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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공업고등학교 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남인우41토
징비록(懲毖錄)의 교훈과 오늘날의 현실
징비록 서론(序論)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 은 1592년 시작되어 1598년에 막을 내린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이 끝나자 유성룡은 당시 국토 전체가 잿더미 로 변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른 7년 전쟁의 지옥도(地獄圖)에 대한 환난을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런 과오 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혹독하게 겪었든 왜란 전후의 사정을 눈물과 회한으로 기록해 놓은 참회록이자 교훈서인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인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것으로, 제목인 '징비'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우리나라에서 씌어진 여러 기록문학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물론 『징비록』이 임진왜란을 다룬 유일한 기록문은 아니다. 하지만 유성룡이 전란 당시 전황이 돌아가는 급박한 사정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기록문학의 일차적 자료가 되는 조정의 여러 공문서들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으로서의 『징비록』이 갖는 가치와 매력은 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징비록』은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지는 외교전을 비롯하여, 전란으로 인해서 극도로 피폐해진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전란 당시에 활약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인물평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로 임진왜란에 대한 입체적인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기록문학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록자의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징비록』은 신뢰를 받고 있다. 애초에 상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공론정치의 활성화라는 목적에서 시작된 붕당정치는, 선조 때부터 소모적인 당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집권층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었으며 전란을 불과 1년 앞둔 1591년에는 집권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조정의 공론을 분열시켰고 그에 따라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류성룡 역시도 동인의 일원인 남인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능이나 전술의 부재로 인해 전투를 그르친 일부 장수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제외하면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징비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때 상대 정파에 의해 탄핵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그였지만, 전란을 회고하는 이 노정객의 안타까움과 반성의 심정은 당파적 증오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선조와 朝廷 그리고 兩班들은 다시금 분열되고 삿대질하기 바빴다.
『징비록』은 1695년(숙종 21) 일본 교토(京都)의 야마토야에서 출간되어, 조선을 연구하는 자료로 쓰여 당시 숙종 임금은 이 책의 해외 유출을 엄금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을 연구한 일본은 결국은 조선을 합병하여 일제 36년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나라 잃은 설음을 겪은 우리이지만, 지금도 여야(與野) 간 고질적인 당파 싸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도 비슷하고 일어나는 사건사고들 조차 그 원인과 대처방식이 징비록에서 지적한 상황과 똑같은지 다시금 참담했든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글을 쓰려한다.
징비록(懲毖錄)의 구성 내용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懲毖錄) 원본
현제의 '징비록'은 7책 16권(卷)으로 이루어져있다. '징비록' 본문은 임진년(1592)~무술년(1598)까지 유성룡이 포화 한가운데서 몸소 겪은 일들을 가감 없이 기록한 <상> <하> 2권과 부록으로 장계․소차(疏箚)로 '근포집(芹曝集)'2권, '진사록(辰巳錄)' 9권, 문이(文移)로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 잡록으로 '녹후잡기(錄後雜記)'로 이루어져 있다.
'근포집'은 1592년(선조 25)~1596년까지 선조에게 올린 軍國․政務에 관한 글[箚․啓辭]들을 모은 책이다. ‘근포’의 의미는 '열자(列子)' 「양주(楊朱)」편에 “옛날 송나라에 농부가 있어 늘 삼베옷을 입고서 겨울을 지내다가 봄철에 와서 따스한 햇볕을 등에 쬐니 마음이 무척 기뻐서 이 따스한 햇볕을 우리 임금에게 드리고 싶다고 하였다. 또 맛있는 미나리[芹]를 맛보고는 우리 임금에게 가져다 드리고 싶다”고 한 고사에서 나왔다
'진사록'은 1592년[임진]~1593년[계사] 사이 류성룡이 종군하면서 선조에게 올린 장계(狀啓)를 모은 책이다.
'군문등록'은 1593년~1598년까지 영의정으로 4도 도체찰사로 재임할 당시 각도 관찰사․순찰사․병마절도사 등에게 내린 지시문을 정리한 책이다.
'녹후잡기'는 임진왜란 7년 동안 겪은 사실이나 전쟁에 관한 견해 및 논평 등을 에필로그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징비록』의 저술 연대는 저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용한 사료나 공문서들에 대한검토 시간을 고려할 때,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지 3~4년째가 되는 1601년 혹은 1602년 무렵이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간 시기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유성룡의 사망 이후 책장에 묻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던 『징비록』은 1633년 그의 아들 진에 의해서, 생전에 쓴 글들을 엮은 『서애집(西厓集)』과 함께 간행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이의현(李宜顯)의 '운양잡록(雲陽雜錄)'에 따르면 1647년(인조25) 외손자 조수익(趙壽益)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할 당시에 간행했다고 하는데, 간행 연도가 불확실하다.
안동의 하회종가(下回宗家)에 보관되어 있는 유성룡의 친필 초본과 더불어, 초판을 기초로 하여 간행된 16권본과 2권본 등 두 가지판본 또한 전해지고 있어, 엄밀히 말하면 『징비록』에는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고 하겠다.
징비록은 이순신 장군의 집안과 어린 시절 성품과 능력 등을 소개하는 귀중한 책으로 '난중일기'와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징비록의 본문 내용
'징비록'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의 일, 그리고 정유재란의 발발과 7년간의 전란이 끝나는 날에 이르는 중요한 사건들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당시 세계 최강 군대였던 일본군을 상대로 무기와 군량이 없어 도망만 치는 조선의 군대, 분노하고 절망하는 백성과 딱한 사정,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내부(內附)하려는 선조 임금, 명나라에만 의존하려는 의명파(依明派) 대신들, 조선을 일본과 분할하여 직할 통치하려는 명나라와의 갈등, 이순신장군의 활약 등을 두루 다독이며 조선을 지켜 낸 류성룡이 스스로 보고 들은 바를 소상히, 그리고 상당히 객관적 시각으로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발발 전 상황과 조정의 대응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로 마음먹고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수입해서 병사를 훈련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했다. 사실 전란의 조짐은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심복을 사신으로 파견했는데, 사신으로 온 요시토시의 매우 거만한 태도나 "군사를 이끌고 명나라를 치러 가겠다"는 일본의 국서는 일찌감치 전란을 예고하는 징조들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대응은,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교류가 명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며 어떻게 하면 그 파장을 축소할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정세 보고
한편 조선에서도 선조 23년(1590)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을 일본으로 보낸 것은 일본이 실제 침략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듬해 봄 귀국하는데,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시급히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고 전한다. 황윤길은 선조에게 복명(復命)할 때도 마찬가지로 보고했다. 그러나 조선의 군신(君臣)들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라는 김성일의 보고를 더 믿고 싶었다.
조사단장의 보고는 무시하고 부단장의 보고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장유(張維)가 쓴 『오억령(吳億齡) 묘지명』에 따르면 전쟁 발발 1년 전인 선조 24년(1591) 부산에 온 일본 사신 현소(玄蘇)를 접대했던 선위사(宣慰使) 오억령은 “일본이 내년에 쳐들어올 것”이라고 보고했다가 해임되었다.
귀국한 통신사 일행이 선조 임금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류성룡은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은 황사(黃使) 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 병화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도 역시 어찌 일본이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겠습니까? 다만 황사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 입니다"고 하였다.
이렇게까지 점차 현실화 되어가는 전란의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는 조선은 제대로 방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성일이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해 임박한 전쟁의 징조를 강하게 부인했을 때 파국은 이미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전쟁 중 김성일의 분전(奮戰)은 잊히고 오판(誤判)의 기록만 후세에 남았다.
이순신, 권율 등의 유능한 인재등용과 대비테세
국란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와중에도 지배층 내부의 당파적 증오로 인해서 조정의 국론이 분열되고 민심이 동요하는 상황을 목도한 류성룡은 전란을 대비하는 그 나름의 계책들을 선조에게 건의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조정의 인사정책 등에 반영되어 훗날 전란 극복에 커다란 보탬이 되기에 이른다.
이순신 장군과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로, 종6품의 정읍 현감 이순신을 단번에 7계급 승진시켜 전라좌수사(정3품)로,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하여 훗날 조선을 구하게 한 이도 류성룡이다.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과 더불어 유성룡이 지속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정책은 바로 '진관(鎭管)체제'로의 복귀였다.
조선 건국 당시에 수립된 일종의 지역적인 방어체제인 진관체제는 각도의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의 직책을 겸임한 채 주진(主鎭)에 있으면서, 도내 각 진의 육군과 수군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진 밑에는 거진, 제진 등이 있어서 지역의 수령이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그 지방의 진지를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병역 기피자들이 증가했고 그 때문에 병력수급에 어려움을 겪자 1555년 을묘왜변을 기점으로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제승방략체제란, 전투가 벌어질 경우 수령들이 휘하의 군사들을 전장으로 인솔해가서,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군 지휘관의 명령을 받는 체제였다.
따라서 이 체제는 대규모의 적군과 정면 대결할 때의 병력운용 개념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있고 기동전에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군 지휘관이 전장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급변하는 전세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체제이기도 했다.
류성룡은 일찍이 제승방략체제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진관체제로의 복귀를 강력히 건의했는데, 거듭된 호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제승방략' 체제가 오랜 기간 문제없이 사용되어온 전술임을 들어 그의 건의를 끝내 묵살해 버리고 만다.
훗날 개전 초기, 관군의 잇단 패배의 원인이 도성에서 파견된 장수를 기다리다가 지친 지방의 군인들이 왜군의 접근에 겁을 먹고 달아나 버린 데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진관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유성룡의 선견지명은 정확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며 피난길에서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1592년 (선조 25) 4월 13일, 대마도를 거쳐 바다를 넘어온 왜군의 공격에 부산포를 비롯한 영남의 여러 성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전쟁 발발 후 나흘이나 지나서야 왜군의 상륙과 잇단 패전을 알리는 급보가 조정에 전해지고 조정은 수습책을 찾지 못한 상태로 혼란에 빠져든다.
조정에서는 대표적인 무장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이 일은 상주에서 적을 피해서 도망치고, 신립은 충주에서 배수진을 친 채 왜적과 맞섰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초기의 패인에 대해 “군정의 근본이라든가 장수를 뽑아 쓰는 요령, 또는 군사 조련 방법 등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도성으로 향하는 관문인 충주에서의 패배가 서울로 전해지자, 조정과 백성은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유 성룡 역시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며 피난길에 나섰다. 왜적의 서울 입성이 임박했다는 긴박한 보고가 속속 전해지는 가운데,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도성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도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 연기가 이미 하늘에 치솟았다. 사현을 넘어 석교(石橋)에 이르렀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쫓아와서 호종하였다. 벽제관에 이르니 비가 더 심하게 내려 일행이 다 비에 젖었다.
임금께서는 역으로 들어가셨다가 조금 뒤에 나와 떠나셨는데, 여러 관원들은 여기에서 도성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으며 시종(侍從), 대간(大諫)들이 가끔 뒤떨어져 오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혜음령(惠陰嶺)을 지날 때 비가 물 붓듯 쏟아졌다. 궁인들은 말을 타고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내어 울면서 따라갔다.
마산역을 지나가는데 한 사람이 밭에서 바라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랏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구를 믿고 삽니까?" 하였다.
임진강에 이르러서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배에 오르신 뒤에 수상(首相)과 나를 부르시기에 들어가서 뵈었다. 강을 건너고 나니 날은 벌써 저물어 물체의 빛깔도 분별할 수 없었다.
그 후 왜적은 삽시간에 평양성 부근까지 육박했다. 이처럼 왜적이 급속하게 북상해오자 피난길의 조정은 다시금 경악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피난길에서 목격한 백성들의 동요와 민심 이반의 심각성이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배신감이 극에 달해 있어서 무엇보다도 민심을 가라앉히는 일이 시급했던 것이다.
전란 이전부터 백성들은 지배계층의 수탈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임시 행궁을 정한 평양성의 백성들 사이에서 임금이 평양성마저 버리고 피난을 떠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민심은 조정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를 들고 왕의 행차를 가로막는 곤혹스러운 상황마저 벌어졌다.
성 안의 아전과 백성들은 난을 일으켜 칼을 빼어들고, 길을 막고는 함부로 쳐서 묘사(廟社)의 신주를 땅에 떨어뜨렸다. 또한 따라가던 재신(宰臣)들을 지목하여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나라의 녹만 훔쳐 먹다가 이제 와서는 나랏일을 그르치고 백성을 속이느냐?" 하였다.
나는 연광정(練光亭)에서 임금이 계시는 행궁으로 달려가면서 길 위에 있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성난 얼굴로 머리털을 곤두세워 소리를 지르기를 "성을 버리고 가시려면 무슨 까닭으로 우리들을 속여서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우리들만 적의 손에 어육(魚肉)으로 만듭니까?" 하였다.
궁문에 이르니 난민들이 거리를 꽉 막았는데, 모두들 팔소매를 걷어 올린 채 무기와 몽둥이를 가지고 사람들을 막 치며 시끄럽게 어지럽혔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러 재신들과 성문 안 조당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뜰 안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평양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날 것을 재촉하였으며, 선조는 아예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피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류성룡은 임금과 대신들을 설득하여 평양성에서 왜적을 맞아 항전하기로 결정을 이끌어냈다.
대신들도 더 이상 민심의 이반을 방치해서는 위험하다는 판단하여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평양성에서의 소요는 진정되었다. 조정이 항전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징비록』에는 실제로 유성룡이 선조 앞에서 백성들의 의지를 믿고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항전을 벌인다면 명나라의 지원을 기대해 볼 수 있지만, 평양성을 버리고 의주로 떠난다면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는 대목이 있다.
명군의 도착과 전세의 역전
류성룡은 『징비록』의 지면 상당량을 명나라 구원병에 관한 기술에 할애하고 있다. 지면의 분량이 증언하듯이, 개전 초기 관군의 잇단 패배로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에게 명나라의 구원병은 실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천병(天兵)'에 다름 아니었다.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남해에서 거둔 이순신의 승전과 각지의 의병 봉기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주와 선천을 거쳐 국경에 인접한 마지막 피난지인 의주까지 내몰렸던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명군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조정은 명나라 군사들이 먹을 양식을 차질 없이 조달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갑자기 닥친 전란 앞에서 조정의 권위가 무너져 인력과 물자의 동원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흩어진 관군을 다시 규합하여 명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치는 것 역시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평양성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왜군의 전력에 적잖이 놀란 명군 장수들은 전투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명군의 총사령관 이여송(李如松) 역시도 왜군의 습격 소문에 두려워하여 평양성 이남을 수복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당시 류성룡은 체찰사의 직분으로 명군에 대한 보급과 협의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종사관을 통해 명군이 군사를 물려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이여송에게 전달했다. 거기에는 도성 수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결사 항전에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첫째로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도 안에 있는데, 지금 왜적들이 있는 곳에 빠졌으므로 귀신이나 사람이나 수복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가서는 안 될 것이고,
둘째로는 경기도 이남에 있는 백성들은 날마다 구원병이 오는 것을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물러갔다는 말을 듣게 되면 다시 굳게 지킬 뜻이 없어져 왜적에게 의지할 것이고,
셋째로는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 자 한 치라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넷째로는 우리 장병들이 비록 힘이 약하다 하더라고 명나라 구원병의 힘에 의지하여 함께 진격하려고 도모하는데 후퇴하자는 명령을 듣게 되면 필시 원망하고 분개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고,
다섯째로 구원병이 물러간 뒤에 왜적들이 그 뒤를 타서 덤벼들면 비록 임진강 이북이라 하더라도 역시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으나, 제독 이여송은 이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징비록』에는 전쟁 수행에 소극적인 이여송과 류성룡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많이 기술되어 있다.
1593년 4월의 일이었다.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대 지휘관 이여송은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을 잡아 와 곤장 40대를 때리라는 명을 내렸다.
왜적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유성룡이 명군과 왜군 사이에서 화친을 의논하는 사자들의 왕래를 방해하기 위해 임진강의 배를 모두 없앴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그것이 모함임을 알게 된 이여송이 바로 명령을 취소해 끌려가던 류성룡이 풀려나지 않았더라면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다. 이때 류성룡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영의정과 같은 정1품의 군정과 민정을 책임진 전시(戰時) 최고 사령관이었다.
중국의 파견군 지휘관이 조선 최고위직 인사를 이렇게 대하는 상황에서 명나라 군대의 횡포는 왜군의 만행 못지않았다. 평소 이여송이 류성룡의 경륜과 담대함을 어려워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지원군의 입장이면서도 실은 점령군이나 다름없는 위세를 가지고 있던 명나라 군사 앞에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표현 그대로 울며 애원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정의 뼈아픈 현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하겠다.
전세를 수습한 관군과 의병들의 눈부신 활약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거둔 승리와 남해 바다 이순신의 거듭된 승전 그리고 각지에서 떨쳐 일어난 의병들의 유격전은 전쟁의 양상을 조금씩 바꿔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4월 30일, 왜군이 떠나버린 도성에 명나라 군사가 진입하면서 서울이 수복되었다.
『징비록』의 기록에 따르면 유성룡 역시 명나라 군사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왔다.
전란 발발 초기에 아무런 경황도 없이 떠났다가 1년 만에 돌아온 도성이었으니 그 감격이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류성룡의 눈에 비친 200년 도읍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거대한 폐허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백성들의 모습뿐이었다.
성 안에 남아있는 백성을 보니 백 명에 한 명 꼴로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고, 살아있는 사람도 모두 굶주리고, 야위고, 병들고 피곤하여 얼굴색이 귀신과 같았다.
이때는 날씨가 몹시 무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죽은 말이 곳곳에 드러난 채 있어서 썩는 냄새가 성안에 가득 차서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코를 막고서야 지나갈 형편이었다.
관청과 여염집 할 것 없이 다 없어져 버리고, 오직 숭례문(崇禮門)에서부터 동쪽으로 남산 밑 일대에 왜적들이 거처하던 것들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宗廟)와 세 대궐 및 종루(鐘樓), 각사(各司), 관학(館學) 등 큰 거리 이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타서 없어지고 오직 재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 나는 먼저 종묘를 찾아가서 통곡하였다.
다음으로 제독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문안하려고 온 여러 사람을 보고 한참 동안이나 소리치며 통곡하였다.
평화 회담 간의 지구전과 백성들의 고통
도성 수복의 여세를 몰아 한강 이남의 왜군을 추격하고자 했던 조정과 유성룡의 의지는 명나라 군사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선조가 평양성에서 서울로 돌아올 무렵, 명군과 왜군 사이에는 종전협상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조선의 강화 반대 목소리는 배제시킨 상태였다.
더구나 협상안에는 왜군이 조선 영토를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조는 물론 조정의 대신들은 명나라와 왜국 사이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격렬한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 하지만 명나라 지원병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왜군을 몰아내기엔 군사적 역량이 너무도 부족했다.
더구나 그동안 명나라 군대의 군수품를 조달하려는 목적에서 백성들에게 부과한 징발과 부역은 한계점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징비록』에 기록된 유성룡의 민생 현장에 대한 묘사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굶주림이 만연했으며, 명군이 먹을 군량 운반에 동원된 노인과 아이들이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적이 되어 산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대다수는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아비와 아들, 남편과 자식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러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적신호가 켜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그 7년 전쟁의 비극과 참상을 말 하지만 사실은 4~5년은 서로 대치하며 보낸 평화 회담 시기가 조선의 民草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치욕(恥辱)을 안겨주었다.
명나라 군대가 조선 땅에 주둔하고 , 왜병이 남쪽 지방에 倭城을 건설하여 長期 주둔을 하면서, 그 혈기 넘치는 젊은 남자들로 구성된 明軍이나 왜군이 전투도 없는 당시에 무엇을 했겠는가?
힘없는 조선의 조정과 백성들은 草根木皮로 살아가면서 그들에게 軍糧米를 대주거나 강탈당하고 우리들의 딸들과 어머니들은 그들에게 겁탈 당하고..
의지할 곳 없고 도망갈 곳 없는 백성은 굶주림 속에서 헤매야 했고 일부는 일본에 끌려가기도 했다. "3도를 짓밟은 적은 가는 곳마다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을 죽였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을 붙잡기만 하면 코를 베어 위세를 부렸던 까닭에 그들이 직산에 도착할 무렵부터 사람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文化財는 파괴되거나 도굴되어 搬出되는 그야말로 慘狀의 시간을 보내었던 것이다.
이순신장군의 하옥사건
도성을 수복한 관군과 명군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지구전 태세로 돌입한 왜군 사이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과 숨 막히는 첩보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이 하옥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순신의 하옥 관련 부분은, 그 후반부에 소개된 이순신의 인물됨과 능력에 관한 류성룡의 극진한 평가와 비교할 때 자신의 감정 표현을 절제하고 일어난 사건의 경과 위주로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다. 물론 이순신에 대한 원균의 비판이 모함이었다거나 조정이 이중간첩 요시라의 꼬임에 속아 넘어갔다는 내용은 들어 있다.
하지만, 그동안 이순신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 다름 아닌 유성룡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적극적인 구명활동이 『징비록』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은 독자들에게 의아스러운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순신에 대한 옹호가 선조의 화를 돋우어 이순신에게 더 큰 화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였거나, 류성룡과 이순신 둘 사이의 사적인 친분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정 대신들의 반발을 예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후반부에서 이례적이라 할 만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순신의 인물됨과 능력 그리고 그와 관련한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순신의 전사와 관련하여 류성룡이 밝힌 다음의 소회는, 이순신이 류성룡에게 단순히 훌륭한 수군사령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몸가짐을 삼가는 태도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그의 형님 이희신(李羲臣)과 이요신(李堯臣)은 둘 다 먼저 죽었으므로, 이순신은 그들이 남겨놓은 자녀들을 자신의 아들딸처럼 길렀으며, 무릇 시집 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은 반드시 조카들을 먼저 한 뒤에야 자기 아들딸을 보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 가지의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왜군의 철수와 최후의 결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사와 승리
1598년 7월, 왜군의 우두머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함에 따라 남해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은 전의를 상실한 채 본국으로의 귀환을 서둘렀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종전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본국으로 귀환하려는 왜군의 대규모 함대를 맞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가 벌인 최후의 결전에서 이순신은 전사했으며, 이 싸움을 기점으로 순천을 점령하고 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비롯하여 부산, 울산, 하동 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전체가 일본으로 철수했다.
전쟁의 종결과 함께 조선 조정은 7년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공허한 영광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는 커다란 상처를 봉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징비록』 서문에서 류성룡이 토로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의 전화가 몰고 온 참혹한 피해를 복구하고 재건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전쟁 발발 수십 일 만에 서울, 개성, 평양 이른바 삼도(三都)가 모두 무너졌고, 임금은 피난길에 올라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 극심한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준 이들은 무명의 백성들이었다.
"어지러운 난리를 겪을 때 중요한 책임을 맡아서, 그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하였다"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류성룡의 모습은 당대의 백성들에겐 어쩌면 때늦은 후회로밖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그치게 한다"는 『시경』의 구절로 자신의 책 제목을 대신한 류성룡의 마음가짐만큼은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하회마을에 있는 류성룡의 집 충효당. 보물 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징비록의 교훈과 오늘의 현실
조선시대 연산군의 폭정으로 신하들에 의한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왕위에 오른 때부터 당쟁이 시작되었다.
제12대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13대 왕으로 올랐는데 나이가 어려 문정왕후가 8년간이나 수렴청정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나마 명종에게 자손이 없어 대를 잇지 못하게 되자 중종의 9번째 아들의 3번째 아들이 왕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14대 선조였다.
최근 KBS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징비록' 드라마에서 보듯이 선조 임금은 일본의 침략을 스스로 막아내려 하지 않고, 명나라에만 의존하려하였고, 또한 자신의 왕권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세자 광해와 바른말을 하는 대신들을 경계하는 실제 유약한 임금으로 나라의 통수권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1592년 5월 23일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조신의 선조(宣祖)는 처음 며칠간 깜깜무소식이었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지 만 나흘이 지나서야 경상좌수사의 첫 장계(狀啓)가 조정에 도착했다.
조정은 그제야 허겁지겁 방어 체계를 조직했지만 왜군은 이미 충청도 근처까지 밀어닥쳐 있었다.
선조가 첫 보고를 받은 지 엿새 만에 한양이 함락됐고, 선조는 궁궐을 버린 채 도피 길에 올랐다.
지금도 역사는 분명 반복되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경보가 계속되자 불안해진 조정은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에게 지방 군기 검열을 맡겼다. 임란 발발 13일 전인 4월 초하루 신립은 왜군이 쳐들어올 경우의 대책을 묻는 유성룡의 질문에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6·25 남침 발발 두 달 조금 전쯤 육군참모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이 38선을 시찰하고 기자단과 만나 “우리 38선 경비 국군은 사기왕성하며 철통같은 경비망을 치고 있으니 조금도 우려할 바는 아니다(‘자유신문’ 1950년 5월 14일)”라고 호언한 것이나, 국방장관 신성모는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라고 하였다가 막상 6.25가 발발하자 불과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고 줄행랑치기 바빴다. 이런 전철(前轍)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나 6·25 때나 개전 초기에 무너진 데는 이런 공통된 배경들이 있었던 것이다.
세월호가 발생한지 一年이 넘었지만 , 그 동안 우리나라 사회나 국가가 대응한 것은 무엇이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아직도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할 방안도 대책도 원인 규명도 제대로 못하고 각기 처해진 정치적인 理解와 이념 논리에 양분되어 끝없이 소모적인 논쟁이 현재도 진행 중이다.
지금도 서로 상대방을 탓하고 있다. 無償 복지와 교육이 그러하고 改憲 논의가 그러하고 ..
아껴 쓰고 효율적으로 사용 할 생각은 안 하고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생각으로,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도 공짜에 익숙해져 버렸다.
공무원 연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왜 자기 들 보다 수입이 적은 국민들이 세금으로 그들의 연금을 내어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도 없이 반대하고 있다.
2015년 5월 20일 메르스(MERS)와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 박근혜 대통령도 비슷한 처지였다.
박 대통령이 복지부 장관의 첫 대면보고를 받은 것은 1호 환자가 확인된 지 6일 지나서였다.
초기 대응 미숙으로 속절없이 '골든타임'이 흘러갔고 전선(戰線)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메르스 사태와 임진왜란은 성격부터 다르지만 실패의 본질적 구조만큼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위기 앞에서 컨트롤 타워는 엉망이었고, 국론은 분열됐으며, 시스템은 고장 나 가동되지 않았다.
왜적(倭敵)을 바이러스로 바꾸기만 하면 16세기의 '징비록'을 2015년 대한민국에 옮겨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1997년 IMF부터 나열하자면, 주한미군 미순이 사건, 쌰쓰, 독도, 태풍 곰파스, 광우병, 신종플루오르, 쌍용차 파업, 평택 미군기지 건설반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반대. 희망버스, 밀양 송전탑, 국회 기물파손 및 공중부양, 부산 조선업체 골리앗 탑, 환란,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육군3사관학교 폐교 거론, 북괴의 소형정찰기 국내침투, 노크귀순, 세월호 사건, 제주도 4.3 폭동공원 건립, 메르스 ...
사건만 나면 눈치를 보는 것이 순서인지 일단 여론의 추이를 보고 뒷북이나 치는 자세,
지금도 늦지 않았다. 면밀한 분석이 끝나는 동시에 과감한 추진력이 필요하다.
맺는 말
과거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던 탓에 4년마다 한번 씩 주변 강국에 의해 잦은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야 왔으나, 오늘날은 6.25이후 60년 넘게 평화시대를 살고있어,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겐 전쟁은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소재로만 생각될 것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역사 교육을 어느 순간에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
進步 학자나 保守 학자들이 임진왜란의 징비록은 가르치지 않고, 근세사의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폄하하는데 열을 올린다.
거시적인 세계사의 潮流는 언급하지 않고 친북 친미 논리에만 얽매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적의 외침을 꿋꿋이 물리치며 나라를 지켜온 조상 덕분이다.
임진왜란시 류성룡·이순신의 헌신과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떨쳐 일어난 의병(義兵)들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국망(國亡)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약소국의 조선시대 유성룡은 왜군과 싸우기는커녕 타협해 한반도 분할로 전쟁을 끝내려 했던 명나라와 이여송에게 이로정연(理路整然)하게 맞섰다. 그럼으로써 나라를 보전하고 명나라 조야(朝野)의 존경까지 받았다. 오만방자했던 명나라 제독 진린이 리더로서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충무공 이순신에게 감복(感服)한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도 우리나라의 지도자는 중국과 일본에 대해 유성룡처럼 의연하고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징비록의 교훈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서로 당쟁으로 싸우기만 한다면, 과거 일제 36년의 강탈과 치욕을 또 당 하게 된다.
다시 한 번 일제에 의한 파괴된 우리의 정신문화를 되새겨보고 무엇이 중요한지 깊게 생각하고 반성하는 국민운동이 일어나야 되겠다.
참고자료 :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임진년의 기억
징비록과 오늘의 현실
눈물과 회한으로 쓴 전란의 기록
국보 징비록의 산실, 낙동강을 굽어보는 옥연정사
참고 : 저자 류성룡 (柳成龍) 소개
1542년 11월7일(음력 10월 1일) ~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 · 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1598년 영의정 자리에서 파직당할 때까지 그는 정무(영의정)와 군무(도체찰사·都體察使)의 총책임자로서 조선을 구하였다.
1566년에서 1598년까지 32년 동안 벼슬 생활을 하고 난후 귀향해 말년에 '징비록'과 여러 글을 집필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진정 국가에 충(忠)을 다한 인물이었다.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첫댓글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시간나는대로 조금씩 잘보겟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