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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위무위 무상상고전(有爲爲無爲 無相相固全)
망아진아현 위공반자성(忘我眞我現 爲公反自成)
불보살은 함 없음에 근원하여 함 있음을 이루게 되고,(무위)
상 없는 자리에서 오롯한 상을 얻게 되며,(무상)
나를 잊은 자리에서 참된 나를 나타내고,(무아)
공을 위하는 데서 도리어 자기를 이룬다.(봉공)
정산종사 법어 무본편 33장의 법문입니다.
한자는 중국말이니 한자에는 너무나 국집하지 마시고 법어에 풀어놓으신 법문에 주의합시다. 물론 한자를 잘 아시는 분들은 한자에 담긴 함축된 의미를 또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무위, 무상, 무아 등 없는 자리에 근원하여 있는 자리를 나투되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지공무사 또 무아봉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도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네가지 지혜’, 그것이 이 성리를 풀며 여러분께 드릴 말씀입니다.
1. 무위(無爲) - (外) 일은 흔적 없이 하라
첫째는 무위(無爲)입니다. 일을 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말입니다.
무위도식(無爲徒食)이라는 말이 있지요. 하는 일 없이 먹고 노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무위는 ‘아무 것도 안한다’는 말입니다.
불가에서의 무위는 놀고 먹는 식의 아무것도 안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가에서 ‘무위(無爲)’라 함은 ‘흔적 없이 하라’는 말입니다. ‘그림자 같이 하라’는 겁니다.
선시(禪詩)중에 ‘대 그림자 뜰을 비 질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앞마당에 대나무 숲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보름달이 훤히 비치는 달밤에 / 이 대나무 그림자가 비쳐 달이 기울어짐에 따라 / 대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짧아지는 모습이 마치 마당을 비로 쓰는 것처럼 보였나 봅니다. 하지만 대 그림자가 뜰을 아무리 쓸어도 마당에 비로 쓴 자국이 남습니까?
안 남지요?
최고의 수행자들인 선사들이 ‘대 그림자 뜰을 빗질한다’ 같은 시를 읊는 것은 바로 흔적 없는 삶을 지향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무릇 수도인들은 다녀가되 흔적없이 다녀가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습니다.
치약을 짜더라도 앞에서 덥썩 짜서 흔적을 분명히 남기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수도인은 뒤에서 깔끔하게 짜서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 수도인은 일을 하고서도 어질러 진 곳을 깔끔하게 치웁니다. / 방을 드나들 때도 신발을 가지런히 하고, 모든 지나친 곳은 수용품을 반드시 정리정돈합니다.
이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자기의 마음을 챙기는 공부이기도 합니다.
남을 도와도 돕지 않은 것처럼, 소리없이 하는 것이 흔적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도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 같은 뜻입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현실적인 일을 하는 것이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수도인은 보이는 세계에서 흔적없는 삶을 지향합니다.
무위란 ‘밖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수도인의 기준’입니다. 다시 말해 밖으로 일을 할 때 흔적없이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무위로 살았을 때) ‘유위위무위’라, 함이 없음에 바탕하면 함 있음을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위의 삶, 매사 흔적 없는 삶을 살아가는 수도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2. 무상(無相) - (內) 마음엔 흔적을 남기지 말라
수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두 번째 지혜는 무상(無相)입니다.
무위(無爲)가 밖으로 나타나는 수도인의 기준이라면, 무상(無相)은 안으로 수도인이 가져야 할 기준입니다.
남을 도우면 꼭 남을 도왔다는 상이 남고, 어떤 일을 했으면 꼭 내 업적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그래서 양나라의 무 임금도 많은 절과 탑을 세운 것을 자랑하다가 달마스님께 면박을 당했나 봅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옛날 지리산이나 금강산 같은 유명한 산에는 석공들이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바위에 이름을 새기기 위해서입니다. 돈을 많이 주면 좋은 자리에 이름을 크게 새기고, 돈을 적게 주면 이름을 적게 새기는 게지요.
금강산과 북한산, 지리산 계곡을 오릅니다. 절경인 바위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분들이 자연을 훼손했다는 불쾌감을 갖지요. 부모님께서 주신 이름이니 자랑스럽게 이름값을 해 사람들의 입과 기억속에 회자되어야 하는게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나를 남기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상(相)입니다.
바위에 새긴 이름은 잘 지워지지 않듯 상도 무척 떼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바위에 새긴 이름이 오래가지만 마음속의 상은 물에 찍은 도장과 같아서 또 한순간에 없앨 수 있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상(相)을 네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4상이라고 하지요.
① 아상(我相)은 ‘나’라고 하는 상입니다. “내가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우리 나라다’ 혹은 ‘내 종교다’라고 하는 극단의 자존감입니다. 이 존재감이 일시적으로 세상을 움직이지만 각각의 ‘나’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충돌과 반목이 싹틉니다.
지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근본주의 즉 자기 종교에 대한 극단적인 상(相)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나’라고 하는 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랬을 때, 자신과 또다른 자신인 모두가 진정한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② 인상(人相)은 ‘사람’이라고 하는 상입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 이외의 자연과 물건은 모두 사람의 사용할 바라하여 무작정 쓰지요.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자동차와 에어콘 등 인간에게 주어진 물질을 함부로 쓰다보니 지구가 더워졌답니다. ‘지구의 온난화’로 점점 육지가 물에 잠겨가고 있습니다. / 그리고 몇 년전 미국의 뉴올리언즈에는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와서 도시 전체를 전멸시켰습니다. / 폭설과 폭염, 집중적인 홍수가 오는 등 이상 기온이 계속됩니다. / 대량으로 닭을 사육하다보니 AI조류독감이 와서 손을 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21세기...점점 지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람이라고 하는 상, 인상’을 계속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와 자연을 살리는 길... ‘인상(人相), 사람이 최고라는 상’을 버리고 좀더 겸허하게 살아야 겠습니다.
③ 중생상(衆生相)은 한마디로 ‘나는 버린 몸’이라는 생각입니다. 불문에 들어왔건마는 ‘어찌 내가 부처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중생일 뿐이야’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개선하거나 진급시키려고 하지 않고 악행과 나쁜 습관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악습을 알면서도 떼지 않는 것은 다 이 중생상 때문입니다. 잠깐씩 자신과 타협을 하는 거지요. 그러면서 본래 부처인 자신의 면모를 점점 가리고 중생으로 더 빠져들고 맙니다.
악습을 떼고 참다운 수도인으로 부처로 진급하는 길... 중생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④ 수자상(壽者相)은 나이가 많거나, 배운 것이 많거나, 뭐든 남도 조금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10년 차이는 친구’라고 하는데 조금만 사이가 비틀어지면 어때요? 한두살 차이 인데도 “민증 까봐!”그러지요. 주민등록증에서 나이를 확인해 보자는 겁니다. 차서(次序) 즉 모든 순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회의 질서를 바루기도 하지요. 하지만 나이가 인격을 대변하나요?
또 “가방끈이 짧다 길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학벌이 많냐 적냐는 거지요. 역시 학벌이 성공을 보장하고 인격을 대변하나요?
교단의 가장 나이가 많으신 원로스승님이신 상산종사님은 좌산상사님이 경산종법사님이 종법사위에 선출되셨을 때, 오체투지로 공경의 예를 올렸습니다. 상산법사님은 두 종법사님이 갓 출가해 간사 근무를 하셨을 때 교단의 중직을 맡아 이 분들의 성장과정을 보아오셨지만 종법사님이 되시자 대종사님을 대하는 예를 갖춘 것입니다. 종법사는 대종사님을 대행하고, 교무는 종법사를 대행하고, 교도는 사회에서 원불교라는 교단을 대표합니다.
민증이나 가방끈을 따지기 보다는 진정한 인품을 갖추는 원불교 교도가 되기 위해 수자상을 버립시다.
이처럼 4상을 버린다는 것, 무상(無相)이란 ‘안으로 수도인이 가져야 할 마음의 기준’입니다. 다시 말해 일을 함에 안으로 흔적없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무상으로 살았을 때) ‘무상상고전’이라, 함이 없음에 바탕하면 함 있음을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3. 무아(無我) - (合) 종국엔 나 마저 놓아버리라
수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 번째 지혜는 무아(無我)입니다.
수도자는 ‘자기’라는 집착과 망각을 벗어나야 진정한 ‘자기’가 나타내고, 이기심을 벗어나야 진정한 자아실현을 할 수 있습니다.
‘무소유’라는 책을 쓰신 법정 스님은 지금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절이 없습니다. 산속 조그마한 암자에서 글을 쓰며 수행을 하십니다. 서울의 한 거부가 요정으로 썼던 계곡의 금싸라기 땅을 절로 쓰라면서 기증했는데 그것이 ‘길상사’입니다. 서울의 길상사는 법정스님의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있지 않고, 거기에는 또 법정 스님의 방도 마련되어있지 않습니다.
법정스님은 철저히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분을 존경합니다. 이름 모를 산속 암자에 묻혀 있지만 세상에 그 분의 이름이 드러나지요.
무아가 뭡니까? 밖으로는 무위의 흔적없는 행을 하고, 안으로는 무상의 흔적없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선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판화가 이철수씨가 있습니다.
이 분이 충청도에 사시는데 어느날 논길을 걸어 친구집에 가고 있었습니다. 논두렁 옆 나무 그늘에서 농부 한사람이 쉬시는데 요소 비료 푸대를 뜯어 부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집에 당도한 이철수씨의 눈에 보이는 것은 벽에 걸려있는 부채였습니다. 자신이 새긴 판화를 찍어 만든 부채였습니다. 유명한 화가가 만든 작품을 찍어 만든 부채이니 가격은 꽤 나가겠지요. 친구는 아예 그 부채를 액자에 표구까지 해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소중하게 대접하고 있는 것을 본 이철수씨는 마음이 흐뭇했을까요?
이철수씨는 돌아오면서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부채의 용도는 사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인데 저 깔깔한 요수 비료 푸대도 사람을 시원하게 하는 부채로 쓰이는데, 형식을 잘 갖춘 자신의 부채는 오히려 박제되어 벽에 걸려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자신의 예술혼이 박제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친구는 이철수라고 하는 ‘나’를 소중하게 대접한다고 부채를 표구했지만 그것은 결국 이철수라고 하는 자유로운 예술의 영혼을 꼼짝 못하게 감옥에 가둔 것이지요.
나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처도 이루고, 이철수씨 처럼 좋은 그림도 그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나’가 자유로움을 잃고 낱낱의 ‘나’로 박제되면 더 이상의 진급이 없습니다. 더 이상의 ‘나’는 없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버릴 수도 없고 안버릴 수도 없는, 모든 것을 이루기도 하지만 결국 이것을 버려야 더 큰 것을 이루는...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무위와 무상으로 ‘나’라는 망집을 벗어날 때, 무아(無我) 즉 나를 잊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안팎으로 흔적없는 마음과 행을 계속해가면 중생인 ‘나’가 사라집니다.
4. 봉공(奉公) - (佛) 모두를 위하면 결국 부처를 이룬다
세상을 살아가는 네 번째 지혜는 봉공(奉公)입니다. 모두를 위하면 결국 부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자의 행위는 공중을 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한 집안이고 모든 생령이 나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범부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반대로 불보살들은 세상 모두를 건지기 위해 힘씁니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범부가 조금 눈이 트이면 가족을 위해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자식은 조건이 없습니다. 가족은 조건이 없습니다. 없어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도움이 되고, 큰 힘이 되지요. 자신에게 많은 의지가 되고 삶을 살아가는 기운이자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눈이 뜨이면 어떻습니까? 절친한 친구를 위해 살아갑니다. 또 자신을 돌봐주는 상사나 은사님이나 성직자를 위해 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미치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지 조금은 낫기 때문입니다.
불보살들은 이 원리를 압니다.
결국 세상은 ‘모든 관계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세상은 사슬이 얽히듯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먹이사슬이 그렇듯, 모기가 해로운 것 같지만 모기가 일시에 없어지면 모기의 유충을 먹고사는 미꾸라지가 타격을 받지요. 예전에 그렇게 싸던 공예품들이 이제는 전문가가 줄어들고 손으로 하는 것이 가치가 높아져 하늘 높은줄 모르고 가격이 비쌉니다.
불보살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세상의 모든 관계가 없어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를 건지려 하는 겁니다. 이것이 공중사입니다.
모두를 위한다는 것! 결국은 나에게, 모두에게 유리함과 쾌적함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처럼 세상은 혼자서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옷과 집과 먹을 것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 욕심만 채우다보면 ‘함께’라는 틀이 무너집니다.
아버지가 자기의 욕심에 매일 술을 드시고 늦게 들어옵니다. 엄마가 자기 욕심에 사치스러운 살림을 합니다. 자녀가 자기 욕심에 철없는 게임과 핸드폰 인터넷을 즐깁니다.
이들의 공중인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는 건강을 해치고 돈을 상실하고 가족과 대화할 기회가 점점 사라집니다. 어머니는 돈을 쓰고 결국 빛에 쪼들려 가산을 탕진하고 빚까지 지게 되어 살림이 아니라 죽임을 향해 가겠지요. 자식은 건전한 공부로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욕심은 일시적으로 채웠겠지만 결국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뭘까요? 개인과 가족의 공멸입니다. 나를 위해서, 내 욕심만 채우다 보면 빚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수도인들은 나만을 위하는 삶이 아니라 공중을 위하는 삶을 삽니다.
수도인의 궁극인 봉공행은 현실적으로 손해가 다가옵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면, 안들여도 되는 힘을 더 들이는 것 같고, 안써도 되는 돈을 더 쓰는 것 같습니다.
최상의 실천행은 봉공하는 삶입니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원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봉공(奉公)하라는 것이 아니고 무아(無我) 즉 나를 잊고 봉공하라는 것입니다. 무아봉공(無我奉公)입니다.
‘위공반자성’이라...봉공의 삶, 항상 공중을 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하는 것임을 알아서 봉공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5. 수도인의 네가지 삶의 지혜
결국 이 의두는 '수도인의 네가지 삶의 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두 원문을 보며 다시 정리해 봅시다.
유위위무위(有爲爲無爲),
불보살은 함이 없음에 근원하여 함이 있음을 이루게 된다.
‘무위(無爲)의 도’를 이릅니다.
즉 밖으로 흔적없는 행을 해가라는 말입니다.
무상상고전(無相相固全)
상 없는 자리에 가야 오롯한 상을 얻게 된다.
‘무상(無相)의 도’를 이릅니다.
안으로 흔적(상)없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망아진아현(忘我眞我現)
나를 잊은 자리에서 참된 나가 나타난다.
‘무아(無我)의 도’를 이릅니다.
안팎으로 흔적없는 마음과 행을 하며 중생인 ‘나’를 사라지게 합니다.
위공반자성(爲公反自成)
공을 위해 일하면 도리어 자기를 이룬다.
‘봉공(奉公)의 도’를 이릅니다.
이처럼 무아에 바탕해 모두(公)를 위해 일하면 결국 ‘부처’가 되고 맙니다.
이 의두의 결론은 ‘무아봉공(無我奉公)’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아봉공의 원리를 상세히 알려준 것이지요.
