 거구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한번 보겠습니다.
제12절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
유자왈, 예지용, 화위귀, 선왕지도, 사위미, 소대유지. 유소불행, 지화이화, 불이예
節之, 亦不可行也.
절지, 역불가행야
ㅇ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그러면 국가가 나올 수밖에 없죠. 좀 넓어지는 것이 나오겠죠. 그래서 국가라는 것이 나오거나 뭔가 이런 것을 과거로부터 이어오고 그러면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하는 사이에 뭔가 바뀌고 바뀌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역으로 말하면 바뀌는 가운데서도 아니 바뀌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시대 시대마다 재창조되는 것이 있을게 아닙니까.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모양, 아버지 이전의 시대가 살았을 때의 시대윤리, 시대정신이라고도 하구요. 시대문화, 일종의 그런게 있었다면, 시대문화라는 게 공자에 있어서는 禮거든요. 그런 시대문화라는 게 과연 정체가 뭐냐. 나올 수 있죠.
ㅇ 有子께서 말씀하시기를, 禮之用 시대문화의 쓰임새는 和爲貴 화를 귀하게 여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用과 和 사이에 以자가 생략됐습니다. 以자가 없으면 아예 해석이 안됩니다. 爲자 가지고 해석이 안됩니다. 爲자 앞에 以자가 붙어야만 以爲가 되잖아요. 합하면요. 여기서는 물론 以和爲貴가 되겠지만, 以A爲B 용법입니다. 以A爲B 용법은 A를 B라고 여기다. 이런 뜻입니다. A를 B로 삼다. A를 B로 여기다 이런 뜻이거든요. 以자가 흔히 생략이 되요. 상습적으로 생략이 됩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시대정신의 쓰임새는 화를 귀한 것으로 여긴다.
ㅇ 先王之道, 앞 지도자의 길도 以斯爲美, 마찬가지로 以자가 생략됐지요. 앞 지도자의 길도 이것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여겼다. 小大由之 작은 것 큰 것이 모두 이곳에서부터 비롯됐다. 이 때 之 앞에 생략된 것이 뜻으로는 있는데, 마치 from이라는 전치사가 들어가는 동사가 있고 from이라는 전치사가 안 들어가는 동사도 있죠. ~로부터 할 때두요. 그런 경우처럼 여기서 由라는 뜻 자체 속에 전치사 from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ㅇ 그래서 크고 작은 것이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했는데 그것이 禮냐 和냐 하는 문제가 해석의 문제가 되죠. 크고 작은 것이 다 禮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하는 것인지 크고 작은 것이 모두 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하는 것인지, 이걸 놓고 주자학과 양명학이 대립 되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적어도 제가 볼 때에는 주자학이 제대로 봤다고 봐요. 주자학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禮가 아니라 和라고 봐요. 그런데 양명학은 그것을 禮로 보거든요. 양명학은 공자학을 상당히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데 그것은 禮를 굳어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禮를 동시대적인 어떤 것으로 보고 주자는 동시대적인 것으로 안 본다는 것이 강해요. 근대 주자학의 변신, 주자학의 토종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성리학은 禮를 상당히 동시대적인 것, 함부로 고치면 안 되는 것으로 보거든요. 그런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아요. 공자시대의 禮라는 것은 한 지도자가 바뀌면 禮가 바뀌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것이 기준이 義죠. 그러니까 시대정신을 판단하는 전체적인 기준으로써 義와 禮를 분간을 잘 안 해버리는 그 측면이 한국의 유학에서 나타난 거죠. 그래서 義와 禮는 거의 같은 것으로 등치를 시키면서 禮를 어기면 옳은 것을 어긴 걸로 몰아가는 가죠. 사문이적으로 만들고, 사문난적으로 만들고 그랬죠.
ㅇ 여기는 굉장히 有若다운 부분이예요. 정말 뛰어난 지적인데, 아마 유若이 이것을 얘기하실 적에는 孔子님이 돌아가신 후가 아닌가 싶은데, 有所不行 행해지지 않는 바가 실천되지 않아야 될 바가 있으니 그게 뭐냐. 和라고 하지만 다 행해져서 안 되는 바가 있으니 뭐냐. 知和而和 和라는 것을 和라고만 알고, 不以禮節之 禮에 따라서 조절하지 않는 것. 不節之인데 중간에 以禮가 삽입된 거죠. 그것을 禮에 따라서 조절하지 않는다면, 亦不可行也 역시 또한 이것은 옳은 것이다. 스스럼 없다. 일단 놓고 和라는 개념 등을 살펴보겠습니다.
ㅇ 有若이라는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시대문화의 쓰임새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화합을 귀중한 것으로 여긴다. 화합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겠죠. 和라는 것은 중용에 나오지 않습니까. 희로애락이 다 발현되어서 모두 제 쓰임새대로 적중한 것을 일러서 和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있을 자리에 있는 것, 자연을 버리지 않고(사람도 자연이니까요) 다 그 기운이 그 자리에 있고 그 기운이 그 자리에서 그만큼 돌고 그렇게 세상에서도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돼 있고, 정명이라는 것을 어떤 사회의 기준에 따라 가지고 막 사회를 굳히게 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데 그런 요소보다 실제로 정명이란 것도 하늘이 주신 그 원래의 위치를이라는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봐야죠. 여기 禮之用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시대정신의 쓰임새라는 것은 결국은 그 정신 자체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존재답게 되도록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 그러기 위해서는 이 존재 저 존재를 쓸데없이 싸움 붙여서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방법적으로는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화합하고 비슷한 거죠. 오늘날 화합하면 약간 좀 타협 이런 거하고 통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과거에도 화합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타협, 중용이라는 개념을 이용해가지고 중간이라고 했구요. 중용을 해야지 그러면 실제로 중간쯤 있어야지 하는 논리 비슷하게 통하고 이것이 또 화합해야지 그러면 타협해야지 그런 개념으로 과거부터 통해왔는데 그 점을 뒤에서 명백하게 인식을 하죠.
ㅇ 先王之道, 斯爲美. 앞 지도자들의 길이란 것이 다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美라는 것은 잘 알다시피 글자가 원래 희생 양에서 온 거죠. 희생 양을 바치는 것이 자꾸 큰 놈을 일러서 아름답다고 그런 거죠. 아름답다라는 기준이 오늘날의 beautiful하고 다른 개념이죠. Beautiful은 상당히 유미주의 관점이 있는데 비해서 판단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아름다움이 천차만별일 수 있는데 비해서 이 美는 한님의 제사장 앞에 바치는 희생 양이 그 해 1년 종자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올라가야 참 아름답다라고 했던 것이니까요.
ㅇ 小大由之. 그래서 크고 작은 모든 禮들이 모든 시대문화의 격식들이 이 和로부터 말미암았다. 和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有所不行. 그러나 和 가운데서 쓸모 없는 것이 있으니 실천되지 않는 바 不行되어야 할 바가 있으니 무엇이냐 知和而和. 和라는 것을 和로만 알고, 원만이 원만인줄로만 아는 거예요. 웬만한 잘못은 덮어놓고 넘어가고 물론 그래야 될 때가 있죠. 그렇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죠. 자기가 책임있는 자리에서 넘어가면 안되죠. 또 어떤 경우에 틀린 것인 줄 알면서 넘어가는 것은 그것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 일을 해야 될 사람이 지적하면 거둘 수 있는 일이죠. 원만함을 원만함으로만, 화합을 화합으로만 알고 不以禮節之. 그 시대정신에 따라서 조절하지 않는다면 和가 중요하다 해가지고 시대정신에 의해서 조절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쓸모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대정신과 시대정신을 규정하는 和와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죠. 어떻게 보면 변증법적 논리에 가깝죠. 구체적인 시대정신과 그 시대정신을 지배하는 和의 원리와의 상호관련성.
ㅇ 논어에 들어가는 순서가 대학, 논어, 중용 아닙니까. 맹자는 보충교재죠. 그런데 보통 공부할 적에 대학, 맹자, 중용을 하는 이유가 대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논어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기초적인 개념이 안 잡혀있어 갖고요. 논어를 볼 수가 없어요. 그 말이 그 말 같고, 이건 파스칼이 한 말이나 공자가 한 말이나 깊이가 차이가 없는 거예요. 대학을 안보고 보면. 세계 명언집에 파스칼의 말과 샤르트르의 말과 공자의 말이 동급으로 취급돼 버릴 수 있죠. 그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대학을 먼저 공부하고 그 다음에 결론적으로 봐야 할 essence가 중용인데요. 일종의 정수가 중용인데 중용을 논어만 보고 나서는 이해를 잘 못하더라, 그래서 보충교재를 보고 나서 중용을 봐라 해서 보충교재로 맹자가 들어간 거죠. 사실 맹자는 안 봐도 되는 거죠.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공부하는 한문의 문장에서는 맹자가 훨씬 논리정연 하거든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소지도 별로 없고, 글자도 비교적 쉬우면서도 현대적인 것에 맞는 그런 것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맹자가 많이 읽히는데 맹자는 깊이는 그다지 없습니다. 역사적인 해박함은 있죠.
제13절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왈, 신근어의, 언가복야. 공근어예, 원치욕야. 인불실기친, 역가종야.
ㅇ 有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믿는다고 다 믿음이 아니다. 앞에 믿음이 나왔잖습니까. 믿음이 있음으로써만 나와 한님이 연결되고 나와 사람이 연결되고 이런 부분이 앞 부분에서 信에 대한 규정이 많이 나왔잖습니까. 여기서 信이라는 것을 한번 더 규정할 필요가 있죠. 有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이라는 것이 옮음에 禮의 판단기준인 義에 바로 禮까지 했으니까 논리가 들어가는 겁니다. 앞에서는 단순한 믿음을 이야기 하셨죠. 단순하게 이해해도 괜찮도록 얘기했죠. 뒤에 와서는 이제 禮까지 이야기 했잖습니까. 논리가 또 생략됐습니다. 禮를 규정하는 것이 義라 했잖습니까. 그러니까 義에 대한 부분이 나오죠. 바로 이 믿음이라는 것이 義에 가깝지 않다면 義에 근접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얘기를 하시려고 합니다.
ㅇ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義에 근접하면 言可復也. 언가부야라고 읽으면 안되고요, 복야 뜻인데, 말도 하나의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말 속에서 꽃이 핀다 그러면 뭔가 말의 세계에서 꽃이 실제 핀 거죠. 근데 실제 세계에서 꽃이 안 피었잖아요. 근데 말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현실세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거라 하는 뜻이 복야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義에 근접한다면 마음에 있는 모든 세계가(言이라는 것이 그런 의미로 봐야 되니까요. 言은 소리가 하나 있잖습니까. 소리, 글자, 言이라는 것은 개념이라고 했잖습니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던 그런 개념들이 다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ㅇ 恭近於禮면 한님에 대하여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 禮에 근접한다면, 恭이라는 것은 앞에서 弟子入則孝, 出則弟 할 때 弟와 恭이 일정하게 통했는데요, 그 恭에 대해서 제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죠. 禮를 얘기했으니까요. 禮를 이야기함으로써 義까지 이야기한 셈이니까요. 대학을 안 읽으면 禮를 이야기하든 義를 이야기하든 모르게 되요. 여기서 논리가 연결이 안 돼버려요. 대학을 읽어도 물론 엉터리로 읽어버리면 이게 왜 갑자기 禮之用, 和爲貴 나온 다음에 갑자기 信近於義, 言可復也가 나오는지 논리가 불분명해지는데 禮라는 것은 義에 기준하고 있는 것이고 義에 기준해서 禮는 늘 和와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 변증법적 관계에 있어서 판단기준이 바로 義다. 그래서 이 믿음은 禮와 和의 판단기준인 義에 가까워야만 현실로써 재현되는 것이고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일치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진심으로 사람들은 모시고 한님을 모시라. 내 마음을 모시라 그랬지만.
ㅇ 그 모시는 것도 시대정신에 근접해 있어야만 遠恥辱也.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욕됨을 멀리할 수 있다. 이 때 恥라는 것은 부끄러울 치자이고 辱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이불을 덮어쓰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들어서는 辱이라는 개념이 욕하지마 이렇게 되는데요. 욕이라는 개념이 어떤 것이냐 그러면(이불을 덮어쓴다 라고 했습니다만) 저기 혜성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혜성이 지나가고 있는 저기 별도 하나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참 동안 뭘 뒤집어쓰고 있다가 뭐 하고 쳐다보니 별이 없거든요. 그걸 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 말을 했는데 말을 하고 나서 마치 그런 거예요. 수련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보다가 비몽사몽간에 뭘 봤어요. 나 뭐 봤다 그리고 나서 다시 보려고 그러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그게 욕이예요. (요즘 사람들은 욕봤다 그러면 거짓말하느라고 욕봤다 그러잖아요. 거짓말은 아니예요) 그러니 재현이 안되는 거예요. 이런 문제는 시대문화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ㅇ 恥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쉬운데요. 뭘 듣긴 들었어요. 뭘 약간 알아요. 근데 이게 다가오질 않는 거예요. 뭔가 옳은 것 같기는 한데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게 부끄럽사옵니다. 이레 되는 거죠. 요즘 와서는 돈이 없어서 부끄럽사와요 이레 되거든요. 辱이라는 것은 바로 조금 전에 뭔가 경험을 했는데 이 경험을 유지시킬 수 없는 것이고, 恥라는 것은 듣긴 들었는데 그것을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진심을 다하긴 해도 시대정신이 반영하고 있는 그 방편들이 있잖습니까. 그 방편들을 활용하거나 그 방편들을 얻지 않으면 납득할 수가 없죠. 뭔가 진실을 듣긴 들었는데 저기 원시인이 와 가지고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감은 오는데요. 부끄럽죠.
ㅇ 요즘 IQ 검사를 가끔 하는데 IQ가 두 자리 숫자면 한편으로 부끄러워해야 해요. 왜냐 시대정신에 부응을 잘 못했다는 거예요. 저는 그리 봅니다. 사람들이 머리가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없다고 봐요. 그 머리가 그 시대정신에 禮에 근접해 있느냐 아니냐 그게 문제거든요. 요즘 말하는 IQ다 EQ다 떠드는 자체가 근본적으로 이 시대문화에 얼마만큼 적응하고 있느냐 하는 시대문화 적응을 나타내 거든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무리 IQ가 높은 사람이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두뇌 용량의 3%를 못 쓴다고 그러잖아요. 사람들은 100% 다 쓰게 되어 있거든요. 두뇌 용량뿐만 아니라 모든 용량의. 그런데 그 시대정신에는 3%만 써도 적당하거든요. 그 3%, 시대정신에 써야 하는 그 용량 어딘가가 부족한 거죠. 어떤 면에서는, 그런 면에서 요즘 IQ가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원리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ㅇ 그래서 자꾸 이 시대와 이 시대의 방편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자꾸 이야기하고 또 이 시대의 방편으로 도저히 납득될 수 없게끔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복고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복고도 아니에요. 그건 禮가 아닌 거죠. 그 시대문화에 어울리지 않는 거죠. 그 시대문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그 禮를 판단하는 그 義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30이 돼야만 뭘 밝힐 수 있다는 것이 그 때가 돼야만 禮와 義가 어느 정도 갖춰진다는 이야기죠.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禮의 판단기준인 義에 가까워야만 말이라는 것이 현실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고, 물론 義에 가깝더라도 믿음이 가깝지 않으면 또한 안 되는 것이죠. 뒤집어 보면, 그 다음에 시대정신에 근접하지 않고 아무리 마음을 다해봤자 치욕을 면할 길이 없다. 멀리할 수 없다. 그러나 물론 시대정신에 따른다 하더라도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또한 이루어질 수 없겠죠.
ㅇ 因不失其親. 이 親자를 놓고 해석이 무지막지하게 벌어지는데요. 朱子의 경우 주자의 후예자들도 두 가지가 다 있는 것 같아요. 因을 연분을 갖고 있는 천하사람 이렇게 해석하기도 하구요. 주어가 되죠. 인하여, 이로 말미암아 이렇게 번역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이로 말미암아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왜 자꾸 천하 사람으로 번역하냐 하면 信近於禮 그래서 信이 주어, 恭近於禮 그래서 恭이 주어, 그래서 因이 주어가 돼야만 뭔가 짝이 맞을 것 같은데 이 문장은 앞 두 문장에 대한 결론입니다. 其親이라는 것은 육친 이런 뜻이 아니구요, 체득해야 될 바를 뜻합니다. 其자에는 여러 가지 용법이 있는데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與자와 붙어 가지고 아마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잖아요. 其자가 적당한, 거기 합당한 이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不傳其人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전해주지 말라 거든요. 이로 말미암아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서 자신이 체득해야 될 바를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ㅇ 亦可宗也. 역시 또한 마루가 될 수 있다. 마루라는 것은 들보, 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한 으뜸이 될 수 있다. 宗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얼이다 알이다 했던 개념과 통하는 것이죠. 얼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인간화된 얼이 될 수 있다. 육체화된 얼이 될 수 있다. 육체화된 알이 될 수 있다. 몸으로 체득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스스로 또한 정신의 종주를 찾을 수 있고 육체화된 종주, 정신적인 종주가 될 수 있고 육체적인 우주가 될 수 있다. 이런 뜻이죠. 그래서 여기서 일단 결론은 좀 났습니다. 결론이 나고 나면 뒷부분에 현실 비판이 몇 개 꼭 나옵니다.
ㅇ 이 논어 구성체계를 잘 보셔야 되요. 논어 구성체계를 보다 보면 끝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2/3정도까지 잘 연결되다가 그 다음부터는 약간 이것을 보충하기 위한 보충문제가 나와요. 교과서로 말한다면 일종의 reading-practice가 나와요. 2, 3구절씩 꼭 나와요. 뒤에 10장 鄕黨篇(향당편) 대부분이 리딩프랙티스예요. 리딩프랙티스 자체가 교재예요. 행동규범만 나와요. 재미있는 것은 리딩프랙티스에는 선생님 말씀만 주로 나온다는 겁니다. 선생님 말씀이 다 나온 것은 아니지만 주로 선생님 말씀이 많습니다.
제14절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자왈, 군자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이.
ㅇ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천군의 아들은 한님의 아들은 한님의 아들을 자처하는 사람은 또 그렇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食無求飽. 먹는데 있어서 배부름을 구함이 없어야 하고, 배부름의 구함을 없애야 하고, 그래서 이 無자가 不자 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갖고 있죠. 食不求飽 문장도 안됩니다만 君子不求飽於食하면 말이 될지 몰라도요. 이런 경우에는요. 문장도 안됩니다만 더욱이 無자가 더 강한 의미가 있죠. 단정적인 의미가 있죠. 행위의 방향이 아니라 완전히 단정이죠. 공도자, 한님의 길이 공도라 한다면 공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도 배부름을 구함이 없어야 하고, 居無求安 거처함에 있어서는 편안함을 구함이 없어야 하고, 敏於事 일을 함에 있어서는 민첩 하려고 해야 하고, 愼於言 말을 함에 있어서는 또한 일치를 시키려고 해야 한다.
ㅇ 就有道而正焉 그래서 길이 있음으로 나아가서, 도가 있음을 취해서, 도가 있음을 선택해서 도가 있는 길로 나간다는 얘기죠. 就가 나아간다, ~에 부임한다 이런 뜻이 있으니까요. 도가 있음으로 나아가서 자신을 바로잡는 것이죠. 자신의 잘못됨이라든지,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可謂好學也已 이것이야말로 정말 배움을 좋아한다 할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 비슷하기도 하죠. 공부하는 사람은 도로써 배부름을 구하라는 뜻이고, 도로써 편안함을 구하는 것이지 음식으로써 배부름을 구하고 거처로써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공도자를 지향한면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의논할 바도 못 된다 그랬거든요. 恥惡衣惡食者 나쁜 옷과 음식을 수치로 여기는 사람은 未足與議也 아예 더불어서 의논할 바도 못 된다. 쉬우면서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계가 불분명하고 시대정신과 화합을 쫓는다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거든요.
제15절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예자야.
子貢曰, 詩云, 如切如蹉,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자공왈, 시운, 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告諸往而知來者也.
고저왕이지래자야.
ㅇ 子貢曰, 자공께서 말씀하시를, 貧而無諂, 富而無驕, 諂(첨)이라는 것은 함정입니다.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 첨입니다. 근데 이것이 아첨으로 됐죠. 뜻이 言자가 붙으면서 확장된 거죠. 원래 뭘 덫에 빠뜨리나 하는 것이 예전에는 조개였잖습니까. 조개를 가지고 卜者가 한님에게 점을 구하잖습니까. 조개를 불에 구우면 조개껍질이 깨지면서 뭔가 표식이 나타나잖아요. 그걸 보면 그 해 운수를 읽고 사람이 살 길을 읽고 그러잖아요. 근데 그걸 가지고 가다가 빠뜨려버리는 겁니다. 그가 그걸 가지고 임검에게 가야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임검도 어차피 제사장이기 때문에 알잖아요. 읽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걸 물어버리고 가는 거예요. 흉조가 나오면 묻어버리고 딴 걸 가져가는 거예요. 그게 원래 첨이에요. 근데 말로써만 첨 하는 거니까 말로만 속이는 거죠. 가난하면 정말 마음이 가난한 거죠. 가난하면서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면서 교만함이 없다면 (예전부터 교만이 제일 큰 병이라 그랬죠. 근데 교만이 제일 들기 쉬운 병이라고 그랬죠. 옛날부터 교만한 자 3년을 가지 못하고, 권력이 10년을 못 가고, 아무리 큰 부유함이 있어도 100년을 못 간다 그랬잖습니까. 그래서 100년 이상 가는 것을 사람 가르치는 거라고 했는데) 何如,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ㅇ 子貢으로 시작하는 것 같지만 결론은 이것이 아니라 뒤에 나오는 것이 결론이죠. 孔子님 말씀이 결론이죠. 리딩프랙티스는 여전히 공자님 말씀입니다. 子曰, 可也.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거죠. 그 정도면 괜찮지. 이것도 쉬운 건 아니거든요. 사람이 처지가 어렵다 보면 아첨하기가 쉽고 사람이 부유하다 보면 교만해지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는 것만 해도 괜찮다.
ㅇ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그러나 未若 ~만 못하다, ~만 같지 않다, ~와 수준이 다르다. 가난하면서 즐길 줄 알고, 즐긴다는 것은 앞에 나왔잖습니까. 有朋自遠方來면 不亦樂乎의 바로 樂이죠. 물이 오르는 거죠. 가난하면서도 신명이 드는 거죠. 그게 즐기는 거죠. 신명이 안 도는데 즐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골골거리는 거죠. 맥이 뻐져 있는 거죠. 흔히 요즘에 보면 즐긴다 하는 것을 賓而樂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빈이낙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죠. 빈이무첨도 못 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처지가 몰락하고 나서 즐긴다 그러거든요. 몸에 물이 안 올라 있어요. 근데 즐긴 데요. 날씨를 즐기고 편안함을 즐긴 데요. 즐기는 게 아니잖아요. 푹 가라앉은 거죠. 죽은 나무가 물에 떠있는 것과 똑 같은 거죠. 애초에 빈이무첨하던 사람이 또 세월이 흘러가지고 아 이제 난 즐길 만 합니다 그러면 가난하면서도 힘이 나서 생기가 돌고 그리 되잖습니까. 나무에 물이 오르는 게 樂 아닙니까. 또한 부유하면서도 禮를 좋아하는 시대정신을 즐기는 자 하고는 수준이 다르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래서 앞의 문장과 뭔가 연결이 되죠. 느낌으로. 禮와 관련해서. 그래서 이것도 리딩프랙티스에 해당 되고요.
ㅇ 子貢曰, 詩云, 如切如蹉,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그러니까 맞받아가지고 한 번 더 물어봅니다. 완전히 선문답입니다. 자공께서 말씀하시기를 詩經(위풍편)에 이르기를 如切如蹉, 如琢如磨라 하니, 其斯之謂與리까. 其와 與가 붙었으니 또 아마죠. 이 之자는 도치를 위해 들어갔습니다. 목적어인 斯를 강조하기 위해 之자를 넣어서 도치시킨 겁니다. 이것에 이름입니까 이렇게 되는 건데 이것을 이름입니까 이렇게 돼야죠. 謂斯가 되면 되는데 그러면 문장이 재미가 없잖아요. 其謂斯與 아마 이것을 이름인가 봅니다. 이 문장을 사람들이 쉽게 해석하고 있는데 이 문장에 쓰인 기법을 논하라 하면 한문학과 학생들이 몇 명이나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其~~與 아마 ~~일 것입니다. 謂斯 이것을 이름인가 봅니다. 하고 툭 던지니까,
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也.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賜也, 자공 이름이 賜니까요. 자공이라는 말은 子자 자체가 벌써 높임말 아닙니까. 子자 자체가 작은 선생이라는 뜻이거든요. 똑같이 선생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예요. 선생님이 붙은 사람들을 자기 선생님과 공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자기 선생님은 子자 다 빼버리고 子丘曰 이렇게 해야 될 거 아닙니까. 孔丘니까 다 빼버리고. 따라서 이것들도 아마도 曾子가 직접 했다기보다는 증자의 감독하에 그 제자들이 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높아요. 子가 앞에 붙은 것은 새끼 선생님이고 有子처럼 뒤에 붙어버리면 상당히 높죠. 증자처럼 뒤에 붙어버리면 상당히 높죠. 증선생, 아예 성을 쓰는 거죠. 성을 쓰면 상당히 높은 겁니다. 성을 앞에 붙이고 뒤에 子자를 붙이면 큰 선생님이라는 뜻이고요. 앞에 子자를 붙이고 뒤에 이름자를 붙이면 작은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子貢은 그런 선생님입니다.
ㅇ 그러니까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로소 ~할 수 있겠구나. 與言 더불어 말할 수 있겠구나. 무엇을 詩를. 사야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ㅇ 告諸. 諸(저)자는 之+於를 합친 글자라 했지만 그냥 之자로만 해석해도 됩니다. 告諸往 지나간 것을 너에게 알려주니 知來者 다가 올 것을 아는구나. 그러고 나서 딱 끝나버렸습니다. 얼핏 보면 엉터리 같은데 그야말로 공자류의 선문답입니다. 가만히 앞의 문장들을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연결됐던 부분, 리딩프랙티스까지 이해하고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오거든요. 지나간 놈을 일러주니 다가올 일을 아는구나. 그리고 딱 연결시켜버립니다. 닦는 듯, 가는 듯, 닦고 갈고. 사실 如切如蹉, 如琢如磨가 딴 게 아니라 玉을 놓고 하는 것이 거든요. 자르고 갈고 닦도하는 대상이 玉입니다. 시경 위풍편에 나오는 玉입니다. 玉을 자를 때 보통 해서는 못 자릅니다. 마음을 굳혀서 자르죠. 이게 보통 보배입니다. 그것을 놓고 자르듯 갈 듯, 과거의 전통을 그렇게 아끼면서 그것을 충분히 시대정신으로서 자기 속에서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돼있잖습니까. 바로 그만큼 믿음이 와야 되죠. 그리고 옳음에 대한 믿음이 왔을 때 비로소 자기 머리 속에 있던 보석의 본 모습이 현실로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을 과거와의 연결성, 개인과의 연결성 이것을 한꺼번에 노래한 거죠. 과거와의 연결성이 또한 연결이 되구요. 玉을 과거로부터 물려받았으니까요. 물려받은 거고 그걸 다듬어야 되니까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과거와의 연결성 그것을 하기 위한 엄청난 정성을 들이는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의 일체성, 이것을 한꺼번에 노래한 거죠. 그러니까 그겁니까 하니까, 이제 비로소 너하고 詩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너도 뭐 안다 이제. 그리고 나서는 혹여 헷갈릴 것 같으니까 지나간 놈을 일러주니 다가올 놈을 아는구나.
제16절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ㅇ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걱정하지 말라. 이 때 之자는 물론 명사절을 만들어주기 위한 거죠. 人之不己知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人不己知면 되는데 마찬가지로 목적어가 대명사인 己자가 쓰였으니까 不知己가 아니고 부정사와 동사 사이에 삽입돼야만 되죠. 不知己가 안되고 不己知가 되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
ㅇ 患 무엇을 걱정하는가. 不知人 내가 남을 모름을 걱정하라. 人자는 대명사가 아니잖아요. 남이란 뜻을 갖고 있지만 그냥 사람이고 보통명사잖아요. 그러니까 不人知라 할 필요가 없죠. 不人知라 해도 틀리진 않습니다. 보통명사고 대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不知人으로 쓸 수 있고, 己자는 대명사이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이기 때문에 不己知로 씁니다. 人자는 3인칭 보통명사고 대명사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대명사가 왔을 때는 인칭과는 상관없이 다 중간에 넣어야만 문장이 됩니다. 만약 이런 것도 문장을 입으로 읽지 않은 사람들 있잖아요. 이 문장이 아니고 다른 문장과 싹 섞어가지고, 不患人之不知己 뭐 이런 식으로 문장을 바꿔가지고 틀린 곳 찾아라 그러면 못 찾을 거예요. 여하튼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모름을 걱정하라. 이게 마지막으로 나온 문장이고, 많이 쓰이는 문장인데 그 뜻이 얼마만큼 깊이 있게 이해되고 쓰일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이 문장도 어찌 보면 앞에 不患人之不己知 는 쓸데없이 나온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 뒷말을 하기 위해 끌어낸 말이니까요. 결국은 患不知人 내가 남을 모름을 걱정하라. 왜 남을 모를 수밖에 없느냐. 내가 나를 모르니까요. 내 몸과 마음이 일체가 안 돼 있는데 남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남이란 게 여기서는 사람으로 표현됐지만 사람만이 남은 아니잖아요. 사람만 지적했지만 온갖 사물이며 우주며 온갖 미세한 존재들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많이 안다고 떠들거든요.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있다. 제일 먼저 나를 알아야 되고 나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고, 그것을 알면서 다른 것으로 넓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 나왔듯이 옛 것을 가지고 또 어떻게 찾아나가야 되고,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턱대고 그렇게 알려고 하지 말라. 그런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물론 짧게 제가 알게만 해석한 건데요. 그렇게 해가지고 1장을 정리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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